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6권 – 5화 : 선택의 기로 (2)
선택의 기로 (2)
“용인문에 두고 온 북리강 기억하 시죠? 놈은 편협한 성정의 소유잡니 다. 아마 이번 일이 묻혔다는 걸 안 다면 자신이 당한 게 억울해서라도 스스로 떠벌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 되면 굳이 저희가 전면에 나서지 않 아도 이번 일의 전모가 드러날 게 분명합니다.”
설우진의 결정적인 노림수는 북리 강이었다.
북리강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서협에 남았다. 그는 설우진이 용인문을 떠나기 전에 놈들의 죄를 샅샅이 밝혀 달라 따로 부탁을 하기도 했었 다.
“이이제이의 계로군?”
“뭐, 굳이 따지자면 그런 셈이죠.”
“자네, 정말 능구렁이 같군. 도무지 내 막내 아들놈 또래라고는 믿기지 가 않아.”
‘당연하지, 내가 살아온 세월이 몇 년인데.’
설우진은 사도군의 얘길 듣고 어색 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 뒤로 두 사람은 편안한 마음으로 술잔을 나 눴다.
보기와 달리 술이 약했던 사도군은 한 병을 채 비우기도 전에 식탁에 고개를 처박았다.
위지촌에서 하룻밤을 보낸 설우진 일행은 정오 무렵에 쌍룡맹의 총단 에 닿았다.
미리 그곳으로 간다고 기별해 뒀던 터라 입구에는 각 세가의 사람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황보민과 그 일당은 화산의 일 따 원 진즉에 잊어버린 듯 환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가문의 어른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밤새 숙취에 시달리던 사도군을 마 중 나온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바 로 용인문의 제자들이었다.
뜻밖에도 그들은 군사부를 상징하는 백색 무복을 걸치고 있었다.
모두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설우진에게 도 한 사람이 다가왔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구릿빛 피부가 인상적인 미녀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에 설우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설우진의 얼굴을 찬찬히 뜯 어보더니 다짜고짜 손짓으로 따라오 라고 했다.
설우진은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아 무 소리 않고 그녀의 뒤를 따라갔 다.
‘이야, 뒤태가 장난 아니네. 금방이라도 옷을 찢고 나올 듯한 저 탄력적인 둔부는 중원의 여인들에게선 쉬이 찾아볼 수 없는 건데………….’
걸음을 걷는 내내 설우진의 시선은 정면의 둔부에 꽂혀 있었다. 압도적 인 크기는 둘째 치고 탄력적으로 위 로 올라가 있는 모습이 마치 사과를 연상케 했다.
“눈알 뽑히기 싫으면 당장 그 눈 돌리지, 손님이라고 해도 이 이상의 무례는 용서 못 하니까.”
설우진의 귓가로 짙은 살기와 함께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꽂혔다.
‘진짜 눈을 파 버릴 기센데.’
설우진은 흠칫하며 고개를 의식적 으로 위로 세웠다. 자꾸만 시선이 아래쪽으로 쏠리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최대한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이고자 했다.
다행히 그 마음이 통했는지 끓어올 랐던 주변의 살기가 거짓말처럼 잦 아들었다.
그녀는 설우진을 내성 깊숙한 곳으 로 안내했다. 그곳은 설우진에게도 꽤 익숙한 장소였다.
“맹주님, 언제 여 호위를 들이신 겁니까? 그것도 저리 빼어난 미인 을.”
설우진이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황유하에게 먼저 가벼운 농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하하하, 자네도 유선이가 마음에 들었나 보구먼! 괄괄한 성격만 빼면 저 만한 아이도 없지.”
황유하가 반갑게 그의 인사에 화답했다.
그의 얼굴은 전에 봤을 때보다 많 이 야위어 있었다.
건강상의 문제인지 아니면 심리적 인 문제인지 많이 지쳐 보였다.
“잘 왔네. 자네가 이곳에 온다는 얘길 듣고 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 네.”
‘이 양반이 왜 이래,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설우진은 황유하의 태도에 강한 부 담감을 느꼈다. 그와의 인연이라고 해봐야 지난번 연회에 함께한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얼마 전 사마 관주가 직접 서신을 보내왔네. 자네 덕분에 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하더군.”
“그냥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놈들 이 작정하고 관도들을 죽이려 들었 다면 아무리 제가 있었어도 막을 수 없었을 겁니다.”
겸손을 떠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 랬다.
청랑대는 관도들을 장난감으로 여 겼다. 그래서 진지하게 상대하기 보 다는 조롱하고 한껏 즐기다가 공포 가 극에 달했을 때 목을 벴다.
그 때문에 설우진이 날뛸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다. 청랑대가 스스로 제 발등을 찍은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됐든 자네 덕분에 젊 은 동량들이 목숨을 건지지 않았는 가. 맹주로서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 하고 싶네.”
황유하가 설우진에게 고개를 숙였 다. 남들이 알면 그야말로 뒤집어질 일이었다.
“얼굴 화끈거리게 왜 이러십니까. 그보다 얼굴이 많이 야윈 거 같은데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 “까?”
“후우, 말도 말게. 황룡 학관의 소 식이 전해진 이후 강경파의 움직임 이 거세졌네. 당장에라도 세를 규합 해 마천의 본거지로 쳐들어갈 기세네.”
창우대를 섬서성에 보낼 때만 해도 강경파의 움직임은 두드러지지 않았 다. 창우대만으로도 패망한 마천 따 위는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한데 마천이 별동대를 황룡 학관으 로 보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태 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청랑대의 습격으로 희생된 관도들 중에는 적은 숫자지만 강경파에 속 한 가문의 자식들도 있었다. 그들의 영향력은 강경파 내에서 미약한 수 준이었지만 명분을 주기에는 충분했 다.
“완전히 마천의 힘을 얕보고 있군요?”
“흐음, 자네 말대로네. 그들은 마천 의 발호를 언제든 꺼 버릴 수 있는 모닥불 정도로 여기고 있네. 거짓된 승리에 도취된 게지.”
거짓된 승리. 황유하는 일전에 치 렀던 마천과의 전쟁을 진짜 승리라 여기지 않았다. 마천이 지난 전쟁에 서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판단한 것이다.
그는 대체 왜 그런 판단을 한 것 일까?
그 근간에는 귀마들이 있었다. 귀 마는 귀신의 힘을 지닌 마도의 인간 병기였다.
금강불괴의 몸에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그들은 전장의 잔혹 한 도살자였다.
마의 무리가 강성해질 때마다 그 선봉에 서곤 했었는데 무슨 이유에 서인지 지난 마천 쟁투에서 끝내 모 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럼 어쩌실 생각입니까, 말린다 고 들어먹을 사람들이 아닐 텐데?”
“일단은 말릴 수 있는 데까지 말려 봐야지. 윗사람들의 욕심에 애꿎은 이들을 사지로 몰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황유하는 강경파의 욕심에 맹의 평 무사들이 희생될 것을 우려했다.
‘이 양반, 뼛속까지 정의감으로 똘 똘 뭉쳤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오히려 그것이 독이 될 수도 있는데…………’
설우진은 황유하의 정의감에 감탄 하면서도 속으로는 우려를 표했다. 전쟁은 일단 승리하는 게 우선이 다.
그 말인즉 승리로 가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 는 뜻이다.
아무런 희생도 치르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전쟁은 없다.
상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해 오는데 정공법만 고수해서 어찌 승리를 취하겠는가.
일례로 쌍룡맹은 마천 쟁투에서 구 파와 수호 가문을 미끼로 사용해 전장의 판을 뒤엎었다. 목적이야 자신 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였지만 그들의 극단적인 선택은 전쟁을 승 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 다.
‘뭐, 내가 왈가불가할 일은 아니지, 전면에 나서서 싸울 것도 아니고.’
설우진은 황유하에게 자신의 속내 를 전하려다 이내 마음을 접었다. 그리고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대화의 주제를 여 호위 쪽으로 돌렸 다.
“너무 저희 둘만 얘기를 나눈 것 같은데 저 호위하는 분을 정식으로 소개시켜 주시죠.”
“아, 이런, 내가 정신이 없었군. 저 아이는 내 하나뿐인 피붙이일세. 이 름은 수아라고 하지.”
“가정을 이루신 적이 없다고 알고 있는데…………….”
“화산 문하에 들기 전에 아들을 하 나 두고 있었네. 그 아이가 장성해 서 수아를 낳은 게지.”
“그럼 아드님은…..?”
황유하와 황수아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설우진은 아차 싶었지만 그가 말을 주워 담기도 전에 황유하 의 입이 먼저 열렸다.
“상행 중에 횡액을 당했네. 나는 당시 폐관수련 중이라 아들 내외의 장례식에도 참석치 못했지.”
“죄송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는 줄도 모르고…”
“이제 다 지난 일일세. 그리고 이 손으로 복수하기도 했고.”
황유하의 얼굴에 씁쓸한 감정이 떠 올랐다.
아들 내외의 소식을 전해들은 뒤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 길로 곧장 상단을 습격한 산채를 찾 아가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벴 다.
녹림에서는 꽤나 세가 크다고 알려 진 곳이었지만 그의 분노를 감당해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손녀분은 맹주님께 무공을 사사한 겁니까?”
“그건 아닐세. 수아는 보타암에서 무공을 사사했네. 암주께서 수아의 재능을 높이 산 게지.”
설우진의 두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보타암은 수호 가문만큼이나 그 행 사가 은밀한 곳이었다.
여간해서는 보금자리인 남해를 벗 어나는 법이 없고 제자를 받아들일 때도 꼭 한 명씩만 정해 받았다. 그 래서 보타암의 인원은 백 년 넘게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한데 이상하군. 보타암의 검공은 불문의 영향을 받아 정심하다고 알 려져 있는데, 아까 보여 준 그 기세 는 분명 패기를 품고 있었어.’
보타암의 뿌리는 구파의 하나인 아미파였다.
초대 보타암주는 본래 아미파의 장문제자였는데, 협행 도중에 사랑하 는 이를 만나 환속하게 된다.
그런데 둘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난다.
혼례를 며칠 앞두고 남자가 맹의 지시로 싸움에 나섰다가 마두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한데 더 기막힌 건 그 지시를 내 린 주체가 아미파의 장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알게 된 여인은 크게 상심해 아미파에 절연을 선언하고 남해의 섬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보타 암의 시작이었다.
설우진과 황수아의 시선이 자연스 럽게 얽혔다.
한데 황수아의 눈빛은 냉랭하기 그 지없었고 단순한 경계심으로 치부하 기에는 그 정도가 과했다.
바로 그때 황유하가 설우진을 정식 으로 소개했다.
“수아야, 일전에 내가 얘기했던 청 년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빼어 난 무공을 지녔단다.”
“그럼, 이 사람이 정말로 그 악적 들로부터 조부님을 구했단 말이에 요?”
황수아는 영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 다.
근육은 제법 도드라져 보이지만 전혀 기세가 발산되고 있지 않았다. 상대가 기세를 갈무리할 수 있는 고수라면 모를까 이렇게 기세가 약 한 이라면 강자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었다.
‘내 실력을 의심하고 있군. 하기야, 벽뢰진천은 깨우기 전까진 그 어떤 내공보다 얌전하니.’
설우진은 황수아의 눈빛에 담겨 있 는 마음을 그대로 읽어 냈다.
기세라는 건 내공에 기반한다. 고 로 내공이 강한 이들일수록 밖으로 표출되는 기세도 강해진다.
물론 모든 무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내공이라는 같은 이름을 지니고 있어도 어떤 심법을 익혔느냐에 따라서 그 성질이 판이하게 달라지기 때 문이다.
일례로 벽뢰진천의 내공은 평소에 는 그 존재감을 알기 힘들 정도로 얌전하다. 하지만 힘을 써야 하는 순간이 오면 폭발적으로 기세가 올 라간다.
이런 이유로 설우진은 평소에는 반 박귀진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그 기 세가 전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조부님, 실례가 안 된다면 저 사람하고 붙어 봐도 될까요?”
“며칠 잘 참는가 싶더니 또 몸이 근질근질한 게냐?”
황유하가 난감한 표정으로 황수아 를 바라봤다.
보타암주의 괄괄한 성격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손녀가 그 성격까지 빼닮게 될 줄은 그로서도 미처 예상 치 못했던 일이었다.
“사부님께서 벽을 뛰어넘기 위해선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끊임없이 부 딪쳐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것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저 사람만 허락한다면 문제 될 게 없잖아요.”
황유하의 만류에도 황수아는 고집 스럽게 설우진과의 비무를 청했다.
“맹주님, 그렇게 붙고 싶어 하는데 허락해 주시죠.”
“괜찮겠나?”
“이런 미인과의 비무는 언제든 환 영입니다.”
설우진은 넉살좋게 웃으며 비무를 수락했다.
사실 그도 보타암의 검술이 궁금했 다. 낭왕 시절에 한 번도 보타암의 제자와 검을 맞댄 적이 없었기 때문 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녀와의 비 무는 되레 이쪽에서도 청하고 싶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