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7권 – 27화 : 악연 재회 (2)
악연 재회 (2)
차설웅은 다급히 뒷걸음질을 치며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두 눈으로 설우진의 신형을 좇았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 다.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그때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웅아, 머리 위를 조심해라!”
다급한 차관호의 목소리와 함께 그 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 다.
차설웅은 반사적으로 양팔을 교차해 머리를 보호했다.
펑.
양팔 위로 설우진의 오른발이 한 줄기 벼락처럼 떨어졌다. 기민한 대 응에 머리를 얻어맞는 참사는 피할 수 있었지만 두 발이 움푹 패여 들 어간 것으로 보아 그 충격은 상당해 보였다.
하지만 대주답게 차설웅은 요란한 기합을 내지르며 설우진의 발을 위 로 밀쳤다.
“호오, 반응이 제법 빠른데. 그럼 어디 이것도 한번 막아 보시지.”
공중제비를 돌아 바닥에 내려선 설 우진이 쉴 틈 없이 다음 공격을 전개했다.
차설웅은 핏발 선 두 눈으로 설우 진의 발끝을 예의 주시했다. 조금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전해졌다. 한데 그 의지가 무색하게 설우진은 또 한 번 감쪽같이 사라졌다.
‘침착하자, 차설웅. 이건 눈속임에 불과하다.’
차설웅은 동요하는 마음을 애써 진 정시키며 두 귀를 활짝 열었다.
쉬쉬쉭.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왔다.
희미하게 입가에 번지는 미소.
‘이번 공격을 막고 바로 맞받아친다.’
차설웅은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자세를 잡고 남은 내력을 오른손 에 집중했다.
주먹 끝자락에서 내력이 소용돌이 쳤다.
‘온다.’
긴장감이 최고조로 끓어오르는 순 간, 왼쪽에서 사나운 기운이 들이쳤 다. 차설웅은 육참골단의 각오로 그 방향에 왼팔을 내밀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왼팔에 충 격이 가해지지 않았고 순간 그의 머 릿속엔 한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허초.
아니나 다를까 반대편에서 강한 충 격이 전해졌다.
왼쪽에 잔뜩 신경을 쓰고 있던 터라 그쪽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펑.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떠올랐 다. 그리고 한참을 날아 비상장 담 벼락에 처박혔다.
일순간 주변이 고요해졌다. 너무나 도 일방적인 싸움 결과에 낭인들도, 오성문의 제자들도 기가 질려 버린 것이다.
‘남궁룡, 그자가 부탁을 해 올 때 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철사자회 는 철모르고 날뛰는 강아지가 아니 라 이빨을 감춘 호랑이였어.’
차관호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칠검문과 함께 이곳을 찾을 때만 해도 용권대가 이리 무참히 당할 것이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남궁벽의 무명이 대단하다곤 하나 그의 나이가 아직 어려 실전 경험이 자신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여 긴 것이다.
한데 남궁벽은 아직 만나 보지도 못했는데 눈앞에 벽이 등장했다. 그 스스로도 넘기 버겁다 판단되는 크 고 높다란 벽이.
“어이, 선봉과 중견이 무너졌는데 이젠 대장이 나서야지. 언제까지 그 렇게 뒷짐만 지고 지켜볼 거야?”
설우진은 대놓고 차관호를 도발했 지만 차관호는 순간의 감정에 휩쓸 리지 않았다.
그가 일개 제자의 신분이었다면 그대로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나 그는 한 문파를 이끌고 있는 수장이다.
잠시 후, 차관호의 무릎이 흙바닥 에 떨어졌다.
털썩.
설우진의 두 눈이 가로섰다. 순수 한 놀람의 표시였다.
“이게 지금 뭐하자는 거지?”
“오성문이 차지하고 있는 이권의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하니 오늘의 무례는 이쯤에서 용서해 주십시오.”
“문주님!”
차관호의 굴욕적인 항복 선언에 남 아 있던 용권대원들이 다급한 목소 리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멋대로 싸움을 걸어 놓고 이제 불리하다 싶으니까 얌전히 발을 빼겠다고?”
“염치없지만…… 그렇습니다.”
차관호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고 그 점이 설우진의 마음을 움직였다.
“솔직한 모습은 맘에 드네. 근데 나도 회주라는 위치가 있어서 그냥 보내 줄 수는 없거든.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쪽에서 저치들을 맡아 줬으면 해.”
설우진의 손가락이 용권대의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칠검문주인 상관춘과 그 문도들이 진을 치고 서 있었다.
차관호는 무거운 표정으로 그의 요구에 답했다.
“저들은 본문과 비슷한 세를 지니 고 있습니다. 용권대만으로 그들을 상대하기는………… 솔직히 힘듭니다.”
“후훗, 그럼 이곳의 낭인들을 붙여 주지. 다들 며칠 간 일이 없어서 따 분해하고 있었거든.”
설우진이 낭인들을 가리켰다.
낭인들은 그의 말에 처음엔 당혹스 러워하다 이내 들뜬 미소를 머금었 다.
전장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는 자 들, 그게 바로 낭인이었다.
“저들이 손을 보태 준다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럼 믿고 지켜보지.”
설우진은 팔짱을 끼고 한쪽으로 물 러섰다.
예기치 못한 상황 전개에 가장 당 황한 건 칠검문주 상관춘이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뒤에서 다 듣지 않았소.”
“설마 남궁 부가주를 배신하겠다는 것인가?”
“당장에 내 제자들이 죽게 생겼는 데 그자가 무슨 대수란 말이오.”
차관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기 세를 끌어올렸다.
그의 유성연환권은 구 성의 경지였 기에 작정하고 휘두르면 천년거석도 부숴 버릴 수 있었다.
‘빌어먹을, 어찌 일이 이리도 꼬인단 말인가. 여우는 내가 아니라 차 관호 저놈이었어.’
궁지에 몰린 상관춘은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이제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됐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 이기게 만 들어야 했다.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놈들을 불 러야겠군, 이런 때를 위해서 연을 맺어 왔던 놈들이니.’
상관춘이 은밀히 뒤쪽에 수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 신호를 확인한 제자가 조용히 대열에서 빠져나갔다.
그 제자는 가장 후미에 쳐져 있었 기에 그 미묘한 변화를 발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언젠가는 네놈과 승부를 낼 것이 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오늘 결판을 “내자.”
상관춘이 살기를 끌어올리며 검을 뽑았다.
칠검문의 검은 눈을 현혹시켰다. 일종의 환검인 셈인데 환검에 익숙 하지 않은 자들은 그 진체를 찾지 못해 곤혹을 치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윽고 두 무리가 서로를 향해 달 려들었다.
가장 먼저 충돌한 건 두 무리의 수장인 상관춘과 차관호였다.
상관춘은 현란한 환검으로 차관호의 눈을 어지럽혔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일곱 개의 검신이 차관호의 요혈을 노리고 들어갔다.
진체를 확인하지 못한 상관춘는 쉴 새 없이 주먹을 내뻗어 일곱 개의 검을 모두 분쇄시켰다.
둘이 격렬하게 맞붙는 사이 칠검문 의 문도들과 낭인들도 서로를 향해 도검을 휘둘렀다. 머릿수는 비슷했 지만 전체적인 실력은 칠검문이 앞 서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낭인들 쪽에는 용권대가 있 었다.
설우진에게 둘이 당해 남은 인원은 일곱뿐이었지만 그들은 낭인들이 불 리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귀신같이 달려가 상황을 유리하게 반전시켰 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뒤늦게 소란을 접한 조인창과 남궁 벽이 설우진의 양옆에 나란히 섰다. 조인창은 얼굴에 걱정이 그득했고 남궁벽도 그 배후가 누구인지 짐작 되는지 잔뜩 굳어 있었다.
“신경 쓸 것 없어, 으레 일어나는 영역 다툼이니까.”
“그래도 우리 때문에 벌어진 싸움 인데 그냥 이렇게 지켜만 보고 있어 도 되는 거야?”
“우리 인창이, 요즘 몸이 근질근질 한가 보네?”
설우진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조인창을 쳐다봤다.
“오, 오해하지 마. 난 그냥 걱정이돼서…”
“걱정할 것 없어. 어차피 이 싸움 은 우리 쪽이 이겨.”
“그렇게 확신하는 근거가 있는 거야?”
“응, 벽이라면 이미 눈치챘을걸.”
설우진이 남궁벽을 대화에 끌어들 였다. 남궁벽은 맘에 안 든다는 듯 눈썹을 씰룩이면서도 충실하게 답했 다.
“다수 간의 전투는 초반의 기세가 승패를 좌우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 에서 이미 저쪽은 반쯤 승기를 내준 상태로 싸움을 치르고 있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럼 이대로 승부가 날 거란 거야?”
“다른 변수가 없다면 아마도.”
‘이놈들이 왜 아직까지 소식이 없 는 거야?”
상관춘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떠 올랐고 집중력이 틀어진 탓인지 검 끝이 살짝 흔들렸다.
차관호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 다.
예리함이 떨어진 상관춘의 검을 왼 손에 차고 있던 강철 투수로 빗겨 쳐낸 뒤 우권을 사납게 내질렀다. 상관춘이 다급히 검을 회수해 막아보려 했지만 차관호의 움직임이 한 발 더 빨랐다.
퍼퍼퍽.
차관의 우권이 상관춘의 가슴에 연 달아 꽂혔다.
구성에 달한 유성연환권답게 다섯 번의 내지름이 마치 하나의 동작처 럼 이어졌다.
쿨럭.
뒤로 삼장이나 밀려난 상관춘이 왼쪽 가슴을 부여잡고 울혈을 토해 냈다.
검붉게 죽은 핏속에는 잘게 부스러 진 내장 조각이 뒤섞여 있었다. 상관춘이 흔들리자 문도들의 손놀 림도 덩달아 어지러워졌다. 난전에 강한 낭인들은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 사납게 칼을 휘둘렀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상관춘은 검을 지지대 삼아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성세가 이어질 줄 알았던 칠검문 이 이렇게 무너지는군.”
차관호가 담담한 시선으로 말을 읊조렸다.
“이놈,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 다! 미친개가 이곳에 당도하는 순간 판은 뒤집힐 것이다!”
‘설마, 이자가 우리 뒤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인가?’
상관춘의 악에 바친 울부짖음에 차관호의 얼굴빛이 굳어졌다.
그리고 상관춘이 예고한 대로 미친개가 무리를 이끌고 뒤늦게 전장에 합류했다.
“얘들아, 사냥이다. 마음껏 물어뜯 어라.”
이 바닥에서 미친개로 통하는 막광 이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등 뒤에서 괴이한 외모를 한 자들이 앞 으로 달려 나갔다.
그들의 눈은 광기로 물들어 있었 다. 마치 마약이라도 복용한 사람처 럼 눈을 희번득거리며 전장의 한복 판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의외로 싸움 실력은 형편없 었다.
그들은 처음의 기세가 무색할 정도로 낭인들이 휘두르는 칼날에 여지 없이 몸을 내줬다.
때문에 곳곳에서 피가 비산했다.
“이것들 별거 아니네.”
낭인들의 얼굴에 방심이 어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들의 등판 으로 검이 삐죽 튀어나왔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일까. 그 답은 막광이 쥐고 있었다.
“흐흐, 역시 광혈단이로군. 독마의에게 한 상자 더 주문해야겠어.”
막광이 비릿한 미소로 전장을 휘젓는 사내들을 바라봤다.
그가 사내들에게 먹인 건 광혈단이라는 마약이었다.
이 약을 복용하게 되면 두려움의 감정은 사라지고 올곧이 살심만 남 게 된다.
한마디로 살인귀로 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막힌 건 살인귀로 변한 이들이 온갖 빚에 팔려 온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막광이 데려온 살인귀들로 전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상대가 눈에 뵈는 것 없이 달려드 는 통에 낭인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 도 못하고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후훗, 이걸로 상황은 반전됐다. 오 성문과 철사자회를 한꺼번에 무너뜨려 주마.”
상관춘은 한껏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의 전음을 듣고 뒤로 물러나 있던 칠검문의 문도들이 다시 전장에 합류했다.
한데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선택이 불러온 끔찍한 파국을.
“우, 우진아!”
조인창이 살갗을 따갑게 찌르는 강 한 살기에 다급히 설우진을 불렀다. 하지만 설우진은 답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올곧이 살인귀들을 조 종하고 있는 막광의 얼굴에 꽂혀 있 었다.
“막광, 네놈을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전생의 많지 않은 악연 중 막광은 단연 일순위에 올려놔도 좋을 정도로 그에게 끔찍한 기억을 안겨 줬 다.
한때는 등을 맡겨도 좋을 동료라고 생각했다. 한데 놈은 그의 믿음을 철저히 짓밟고 등에 칼을 꽂았다. 얼마나 그 배신감이 컸는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지금도 막광이라는 존 재가 치가 떨리도록 증오스러웠다.
“인창아, 안에 있는 애들 모두 불 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