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8권 – 16화 : 귀마혈투 (2)
귀마 혈투 (2)
철저히 점조직으로 운영되기에 그 실체를 아는 이는 통천문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문주님께서 이곳엔 어인 일이십니까?
-일전에 부상을 입은 채로 이곳에 온 사내가 있을 것이다.
-그분을 찾아오신 겁니까?
-그래. 지금 어디 있지?
-취몽루 별채에 묵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모실까요?
-내 뒤에 여러 꼬리가 붙어 있다. 괜한 의심을 살 수 있으니 적당한 아이로 붙여라.
“호호홋, 취향도 참 독특하셔라. 하 긴, 품에 안고 자기에는 살집이 없 는 아이보단 살집이 어느 정도 있는 아이가 좋죠. 매향아, 오늘 네가 맡 을 손님이다. 천외로 모셔 가도록 해라.”
여인이 뇌쇄적인 교소를 흘리며 손 님을 기다리고 있던 기녀 하나를 불 렀다.
매향이란 이름의 기녀는 살집이 두 툼했다. 넓은 품의 옷이 작게 느껴 질 정도였다.
“공자님, 평생에 잊지 못할 밤이 되게 해 드릴게요.”
매향이 적사호의 손을 끌고 복도 안쪽으로 향했다. 그가 안으로 사라 진 후 손님 서넛이 한꺼번에 취몽루 를 빠져나갔다.
“몸은 괜찮나?”
불쑥 찾아온 불청객에 놀라 반사적 으로 검을 뽑으려던 사내가 적사호 의 얼굴을 확인하곤 손을 내렸다.
“참 일찍도 찾아왔군.”
흑성 진추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보름 전 적사호의 부탁을 받 고 마천이 도사리고 있는 황룡 학관 에 잠입했다.
섬서에 들어와 있는 마천의 전력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처음엔 순조로웠다. 그가 익힌 흑풍마령이 자연스럽게 그의 채취와 종적을 가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감이 너무 지나쳤던 것 일까, 마천주가 도사리고 있는 관주 실로 접근하다 그의 그림자들에게 종적을 들키고 말았다.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한데 전력을 다했음에도 마천주의 그림자들을 완전히 떨쳐 낼 수는 없 었다.
궁여지책으로 그는 자신의 몸을 미 끼로 그들의 공격을 유도했다. 다행 히 그 시도는 성공적으로 끝이 났 다, 팔과 옆구리에 깊은 자상을 남 긴 채로.
그 후 진추성은 은밀히 적사호에게 연락을 넣었고 그때 적사호가 소개 해 준 곳이 바로 취몽루였다.
“바쁘신 몸이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걸 보면 내게 또 시킬 일이 생긴 모양이군?”
“부정하지 않겠다.”
“그래, 이번에 내가 할 일은 뭐 지?”
“설우진을 내게 데려왔으면 한다.”
“벽뢰진천의 전수자?”
진추성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몇 차례 만남을 가진 적이 있었기 에 그 이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 다.
“그 친구를 왜 찾는 거지?”
“이번에 쌍룡맹주와 손을 잡고 역천회의 수신무위를 치려고 한다. 그 일에 녀석이 꼭 필요하다.”
적사호는 복잡하게 말을 돌리지 않 고 직접적으로 설우진이 필요한 이 유를 밝혔다.
하지만 진성은 쉬이 납득하지 못 했다.
“그 어린 친구한테 그런 중임을 맡 겨도 되는 건가? 자칫 실수라도 하 는 날엔 그간에 세웠던 계획이 수포 로 돌아가 버릴 수도 있는데.”
“어차피 그 녀석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왜지?”
“나와 쌍룡맹주, 둘의 신뢰를 한꺼번에 받고 있기 때문이지.”
설우진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양쪽 진영에 중요한 인물이 되 어 있었다, 물론 그의 입장에선 전 혀 달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사람을 보는 눈이 까다롭기로 유 명한 적성이 인정한 인재라…………. 하 긴, 내 눈에도 예사로워 보이진 않 았지. 그런데 그 녀석이 순순히 따 라오려고 할까? 그때 대화를 나눠 보기론 강호의 대의 따위는 안중에 도 없어 뵈던데.”
진추성이 작은 우려를 표했다.
“제 발로 오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데려와라.”
“너무 쉽게 얘기하는 거 아니야? 어리긴 해도 상대는 벽뢰진천의 전수자라고.”
남의 일처럼 쉽게 얘기하는 적사호 를 보면서 진추성은 퉁명스럽게 반 문했다. 하지만 그런 불만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이길 자신이 없나?”
“하아, 도저히 말로는 못 당하겠군. 좋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앞으 로 데려오지.”
진추성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적사 호의 청을 수락했다.
한데 그것으론 만족하지 못했는지 적사호가 얼른 움직이라며 등을 떠 밀었다.
“이건 좀 너무하는 거 아니야? 밖 을 봐, 이미 날이 어두워졌다고.”
“녀석에게 위험한 꼬리가 붙었다. 서둘러 움직이지 않으면 녀석이 당 할지도 모른다.”
“설마, 귀마들이 ……………?”
진추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귀마는 봉인마공을 전수받은 그도 쉬이 볼 수 없는 상대였다. 적사호 의 말대로 귀마들이 설우진의 뒤를 쫓고 있는 거라면 한시도 지체할 틈 이 없었다.
“그 친구의 행적이 마지막으로 포 착된 곳이 어디지?”
“의창이다.”
“그럼 바로 그곳으로 가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진성이 검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섰다.
노도채의 배에서 하룻밤을 보낸 설 우진은 다음 날 용문걸이 내준 쾌속 선을 타고 약주로 향했다.
쾌속선은 강습용으로 개조된 배로 설우진이 타고 왔던 상선보다 수 배 이상 그 속도가 빨랐다.
덕분에 설우진은 예정했던 시일보 다 하루 먼저 약주에 도착할 수 있 었다.
그리고 염려했던 마천의 흔적은 보 이지 않았다. 그의 생각대로 약주까 지는 인원을 분산하지 못한 듯했다.
배에서 내린 설우진은 그길로 곧장 육로로 갈아탔다. 황강과 단풍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단풍은 무한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 로 빠르게 걸음을 한다면 하루 안에 닿을 수 있었다.
날이 어스름하게 저물 무렵 설우진 과 궁악비가 단풍에 닿았다.
해가 지는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는 비교적 한산했다. 설우진은 서둘러 가까운 객잔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 다.
“이대로 무한에 가는 건가?”
식사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궁악 비가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설우 진이 가타부타 얘기해 주지 않으니 그로선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당사자인 설우진도 아직 마음 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피해 다니는 게 옳은 생각 일까? 어차피 내 근거지가 무한이라 는 걸 알고 있는 이상 어떤 식으로 든 부딪치게 될 텐데. 그리고 어쩌 면 조바심이 난 놈들이 가족들을 볼 모로 잡을 수도 있어. 눈에 뵈는 게 없는 귀마들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설우진은 배를 타고 오는 내내 고 민했다. 처음엔 귀마들을 피한 게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한둘이라면 모를까 다섯은 분명 그로서도 벅찬 숫자였기에.
그런데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 의 판단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귀마들을 피하면 피할수록 가족들이 위험해진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고민 끝에 설우진은 모습을 드러내 기로 결정했다.
스스로 미끼가 되어 귀마들을 끌어 들이겠다는 심산이었다.
설우진이 바뀐 계획을 얘기하자 궁 악비는 펄쩍 뛰었다.
“그건 미친 짓이네. 자네가 또래에 걸맞지 않게 대단한 실력을 지녔다 는 건 인정하네만 상대해야 할 귀마 가 하나도 아니고 무려 다섯일세.”
“왜 다섯입니까? 한 놈은 낭왕께서 맡으셔야지요.”
“내, 내가?”
“설마 고용주가 위험에 빠졌는데 강 건너 불구경하겠다는 건 아니시겠죠?”
‘하아, 역시 이 의뢰는 받지 말았어야 했어.”
궁악비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귀마는 낭왕인 그로서도 상대하기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뛰어난 무력 은 둘째 치고 그들은 싸움에 능했 다. 타고난 것인지 훈련에 의한 것 인지 알 수 없지만 귀마 앞에선 낭 인의 강점인 풍부한 실전 경험이 빛 을 발했다.
“내가 한 놈을 맡는다고 쳐도 넷이 남네. 정말 혼자서 넷을 감당할 자 신이 있나?”
“굳이 정면 승부를 고집할 필요는 없지요.”
“하면, 복안이 있는 겐가?”
“놈들의 손발을 묶을 큰 그물을 준 비할 것입니다.”
“허어.”
잔뜩 기대했던 궁악비의 입에서 탄 식이 터져 나왔다.
천하의 마인들을 그물로 남겠다니 이 무슨 가당치도 않은 소린가. 한데, 대화를 이어 가는 설우진의 표정은 진지했다.
“보통의 그물이라면 놈들의 손짓 한 번에 갈가리 찢겨 나갈 겁니다.
하지만 이걸로 만든 그물이라면 어 떨까요?”
설우진이 손끝에서 뇌기를 응축시켜 두꺼운 실처럼 뽑아냈다.
“가, 강기?”
궁악비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물었다.
강기가 뭔지 몰라서 묻는 게 아니 다. 강기는 거칠고 사나운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기를 인위적으로 응 축시켜 유형화를 시키기 때문이다. 한데 그 거칠고 사나운 강기가 실 처럼 뽑아져 나왔다. 내기를 자유자 재로 다룰 수 있는 어떠한 경지에 이르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저 나이에 화경이라니. 세상의 기연이 저놈한테 다 모이기라도 한 건가?’
놀라움이 가시자 부러움이 밀려들었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습니다, 이 경지에 이르기까지 결코 쉬운 길만 있었던 건 아니니까.”
“크흠, 내가 뭐라고 했나! 그보다 강기로 그물을 만드는 게 실제로 가 능한 일인가? 난 당최 상상이 안 가는데.”
궁악비는 설우진의 경지를 눈으로 확인하고서도 쉬이 의구심을 떨쳐 내지 못했다.
그가 아는 강기는 내력 잡아먹는 귀신이다.
한데 그 강기로 그물을 만들어 귀마를 잡는 데 쓰겠다니 도무지 그의 상식으론 납득이 되질 않았다.
“그럼 복잡하게 말로 설명을 하기 보단 직접 눈앞에서 시연해 보이죠.”
설우진이 객잔을 나섰다.
궁악비는 엉겁결에 그 뒤를 따라나 섰고 주변 가게를 둘러보던 중에 설 우진이 한 가게에 들어가 그물 한 채를 가지고 나왔다.
그물은 청올치로 짜여 있었다. 청올치는 칡넝쿨 껍질을 삶아 실처 럼 뽑아낸 것으로 명주실로 만든 그물보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했 다.
설우진은 그물을 들고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후미진 골목 안이었다.
‘대체 저걸로 뭘 할 셈이지?’
궁악비는 뚫어져라 설우진의 손목 을 주시했다.
잠시 후 설우진이 품 안에서 금황 침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익숙한 솜씨로 그물에 대고 덧바느질을 하 기 시작했다.
덧바느질은 완성된 그물에 실을 대 그 강도를 끌어올리는 작업이다. 보 기엔 쉬워 보이지만 얇은 실위에 또 다른 실을 씌워야 하기에 고도의 집 중력을 필요로 했다.
물론 설우진에겐 해당되지 않는 얘기였다.
그는 덧바느질보다 더 섬세한 움직 임을 필요로 하는 자수를 어릴 때부 터 해 왔다. 그러니 이 정도는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설우진이 그물에서 손을 놨다.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었다. 굳이 찾자면 그물 전체에 은은한 빛 이 감도는 정도랄까.
“한번 시험해 보시죠.”
설우진이 궁악비에게 그물을 건넸다.
“어떻게 시험해 보라는 건가?”
궁악비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에 설우진은 그가 허리에 차고 있는 혈부를 가리켰다.
궁악비는 어이가 없었다.
혈부가 비록 검이라 칼에 비하기는 힘들지라도 기본적으로 상대를 베기 위해 만들어진 만큼 그 날은 제법 날카롭게 서 있었다. 한데 그 혈부 로 그물의 강도를 시험해 보라니.
“왜 자신 없으십니까?”
궁악비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설우진이 슬쩍 도발했다. 그 빤한 도발에 궁악비는 보기 좋게 넘어갔 다.
“날 이겼다고 이 혈부까지 무시하 는 모양인데, 이 녀석의 날은 만년 한철을 섞어 만든 덕에 강철로 된 문도 단번에 쪼개 버릴 수 있네. 하 물며 이깟 그물쯤이야.”
궁악비가 한 손에 그물을 쥐고 그위에 혈부를 가져갔다.
그리고 혈부를 가볍게 위로 올렸다
아래로 내리찍었다.
키키킥.
가는 마찰음이 일었다.
‘뭐, 뭐가 이렇게 질겨. 아무리 내 력을 싣지 않았다지만 그물 한 가닥 도 베지 못하다니……………’
궁악비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 다.
이에 그는 단전의 내력을 끌어올렸 다. 오기로라도 그물을 찢어 버릴 심산이었다.
재차 혈부가 허공을 갈랐다.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기운이 혈부의 날에 응어리져 있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강한 힘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슴이 진탕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