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7권 – 2화 : 일품 고난 (2)
일품 고난 (2)
“정녕 피를 볼 작정이야?”
황달호가 설무백의 멱살을 틀어쥐 며 소리쳤다. 하지만 굳게 다문 설 무백의 입술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그래, 어디 대갈통이 깨지고도 그 리 뻣뻣하게 버틸 수 있는지 두고 보겠어.”
분기탱천한 황달호가 설무백의 머 리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내력 이 담겨 있지는 않았지만 몽둥이 끝 자락에 실린 바람 소리는 여간 매서운 게 아니었다.
“점주님!”
위기의 순간, 뒤쪽에 서 있던 고간 이 앞으로 뛰쳐나와 온몸으로 설무 백을 감쌌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고간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흑도패 생활로 다져진 몸이었지만 황달호가 휘두르는 몽둥이는 그 끝 이 너무 묵직했다.
“고 총관, 어서 비켜서게!”
“안 됩니다. 공자님께 목숨을 바쳐 점주님을 모시겠다고 맹세했습니 다.”
“그러다 정말 죽을 수도 있네!”
“조, 조금만 버티면 됩니다. 곧 호걸륜 호위장이 부하들을 이끌고 이 곳으로 달려올 것입니다.”
고간은 자신을 밀어내려는 설무백 을 더 꽉 껴안았다.
일이 꼬이려고 했는지 호위를 맡고 있던 호걸륜은 부재중이었다. 하오 문에 이번 사건에 대한 조사를 의뢰 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 다.
그가 가게를 나선 건 이각 여전, 고간의 말대로 조금만 더 버티면 됐 다.
한데 그 잠깐의 시간을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눈이 뒤집힌 황달호가 작정하고 몽둥이를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퍽퍽퍽.
고간의 등판은 쏟아지는 몽둥이세 례에 살점이 짓이겨지고 붉은 피로 얼룩졌다.
설무백이 그만하라며 악을 내질렀 지만 황달호의 몽둥이질은 멈출 줄 몰랐다.
“왜 이리 가게가 소란스러운 거지?”
일품점을 눈앞에 두고 설우진이 멈 칫했다.
가게 앞에 구경꾼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 있었다. 손님이라고 보기엔 그 숫자가 너무 과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게 안쪽에서 간헐적으로 비명이 새어 나왔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불길한 생각이 든 설우진은 한달음 에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가 내뿜는 사나운 기세에 앞을 가로막고 있던 인의 장막이 절로 열 렸다. 그리고 그 뒤로 당무성과 살 라만더가 급하게 따라붙었다.
“이게 무슨 개 같은…….”
항상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야 할 가게는 난장판으로 변해 있었다. 옷 가지는 바닥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고 점원들은 불한당 같은 놈들에 게 희롱을 당하고 있었다.
스멀스멀 분노가 차올랐다.
이를 방증하듯 움켜쥔 주먹에 힘줄 이 사납게 돋아났다.
그런데 바로 그때, 고간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사색이 된 얼굴 로 아버지가 고간의 얼굴을 감싸 쥐 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분노는 걷잡 을 수 없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놨다.
‘죽인다.’
스릉.
그가 천뢰도를 뽑아 들었다. 하지 만 그때까지도 황달호를 비롯한 흑도패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가게 안이 피바다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런데 설우진이 막 앞으로 뛰쳐나 가려는 찰나, 한발 늦게 가게 안으 로 들어선 당무성이 그의 상태를 확 인하고는 다급히 일성대갈을 내질렀 다.
그 소리가 간발의 차이로 설우진의 발목을 붙잡았고 설우진은 이성을 되찾았다.
‘이런, 하마터면 아버지가 보는 앞 에서 지옥도를 연출할 뻔했군. 저 새끼들이 하고 있는 짓거리를 보고 있노라면 사지를 찢어 발겨도 시원찮지만 그리하면 아버지가 놀라실 테니 천뢰도 대신 다른 걸 써야겠 어.’
들끓는 살기를 애써 가라앉힌 설우 진이 천뢰도를 다시 도갑에 집어넣 고 주변을 살폈다.
때마침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옷걸 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길이 세척 반, 무게 두 근에 한 손으로 휘두르기 적당한 크기였다.
“네놈은 뭐야?”
설우진의 정체를 알 리 없는 흑도 패 하나가 겁 없이 그의 앞을 가로 막고 섰다.
설우진은 그 낯짝을 빤히 쳐다보며 옷걸이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나? 이 집 아들내미다, 이 개새끼 “들아.”
퍽.
옷걸이가 날카로운 소성을 내며 흑 도패의 면전에 그대로 꽂혔다.
단 일격에 그의 코뼈는 박살이 났다.
날벼락 같은 공격에 흑도패는 비명 을 지를 새도 없이 그대로 쓰러졌 다.
그는 쓰러진 채 코피를 하염없이 흘리고 있었다.
설우진의 범상치 않은 실력에 흑도 패들은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 다.
“이놈들아, 돈을 받았으면 그 값을 해야지!한 놈이라도 도망가면 내가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대갈통을 조 져 버릴 테니 딴생각 말고 공격해!”
황달호는 계약을 들먹이며 싸움을 강요했고 다들 그의 잔인한 성품을 아는지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둘 씩 설우진의 근처로 모여들었다. 수적인 우세를 앞세우겠다는 심산 이었다. 하지만 토끼가 수천 마리 있은들 호랑이의 상대가 될 수는 없 는 법이었다.
설우진은 피로 물든 옷걸이를 들고 그들의 한복판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거침없이 옷걸이를 휘둘렀 다.
옷걸이가 날카로운 소성을 낼 때마다 찢어지는 비명이 그 뒤를 이었 다.
‘설마, 설가장의 아들놈이 풍야패 를 잡아먹었다는 게 그냥 뜬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단 말인가.’
폭풍과도 같은 설우진의 움직임에 황달호는 잊고 있던 옛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풍야패에 패해 비참하게 쫒겨났던 진호패 식구들은 재기의 때를 기다 리며 무한 외곽에서 근근이 살아가 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믿기 힘든 소문 하나가 그쪽 바닥에 돌기 시작했다. 약관도 안 된 설가장의 장남이 풍야패의 새로운 주인이 됐다는 내용이 었다.
처음엔 헛소문이라 생각했는데 일 품점을 찾아가 보니 실제로 풍야패 의 핵심 간부 셋이 나란히 일을 하 고 있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 그 뒤로 몇 번을 찾아갔지만 눈에 보이는 광경 은 한결같았다.
하지만 그때도 소문의 진위만은 의 심이 됐다.
풍패를 무너뜨렸다고 하기에는 설우진의 얼굴이 너무 앳되었기 때 문이다.
한데 지금 눈앞에서 미쳐 날뛰는 설우진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그 소문이 사실인 듯했다.
황달호는 부쩍 긴장한 얼굴로 진호 패의 식구들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 로 하여금 설우진을 집중적으로 노 리게 했다.
스무 명 남짓한 인원이 동시다발적 으로 품 안에서 소도를 꺼냈다. 다들 독이라도 발랐는지 칼끝은 시 퍼런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래, 네놈의 싸움 실력 인정한다. 하지만 사혈독이 묻은 검에 조금이 라도 스치면 넌 끝이야. 살짝만 독 이 퍼져도 몸이 굳어 버리거든.’
황달호는 뜻하지 않은 변수의 출현 에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비장의 수로 준비한 사혈독을 믿은 것이다.
한데 그가 간과한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그건 설우진도 혼자가 아니 라는 것이었다.
설우진에게 접근하는 진호패 뒤로 당무성이 귀신처럼 모습을 드러냈 다.
쉬쉬쉭.
가는 소성과 함께 수십 개의 암기 들이 허공을 갈랐다. 모두 당가에서 제작된 질 높은 암기들이었다.
게다가 그 끝에는 사혈독과는 비교 도 안 되는 사나운 독이 발려 있었 다.
“커억.”
암기를 얻어맞은 자들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내력을 지녔다면 독이 퍼지는 걸 조금이라도 지연시킬 수 있었겠지만 일개 흑도패에 내력을 바라는 건 무 리였다.
그리고 위협적인 건 그뿐만이 아니 었다. 주인의 분노를 느끼는 것인지 살라만더도 평소답지 않게 흥분해 날뛰었다.
녀석은 짧은 다리를 이용해 흑도패 들 사이를 이리저리 누비며 꼬리로 그들의 발목을 후려쳤다.
바위도 깨부수는 살라만더의 꼬리 인지라 공격에 당한 흑도패들은 발 목을 부여잡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 했다.
‘도망가야 돼.’
공손득은 마음이 급해졌다.
날고뛴다는 흑도패들이 눈앞에서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가고 있었 다.
그도 싸움엔 어느 정도 자신이 있 지만 이건 자신의 실력이 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공손득은 조심스럽게 문으로 향했 다. 싸움에 끼기 싫어 뒤쪽으로 많 이 빠져 있었던 터라 몇 걸음만 내 디디면 됐다.
‘그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빠져나가는 거야.’
문이 가까워 오자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이제 조금만 손을 뻗으 면 문고리였다.
한데 순간 그의 왼쪽 다리가 갑자기 안쪽으로 확 끌려 들어갔다.
뒤늦게 손을 뻗어 봤지만 검지 끝 에 아슬아슬하게 문고리가 스쳐 지 나갔다.
원망스러운 마음에 돌아보니 아까 부터 미쳐 날뛰던 석척 한 마리가 자신의 왼쪽 바짓단을 물고 있었다. 그 사이 싸움은 끝이 났다.
황달호는 부하들이 모두 제압당하 자 주먹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설우 진의 발아래 무릎을 꿇어 버린 것이 다.
가늘고 길게 연명하는 그만의 생존 법이었다.
“형님,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저희도 좋아서 이런 일을 벌인 게 아닙니다.”
황달호는 그야말로 손이 발이 되도 록 빌었다. 그리고 은연중에 책임을 다른 쪽으로 떠넘겼다.
“그러니까 네 말은 어떤 놈의 의뢰 를 받아서 여기로 쳐들어왔다?”
“네, 거금을 주면서 영업장을 최대 한 난장판으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놈의 얼굴은?”
설우진이 황달호의 멱살을 틀어쥐 고 위로 들어올렸다.
“그, 그게……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 었습니다.”
“그럼 내가 네놈을 살려 둘 이유가 없잖아.”
설우진이 손끝에 힘을 줬다. 황달 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 얼굴은 못 봤지만 허리에 특 이하게 생긴 검을 차고 있었습니 다.”
“어떻게 생겼는데?”
“길이는 삼척 정도에 검신이 만도 처럼 휘어 있었습니다.”
‘검신이 휘었다면………… 혹시, 이 자 식 동영에서 건너온 태도를 검으로 착각한 거 아니야?’
설우진은 동영의 태도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태도는 동영의 무사들이 사용하는 칼의 한 종류로 대체적으로 도신이 날렵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태도를 처음 보는 이들은 도가 아닌 검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꽤나 빈번했다.
“혹시 그 검, 이렇게 생겼냐?”
설우진이 사실 확인을 위해 천뢰도 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태도의 형 상을 바닥에 그렸다.
그림이 거의 완성될 무렵 황달호가 반색하며 소리쳤다.
“맞습니다! 딱 이렇게 생겼습니 다!”
그의 격한 반응에 설우진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어떤 놈들이지, 중원에선 거의 태도를 쓰지 않는데?’
태도는 도신이 대체적으로 가늘고 가벼워 중도를 애용하는 중원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굳이 태도를 애용하는 집단을 찾자면 살수단 정 도였다.
게다가 태도는 구하기가 어려웠다. 중원 내에선 태도를 생산하는 곳이 없어 동영에서 직접 가져와야 했기 때문이다.
“돈은 어떻게 받았지?”
“모두 현금으로 받았습니다.”
‘하기야,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있 는 놈이 아니면 추적당할 게 뻔한 전표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테지.’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쓸 만한 정보가 많지 않았다.
이 정도의 단편적인 정보로 배후를 밝혀내는 건 추종술에 능한 그라고 해도 불가능했다.
이쯤 되니 슬슬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설우진은 조용히 옷걸이를 다시 집 어 들었고 눈앞에서 전해져 오는 강 한 살기에 황달호는 황급히 수중의 돈을 꺼내 놓으며 외쳤다.
“대, 대협,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놈들에게 받은 돈, 아니 제가 이제 까지 모은 돈까지 모두 내어 드리겠 습니다.”
그를 시작으로 곳곳에서 돈이 쏟아 져 나왔다. 액수는 제각각이었지만 다들 최소한의 성의는 보였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공손득만은 난 감한 표정으로 설우진의 눈치를 살 폈다. 며칠 전에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고향에 보낸 터라 주머니가 텅 비어 있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레 설우진의 시선이 공손득 의 얼굴로 향했다.
“넌 뭐냐?”
“……죄송합니다. 전 드릴 돈이 없습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지?”
설우진이 가볍게 옷걸이로 손바닥 을 툭툭 쳤다.
장난처럼 보이는 행동이지만 두 눈의 살기는 그냥 넘길 수 없었다.
하지만 없는 돈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기에 공손득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사정을 설명했 다.
“그러니까 네 말을 종합해 보면 친 구 놈이 널 팔아먹었다는 거네?”
“네, 이런 일을 하는 건 줄 알았으 면 절대 따라나서지 않았을 겁니 다.”
“흐음, 네 면상을 봐서는 그 말들이영 신뢰가 안 가는데.”
“그, 그럼 이걸 봐 주십시오.”
설우진이 자신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자 공손득은 최후의 수단으로 품 안에서 목패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