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8권 – 3화 : 낭왕궁악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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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8권 – 3화 : 낭왕궁악비 (3)


낭왕궁악비 (3)

중경의 밤하늘에 휘영청 달이 떴 다.

청연각에서 머물고 있던 설우진은 야음을 틈타 은밀히 창문을 통해 밖 으로 빠져나왔다. 방은 삼 층에 위 치해 있었지만 창밖으로 몸을 내던 지는 그의 발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타닥.

가볍게 땅에 내려선 설우진은 주변 의 기척을 주시하며 대로 위를 내달 렸다. 늦은 밤이라 대로변에는 길묘의 울음만이 간간이 울려 퍼질 뿐 사람의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 았다.

한참 동안을 내달린 설우진이 멈춘 곳은 마을 외곽에 자리한 거대한 창 고였다.

넓이는 족히 오십 장은 넘고 한눈 에도 튼튼해 뵈는 철문이 입구에 상 징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철문 좌 우에는 검을 찬 무사들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위를 주시하며 경비를 서고 있었다.

‘십대 상단 중 하나라고 하더니 물 류 창고도 어마어마하게 크군. 이곳 이 불타 버리면 놈들에게 타격이 크 겠지.’

설우진의 시선이 무사들의 옆 자 락, 그러니까 대문 왼편에 비스듬하 게 걸려 있는 깃발에 닿았다. 그 깃 발 한복판에는 보병들이 사용하는 군도가 수놓여 있었다. 중원에서 군 도를 상징하는 세력은 예도상단이 유일했다.

그는 이곳 중경에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찾아왔다.

하나는 낭왕 영입이었고, 다른 하 나는 예도상단에 대한 복수였다. 그는 상하평에서 예도상단의 물건 을 빼앗은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 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중경의 물 류 창고였다.

대다수의 대형 상단들은 교역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중경에 물류 창 고를 두고 있었다.

특히 동부에 자리하고 있는 예도상 단과 같은 상단들의 경우에는 서역 과의 교역로가 지나치게 길어 중경 에 창고를 두고 계약이 성사되면 그 곳에서 바로 물건들을 빼내 서역으 로 가져가곤 했다.

설우진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 그는 지겹도록 물류 창고 앞을 지켰다. 대형 상단들이 상행을 떠난 뒤에 무사들의 공백을 낭인들 로 채웠기 때문이다.

‘슬슬, 안으로 들어가 볼까.’

설우진은 무사들의 동태를 살피며 창고의 측면으로 돌아갔다. 그쪽은 상대적으로 경비가 허술한 편이었 다. 경비들이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 기는 하지만 그 횟수가 많지 않았 다.

경비들이 한차례 순찰을 돌고 난 뒤 설우진은 벽면에 바짝 몸을 붙이 고 머리 위로 금황침을 튕겼다.

금황침은 긴 꼬리를 드리우며 지붕 에 안착했다. 그 꼬리는 설우진이 가늘게 뽑아낸 벽뢰진천의 뇌기였 다.

‘이쯤이면 적당하겠지.’

설우진이 뇌기를 움직여 금황침 밖 으로 갈고리와 비슷한 형상의 강기 를 뽑아냈다. 그리고 강기가 온전한 형태를 갖추자 가볍게 아래로 잡아당겨 지붕에 박히게끔 했다.

“슬슬, 가 볼까.”

뇌기가 팽팽하게 당겨지자 설우진 은 경쾌한 발놀림으로 벽면에 몸을 띄웠다. 그리고 이내 평지를 내달리 듯 벽을 차고 올랐다.

순식간에 그의 신형이 지붕 위로 사라졌다.

작은 인기척조차 나지 않았기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 무사들은 설 우진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 다.


창고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천명의 사람이 다 들어가도 될 정도로 넓었고 곳곳에 곡물을 담은 포대가 탑처럼 쌓여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만 세도 족히 천 석은 넘어 보였다.

“곡물이 왜 이렇게 많은 거지? 곡 물이 서역과의 주요 교역 물품인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건 양이 과한데.”

설우진은 사방에 놓인 곡물 포대를 보고 예리하게 눈빛을 발했다.

가만가만, 혹시 이 곡물들 군량미 로 팔아먹으려고 미리 확보해 둔 게 아닐까? 전에도 마천 쟁투 당시에 십대 상단 중 몇 곳이 군량미로 떼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돌았었는 …….

설우진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무수한 희생을 낳았던 마천 쟁투, 한데 그 와중에도 쏠쏠하게 이득을 챙겨 간 곳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마천과 쌍 룡맹 양쪽에 군량미를 댔던 상단이 다.

그들은 양쪽 진영을 오가며 흥정했 고 보다 높은 값을 부르는 곳에 군 량미를 팔아넘겼다.

그들의 행태에 많은 이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누구도 들은 척 을 하지는 않았다.

결국 마천 쟁투가 끝난 뒤 상계의 판도는 그들을 중심으로 재편됐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양심을 지켰던 상단들은 십대 상단의 지위를 잃고 추락한 데 반해, 군량미로 돈을 번 이들은 중원의 상권을 손에 쥐었다. ‘이번에는 네놈들의 뜻대로 안 될 거다.”

설우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리 며 양발에 뇌기를 집중시켰다.

잠시 후 응축된 뇌기가 뜨거운 열 기를 발산했다. 그 열기는 이내 근 처의 포대로 옮겨져 활화산 같은 불 길을 만들어 냈다.

그가 내딛는 걸음마다 불길이 이어 졌고 때문에 포대에는 고루고루 불 이 붙었다.

“부, 불이다, 불!”

창밖으로 흘러나오는 연기에 경비무사들이 혼비백산했다. 일부는 사람들을 부르기 위해 뛰어나가고 일 부는 안의 상황을 확인코자 자물쇠 를 풀고 다급히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무리 양쪽에서 힘을 줘도 문이 열리질 않아 결국 허무하게 시 간만 소요됐다.

그사이 사람을 데리러 갔던 무사들 이 한 남자와 함께 돌아왔다. 그는 자다 나왔는지 고급스러운 화복 위 로 산발이 된 머리칼을 거칠게 휘날 렸다.

“이 새끼들아, 문 안 열고 지금 뭐하는 거야?”

예성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예도상단주의 셋째 아들로 중경의 사업 일체를 전담하고 있었다. 

“고, 공자님, 문이 열리질 않습니 다!”

문을 당기고 있던 무사들이 곤혹스 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사정을 설명 했다. 이에 예성기는 인상을 쓰며 무사들을 옆으로 밀쳐 내고 양손으 로 문고리를 잡아챘다.

손등 위로 사납게 힘줄이 일었다. 한데 숨소리만 격해질 뿐 문은 미동 도 하지 않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문에 아교라도 바른 것처럼 꿈적도 하질 않잖아. 누군가 안쪽에서 일부러 걸 쇠를 채운 게 아니라면 있을 수 없 는 일인데, 설마 누군가 일부러…?’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도끼를 가져와라!”

예성기가 다급히 도끼를 찾았다. 잠시 후 무사 하나가 잔뜩 날이 선 도끼를 가져왔다.

예성기는 도끼를 양손에 쥐고 단전 의 내력을 쥐어짜 냈다.

쿵쿵쿵.

도끼가 연달아 문을 두들겼고 두툼 한 날이 문고리가 달려 있는 부분을 깨부쉈다. 그러길 한참이 지나자 뭔 가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안 쪽으로 살짝 밀려 들어갔다.

서서히 드러나는 창고 안쪽의 정 경, 그곳은 거센 화마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어찌나 센지 살짝 열린 문틈으로도 불길이 새어 나올 정도였다.

“젠장…….”

예성기의 손에서 도끼가 힘없이 떨 어졌다. 그가 천지조화를 부릴 수 있는 신선이 아니고서야 어찌 저 불 길을 사로잡을 수 있겠는가.

그저 바라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자네, 얘기 들었는가?”

“무슨 얘기?”

“아 글쎄, 예도상단의 창고가 밤새 불이 나서 홀라당 타 버렸다네.” 

“아니, 멀쩡하던 창고에서 왜 불이 난단 말인가?”

“그야 낸들 알겠는가. 근처에 사는 양씨 말로는 누군가 일부러 불을 지 른 것 같다고 하더군.”

“허어, 그럼 그 산처럼 쌓여 있던 곡물은?”

“창고가 타 뼈대만 남았는데 곡물 들이라고 무사했겠는가? 뭐, 차라리 잘된 일이지, 어차피 못 배우고 가 난한 이들에게서 갈취한 것들이니 까.”

사내가 분개하며 소리쳤다.

예도상단은 십대 상단이라는 이름 에 걸맞지 않게 치졸한 방법으로 돈 을 벌어들였다. 그중의 하나가 상단 소유의 땅을 소작토록 하는 것이었는데 소작농들이 글을 모른다는 걸 이용해 처음 약속했던 것보다 턱없 이 많은 양의 곡물을 가져갔다.

소작농들이 거세게 항의했지만 소 용없었다. 계약서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듣고 보니 그렇군. 말이 나온 김 에 우리 그 창고 구경이나 가세. 이 젠 놈들도 피땀 흘려 가꾼 재물을 눈앞에서 뺏긴 심정을 알 테지.” 

이윽고 두 사람의 발걸음이 예도상 단의 창고로 향했다. 한데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그 주위에는 사람들이 넓게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통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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