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7권 – 30화 : 그곳으로
그곳으로
철사자회의 시끄러운 신고식은 사 람들의 입을 통해 무한 전역으로 퍼 져 나갔다.
그리고 설우진이라는 이름 석 자가 확실히 각인되는 계기가 됐다.
“자네들 들었는가? 아 글쎄, 일품 점의 장남이 마약에 취한 사람들을 구해줬다는구먼.”
“그게 참말인가? 역시 호부 밑에 견자 없다는 조상님들의 말씀이 딱 들어맞는군.”
부풀려진 소문 속에서 설우진은 전에 없던 협객이 되어 있었다.
그런 오해를 산 데에는 광혈단에 취했던 사람들의 영향이 컸다.
설우진의 지시로 전장에 나선 철사 자회 식구들은 마천과의 사투로 길 러진 실력을 한껏 뽐냈다.
살기에 취한 사람들의 공격이 꽤나 매서웠지만 그들이 상대했던 청랑대 나 적랑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들은 집중적으로 수혈을 노렸다. 마약에 취해 있는 그들을 안전하게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격렬했던 싸움이 끝나고 사람들은 가까운 의원으로 옮겨졌다.
죽다 살아난 그들은 입을 모아 철사자회의 협의지심을 칭송했다.
“젠장, 이런 걸 원했던 게 아닌데.”
설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 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집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소문을 듣고 걱정이 된 부모님이 그를 부른 것인데 일품점에 도착하 고 보니 현령부터 무한에서 방귀깨 나 뀐다는 자들이 모두 그곳에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행동을 칭 찬했고 부모님들은 자랑스러운 눈빛 으로 그를 바라봤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 에서 설우진은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진아, 집엔 잘 다녀왔어?”
“그래, 누구 덕분에 아주 잘 다녀 왔다.”
“너무 그렇게 정색하지 마. 어찌 됐든 철사자회의 이름이 무한 사람 들에게 긍정적으로 각인됐잖아. 그 리고 뭣보다 부모님들께서 기뻐하셨다며.”
조인창이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건넸다.
설우진은 잔뜩 인상을 구기면서도 거기에 강하게 반박을 하지는 못했 다.
“인마, 그렇게 좋아할 일이 아니야. 무한 전역에 소문이 쫙 퍼지면서 마천의 눈이 이곳을 향하게 생겼다 고.”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 니야? 쌍룡맹과의 전면전을 앞두고 있는 마천이 일개 황룡 학관의 관도 에게 신경을 쓰겠어?”
‘니미럴, 내가 일개 관도가 아니라 는 게 문제지. 혈옥불을 빼돌려 섬 서 공략의 시기를 늦춘 건 둘째 치 고, 최근에는 누란에서 흘러나올 군 자금까지 막아 버렸다고.’
도둑이 제 발 절인다고, 설우진은 마천의 움직임이 내내 신경 쓰였다. 해서 나살문을 통해 정기적으로 마 천의 움직임을 보고받고 있었는데 섬서 쪽은 눈이 가려진 상태라 정보의 양이나 질이 형편없었다.
‘지금 철사자회 전력으로는 일전에 사천에서 마주쳤던 그 괴물 놈 하나 도 감당하기 힘들어. 꾸준히 성장하 고는 있지만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 족해.’
처음 그가 세운 계획은 은밀히 철 사자회를 키우면서 그들로 하여금 가족들을 지키게 하는 것이었다. 한데 의도치 않게 남궁세가가 개입 하면서 일이 틀어져 버렸다. 예상보 다 빨리 그의 존재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때문에 시간이 촉박해졌다.
‘철사자회를 키울 여유가 없는 상 황에서 내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밖에서 힘을 끌어오는 거 야.’
설우진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다음날, 설우진은 간단한 봇짐을 챙겨 방을 나섰다.
이른 새벽부터 앞마당에서 수련 중 이던 남궁벽은 그 모습을 보곤 퉁명 스러운 어투로 말을 걸어왔다.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자리를 비우는 거냐?”
“급한 일은 처리했잖아.”
“그 뒷수습은 어쩌고.”
“후훗, 네 녀석이랑 인창이가 버티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그게 바로 직무유기라는 거다. 이번엔 언제쯤 돌아올 작정이냐?”
남궁벽은 툴툴대면서도 적극적으로 발을 붙잡지는 않았다. 어차피 가지 말란다고 안 갈 인간이 아니라는 것 을 알기 때문이다.
“계획은 한 달로 잡고 있는데 얘기 가 잘되면 그보다 빨리 돌아올 수도 있어.”
“그럼 혹시 시일이 늦어질 것 같으 면 서신이라도 보내라. 괜히 애들 걱정하게 하지 말고.”
“알았다. 그럼 나 없는 동안 이곳 을 잘 부탁하마.”
남궁벽에게 일을 떠맡긴 채 설우진 은 홀연히 장원을 나섰다. 그리고 중간에 마방에 들러 튼튼한 말을 빌린 뒤 중경으로 향했다.
중경은 사통팔달의 요지였다.
동으로는 호북, 북으로는 섬서, 남 으로는 귀주, 서로는 사천과 인접해 있어 동서 무역로를 오가는 상인들 은 상행에 나설 때마다 꼭 한 번씩 중경에 들렀다.
상인들이 많이 몰리면서 중경에는 자연스럽게 이색적인 시장이 하나 형성됐다.
그것은 상행에 꼭 필요한 인력을 충당할 수 있는 인력시장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것이 낭인전이다.
낭인전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낭인들이 자신의 몸을 팔았다. 그 값은 대부분 흥정을 통해 결정 됐는데 특급 낭인들의 경우에는 부 르는 게 값을 정도로 그 몸값이 비 쌌다.
하지만 상인들은 그들을 고용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 돈을 아 끼려다 산적이나 마적들과 조우할 경우 재물과 목숨을 한꺼번에 잃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설우진이 낭인전에 얼굴을 비친 건 정오 무렵이었다.
“이곳은 여전하네. 진한 땀내와 옅 은 피비린내가 역하게 코를 찔러.”
설우진이 길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 는 낭인들을 보며 거침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대다수의 낭인들은 노상에서 손님 을 기다렸다.
안쪽에 그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기는 했지만 실력이 떨 어지는 자들은 그 근처에도 다가갈 수 없었다.
철저하게 힘의 논리가 통하는 곳이 었다.
노상에 앉아 있던 낭인들은 설우진 이 눈앞을 지나갈 때마다 두 눈에 잔뜩 힘을 줬다.
자신을 불러 달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하지만 설우진은 냉정하게 그들을 지나쳐 낭인전의 중심부로 향했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 낭인전과 어울리지 않는 호화스러운 건물이 올라 가 있었다.
‘내 발로 이곳을 다시 찾게 될 줄이야……..’
설우진은 감회에 젖은 눈빛으로 누 각의 입구에 걸려 있는 현판을 바라 봤다.
-낭왕루.
그랬다. 이곳은 낭인들의 정점에 서 있는 낭왕이 머무는 곳이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곳에는 아무 나 드나들 수 없었다.
낭인들은 상급 이상, 손님인 상인들도 간부 이상만 출입이 허락됐다. 설우진이 입구로 다가서자 문을 지 키고 있던 덩치들이 그 앞을 가로막 았다.
매번 겪는 일이었기에 설우진은 미 소 띤 얼굴로 집에서 가져온 명패를 내밀었다. 그 명패에는 설가상단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덩치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바쁘게 얘기를 주고받더니 이내 명패를 돌 려주며 길을 열었다.
끼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정갈하 게 정돈된 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탁자에는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낭인들과 노회한 인상의 상인들이 서로 마주앉아 몸값 흥정을 벌이고 있었다.
“설가상단에서 오셨다고요? 근자에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상행 중에 큰 피해를 입으셨다고 하던데 사업 에는 지장이 없으셨나 봅니다.”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풍채 좋은 중년 사내가 설우진에게 말을 걸어 왔다.
사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설우진의 입가엔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사내 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 뒤에도 훈훈 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전생의 인연 중 한 명이었다.
‘손 총관님, 오랜만에 뵙네요, 철모 르고 날뛰던 시절에 꽤나 신세를 많이 졌었는데.’
설우진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얼굴, 눈앞의 사내 손동유는 그가 낭인으로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줬던 선배 다.
처음 만났을 땐 낭인답지 않은 순 한 인상 때문에 그를 만만히 대했었 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낭왕루에서 소란을 피우는 상급 낭인을 제압하 는 모습을 목도했다.
그 뚱뚱한 몸이 어찌나 비조처럼 날렵하게 움직이던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 이후로 설우진은 손동유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고 그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 역용술과 추종술 등의 잡기 부터 낭인으로서 갖춰야 할 자세와 생존법까지.
“손님.”
아무리 기다려도 설우진이 대꾸하 지 않자 손동유가 목청을 높여 그를 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설우진이 입을 뗐다.
“아, 실례했습니다. 아는 분을 닮은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 라봤습니다.”
“하하, 친한 분이셨나 봅니다.”
“네, 둘도 없이 친했지요. 제가 참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이렇게 다시 얼굴을 뵈니 정말 기쁩니다. 그때는 마지막 가시는 길도 배웅하지 못했었는데……….’
설우진은 손동유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그가 한참 특급 낭인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을 때 손동유는 늘그막에 병을 얻어 힘겨운 노년을 보내고 있 었다.
벌이가 없는 상태에서 치료비만 나 가니 그의 삶은 점점 궁핍해졌다. 결국 그는 아무도 찾지 않는 초막 에서 외로이 숨을 거뒀다.
설우진이 뒤늦게 그 소식을 접하고 달려갔지만 이미 그의 유해는 가루 가 되어 시강에 뿌려진 뒤였다.
둘은 한동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에서 정담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언 제까지 설우진 한 사람만 붙잡고 있 을 순 없었던 손동유는 중간에 대화 를 끊고 원하는 낭인이 누구인지 물 었다.
이에 설우진은 침착한 눈빛으로 답 했다.
“제가 원하는 사람은 낭왕 궁악비입니다.”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