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6권 – 9화 : 누란 여로 (2)
누란 여로 (2)
그런데 지금 설우진이 가고자 하는 곳은 누란국이다, 오랫동안 몸과 마 음을 나눈 연인 자스민이 있는.
“그런 이유라면 맹주님께 나와 비 슷한 실력자를 붙여 달라고 해요.”
“그건 안 돼요. 인위적으로 맺어진 관계는 성장의 발판이 되지 못한다 고 했어요.”
“니미, 그럼 내가 한방에서 같이 자자고 하면 같이 잘 겁니까, 난 몸 이 뜨거워서 여자 없이는 잠을 못자는데?”
도통 말이 통하지 않자 설우진은 극단적인 충격 요법을 썼다. 여자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대놓고 건드린 것이다.
예상대로 그녀는 발끈했다. 상종 못할 인간이라고 거친 욕을 내뱉기 도 했다.
이에 설우진은 쐐기를 박았다.
“내 조건을 수락하지 않을 거라면 이쯤에서 깔끔하게 제 갈 길 갑시 다.”
황수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이쯤 에서 갈라서는 게 맞았다. 암주의 지시를 따르자고 사내와 한 방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는 이상하게 감정적으 로 설우진에게 끌렸다. 강한 수컷의 향기에 취했다고나 할까.
“한방에서 같이 자기만 하면 되는 거죠?”
“정말 같이 자겠다는 거요?”
설우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이 정도면 알아서 떨어질 거라 예상했는데 그 황당한 조건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이야………….
“남녀가 한방에 있으면 으레 사고 가 터지기 마련이오. 사내는 다 늑 대라는 말도 있지 않소.”
“강제로 덤벼들면 낭심을 차 버리 면 되죠.”
‘이, 이 여자 위험해. 이럴 줄 알았으면 비무 따위 응하지 않는 거였는데……………?
막 나가는 그녀의 태도에 설우진은 뒤늦은 후회를 했다.
결국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서역 으로 향했다.
“이거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왜 매번 내게 방값을 미루는 거냐고요!”
감숙성의 성도 난주, 그 한복판에 낯익은 두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열흘 전 정주를 출발했던 설우진과 황수아였다.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곳은 난주에서 꽤 규모가 큰 성운객 잔이었다.
성운객잔은 일 층에 식당을 운영하 고 이 층부터 오 층까지는 객방을 운영했다. 이곳은 서역을 오가는 상 단들이 자주 이용하는 터라 항시 손 님들로 붐볐다.
“그렇게 불만이면 이제라도 정주로 돌아가. 나야 아쉬울 것 하나 없으니까.”
“사내대장부가 어찌 이리도……!”
황수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뒤늦게 주변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 려 있음을 인지한 것이다.
‘사부님, 어째서 저에게 이런 시련 을 주십니까? 저런 사내놈한테 뭐 배울 게 있다고!’
그녀는 속으로 사부를 원망했다.
“계산은 아매가 할 테니 얼른 방으 로 안내해 주시오. 그리고 함께 목 욕할 터이니 물도 넉넉하고 받아 두 시오.”
설우진은 이를 가는 황수아를 뒤로 한채 점원을 재촉했다. 이에 점원 은 예의 영업 미소를 지으며 설우진 을 방으로 안내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황수아는 부들부 들 떨리는 손으로 전낭에서 돈을 끄 집어냈다. 그렇게 셈을 치른 후 설 우진이 향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야, 여자가 방값을 치르다니. 정말 복 받은 사내로군.”
“자네도 그리 생각했나? 우리 예매 도 저 모습을 봤어야 하는데. 요새 방값으로 허리가 휠 지경이네.”
“차라리 일찍 혼례를 치르지 그러 나, 둘이 연분을 나눈 지 벌써 삼 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후유, 말도 말게. 예매가 집 살 돈을 마련하기 전까진 절대 혼례를 치르지 않겠다하네.”
“그건 너무하지 않은가! 집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자네 부모님 이 돈을 보태 줄 만큼 형편이 나은 것도 아닌데.”
“그래서 요새 고민이 많네, 예매와 계속 만나야 하는 건지………….”
“세상의 반이 여자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그렇게 맘고생을 할 바엔 차라리 깔끔하게 정리하고 다른 인 연을 찾게. 자네 정도의 외모면 얼 마든지 여자들이 줄을 설 걸세.”
방으로 향하는 황수아를 보면서 두 청년이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두 청년은 난주상단에 적을 두고 있는 소행수들이었다. 소행수는 대 행수를 옆에서 보좌하면서 상행과 관련된 전반적인 일을 배우는데 그 보수가 상당히 짰다. 교육비 조로 대행수가 급여의 일부를 가져가기 때문이다.
“자네의 말을 들으니 그래도 위안 이 되는군. 오늘 가서 예매하고 담판을 지어야겠네.”
“그래, 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응원함세.”
두 사람이 서로를 격려하며 잔을 부딪쳤다.
그런데 갑자기 양이라는 청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예매, 여긴 웬일이야!”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고운 화 복을 차려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사내들의 마음을 한 번에 빼앗을 정도로 빼어난 미모의 소유 자는 아니었지만 풍만한 가슴과 입 술 가에 찍혀 있는 미인점이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양랑, 대낮부터 술이에요?”
“미, 미안, 유천이가 요즘 들어 부쩍 외로움을 타는 것 같아서 위로주 한잔 샀어.”
“지난번에 만났던 아가씨하고 잘 안 된 거예요?”
“응. 그쪽에서 퇴짜를 놨나 봐. 아 무래도 외모가 걸렸던 거겠지.”
“유천 오라버니의 외모가 어때서 요! 잘생기진 않았어도 사내답게 이 목구비 뚜렷하고, 특히 저 코는 금 전운을 불러들인다는 복코잖아요.”
그녀의 칭찬에 맹유천의 얼굴이 사 납게 일그러졌다. 얼굴의 반을 차지 하는 그의 코는 그간 만나 온 여인 들에게 호감을 주기는커녕 되레 비 웃음의 대상이 됐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사람의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이어졌 다.
“근데 진짜 여긴 왜 온 거야? 가 게가 한창 바쁠 시간 아니야?”
“그게, 이모님이 오늘 성운객잔에 좋은 장어가 들어왔다고 했거든요. 지난번에 보니까 양랑이 영 힘을 못 쓰는 것 같아서 몸보신 좀 시켜 주려고…….”
여인이 얼굴을 붉혔다.
“역시, 이 세상에 나 생각해 주는 건 우리 예매밖에 없다니까. 유천아, 미안한데 자리 좀 옮길게.”
‘저 새끼가 아까는 금방이라도 정리할 것처럼 굴더니………….’
“마음대로 해, 언제부터 네가 날 그렇게 챙겼다고.”
맹유천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하지 만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양 은 희희낙락거리며 연인의 손을 잡 고 창가 자리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면 맹유천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것들아, 장어 먹고 배탈이나 나 라!”
탕에서 김이 폴폴 올라왔다.
설우진은 그 앞에서 몸에 걸치고 있던 옷들을 깔끔하게 벗어 냈다.
근육으로 다져진 나신. 그의 몸은 여인의 몸 못지않게 매혹적이었다.
“안 들어올 거요?”
설우진이 뒤를 돌아봤다.
“내, 내가 왜 당신하고 그 탕에 같이 들어가요?”
뒤돌아선 황수아의 얼굴이 잘 익은 능금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루 이틀 겪는 일도 아닌데 그녀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그럼 안 씻고 잘 거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어서 탕에나 들어가요. 뭐 보기 좋은 몸이라고…….”
“이 정도면 끝내주지 않소, 초원을 누비는 들소처럼 군살 하나 없이 근 육에 탄력이 넘치는데?”
“여자들은 그런 몸 징그럽다고 싫어해요.”
‘난 좋아하지만.’
황수아는 끝말을 몰래 삼켰다. 그 녀는 설우진이 이런 도발을 해 올 때마다 입으로 싫다고 외쳐댔지만 가슴속에선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야릇한 감정이 들었다.
첨벙.
그녀가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설 우진이 탕 속으로 들어갔다. 설우진 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몸에 묻은 먼지들을 훌훌 털어 냈다.
‘황수아, 정신 차려. 저놈은 분명 네가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짐 승처럼 달려들 거야. 절대 경계를 늦춰선 안 돼.’
황수아는 설우진에게 끌리는 마음을 참아 내려 열심히 자기 최면을 걸었다.
탕 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 우진은 그녀의 강인한 의지에 탄사 를 보내며 입가에 진한 미소를 떠올 렸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황수아는 그동 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의구심을 털 어 냈다. 서역까지 얼마 남지 않은 거리인지라 그 목적을 확실히 알고 싶어서였다.
“근데, 무슨 일이기에 요즘처럼 흉 흉한 때에 서역으로 향하려는 거죠, 서역은 마천의 권역인데?”
설우진은 한 잔의 술로 가볍게 목을 축이고는 자스민에 대해서 간략 하게 얘기했다.
자스민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 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니까 연인을 구하러 간다는 거네요?”
“그래서 내가 따라오지 말라고 했 던 거예요, 서로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
“많이 좋아하나 보죠?”
기분 탓일까. 설우진은 그녀의 말투에서 찬바람을 느꼈다.
“그게 왜 알고 싶은데요?”
“그, 그냥 궁금했어요, 사매들이 얘 기하기를 남자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선 불지옥이라도 주저하지 않고 뛰어든다고 하기에………….”
황수아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 려 허겁지겁 말을 지어냈다. 그 모 습을 보면서 설우진은 대화를 이었 다.
“사매들의 말은 믿지 마요, 그런 사내는 만 명에 한 명 정도에 불과하니까.”
“그럼 당신은……?”
“그 만 명 중에 하나죠.”
설우진이 뻔뻔스럽게 자신의 얼굴 에 금칠을 했다. 농인 걸 알면서도 황수아는 설우진이 너무 얄미웠다.
“이거나 먹어요.”
그녀가 기습적으로 설우진의 입에 고추를 밀어 넣었다. 알싸한 향이 코끝에서 가시지 않을 정도로 매운 고추였다. 하지만 설우진은 그녀의 성의를 거부하지 않고 한 번에 고추 를 씹어 먹었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식사하는 사이 옆쪽 식탁으로 새로운 손님들 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는 것이 강호 인들로 짐작됐다.
“모령이, 요새 왜 이리 마천이 조 용한 겐가, 열흘 전까진 금방이라도 섬서로 쳐들어갈 것처럼 시끄럽더 니?”
“낸들 알겠는가, 놈들의 음흉한 속 을.”
“그럼 우린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하는 겐가?”
“일단은 대세에 따라야지, 우리 같 은 중소 문파가 무슨 배짱으로 마천 과 맞서겠나. 술이나 마시세!”
그들은 복호문 인근에 자리한 천강 문의 무사들이었다.
천강문은 이름은 거창하지만 문도 수가 백에도 이르지 못할 만큼 그 세가 약했다.
현재 감숙성에는 그러한 소규모 문 파들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 다.
‘내가 알고 있는 마천이라면 청랑 대와 적랑대의 일을 빌미 삼아 작정 하고 쳐들어와야 맞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설우진은 그들의 얘기를 듣고 고개 를 갸웃거렸다.
전생에서 보여줬던 마천의 행보와 지금의 행보가 판이하게 달랐기 때 문이다.
하지만 그 의구심은 새로이 등장한 손님들에 의해 금세 지워졌다. 반라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등장 한 이는 면사를 쓴 여인이었다. 꽤 귀한 신분인 듯 온몸에 화려한 장신 구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고, 공주님, 오셨습니까!”
여인의 출현에 점소이들이 한꺼번 에 뛰어왔다.
그녀를 맞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닌 듯 그 태도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 다.
“조용히 식사하고 싶으니 지금 당 장 땀내 나는 사내들을 모두 쫓아내 라.”
그녀의 고운 입술에서 앙칼진 목소 리가 흘러나왔고 그 순간 손님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 다.
그녀의 신분을 알고 있는지 다들 싫은 내색 한 번 내비치지 않고 식 탁에 돈을 올려놓은 채 조용히 밖으 로 나갔다.
하지만 모두가 그녀의 말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이가 바로 외로움을 달래려 정신없이 술을 푸고 있던 맹유천이었다.
“니미럴, 네년이 여길 전세냈어? 왜 네가 나가라마라 지랄이야!”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맹유천 이 그녀에게 거침없이 삿대질을 했 다. 진양이 옆에 있었다면 필사적으 로 말렸을 테지만 그는 이미 연인과 함께 객방으로 들어간 뒤였다.
“파잔, 저놈의 혓바닥을 잘라라!”
파르르 떨리는 면사 너머에서 분노 한공주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이에 유난히 짙은 구릿빛 피부에 반들거리는 민머리를 한, 무사 파잔 이 허리에서 만도를 뽑아 들고 맹유 천 쪽으로 다가갔다.
“뭐야, 나랑 한판 붙어 보자는 거야!”
취기 탓인지 맹유천은 당최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다.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자신 있게 뽑아 든 게 그 증거였다.
캉!
파잔의 만도가 맹유천의 검을 단번 에 쳐 냈다. 술기운에 제 몸도 가누 지 못하는 그가 무슨 수로 제대로 힘이 실린 칼을 막아 낼 수 있겠는 가.
호구가 찢어져 피가 났다. 맹유천 은 그제야 술이 좀 깼는지 무사를 피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하지 만 그의 등 뒤에는 두꺼운 벽이 가 로막고 서 있었다.
파잔은 긴 혀로 만도의 날을 핥으 며 맹유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완 강하게 저항하는 그의 팔을 뿌리치
고 강제로 입을 벌려 혀를 밖으로 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