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7권 – 3화 : 일품 고난 (3)
일품 고난 (3)
목패는 손바닥만 했는데 전면부에 청운이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 자식이 왜 이걸 가지고 있는 거지?”
목패를 보고 설우진은 적잖이 놀랐다.
그것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가 분신처럼 가지고 다니던 물건 이기 때문이다.
“이 목패, 정말 네 거야?”
“네, 학비를 모으느라 입학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그럼 유학생?”
“네, 무한에서 오십여 리 정도 떨
어진 마곡촌이 제 고향입니다.”
‘참, 인연이라는 게 묘하네.’
설우진은 뜻하지 않은 후배와의 만남에 실소가 절로 터져 나왔다.
사실 황룡학관에 들어간 이후로 그는 청운 학관엔 단 한 번도 찾아 가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희한하게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일이 터졌다. 때문에 청운 학관에 들러야겠다는 여유는 꿈도 꿔 보지 못했다.
“난 후배라고 봐줄 정도로 정이 흘러넘치는 인간이 아니야. 하지만 없는 돈을 억지로 만들어 내라고 할 수도 없으니 어쩐다.”
공손득의 처분을 놓고 설우진은 고 민에 빠졌다. 그리고 한참 뒤 입을 뗐다.
“너, 공부는 좀 하냐?”
“제 입으로 말씀드리긴 부끄럽지만 한 번도 일 등을 놓친 적이 없습니 다.”
“호오, 보기보단 머리가 좋은가 보 네. 그럼, 돈 대신 머리로 빚을 갚 아라.”
“……?”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넌 그냥 이번 일의 배후만 밝혀내면 돼.”
“일개 학생에 불과한 제가 어떻게……?”
“그러니까 머리를 잘 굴려야지. 따라와.”
설우진이 공손득을 데리고 위층으로 향했다.
“후우, 살았다.”
황달호를 비롯한 흑도패들은 안도 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자신 들 곁에 설우진보다 더한 인간이 도 사리고 있다는 걸.
“방금 한숨 쉰 놈들 튀어나와.”
날선 목소리와 함께 당무성이 설우진의 자리를 대신했다.
그의 손에는 방금 전까지 설우진이 쥐고 있던 옷걸이가 들려 있었다.
“긴장 풀어, 아까는 보는 눈이 많 아서 일부러 겁을 준 거니까.”
이 층에 마련된 응접실, 설우진이 공손득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건 넸다. 하지만 굳은 공손득의 어깨는 좀체 풀릴 줄 몰랐다.
“술은 마실 줄 알지?”
“네, 고향에서 곡주는 즐겨 마셨습 니다.”
“그럼 우리 가볍게 술이나 한잔하 면서 얘길 나누자.”
설우진이 약간의 다과와 술을 내왔다.
응접실은 손님들을 접대하는 용도로 만들어진 곳이라 항시 안줏거리와 술이 배치돼 있었다.
술잔이 오가면서 경직된 분위기는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선배님, 평소 일품점에 악감정을 지닌 세력은 없었습니까?”
공손득이 원론적인 질문을 던졌다. 설우진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전에는 많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 이미 일품점을 중심으로 시 장의 판도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거든.”
처음 시장에 진출할 당시와 비교해 서 지금의 일품점은 그 규모가 수십 배 이상 성장해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에는 어김 없이 일품점의 지점이 진출해 있었 고 그 지점들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수익은 경쟁 업체들에 비할 바가 아 니었다.
덕분에 지금은 경쟁 업체들이 일품 점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자신들의 구역에는 진출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럼 설가상단 쪽은 어떻습니까?”
“설가상단?”
설우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공 손득을 쳐다봤다.
사실 그는 설가상단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설가상단이 영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데다가 그간 굵직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미처 집 안일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 이다.
“설가상단이 지금 주력하고 있는 사업이 뭐지?”
감이 왔다.
설우진은 공손득에게 설가상단의 최근 행보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설가상단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 가 그 내용을 알 리 없었다.
공손득이 대답을 머뭇거리자 설우 진은 급한 성정을 드러내며 목소리 를 높였다.
“그냥 뭐 들은 거라도 없어?”
이에 놀란 공손득은 최근에 파다하게 퍼졌던 소문을 그에게 그대로 전했다.
“저도 전해들은 내용인데 최근에 설가상단이 조선 상단과 물물교역을 시도하다 큰 손해를 봤다고 합니다. 산적들의 피습에 거래하기로 했던 물건들을 모두 잃고 막대한 배상금 까지 물어 주게 된 것이죠.”
‘고간 이 자식, 욕심을 부릴 거면 제대로 부릴 것이지. 대체 일 처리 를 어떻게 한 거야?’
설우진은 비난의 화살을 고간에게 돌렸다.
단순히 그가 만만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아는 아버지는 일을 크게 벌 일 인물이 아니었다. 한데 설가상단 이 만들어졌다는 건 다른 사람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봐야 했다.
설우진이 고간에게 이를 갈고 있을 때에도 공손득의 말은 계속 이어졌 다.
“근데 진짜 문제는 그 됩니다. 배 상금을 받고 돌아갔던 조선 상단의 행수가 다음 날 차가운 시체로 발견 됐습니다. 당연히 배상금은 감쪽같 이 사라진 뒤였습니다.”
“……그거 너무 억지스러운 전개 아니야? 대놓고 우릴 의심하게 만들 어놨잖아.”
설우진은 어이가 없었다. 상대의 수가 너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사람들한테 통한다는 것에 있었다.
“솔직히 그 소문을 들었을 때 저도 설가상단을 욕했었습니다. 설가상단 과 직접적인 접점이 없으니 들은 대 로만 판단한 것이죠.”
“그럼 다들 우리가 범인이라고 생 각하고 있다는 거야?”
“네.”
‘젠장, 나도 편히 쉴 팔자는 못 되 나 보네.’
설우진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오랜만에 편히 쉴 생각으로 고향에 돌아왔는데 집에 도착하기 무섭게 대형 사고가 터진 것이다.
“이거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 하냐?”
“그걸 왜 저한테…………?”
공손득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반 문했다.
“아까 내가 했던 말 벌써 잊은 거 야? 머리로 빚 갚으라고 했잖아!”
“저도 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은데 저는 그럴 만한 역량이…………….”
“역량이 안 되면 죽어라 노력해야 지. 그리고 성과가 좋으면 널 우리 일품점에 넣어 줄 수도 있어.”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공손득은 순간 자신의 두 귀를 의 심했다.
일품점은 무한 내에서도 꿈의 직장 이라 불리고 있었다. 다른 곳에 비 해 보수가 배 이상으로 많은 데다 학비까지 지원됐기 때문이다.
‘이건 놓칠 수 없는, 아니 놓쳐서 는 안 되는 기회야. 일품점의 직원 만 되면 현이도, 산이도 돈 걱정 없 이 학관에 다닐 수 있어.’
“하겠습니다, 죽을힘을 다해서.”
공손득은 혹시라도 설우진이 마음 을 바꿀까 싶어 다급히 소리쳤다. 이에 설우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보이며 품에서 전표 한 장을 꺼내 내밀었 다.
은자 오백 냥짜리 전표였다.
“배후를 밝히려면 정보가 필요할 거야.”
“저, 정말 절 주시는 겁니까? 제가 가지고 도망쳐 버릴 수도 있는…….”
“후훗, 선배가 돼서 후배를 못 믿 으면 되겠어?”
‘그리고 뭣보다 그 전표에는 추종 향이 발려 있어서 네놈이 어디로 도 망가든 반나절 안에 찾을 수 있거 든.’
설우진은 속내를 감춘 채 멋진 선 배의 모습을 흉내 냈다. 그의 감쪽 같은 연기에 공손득의 두 눈은 감동 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