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7권 – 23화 : 암계 난무 (2)
암계 난무 (2)
남궁벽이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 내용이 거짓이 아닌 사실이라면 남궁룡은 제 스스로 기밀을 누설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는지 남궁룡이 얼굴을 붉히며 다급히 대 화를 이어 갔다.
“……방금 들은 얘기는 머릿속에서 깔끔히 지워라. 만에 하나라도 그 얘기가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그때 는 본가의 부가주가 아니라 집법전의 부전주로서 네놈을 징치할 것이 다.”
“철사자회만 건드리지 마십시오. 그 약속만 지켜 주신다면 이 입을 꾹 다물고 있겠습니다.”
“좋다, 네놈이 원하는 대로 제갈가 의 권역에 철사자회를 세우는 일은 더 이상 개입 않겠다. 대신 그 활 동이 우리 가문의 명예에 누가 된다 면 그때는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 다.”
남궁룡이 한발 물러섰다.
“부가주께서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 리고 더 할 얘기 없으시면 전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남궁벽은 형식적인 인사를 건넨 뒤 그대로 남궁룡의 옆을 지나갔다.
그리고 몸이 교차하는 바로 그 순 간, 남궁룡의 두 주먹이 파르르 떨 렸다.
‘이놈,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지 마 라. 무릇 세력이라는 것은 만드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든 법이 다. 내 네놈과 그 빌어먹을 설가 놈 에게 강호의 어른으로서 그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해 주마.’
남궁벽이 돌아왔다.
정자에서 한가로이 낮잠을 청하고 있던 설우진이 그의 기척을 느끼고는 한달음에 달려왔다.
두 사람은 오랜만의 만남이 어색한듯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다 이내 가 볍게 손을 맞잡았다.
“자스민은 잘 만나고 온 거냐?”
남궁벽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응, 생각보다 상황이 안 좋아서 해결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설우진은 누란국에서 있었던 일들 을 간략하게 전했다.
“최근 집안에 우환이 있었다고 들 었는데 그건?”
“바쁘게 뛰어다닌 덕분에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뭐, 뒷맛이 좀 구리기는 하지만.”
“왜?”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인위적인 사고였거든.”
“그럼 누군가 의도적으로 일품점을 노리고 일을 벌였다는 거야?”
“응, 그것도 너랑 가까운 인간이.”
“설마, 남궁세가가 개입된 거냐?”
남궁벽의 눈빛이 거칠게 요동쳤다.
“너무 그렇게 정색할 것 없어, 남 궁세가 전체가 아니라 나랑 안면이 있는 작자가 혼자서 벌인 일이니 까.”
“너와 안면이 있는 남궁세가 사람 이라면………… 설마 부가주?”
“그래, 내가 일전에 쌍룡맹 총단에 서 망신을 준 것에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야. 한데 나한테 직접 위해를 가할 순 없으니 만만한 일품점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은 걸 테지.”
설우진은 담담하게 남궁룡이 예도 상단을 이용해 일품점을 위기에 빠 뜨린 정황을 얘기했다.
얘기가 끝나자 남궁벽의 얼굴은 사 납게 구겨졌다. 인간이 안 된 줄은 뻔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밑바닥일 줄이야……………
“미안하다.”
“됐어, 인마, 그보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집에 다녀온 거야? 학기가 끝난 뒤에도 집에 안 갔었잖아.”
“실은 철사자회 때문에 다녀왔다.”
“왜?”
“가문의 어른들이 철사자회가 제갈 세가의 권역에 들어 있다는 걸 문제 삼았다. 철사자회의 주인을 네가 아 닌 나로 오인해서 벌어진 일이지.”
“아, 그래서 그 진드기 같은 놈이 이곳을 찾아왔었던 거구나.”
“진드기?”
“응, 나흘 전부터 이곳으로 출근하 는 놈 있어. 너랑 묘하게 얼굴이 닮 았던데. 아, 마침 슬슬 올 때가 됐 다.”
설우진이 정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 자 아니나 다를까 문제의 진드기가 장원 안으로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두 개의 시선이 교차했다.
‘드디어 왔구나.’
‘저 녀석이 왜 여기에…………?”
남궁벽과 남궁훈은 오랜만의 재회 에 서로를 무척이나 낯설어 했다. 하기야,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던 사이이니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기도 어색할 것이다.
이에 설우진이 눈치 빠르게 다리 역할을 했다.
“너희들, 형제 맞지? 피를 나눈 사 이가 아니면 이렇게 닮기 힘들거든.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설우진이 두 사람을 이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인부를 써서 묵은 때를 벗겨 내고 가구까지 새로 들여놓은 터라 내부 는 무척이나 깔끔했다.
“난 술상을 좀 봐올 테니까 그동안 둘이 회포나 풀고 있어.”
설우진이 부엌으로 향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남궁벽이 먼저 입을 뗐다.
“네가 이곳엔 무슨 일이지?”
“아버지께서 철사자회를 해체하라는 명을 운검대에 내리셨다.”
“이곳에 와서 된통 당했겠군?”
남궁벽이 남궁훈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치욕스러운 패배의 순간이 떠올랐 는지 남궁훈의 얼굴색이 붉게 변했 다.
“녀석에게 졌다고 해서 속상해할 것 없다.”
“……?”
“나도 아직까지 녀석과의 비무에서 단 한 번도 이겨 보질 못했다. 매번 전심전력을 다했는데도 녀석의 발끝 조차 쫓아갈 수가 없었지.”
“그, 그게 말이…….”
“말이 된다, 녀석은 일반적인 잣대 로 잴 수 없는 괴물이니까.”
남궁벽이 설우진에 대한 소회를 털 어놨다.
그도 처음엔 거듭된 패배에 스스로 를 질책하고 시기의 눈으로 설우진 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한데 시간이 흐르면서 설우진을 인 정하게 됐다, 저놈은 나와 다른 세 계에 살고 있는 괴물이라고.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도통 진전이 없던 검술이 눈에 띄게 날카 로워지기 시작했다.
검을 짓누르고 있던 심마가 사라진 효과였다.
“하니 술이나 한잔 마시고 가문으 로 돌아가라.”
남궁벽이 담담한 어조로 축객령을 내렸다. 하지만 남궁훈은 순순히 물 러서지 않았다.
“난 이곳에 운검대주의 자격으로 왔다. 부여받은 임무를 완수하기 전 까지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럼 힘으로라도 철사자회가 문을 여는 걸 막겠다는 것이냐?”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그리해야 지.”
두 사람 사이에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서 로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한데 바로 그때, 설우진이 문을 거 칠게 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의 손에는 큼지막한 쟁반이 들려 있 었다.
“어이, 주인도 없는 방에서 왜들 눈에 힘을 주고 그래. 평소에 둘 사 이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오늘만은 술친구로 사이좋게 지내 봐.”
설우진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쟁 반을 탁자에 놨다. 그리고 가져온 술병을 두 사람에게 나눠 줬다.
병째 마시는 게 익숙한 남궁벽은 술병을 그대로 받아 입으로 가져갔지만 남궁훈은 머뭇거렸다.
명가의 자제로 엄격한 교육을 받아 온 그에게 술을 병째 마시는 건 있 을 수 없는 일이었다.
“뭘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어? 화 끈하게 입안으로 부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설우진이 기 습적으로 남궁훈의 손목을 잡아채 반강제로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게 했다.
남궁훈은 거칠게 저항했지만 설우 진의 아귀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입안으 로 술이 밀려 들어왔다.
입안 가득 진한 술맛이 감돌았고 이어지는 뜨거운 목 넘김은 잔으로 마실 때와는 또 다른 쾌감을 느끼기 에 충분했다.
한번 맛을 들이자 남궁훈은 언제 어색해했냐는 듯이 술병으로 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비워져 가는 술병은 어느 새 탁자에 수북하게 쌓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 다.
“커억, 남궁벽, 아버지가 허락했다 고 마음 놓지 마, 그들은 아버지도 안중에 없이 행동하니까.”
보기와 다르게 남궁훈은 술이 약했 다.
달랑 두 병 마시고 취해 버린 그 는 속에 감춰 두고 있던 말들을 자연스럽게 털어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남궁세가의 숨겨 진 민낯이 드러났다.
남궁세가는 내부의 두 개에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 세력들은 각기 가주인 남궁대현 과 부가주인 남궁룡을 지지하고 있 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남궁룡 쪽의 세가 커지고 있었다.
왜 그런 흐름이 생긴 것일까?
그 근본적인 원인은 두 사람의 성 향 차이에 있었다.
남궁대현은 욕심이 없는 담백한 성 격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외부로 힘 을 뻗기 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데 치중했다.
그에 반해 남궁룡은 야심이 컸다.
그는 안에서 힘을 쌓기보다 밖으로 표출해 내기를 원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자연스레 남궁 대현보다는 남궁룡의 곁에 사람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남궁훈의 술주정 이후 남궁벽의 얼 굴이 심각해졌다. 그들이 어떤 식으 로 나올지, 아니 남궁룡이 어떤 식 으로 움직일 지 머릿속에 훤히 그려 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대비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왜? 네가 집에 가서 잘 해결했다 며.”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다. 단순하게 본가의 움직임만 억제하면 된다고 판단했는데 외부 세력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걸 간과했다.”
남궁세가처럼 덩치가 큰 세력과 달 리 규모가 작은 세력들은 영역을 두 고 자주 다툼을 벌인다.
가질 수 있는 땅이 상대적으로 적 기에 일어나는 부작용이다.
철사자회가 자리 잡은 무한 외곽에 도 정파 계열의 두 문파가 치열하게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그들 문파는 각기 칠검문과 오성문 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는데 제 갈세가와는 직접적으로 연관된 바가 없었다.
“그러니까, 네 말을 종합해 보면 남궁룡 그자가 어떤 식으로든 칠검문과 오성문을 움직일 거다?”
“그래.”
“뭐, 그럼 간단하네. 놈들이 움직일 수 없도록 우리 쪽에서 먼저 조치를 취하면 되잖아.”
“설마, 선공이라도 취하겠다는 거 냐?”
“인마, 무한은 부모님들이 사시는 곳이야. 내가 아무리 막가는 놈이라 도 부모님 눈치는 볼 줄 알아.”
“그럼?”
“간단해. 놈들이 지레 겁을 먹게 만드는 거지.”
설우진의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남은 술을 입으로 가져갔다.
과연 그가 생각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두 중년 사내가 동시에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름 자신들의 터전에서는 대우받 던 그들이지만 눈앞의 사내에겐 고 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마주한 이는 남궁룡이었 다.
그는 마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 하듯 손을 내저으며 상석에 자연스 럽게 엉덩이를 붙였다.
“늦어서 미안하게 됐소.”
“아닙니다. 공사가 다망하신 분인데 저희가 마땅히 시간을 맞춰야지 요.”
“맞습니다. 귀한 분을 만나 뵙는데 그깟 기다림이 대수겠습니까.”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소. 내 두 분을 이리 만나자고 한 것은 한 가 지 부탁을 하기 위함이오.”
남궁룡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 었다. 이에 그를 바라보는 두 사람 의 눈빛에 긴장감이 어렸다.
“이번에 무한 외곽 쪽에 새로이 철 사자회라는 세력이 자리 잡은 걸 아시오?”
“네, 근자에 워낙 소문이 자자했던지라.”
“그럼 그곳에 내 조카가 있다는 것도 알겠구려?”
남궁룡이 남궁벽의 존재를 언급하 자 순간 두 사람의 얼굴빛이 굳어졌 다.
자신들의 구역에 철사자회가 들어 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두 사람은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나름의 긴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 었기 때문이다.
한데 남궁벽이 그곳의 수장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골치가 아파졌다. 남궁벽은 남궁세가주의 차남이다. 서자의 신분이기는 해도 그들의 입 장에선 그 사실을 마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조카분을 염려하시는 거라면 걱정마십시오. 철사자회가 온전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눈매가 가늘어 여우같다는 핀잔을 많이 듣는 칠검문주 상관춘이 먼저 손을 비볐다.
그 모습에 오성문주 차관호는 눈을 흘기며 다급히 말을 이었다.
“지리적으로 칠검문보다는 저희 오 성문이 가깝습니다. 조카분께 도움 이 필요하면 꼭 저희 오성문을 방문 해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두 사람은 남궁룡이 내민 줄을 잡 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칠검문과 오성문은 중소 문파다. 아무리 크고 싶어도 천중오가와 같은 든든한 연줄 없이는 일정 규모 이상으로 세를 키우기 힘들었다.
“이거 두 사람이 내 뜻을 곡해한 모양이오. 내가 원하는 건 철사자회 를 돕는 것이 아니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벽이 그 아이의 행태가 요즘 도를 넘어서고 있소. 본가에서는 이번에 무한에 분파를 내는 것을 허락지 않 았소. 한데 그 아이가 멋대로 철사 자회라는 이름으로 분파를 낸 것이 오.”
“하면……?”
“그 아이에게 세상의 쓴 맛을 보게 해 주시오. 두 문파에서 어떤 식으 로 나오든 본가에서는 개입치 않을 것이오.”
“그럼 무력을 써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상관춘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남 궁룡의 얼굴을 응시했다. 상대적 약 자인 그들의 입장에선 그 부분이 가 장 맘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본디 가르침에는 매가 필요한 법 이오.”
우회적인 표현의 허락이었다.
“알겠습니다. 남궁가에서 그런 가 르침을 원한다면 성심성의껏 행하겠습니다.”
“그럼 두 사람만 믿겠소.”
남궁룡이 입가에 진한 미소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