낭왕전생 6권 – 28화 : 망종 재회 (3)
망종 재회 (3)
갈독단이 주로 사용하는 천화독이 었다.
천화독은 독성이 있는 꽃들을 갈아 만든 것으로 조금만 흡입해도 호흡 곤란을 야기했다.
독낭이 터져 나가면서 사위에 향긋 한 꽃향기가 퍼졌다.
한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설우진 의 얼굴엔 중독의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 모습에 갈독단의 무사들은 당황했는지 부랴부랴 다른 독을 준비했 다.
하지만 그들보다 설우진의 움직임 이 한발 더 빨랐다. 그는 갈독단 사 이로 뛰어듦과 동시에 사위로 뇌기 를 퍼뜨렸다. 뇌기는 노도와 같이 갈독단을 덮쳤고 무사들은 독낭을 손에 쥔 채로 쓰러졌다.
사실 갈독단은 용독술을 제외하곤 딱히 내세울 것 없는 조직이었다. 그들이 당세기를 따랐던 것도 당가 내에서의 처지가 비슷했기 때문이 다.
“이, 이놈, 감히 당가의 무사를 해 하다니! 네놈이 그러고도 무사히 사 천 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당세기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외쳤 다. 믿는 구석이 사라졌으니 협박으 로라도 설우진을 압박하겠다는 심산 이었다.
하지만 설우진은 그의 가당찮은 수 작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 니, 되레 협박질로 맞받아쳤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야. 이 쪽만 입을 다물면 너와 내가 만났다 는 사실을 누가 알겠어?”
설우진이 당무성을 손가락으로 가 리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 였다. 이에 당세기의 두 다리는 보 기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 다.
한데 바로 그때 변수가 발생했다. 뒤늦게 마당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청미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것이다.
그때 공교롭게도 청미와 당세기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기 공자님!”
청미가 먼저 알은 척을 했다.
당세기는 그것이 절호의 기회라 여 기고 얼굴에 한껏 미소를 피어 올리 며 청미의 인사에 대꾸했다.
“미아, 오랜만이구나. 내 뒤늦게 월 매가 아이를 낳는다는 소식을 접하 고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왔단다.”
당세기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해댔다. 한데 순진한 청미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 찾아와 주셨 네요. 빨리 안으로 들어오세요. 용이 가기 공자님을 닮아 무척이나 늠름 하고 잘생겼어요.”
청미가 문을 활짝 열었다.
하지만 당세기는 선뜻 그곳으로 발 을 향하지 못했다. 설우진이 교묘하 게 그 길목을 가로막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아이를 보러 오라지 않느냐! 당세기가 조심스럽게 발을 뗐다. 이에 설우진은 옆으로 살짝 물러섰 다. 당세기는 자신의 수가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설우진의 옆을 지나칠 때 머릿속으로 섬뜩한 전음이 전해 졌다.
-네 입으로 내 아이라고 했으니 당가로 돌아갈 때도 같이 가도록 해, 혼자 나오면 진짜 네놈의 머리 통을 부숴 버릴 테니까.
-나, 난 아직 정식으로 혼례도 치 르지 않은 몸이다. 한데 어찌…,
-그러게 아랫도리를 잘 놀렸어야 지. 신중하게 고민해서 선택해, 저 방으로 들어가 좋은 아버지로서 새 삶을 시작할지, 아니면 여기서 귀신 이 되어 구천을 떠돌지.
설우진이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당세기는 당장에라도 개소리 말라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 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방으로 향했다.
그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청미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당세기가 방으로 들어간 후 설우진 은 당무성의 몸 안에 뇌기를 흘려 세침의 독을 일시에 태워 버렸다. 독이 사라지자 당무성의 얼굴엔 빠 르게 혈색이 돌아왔다.
“쿨럭.”
당무성은 울혈을 토해 냈다. 독기 가 침습해 있던 피가 검붉게 응어리 져 있었다.
“구명지은에 감사드립니다.”
숨통이 트이자 당무성은 깊숙이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에 설우진은 별거 아니라는 투로 손사래를 치며 그에게 당가에 들어 가게 된 배경을 물었다.
당무성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당초려와 부부 지연을 맺게 된 과정 을 소상하게 밝혔다.
“참, 애달픈 사연이네. 이래서 낭인 이 가정을 갖는 건 쉽지가 않다니 까.”
자유로운 낭인의 삶, 그 이면에는 차가운 현실의 벽이 놓여 있었다. 세상이 낭인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무척이나 냉담했고 당무성의 경우처럼 뿌리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하기 일쑤였다.
해서 낭인들 중에는 제대로 가정을 이루는 이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설령 가정을 이루더라도 낭인에 대 한 그릇된 편견 때문에 길게 이어지 질 못했다.
“낭인을 잘 아시오?”
‘알다마다. 내가 한때는 네놈들의 최고 대가리였거든.’
“알기는 뭘, 오다가다 들은 거지. 그나저나 이제 어쩔 셈이지? 저속 좁은 놈이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리 없을 텐데.”
“휴우, 모르겠소. 맘 같아선 령아를 데리고 당장에라도 당가를 떠나고 싶지만 당가가 아니면 절맥을 치료할 방법이 요원한 터라………….”
당무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의 딸이 앓고 있는 절맥은 만월 음한이었다. 만월음한은 꽉 차오른 보름달처럼 나이를 먹어 갈수록 음 기가 쌓이는 속도가 빨라지는데 이 를 막지 못하면 음기가 과해져 종국 에는 심장이 멎게 된다.
이 만월음한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음기가 쌓이는 혈맥을 양기로 뚫어 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내공을 다 룰 수 있는 의원과 강한 양기를 띤 약이 필요했다.
‘어쩐다? 애가 불쌍하기는 한 ……..’
설우진은 당무성의 얘길 듣고 고민 에 빠졌다.
당세기를 협박하면 당무성의 딸을 치료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 었다. 문제는 왜 자신이 그런 수고 를 해야 하냐는 점이었다.
당무성과는 전직 낭인이라는 접점 말고는 아무 인연이 없었다. 그리고 그를 당세기의 마수로부터 구해 준 것만 해도 그로선 분에 넘치는 호의 를 베푼 셈이었다.
이에 설우진은 고민 끝에 어렵게 입을 뗐다.
“혹시, 담근 술 있어?”
“있기는 있습니다만……….”
“딸아이 고치고 싶으면 그걸 지금 당장 이곳으로 가져와.”
“그게 무슨……?”
“시간 없어. 빨리 움직여.”
설우진은 의아해하는 당무성을 억지로 떠밀 듯이 집으로 보냈다. 당무성은 곤혹스러웠지만 그길로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초령이 완쾌되면 마시려고 담가 뒀던 술들 을 몽땅 밖으로 끄집어냈다.
일각 여 뒤, 땀으로 얼굴이 범벅된 당무성이 양손 가득 술병을 들고 설 우진 앞으로 달려왔다.
“호오, 이거 기대 이상인데. 확실히 낭인들이 술 하나는 기똥차게 담근 다니까.”
술병에서 그윽하게 새어나오는 주향에 설우진은 반색했다. 그리고 당무성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콸콸콸.
술이 넘어가는 소리가 참 맛있게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가 잦아질 때쯤 설우진이 술병 안에서 길쭉한 뭔가를 끄집어냈다.
그것은 붉은 빛이 감도는 몸뚱이에 수백 개의 다리가 일렬로 늘어서 있 었는데 음지에서 사내들에게 최고의 보약이라 불리는 혈오공이었다.
“이 귀한 걸 어떻게 잡은 거지?”
“딸아이의 병을 고치는 데 필요한 약초를 구하려고 산에 올랐다가 우 연히 발견했습니다.”
“독은 어디 뒀지?”
“혹시 몰라서 따로 빼 두었습니 다.”
“쯧쯧, 당가에 있었으면서 설마 그 독의 값어치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설우진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당 무성을 쳐다봤다.
하지만 영문을 알 리 없는 당무성 은 두 눈만 깜빡거릴 뿐이었다.
“혈오공의 독은 그 자체로는 독성 이 강하지 않지만 몇 가지 특별한 약물과 뒤섞일 경우엔 무색무취의 독으로 변하게 돼. 그래서 독을 배 우는 이들은 혈오공에 환장을 하 지.”
“그럼…..?”
“당세기 그놈한테 부탁하지 않아도 그 독만 있으면 네 딸을 치료할 수 있어. 아니, 치료가 아니라 독공이라 도 전수해 줄걸.”
설우진은 전생에 혈오공에게 물린 적이 있었다.
나이가 어렸던 때라 잔뜩 겁에 질 려서 사부에게 달려갔는데 사부는 대수롭지 않게 며칠 지나면 낫는다 고 하면서 혈오공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 뒤로 보름간 집에 돌아 오질 않았다.
처음엔 걱정이 됐다, 미우나 고우 나 유일한 식구였기에.
한데 나중에 그 보름 동안 사부가 혈오공을 판 돈으로 기루에서 여인 들을 끼고 놀았다는 얘길 듣고는 너 무 화가 치밀어 잠도 이룰 수가 없 었다.
“정말 그 독이면 령아를 치료할 수 있는 겁니까?”
“확실하다니까. 정 믿음이 안 가면 당가의 무사들 중에 아무나 붙잡고 혈오공에 대해 물어 봐. 아마 두 눈 을 시퍼렇게 뜨고 욕심낼걸.”
“다, 당장에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만약 은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 남 은 생은 은인께 바치겠습니다.”
“됐어, 몸매 좋은 아가씨도 아니고 애 딸린 홀아비를 뭐에 쓴다고.”
설우진은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던 당무성은 그 얘길 듣지 못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 다.
‘혈오공 덕분에 귀찮은 일 하나 덜 었네. 그럼 마무리로 요 녀석을 먹 어 볼까?’
당무성을 보내고 설우진은 혈오공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느낌이 싸했다.
순간 익숙한 시선과 마주했다. 붉 게 빛나는 눈동자. 살라만더였다. 와그작.
혈오공의 몸뚱이가 절반 이상 사라 졌다. 설우진이 다급히 막아 보려 했지만 녀석의 혓바닥은 순식간에 혈오공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 빌어먹을 석척 놈!”
살라만더는 잽싸게 뒤로 빠지는 살 라만더를 향해 천뢰도를 빼들었다. 그의 분노를 짐작케 하듯 도신 전 체가 뇌기로 뒤덮였다.
성도에 머무른 지 한 달, 설우진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겼다. 처음 성도에 도착했을 땐 거의 빈 몸이나 다름없었는데 지금은 봇짐이 세 개나 됐다.
두 개는 청월, 청미 자매가 준비해 준 것이고 나머지 한 개는 당무성이 준비한 것이었다.
“정말 안 따라와도 된다니까.”
출발 직전, 집 앞에서 작은 실랑이 가 일었다.
그 원흉은 당무성이었다.
그는 설우진의 조언 덕분에 무사히 딸의 절맥을 치료할 수 있었다. 혈 오공의 독을 본 신독당의 의원들이 앞다퉈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초령을 치료했던 이가 후 원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뒤늦게 안 사실인데 그는 전대 신독당주였던 당진걸의 수제자였다.
딸이 건강도 되찾고 훌륭한 스승도 맞이하게 되자 당무성은 설우진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며 찾아왔다.
설우진은 당연히 완강히 거부했다. 하지만 당무성의 고집은 표정 변화없는 얼굴만큼이나 질기고 단단했 다.
“저는 당가의 무사이기 이전에 낭 인입니다. 딸아이의 목숨을 담보로 맺은 계약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당최 말이 통하질 않았다. 설우진 도 한 고집 하는데 당무성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좋아, 그럼 딱 일년만 내 곁에 붙어 있어. 그 이상은 절대 용납 못 해.”
설득이 불가능하다 판단한 설우진 은 기한을 못 박으며 한 발짝 물러 섰다. 이에 당무성도 뜻을 굽힐 수 밖에 없었다.
“조심해서 돌아가요, 우진 오라버니! 그리고 언제든 이 청미가 보고 싶으면 놀러오세요!”
곱게 차려 입은 청미가 얼굴을 붉 히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 뒤에 어색하게 서 있던 당세기도 한마디 했다.
“잘 가라.”
-그리고 다시는 얼굴 보지 말자. -후훗, 그러니까 부인이랑 애한테 잘해. 조금이라도 이상한 소문이 들 리면 당장에 달려올 테니까.
-니미럴, 그건 걱정 마라, 요즘엔 아버지께서 나보다 청월이와 용이를 더 자주 찾고 있으니.
당세기의 얼굴이 나라를 잃은 사람처럼 처연하게 변했다.
청월과 아이를 데려가면 집안에서 난리가 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의 아버지는 둘을 크게 반겼 다.
처음 대면했을 때만 해도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청월 이 자신을 청가장의 장녀라 소개하 자 반응이 확 달라졌다.
-그걸 바로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거다. 아무튼 내 경고 잊지 말고 부 디 똑바로 살아라.
설우진은 당세기와의 인사를 끝으 로 다시 먼 여정을 떠났다. 이번 목적지는 고향인 호북 무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