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7권 – 10화 : 흑선 경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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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7권 – 10화 : 흑선 경매 (3)


흑선 경매 (3)

“하아, 이거 뭐 뀐 놈이 성낸다더 니. 이봐, 내가 시작한 판에 중간에 끼어든 건 당신이야. 왜 이제 와서 남의 탓을 하는 건데?”

“네, 네놈이 아까 날 자극하지 않았느냐!”

“내가 언제, 난 당신하고 말을 섞은 기억도 없는데?”

“그, 그건…….”

초금저는 말문이 막혔다.

그사이 소문혁이 끼어들었다.

“초 대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흑 선의 규칙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 이상 소란을 피우시면 저희 쪽에 서도 거칠게 대응할 수밖에 없습니 다.”

“나, 날 협박하는 겐가?”

“그리 느끼셨다면 죄송하지만 경매 장을 책임지고 있는 제 입장도 헤아 려 주십시오.”

소문혁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유연한 대처에 초금저도 더는 완강한 입장을 고수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소 당주, 이번 낙찰 건은 포기하겠네. 이건 그 위약금일세.”

초금저가 소문혁에게 금자 열 냥짜리 전표를 건넸다.

흑선에서는 낙찰자가 물건 수령을 포기하는 경우 낙찰 금액의 일 할을 위약금으로 내도록 되어 있었다. 소문혁은 전표를 받아 챙기며 손님 들에게 외쳤다.

“낙찰자의 변심으로 첫 번째 경매 가 취소됐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 만 저희 흑선에선 고객님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자, 분위기를 바꿔 두 번째 경매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 다.”

두 번째 경매가 시작되자 노인이 갇혀 있던 철창은 배 안쪽으로 옮겨 졌다.

설우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철창이 옮겨진 곳으로 향했다. 소문혁은 경매에 집중하느라 미처 그 모 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배 속은 어두컴컴했다.

군데군데 횃불이 걸려 있기는 했지 만 넓은 공간을 모두 밝히기에는 그 숫자가 너무 적었다.

저벅저벅.

횃불 아래 희미한 한 쌍의 그림자 가 나란히 드리워졌다.

노인을 따라 배 안으로 들어온 설 우진과 왕고대였다.

무사들이 경매장으로 모두 빠져나 간 덕분에 창고 안은 무척이나 한산 했다.

“어서 나 대신 말을 걸어 봐.”

“뭐라고 얘기합니까?”

“저자의 도련님 일로 찾아왔다고해.”

설우진이 왕고대를 재촉했다.

그의 성화에 왕고대는 조심스럽게 철창 쪽으로 접근해 말을 걸었고 조 선말에 능통하다는 자랑이 거짓이 아닌 듯 말에 막힘이 없었다.

“지금 우리 도련님 일로 찾아왔다 고 했소?”

“아유, 김씨, 똑같은 말을 몇 번이 나 반복해야 해! 이 행수 일을 해결 해기 위해 찾아오신 분이라니까!” 

“그럼 설가상단의 ……………?”

“그렇다니까. 꽤나 높은 직책에 계시는 것 같으니까 잘 얘기해 봐. 아마 큰 도움이 될 거야.”

왕고대는 김씨를 적극적으로 설득 했다. 자신에게 돈이 되는 일이니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노력은 통했다.

왕고대는 밝은 표정으로 설우진에 게 다가와 김씨와 얘기가 잘됐음을 알렸다.

“그럼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그자 와 접촉한 자가 있었는지 물어 봐.” 

설우진이 이성철의 행적에 대해 물 었다.

그 말은 왕고대를 통해 김씨에게 고스란히 전해졌고 김씨는 한 맺힌 목소리로 이성철과 박상원 사이에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얘기했다.

“그러니까 얘기를 종합해 보면 박 상원이란 자가 이성철에게 중원의 상단을 소개했고, 그 상단에서 우리 설가상단과의 거래를 추천했다?” 

“네, 김씨 말로는 둘이 짜고 이 행 수를 함정에 빠뜨린 것 같다고 합니 다.”

“함정에 빠진 건 그가 아니야. 놈 들이 최종적으로 노렸던 건 우리 상 단이야. 이성철 그자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 덫에 빠지게 유도한 거지.” 

김씨의 증언을 통해 사건의 정황이 깔끔하게 드러났다.

모든 전말을 알게 된 설우진의 머리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박상원 그자를 족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는 침 착하게 대응하자며 스스로 감정을 추슬렀다.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놈들은 치밀해. 섣불리 박상원 쪽 을 건드렸다 오히려 꼬리를 자르고 도망쳐 버릴 수 있어. 일단은 흑선 에서 내린 뒤 은밀히 움직여야겠 어.’

“수고했다. 이건 약속한 보수다.” 

설우진이 왕고대에게 돈을 건넸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황금이었다. 

“저, 정말 저 주시는 겁니까?”

왕고대가 감격에 찬 눈빛으로 설우진을 쳐다봤다.

“내가 한 입 가지고 두말할 사람처 럼 보이냐? 네 덕분에 연결 고리를 찾았으니 그 셈은 확실히 치러야 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당하게 일한 몫이니까 그런 과 례는 필요 없어.”

설우진은 연신 허리를 숙여 감사의 뜻을 전하는 왕고대에게 가볍게 손 사래를 치며 밖으로 향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김씨가 창살을 부여잡고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대인,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응? 이건 한어잖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설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설우진과 눈이 마주치자 김씨는 더 격하게 말을 이 어 갔다.

“도련님의 억울한 한을 푸는 데 조 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시 키시는 건 뭐든 할 테니 제발 제 청을 들어주십시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설우진이 왕고대를 빤히 쳐다봤다. 한데 당황하기는 왕고대도 매한가지 였다.

‘젠장, 이게 무슨 엿 같은 경우야! 분명 내 앞에선 조선말만 썼었는 ……..’

“죄, 죄송합니다. 저도 김씨가 이리 한어가 유창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 말을 어찌 믿어?”

“정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 돈을 다시 돌려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맹세 코 전 몰랐습니다.”

왕고대가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손 으로 금자를 내밀었다. 물론 이는 고도로 계산된 행동이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설마 가져가지 는 않겠지?’

왕고대는 슬쩍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폈다.

한데 그의 기대가 무색하게 설우진 이 잽싸게 금자를 가져갔다.

‘하아, 저 나쁜 놈, 아무리 내 얘기 가 틀렸기로서니 어떻게 저리 매정 하게 돈을 가져갈 수 있는 거지. 잠깐이나마 좋은 맘을 품었던 내가 병신이다, 병신.’

왕고대는 억울하고 화가 났다. 어제부터 설우진을 그림자처럼 쫓 아다니며 수발했는데 그 노력의 대 가가 한순간에 사라졌으니 그 마음 이 오죽할까.

한데 바로 그때, 가벼워졌던 손끝 에 뭔가 묵직함이 느껴졌다.

왕고대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고 낯익은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반으로 조각 난 금자였다.

“이, 이게……?”

“약속한 몫에서 절반을 떼어 낸 거 야, 그래도 김씨에 대해서 알려 주고 날 이곳까지 데려다 주기도 했으니까.”

“정말 주시는 겁니까?”

“싫으면 말고.”

“아, 아닙니다. 정말 감사히 쓰겠습니다.”

왕고대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우 고는 금자를 품 안에 갈무리했다, 다시는 뺏기지 않다는 듯.

“그나저나 저 노인네 데려갈 가치 가 있을까? 보아하니 제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들 듯한데.”

“신분은 노비였지만 이 행수가 항 상 수족처럼 데리고 다녔던 걸 감안 하면 뭔가 남모를 재주를 지닌 게 아닐까요?”

‘하긴, 일개 노비가 한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지.’

설우진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렴한 몸값을 자랑하는 늙 은 노비다. 그를 사는 데 드는 비용 쯤은 전혀 부담될 게 없었다.

설우진은 그길로 열띤 경매가 이뤄 지고 있는 갑판으로 향했다.

여기저기서 값을 높여 부르는 소리 가 들려왔다.

무대에는 상급으로 평가받은 여자 노예가 올라와 있었다. 사내들의 탐 욕을 부추기기 위함인지 그녀는 벗 은 것이나 진배없는 실오라기 같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가 작은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애끓는 사내들의 탄성이 흘러나왔 다.

하지만 설우진은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돈으로 여자를 살 만큼 굶주리지도 않았고 지금은 눈앞의 여인보다 김 씨 노인을 사는 것이 더 급했기 때 문이다.

열띤 경쟁 끝에 오백 냥이 넘는 금액에 여자 노예가 낙찰됐다.

설우진은 경매가 끝난 뒤 곧장 소 문혁을 불렀다.

소문혁은 의아해하면서도 곧장 설우진 쪽으로 걸어왔다.

“소협, 무슨 일입니까?”

“아까 경매가 취소됐던 늙은 노예, 내가 데려갔으면 하는데.”

“그건 좀 곤란합니다. 저희 흑선에 서는 낙찰되지 않은 물건을 밖으로 내보낼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소문혁은 설우진의 청을 단호히 거 절했다.

하지만 실제 그런 규칙 따위는 존 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낙찰되지 않 은 노예는 그가 나서서 소위 떨이로 단골들에게 넘기곤 했었다.

한데 왜 그는 태도를 달리 한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늙은 노예를 돈이 되는 상품이라고 판단했기 때 문이다.

“정말 안 되는 거야?”

설우진이 재차 물었다.

“음, 원칙적으로는 안 되지만 제 권한으로 한 명 정도는………….”

“그럼 넘겨.”

“가격은……………?”

“경매 시작가로 해. 내가 나선 덕 분에 공돈도 챙겼잖아.”

설우진은 은자 한 냥을 제시했다. 하지만 소문혁은 불만족스러운 표정 으로 손가락 열 개를 활짝 펴 보였 다.

“은자 열 냥?”

“금자 일백 냥까지 몸값이 올라갔 던 노예입니다. 그 정도는 주셔야 저도 윗선에 얘기할 수 있는 명분이 생깁니다.”

소문혁은 김씨 노인에게 매겨졌던 몸값을 들어 설우진을 설득했다. 

‘이 새끼가 아주 작정하고 내 주머 니를 털려고 하네. 그럼 어쩔 수 없 지. 나도 다소나마 거친 방식으로 나갈 수밖에.’

소문혁을 바라보는 설우진의 눈빛 이 사납게 변했다.

“그럼 뭐, 그 거래는 없던 걸로 하 지.”

“네?”

“없던 걸로 하자고. 나도 딱히 그 늙은 노예가 필요해서 데려가려고 했던 건 아니니까. 대신 이거 하나 만은 분명히 알아 둬, 분에 넘치는 욕심은 반드시 화를 부른다는 걸.”

설우진은 그대로 뒤돌아섰다.

왕고대는 멀뚱히 두 사람을 쳐다보 고 있다가 황급히 그 뒤를 쫓았다. 

“공자님, 무슨 복안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왕고대가 넌지시 물었다.

설우진이 자신 있게 돌아서는 걸 보고 노림수가 숨어 있을 것이라 지 레짐작한 것이다.

이에 설우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에 차고 있던 천뢰도를 가볍게 두들겼다.

‘그 칼로 뭘 한다는 거지? 설마, 칼부림이라도 해서 억지로 빼앗겠다 는 건 아니겠지?’

왕고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우진이 나이에 비해 대단한 실력 을 지닌 건 분명했다. 하지만 이 흑 선은 흑서문의 주요 사업체 중 하나 였다. 눈에 보이는 무사들만 해도 그 숫자가 수십이 넘는데 그들과 정 면으로 싸운다는 건 한마디로 미친 짓이었다.

“고, 공자님, 침착하게 다시 한 번 만 생각해 보시죠. 아까 그 족제비 처럼 생긴 놈이 얄미운 수를 부리긴 했지만 힘으로 맞서는 건 너무 위험 합니다.”

“그게 뭔 헛소리야?”

“싸움을 걸려던 게 아니십니까?”

“싸우려고 맘먹었으면 방금 전에 그 자식 면상에 주먹부터 날렸을 거야.”

“하면……?”

“불장난을 좀 해 볼까 해.”

“미, 미친 짓입니다. 흑선을 불태우 면 무슨 수로 청도항으로 돌아갑니 까?”

“밖에 우리가 타고 온 소선이 있잖 아. 셋이 타고 가기엔 충분할 것 같은데.”

‘이 인간, 진짜 저지를 기세잖아.’ 왕고대는 기겁했다.

흑선을 불태우고 튀겠다니, 이건 흑서문에 대한 선전포고나 진배없었다.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없어. 아니, 더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설우진은 왕고대의 설득을 뒤로 하 고 거침없이 선내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불안감을 느낀 소문혁은 부랴부랴 부하들을 아래로 내려보냈 다. 모두 흑서문에서 알아주는 실력 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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