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7권 – 17화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3)
눈에는 눈, 이에는 이 (3)
좌판에 올려놓기 무섭게 옷들이 팔 려 나갔다.
특히, 단예의 손을 거쳐서 완성된 옷들은 손님들 사이에서 뜨거운 반 향을 일으켰다.
“궁지에 몰리니, 별짓을 다하는군.”
“어쩌겠어요, 쌓아 둬 봐야 짐밖에 안 될 텐데. 일품점 본점이 내려다보이는 객잔 최상층에 낯익은 얼굴들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황궁에서 열린 예복 경연에 서 설우진에게 쓴맛을 봤던 벽라점 의 고성만과 태희점의 홍설, 그리고 최근에 그들 무리에 합류한 만화점 의 제춘명이었다.
제춘명이 운영하는 만화점은 운남 성을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복 경연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일 품점을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한데 예복 경연에서 일품점이 우승 을 차지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지 리적으로 먼 운남성에서도 일품점의 옷을 찾는 이들이 하나둘씩 늘기 시 작한 것이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적이라 생각했던 경쟁 업체들을 먼저 찾아 갔다.
일품점을 공동의 적으로 인식한 그 들은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저걸 그냥 두고 볼 겁니까?”
제춘명이 술을 입안에 털어 넣으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는 두 사람의 태도가 영 맘에 들지 않았다.
난공불락의 성처럼 여겨졌던 일품 점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힘을 모아서 더 찔러도 모자랄 판에 한가 롭게 구경이나 하고 있다니.
바로 그때 제춘명의 마음을 눈치챘 는지 홍설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붉 게 달아오른 입술을 들썩였다.
“호호, 우리 명이 오라버니 단단히 뿔났네. 걱정 마, 그렇지 않아도 내 가 아까 애들 시켜서 손을 써뒀 “어.”
“손을 써 두다니?”
“미리 알면 재미없지. 일단 조용히 지켜봐. 아마 일품점 때문에 쌓였던 체증이 쑥 내려갈걸.”
그녀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죠?”
정신없이 좌판에 옷을 깔고 있던장씨에게 일단의 무리가 다가왔다. 화려한 복색의 궁장을 갖춰 입은 중년의 여인들이었다.
유난히 화장이 짙은 것이 화류계 쪽에서 종사하는 이들로 짐작됐다.
“손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장씨는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응 대했지만 돌아오는 건 잔뜩 날이 선 비수였다.
“저 옷들 어떻게 된 거죠? 내가 석 달 전에 구매할 때만 해도 은전 을 오백 개나 줬는데 지금은 그 절 반에도 못 미치는 이백 개에 판다는 게 말이 돼요?”
“그것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어쭙잖은 변명은 집어치워요. 당 장 환불해 주지 않으면 이곳에서 우리들 입김이 얼마나 센지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예요.”
여인은 대놓고 환불을 요구했다. 분명 먼저 옷을 사 간 손님의 입 장에선 억울할 수 있는 일이다. 일 년도 아니고 불과 석 달 만에 가격 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으니 사기를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할 것 이다.
하지만 가격을 결정하는 건 전적으 로 파는 쪽의 권리다. 석 달 사이에 가격이 떨어졌다고 해서 환불을 요 구한다? 이건 진상 고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당당하게 환불을 거 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데 있었다.
진상짓을 벌이고 있는 화월련은 무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청향 루의 고참 기녀였다.
나이를 먹어 일선에서 뛸 수 없는 고참 기녀들은 뒷방에 앉아 후배 기 녀들을 관리 감독한다. 당연히 기루 내에서 그녀들의 입김은 상당했다.
‘어떻게 하지?’
장씨는 선뜻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환불을 거부하자니 그녀들의 입이 두렵고 그렇다고 해 주자니 대규모 환불 사태가 우려됐다.
“당신,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화월련이 허리에 손을 갖다 대며 언성을 높였다. 그 소리에 주변을 오가던 손님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쏠렸다.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서…….”
장씨는 화월련에게 양해를 구한 뒤 급하게 본점 건물 안으로 뛰어올라 갔다.
그리고 설무백에게 밖의 상황을 그 대로 전했다.
“총점주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허어, 참으로 진퇴양난이로군. 누 군지 모르겠지만 우리를 아주 말려 죽이려고 작정한 모양일세.”
설무백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며칠 동안 그의 얼굴은 반쪽 이 되었다. 날로 악화되는 여론에 매일같이 잠을 설친 것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설무백은 어렵게 입을 뗐다.
“원하는 대로 환불해 주게.”
“그리하면 너 나 할 것 없이 가게 로 찾아와 환불을 요구할 것입니 다.”
“지금은 나빠진 여론을 바로잡는 게 우선일세. 자금은 내 어떻게든 융통해 볼 터이니 빨리 내려가 보 게.”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 처리하겠습니다.”
장씨는 다시 일 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환불해 주기 위해 간이 금고 에서 돈을 꺼내 왔다.
한데 건물 밖에선 뜻하지 않은 상 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이, 늙은 계집! 나잇살 처먹고 이게 무슨 추태야? 옷에 문제가 있 는 것도 아니고 가격 좀 떨어졌다고 환불해 달라는 게 말이 돼?”
“네, 네놈이 뭔데 나한테 지랄이야?”
화월련이 한껏 성을 냈다.
그녀의 괄괄한 성격은 무한 시내에 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대단했 다. 하지만 설우진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 갔다.
“나? 이 집 아들. 신수공자라고 무한에 소문이 자자했었잖아.”
주변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일품점 이 지금의 위치에 오르는 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이가 설우진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가 만든 옷을 얻고 자 하는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명성을 얻더니 거만 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역시 돈 때 문에 사람을 죽인 작자의 핏줄답 다.”
화월련이 사람들에게 이성철의 죽 음을 상기시켰다. 여론을 자신 쪽으 로 끌고 오기 위한 그녀의 술수였 다.
예상대로 설우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 모습을 보며 화월련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 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설우진이 앞 으로 쇄도하며 그녀의 목덜미를 틀 어쥐었다.
“커, 커헉, 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냐?”
화월련이 붉어진 얼굴로 힘겹게 말 을 뱉었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 아니야. 네년이 직접 그걸 본 것 도 아니잖아.”
“저, 정황이 딱 들어맞지 않느냐.”
“뭐가 맞는다는 거지? 지금 상황을 봐. 그 작자가 죽음으로써 일품점은 배상금의 수배에 달하는 손해가 발 생했어. 그자가 죽으면 우리가 가장 먼저 의심받을 걸 뻔히 아는데 내 아버지가 그런 무리수를 두셨을까?”
설우진은 그녀뿐 아니라 이곳에 모 인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 로 이번 사건의 맹점을 날카롭게 짚 었다.
여기저기서 동요하는 목소리가 들 려왔다.
“그래, 그 마음씨 좋은 양반이 돈 때문에 사람을 죽였을 리 없지.”
“아무렴, 일전에 돈이 없어 딸내미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있을 때도 설 점주님이 선뜻 돈을 내주셨어.”
설무백이 평소에 쌓아 뒀던 인망이 조금씩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 이게 아닌데………….’
화월련은 반전된 상황에 당혹스러 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던 중 머릿속으로 설우진의 전 음이 전해졌다.
-보아하니 작정하고 깽판을 치러 온 것 같은데, 누구야, 널 움직인 연놈이?
“……”
-순순히 부는 게 좋아. 난 아버지 처럼 착하질 못해서 수틀리면 상대 가 여자라도 가만 안 놔두거든. 그 곱상한 얼굴, 죽을 때까지 가져가고 싶으면 내 말 들어.
설우진이 배후에 대해 물었다.
화월련은 한참을 고민하는 듯하더니 어렵게 하나의 이름을 입에 담았 다.
그 소리가 워낙 작아서 주변인들은 듣지 못했지만 마주보고 서 있던 설 우진은 입 모양을 보고 정확히 알아 들었다.
원하는 답을 얻어낸 설우진은 그녀 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화월련은 바닥에 주저앉아 힘겹게 숨을 몰아쉬더니 이내 함께 왔던 기 녀들을 데리고 도망치듯 군중 사이 로 빠져나갔다.
“아버지, 위기는 기회라고 했어요. 옷이 팔리지 않는다고 해서 옷값을 후려쳐서 파는 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과 같아요.”
“방법이 없지 않느냐.”
“그건 걱정 마세요, 이곳으로 오는 내내 생각해 둔 게 있으니.”
설우진은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 모습에 설무백은 걱정이 되면서 도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기도 했다. 일품점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설 우진이 나서서 처리해 준 선례가 있어서였다.
“정말 할 수 있겠느냐?”
“네.”
“그럼 믿고 맡기마. 오늘부로 네가 일품점의 주인이다.”
설무백은 일품점 운영에 관한 전반적인 권한을 설우진에게 부여했다.
권한을 부여받은 설우진은 곧바로 떨이 판매부터 중단시켰다. 그리고 재고로 쌓여 있는 물건들을 본점에 모으도록 지시했다.
“이것들을 대체 어찌할 셈이냐?”
“무한 현청으로 가져갈 생각입니 다.”
“그곳엔 왜?”
“최근에 일을 보러 청도에 갔다가 하남과 산서 일대에 전염병이 돌아 피해가 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버지도 잘 아시겠지만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잘 먹고 잘 입어 야 합니다.”
돌려서 얘기했지만 설무백은 단번 에 설우진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호오, 그래. 제값도 못 받고 팔 바엔 차라리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 들을 돕는 게 낫겠지. 잘 생각했다.”
“아깝지 않으세요?”
“돈이란 건 가치 있는 곳에 쓰일 때 그 빛을 발하는 법이다. 그간 분 에 넘치는 부를 쌓은 것 같아 마음 이 편치 않았었는데 우리 아들 덕분 에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을 것 같구나.”
‘역시, 아버지다운 말씀이시네요. 뭐, 저하곤 추구하는 바가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존경합니다.”
그날 오후, 설우진은 수십 대의 수 레를 이끌고 무한 현청으로 향했다. 미리 기별을 넣어뒀기 때문인지 입구에 관병들과 현령대인 차철기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현령 대인을 뵙습니다.”
설우진이 먼저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오호, 자네가 한때 무한 일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신수공자인가?”
“부끄럽지만 한때 그런 이름으로 불린 적이 있었습니다.”
“하하하하! 이거 내가 운이 좋구 먼, 눈앞에서 신수공자를 다 보고. 안으로 들어가세.”
차철기가 설우진을 데리고 현청 안 으로 들어갔다.
그는 적당히 청렴하고 적당히 부패한 관리였다.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 치지 않기에 전체적인 평판은 나쁘 지 않았다.
“조촐하지만 내 성의일세. 한잔 받 게.”
집무실 한편에 마련된 술상에 앉자 차철기가 잔에 술을 채워 건넸다. 설우진은 이를 마다하지 않고 깔끔 하게 비웠다.
“근자에 꽤 마음고생이 심했겠더 군.”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아버지를 두고 온갖 낭설이 떠도는 데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습니다.”
“그 마음 십분 이해하네. 그래서 하는 얘기네만 우리 무한 현청에서 공식적으로 일품점에 힘을 실어 줄 까 하네.”
“힘이라 하시면……?”
“일품점에 혐의가 없음을 내 이름을 걸고 알리는 게지.”
“그리만 해 주신다면 대인을 평생 의 은인으로 여기겠습니다.”
“하하하, 뭘 그렇게까지. 그보다 자 네 요즘도 옷을 만드나?”
“틈틈이 연습은 하고 있습니다.”
“그럼, 내 작은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겠는가?”
차철기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무래도 이 얘기를 꺼내기 위해 장황하게 밑밥을 깐 듯했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자네, 혹시 고의도 만들 줄 아는가?”
‘첩년에게 푹 빠져 산다고 하더니 그 계집에게 줄 요량인가 보군.’
설우진은 차철기를 만나러 오기 전 에 나살문을 통해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가 원하는 것을 내줌으 로써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 함이었다.
“고의라면 연습 삼아 몇 번 만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사내가 아니라 여인의 고의인 …….”
“기본적인 형태는 비슷하기 때문에 문제없습니다. 어떤 문양을 넣어 드리면 될까요?”
“화려하게 날갯짓하는 붉은 나비가 좋겠네.”
“그럼 완성되는 대로 사람을 통해 전해 드리지요.”
“고맙네. 앞으로도 좋은 인연을 이 어 갈 수 있으면 좋겠군.”
둘의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됐다.
설우진이 취한 기부 전략은 무한 현령 차철기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빠르게 일품점에 대한 인식을 바꿔 놓기 시작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소문난 일품점이다. 한데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고 전염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마을에 옷을 기부한다는 것은 소문 과 정반대의 행보였다.
당연히 사람들 사이에서 큰 반향이 일었다.
“역시, 헛소문이었어.”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대체 누 가 그따위 헛소문을 퍼뜨린 거야? 솔직히 그 살인 사건에 일품점이 관 련됐다는 실제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