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6권 – 3화 : 분란 종식 (3)
분란 종식 (3)
넓은 관도 위로 세대의 마차가 여유롭게 달리고 있었다.
마차에는 용인문을 상징하는 백룡 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용인문주 사 도군의 배려였다.
서협에서 쌍룡맹 총단이 자리한 정 주까지는 길고 넓은 관도가 놓여 있 었다. 덕분에 마차를 타고 가는 여 정은 무척 순조로웠다.
그런데 마차가 쉬어 갈 때마다 설 우진과 남궁벽이 탄 마차로 황보민 일당이 한 명씩 방문했다.
목적은 역시나 설우진에게 선처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다들 뜻한 바를 이뤘는지 마차를 내릴 때의 표정이 한결같이 밝았다. 마지막으로 황보민이 마차에 올라 탔다.
“선배님,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이번 일이 알려지면 저는 가문에서 쫓겨납니다.”
황보민이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으 며 용서해 달라 애원했다. 두 눈이 충혈된 것을 보니 금방이라도 눈물 을 쏟아 낼 기세였다.
하지만 설우진은 속이 뻔히 보이는 수작질에 넘어갈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이런다고 내 마음이 바뀌진 않아. 그만 돌아가.”
설우진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황보민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절박했다.
“선배님이 이번 일만 조용히 넘어 가 주시면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
“필요한 거 없어. 그러니까 입다 물고 조용히 처박혀 있어.”
‘빌어먹을 놈, 돈도 싫고 무공도 싫다면 대체 뭘 들이대야 하는 거 야?’
설우진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 서 황보민은 사납게 인상을 구긴 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는 앞서 설우진에게 천금의 돈과 황보세가의 도법을 제시했다. 한데 설우진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 다. 돈도 무공도 아쉬울 게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래, 자고로 남자는 미인에 약한 법이지.’
“그럼 천하절색의 미녀는 어떻습니 까? 황보설이라고 방년 열여덟의 사 촌 누이인데 벌써부터 강북 제일미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미모가 빼어 납니다. 형님이 원하신다면 따로 자 리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황보민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황보설에 대한 찬사를 늘어놨다.
그녀는 황보세가의 천금으로 시서 기화에 능한 재녀라고 명성이 자자 했다.
한데 그녀의 이름을 들은 설우진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누구 인생을 망쳐 놓으 려고 작정했나? 황보설이면 천하에 알아주던 요녀잖아, 그 계집의 면상 만 보고 접근했다가 속곳까지 털린 사내가 한둘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옥면마녀. 그가 낭인 시절에 들었 던 황보설의 별호였다.
얼굴은 옥같이 아름다운데 그 심성 은 사갈같이 사납다 하여 호사가들 이 붙여 준 이름이었다.
“얼굴이 지나치게 예쁜 여자는 여러모로 피곤해. 그러니까 객쩍은 소 리 그만 지껄이고 잠이나 자. 맹에 도착하면 조사받느라 쉴 틈도 없을 테니까.”
설우진은 이번에도 단호하게 거절 했다. 그러고는 더 듣기 싫다는 듯 두 눈을 감고 팔짱을 꼈다.
이에 황보민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렇게 된 이상 그거라도 써야겠 어. 놈도 천신 담휘월이 잠든 비동 이라면 관심을 가질 테지.’
“선배님, 혹시 천신동이라는 이름 을 들어 보셨습니까?”
설우진의 눈꼬리가 살짝 흔들렸다. 천신동은 그의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는 이름이었다. 그도 그럴게 자신을 개 무시하던 천왕이 그곳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천왕 차준경은 본래 설우진과 같은 낭인 출신이었다.
설우진과는 비슷한 나이였기에 자 연스럽게 비교가 됐는데 언제나 그 는 설우진보다 한 수 낮게 평가됐 다.
그런 와중에 차준경이 갑자기 낭인 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낭인들 세계 에선 흔하게 있는 일이라 그에 대한 관심은 금세 사라졌다.
한데 그로부터 십 년 후, 차준경은 천왕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강호로 돌아왔다. 천신동을 열어 제 이대 천신이 된 것이다.
‘설마, 저놈이 얘기하는 게 그 천 신동은 아니겠지?’
설우진은 구미가 당겼다. 지금도 그는 충분히 강했지만 그 강함에도 한계는 존재했다.
그가 익힌 무공은 단조로웠다. 벽 뢰진천과 야수감각도를 제외하면 나 머지는 잡기에 불과했다.
그에 반해 그와 비슷한 무위를 갖 춘 이들은 대부분 풍부한 무학적 토 양을 갖추고 있었다. 뿌리가 튼튼한 명문가에서 기초를 배우고 순차적으 로 상승 무공을 익혀 왔기 때문이 다.
설우진은 황보민이 말하는 천신동 이 그 천신동인지 알아보기 위해 슬쩍 운을 띄웠다.
“천신동, 이름은 참 거창하네.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도 그곳에서 말년을 보낸 거냐?”
“과거 천신이라 불렸던 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무공이 하늘에 닿아 신 의 경지에 이르렀다 할 정도로 대단 한 자였습니다.”
“혹, 담휘월을 얘기하는 것이냐?”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맞습니다.”
“이제 하다하다 전설로 남아 있는 인물을 끌어들이는 거냐?”
“전설이 아닙니다. 천신은 실제 강 호에 존재했습니다. 천신동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네가 직접 그곳에 들어가 본 것도 아닌데 그걸 어찌 알아?”
“천신의 제자가 남겨 놓은 비서에 천신동이 언급돼 있었습니다, 그곳 을 여는 열쇠와 함께.”
설우진이 쉬이 믿으려하지 않자 황보민은 확실한 근거를 제시했다.
“정말 열쇠가 있다고?”
“네, 바로 여기.”
황보민이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밖으로 뺐다.
그런데 정말로 열쇠가 목걸이 한가 운데 걸려 있었고 은은한 금빛이 감 도는 몸통 한가운데에는 천신을 상 징하는 쪼개진 달이 새겨 있었다.
“정말 그게 천신동을 여는 열쇠라 고?”
설우진은 여전히 의심쩍다는 반응이었지만 그 속내는 달랐다.
그는 이미 천왕 차준경을 통해 천 신동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열쇠가 어떻게 생겼는지 도.
‘그놈은 부적처럼 열쇠를 가지고 다녔었지. 저것과 똑같은 모양의 열 쇠를.’
뇌리에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 그 안에 보이는 열쇠와 눈앞의 열쇠는 꼭 닮아 있었다.
“천신동은 태산 적월봉에 있습니 다.”
황보민은 설우진의 관심을 조금이 라도 붙잡기 위해 천신동의 위치까지 얘기했다.
여기에서 설우진은 강한 의문을 제 기했다.
“천신동의 위치에, 그곳을 열 수 있는 열쇠까지 가지고 있었으면서 왜 아직까지 가만히 놔둔 거지?”
“그, 그게……… 몇 번이나 적월봉에 찾아갔는데 천신동을 발견하지 못했 습니다. 동굴이란 동굴은 다 뒤졌는 데도 사람의 흔적이 닿아 있는 곳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럼 장소가 틀린 것 아니냐?”
“아닙니다. 분명 비서에는 담휘월 이 적월봉에서 일생을 마감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눈빛을 보아하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 천신동 주변에도 외부인의 접근을 막기 위 한 진식이 펼쳐져 있는 건가?’
설우진은 진식의 존재를 의심했다. 그가 벽뢰진천을 얻었던 봉뢰동 근 처에도 진식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 이다, 안개를 자욱하게 뿌려 주는 운무진이.
당시 진이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더라면 봉뢰동을 찾 기는 요원했을 것이다.
“보물의 주인은 하늘이 정한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이 열쇠로 천신동을 찾아가십시오. 저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지만 선배에게는 인연이 닿을 수도 있습니다.”
황보민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열쇠 를 건넸다.
한데 아깝기는 한지 열쇠를 쥔 엄 지와 검지에 미세한 떨림을 보였다.
‘어차피 맹에 가서 놈의 죄를 밝혀 봐야 제 식구 감싸기로 유야무야 묻 히게 될 공산이 커. 그럴 바에는 차 라리 실리를 챙기는 게 낫겠지, 애 당초 놈들에게 정신적인 압박감을 가할 목적으로 나선 길이었으니.’
설우진은 처음부터 황보민 일당을 단죄하기 위해 총단행에 따라나선 것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쌍룡맹의 생리에 대 해 잘 알고 있었다. 여러 차례 그곳 에 덴 적이 있어서다.
쌍룡맹은 중원 그 어느 세력보다 정의롭다 외치지만 그들이 암중에서 행하는 일들은 지저분하기 그지없었 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게 제 식 구 감싸기였다.
쌍룡맹은 맹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무사들이 저지른 잘못을 철저히 은 폐시켰다. 눈앞에 뻔히 증거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죄를 인정하 지 않았다.
설우진은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 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유 력 세가의 자제들이 다수 연관되어 있는 만큼 되레 자신에게 역풍이 닥 칠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 는 총단까지 동행하는 것으로 황보민 일당을 압박해 실리를 얻고자 한 것이다.
물론 그 결과물이 천신동의 열쇠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벽이 네 생각은 어때?”
설우진이 슬쩍 남궁벽의 의견을 물 었다. 남궁벽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 며 전음으로 반문했다.
-넌 저놈의 말을 믿는 거냐?
-밑져야 본전이잖아. 맞으면 대박 인거고.
-네 녀석이 꾸민 일이니 알아서 해, 난 천신동 따위 관심 없으니.
“좋아, 소중한 걸 내줄 정도로 반 성했다면 더 이상 일을 크게 벌일 필요는 없겠지.”
“그 말씀은……?”
“네놈들이 저지른 바보 같은 짓을 모두 잊어 주겠어. 그러니까 앞으론 착하게 살아.”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황보민이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감 사의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설우진의 눈엔 그것이 복수 의 다짐으로 비춰졌다.
‘그래, 어디 한번 복수하겠다고 또 설쳐 봐라, 그때는 진짜 그 목 줄기 를 끊어 줄 테니.’
설우진이 황보민의 인사에 진한 미소로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