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7권 – 12화 : 드러난 배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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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7권 – 12화 : 드러난 배후 (2)


드러난 배후 (2)

내력을 싣지 않았음에도 그의 무릎 은 무사의 턱뼈를 일격에 바스러뜨 렸다.

“한꺼번에 공격해!”

설우진이 만만찮은 상대라는 걸 인 지한 무사들이 수적 우위를 앞세워 우르르 몰려들었다.

전면에서 들이치는 사나운 검들, 하지만 이번에도 설우진은 천뢰도를 뽑지 않고 맨몸으로 그들을 상대했 다.

물론 혼자의 몸은 아니었다.

“이런 비겁한……!”

흑서문의 무사들이 검을 휘두르는 마지막 순간에 멈칫했다. 설우진이 기절해 있던 흑서문의 무사를 방패 삼아 앞으로 내민 것이다.

설우진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번 개 같은 손놀림으로 그들의 목울대 를 후려쳤다.

“크르륵.”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흑서문의 무사들이 앞다퉈 쓰러졌다.

‘무시무시한 실력이다. 이자라면 분명 도련님의 억울한 죽음을 밝힐 수 있을 것이야.’

눈앞에서 설우진의 활약을 본 김씨노인은 가슴속에 희망을 품었다.

그사이 설우진은 바닥에 떨어졌던 검을 하나 들고 흑선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왜 아무런 소식도 없는 거지? 설 마, 그놈한테 모두 당한 건 아니겠지?”

경매는 다시 시작됐지만 소문혁은 좀체 집중하지 못했다. 설우진을 감 시하러 보냈던 무사들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불안한 마음은 이내 끔찍한 악몽을 야기했다.

“킁킁, 무슨 냄새 나지 않아?”

“뭐가 타는 것 같은데.”

“가만, 저 연기는 어디서 흘러나오는 거지?”

손님들의 시선이 선체를 타고 오르 는 연기에 집중됐다. 그리고 이내 배에 불이 났음을 인지했다.

배는 난리가 났다. 땅에서 불이 났 다면 달려서 피할 수 있지만 바다에 떠 있는 배는 피할 곳이 없었다.

이에 사람들은 앞다퉈 소선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소선 의 숫자는 어찌된 일인지 처음보다 크게 줄어 있었다. 손님을 배에 나 른 대다수의 어부들이 항으로 돌아 간 것이다.

“비켜.”

탈 사람은 많은데 탈 수 있는 배는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 뱃전이 금 세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처음엔 몸으로 치고받는 정도였는 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칼부림으로 까지 이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냐?”

소문혁은 사색이 된 얼굴로 수하에 게 상황을 물었다.

“곡물 창고에서 불이 났습니다. 불 을 꺼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는 있는 데 불길이 너무 거셉니다.”

“그곳에서 왜 불이 난단 말이냐?” 

“그건 저도 잘……”

바로 그때 선 내에서 설우진이 유 유히 걸어 올라왔다. 그리고 입가에 비웃음을 한껏 머금은 채 소문혁을 쳐다봤다.

그 미소에서 소문혁은 지금의 화재 가 누구의 손에서 비롯되었는지 직 감할 수 있었다.

“네, 네놈이 이런 짓을 하고도 무 사할 것 같으냐? 본문의 무사들이 네놈을 끝까지 찾아내 사지를 찢어 발길 것이다.”

“지금은 그보다 네놈 목숨이나 챙 기시지. 이 배, 곧 가라앉을 거거 든.”

설우진은 소문혁의 협박을 뒤로 한 채 그대로 뛰어내렸다. 양손에는 왕 고대와 김씨 노인을 쥐고 있었다.

쿵.

세 사람이 배에서 뛰어내리자 요란 한 포말이 일었다.

헤엄을 친 그들은 간신히 타고 왔 던 소선으로 올라왔고 설우진은 사 색이 된 얼굴로 앉아 있는 왕고대에 게 노를 건넨 뒤 근처의 배를 향해 쌍장을 내질렀다.

펑펑펑.

소선들이 연속적으로 터져 나갔다. 위에서 정신없이 싸움을 하고 있던 손님들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 다.

“이제 그만 출발해.”

소선들을 모두 부순 설우진은 유유 히 청도항을 향해 나아갔다. 그사이 불길이 배 전체에 퍼졌는지 희뿌연 연기가 갑판을 빠르게 뒤덮었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일을 벌 이신 겁니까? 흑선이 불탔으니 흑서 문에서 눈에 불을 켜고 공자님을 잡 으려고 들 겁니다.”

“올 테면 오라고 해, 그깟 흑도패 놈들 하나도 겁나지 않으니까.” 

“든든한 뒷배라도 있는 겁니까?” 

왕고대가 은근한 눈빛으로 그를 바 라보며 물었다. 흑서문에 준하는 뒷 배가 있지 않고선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지를 리 없다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설우진의 대답은 그의 기대 를 산산이 무너뜨렸다.

“든든한 뒷배는 무슨, 그냥 내 실력을 믿는 거지. 볼일 다 봤으니까 우린 이쯤에서 헤어지자.”

설우진이 왕고대에게 이별을 고했 다. 한데 왕고대는 객잔으로 돌아가 지 않았다.

“저 이대론 객잔에 못 돌아갑니 다.”

“왜?”

“공자님 때문에 제 얼굴이 다 팔리 지 않았습니까! 필시 공자님을 찾기 위해 흑서문에서 저부터 족칠 겁니 다.”

“그럼 어쩌라고? 내가 네놈의 인생 까지 책임져 줄 수는 없잖아.”

설우진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에게 왕고대는 심부름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사건이 조용해질 때까지라도 절 보호해 주십시오. 그 뒤엔 제갈 길 알아서 찾아가겠습니다.” 

“좋아. 대신 공짜는 없어.”

‘정말 너무하네, 차라리 벼룩의 간 을 빼 먹지.’

왕고대는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뒷일 생각 않고 그냥 한대쳐 버 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눈에 힘 풀지, 네놈한테 돈 뜯어 낼 생각 없으니까.”

“그럼……?”

“일을 하라는 거야,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설마 이런 짓을 하고서도 계속 이곳에 남아 있을 생각은 아니시겠 죠?”

왕고대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놈한텐 안된 일이지만 아직 일 이 안 끝났어.”

‘하아, 그냥 혼자서라도 도망칠까?’


퍽.

“이 새끼야, 지금 네놈이 뭔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

방 안에서 성난 황소의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죄송합니다, 문주님! 모든 게 제 불찰입니다.”

소문혁이 바닥에 제 이마를 세게 찍었다. 어찌나 세게 찍었는지 이마가 찢어져 미간으로 피가 흘렀다.

“대체 어떤 놈이냐?”

흥분을 좀 가라앉혔는지 흑서문주 가휼이 짜내듯이 말을 뱉었다.

그는 흑도판에서 전설로 통하는 인 물이었다. 시전 뒷골목의 비렁뱅이 에 불과했던 과거를 딛고 번듯한 문 파의 주인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비렁뱅이 시절에 소림의 파계 승과 인연이 닿아 외공 하나를 전수 받았다.

금종조에서 비롯된 금강철괴공이라 는 외가무공이었다.

금강철괴공은 원하는 부위를 일시적으로 금강불괴지신처럼 만들 수 있었다.

막싸움에 능했던 그에겐 최적의 무 공이라 할 수 있었다.

“젊은 놈이었습니다. 그리고 박행 수가 넘긴 늙은 노예를 노리고 있었 습니다.”

“늙은 노예를 왜?”

“그것까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은 직접 잡아서 족치는 수밖 에 없겠군. 지금 당장 흑무단을 소집해.”

“굳이 흑무단까지 움직일 필요가 있을까요?”

“흑선이 본문의 소유임을 뻔히 알 고도 불을 저지른 놈이다. 정신이 나간 게 아니라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고수일 가능성이 높다.”

가휼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무식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그는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알았다. 쥐뿔 도 가진 것 없던 그가 흑서문의 문 주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머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날 오후, 온몸을 검은 천으로 두 른 흑무단이 흑서문의 문턱을 넘었 다.

그들의 허리에는 흑무단의 상징인 쌍겸이 걸려 있었다.


“눈엣가시 같던 놈이 사라지니 절 로 입맛이 도는군,전에는 아무리 맛있는 산해진미를 내놔도 선뜻 손 이 가질 않았었는데.”

박상원은 요즘 입맛이 참 좋았다. 전에는 유명한 숙수의 요리를 먹고 도 입안이 꺼칠하게 느껴지곤 했었 는데 지금은 싸구려 소면도 진하게 육수를 낸 것처럼 맛있게 느껴졌다. 이를 방증하듯 그의 손은 쉴새 없이 상 위를 훑고 지나갔다. 그때 마다 요리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똑똑똑.

“행수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식사가 끝나 갈 무렵 그를 대신해 일을 나갔던 소행수가 돌아왔다. 박 상원은 무명천으로 입 주변을 닦으 며 말을 이었다.

“들어와.”

드르륵.

문이 열리고, 스물서넛 정도로 보 이는 청년이 얼굴을 비췄다.

“예도상단 사람들은 만나봤느냐?” 

“네, 약속대로 내일 중으로 일꾼들 을 보내 물건을 가져가기로 했습니 다.”

“그럼 우리가 요구한 것들은?” 

“늦어도 나흘 안에는 가져다주겠다 고 했습니다.”

“후후, 이거 일이 술술 풀리는군. 수고했다. 이리 와서 한잔 받아라.”

박상원이 청년을 자신의 앞으로 불 렀다.

청년은 상 아래에 무릎을 꿇고 그 가 내미는 술을 받았다.

“마셔라.”

“감사합니다.”

청년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잔을 비웠다. 그러고는 한참을 망설이는 듯하더니 어렵게 입을 뗐다.

“박 행수님, 혹시 이 행수님의 시체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게냐?”

박상원의 두 눈에 사납게 날이 섰다.

“한때 저에게 장사를 가르쳐주셨던 분입니다. 조선으로 모시지는 못하 더라도 양지 바른 곳에 묻어 드리고 싶습니다.”

청년 이도는 정식으로 사승의 연을 맺지는 않았지만 이성철에게 장사의 전반적인 지식을 배웠다.

이유는 단순했다. 두 사람의 성과 본이 같았기 때문이다.

“이 행수는 이미 김 노인을 시켜 양지 바른 곳에 묻게 했다. 하니 그 일에 대해선 신경 쓸 것 없다.”

“그럼 그 위치라도……?”

“네놈이 지금 묘나 찾아다닐 정도로 한가한 상황이더냐!”

“……죄송합니다.”

이도는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이행수님 일에 왜 이리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거지? 설마, 김씨 노 인의 얘기대로 박 행수님이 이번 일 과 관련이 있는 걸까?’

이도는 박상원의 태도에 의구심을 품었다.

하지만 당장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지켜 보는 것 외에는.

“몸이 편해지니 쓸데없는 잡념이 생기는 것이다. 오늘 중으로 예도상 단과 거래할 물건들을 다시 한 번 확인토록 해라. 수량이 어긋나거나 불량이 섞여 있을 시 네게 모든 책 임을 물을 것이다.”

박상원이 억지로 일을 떠맡겼다. 이도 입장에선 무척이나 억울한 일 이었지만 그의 성정을 아는지라 더 는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방을 나섰 다.

“에잉, 저놈도 기회가 되면 조용히 치워 버려야겠어. 일 처리가 깔끔해 곁에 두고 있었지만 이가 놈에게 장사를 배웠다는 게 영 마음에 걸려.” 

이도의 등을 바라보는 박상원의 눈 빛에 옅은 살의가 번졌다.


청도항으로 돌아온 설우진은 왕고 대, 김씨 노인과 함께 고려각에 방 을 잡았다.

설우진은 어디서 묵든 상관없었지 만 왕고대가 극구 고려각을 추천했 다. 고려각은 길목 한가운데 자리하 고 있어 주변의 동태를 살피기 용이 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다들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설우진이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이에 먼저 왕고대가 답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제 짐은 이미 챙겨 놨으니 바로 이곳을 뜨시죠. 곧 청도항에 흑서문의 천라 지망이 펼쳐질 겁니다.”

“겁나면 혼자 가.”

“그, 그래도 함께해 온 의리가 있 는데 그럴 순 없죠.”

“돈으로 맺어진 사이에 뭔 의리 타 령이야! 계속 그 따위 헛소리 지껄 일 거면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설우진은 왕고대의 의견을 시원하 게 묵살했고 왕고대는 툴툴 대면서 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함께하겠다는 암묵적인 의사표시였다.

이때 눈치를 보고 있던 김씨 노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단은 거래일까지 기다려 보시지 요. 박 행수가 대가를 약속받고 도 련님을 함정에 빠뜨린 게 분명하다 면 이번 거래에서 그 흉수가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흠,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군. 이번 거래는 어디서 이뤄지지?”

“상하평입니다.”

“상하평?”

“청도항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자리한 작은 평원입니다.”

“왜 굳이 그런 곳에서 거래를 하는 거지, 청도항이 거래를 하기에 좁은 곳도 아니고?”

“주위의 이목을 피하려는 목적이 숨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김씨 노인은 침착하게 자신의 의견 을 피력했다.

“그 말은 곧 뒤가 구리다는 거네?”

“네.”

“후훗, 그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지.”

“무슨 복안이 있으십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놈들에게 똑같이 되갚아 줄 거야.”

“그게 무슨…?”

왕고대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궁금하면 네 녀석이 미끼가 되어 움직여 봐.”

“무슨 미끼……?”

“흑서문을 끌어들이는 미끼지. 네녀석이 청도항에서 얼굴을 팔고 다 니면 흑서문 놈들이 알아서 몰려들 거 아냐.”

“대, 대체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사람이 좀 필요하거든. 돈 주고 낭인들을 고용하는 것보다 놈들을 쓰는 게 낫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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