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8권 – 6화 : 변란의 조짐 (3)
변란의 조짐 (3)
잠시 후 설우진과 궁악비가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사내는 문이 닫히는 것까지 확인한 후 번화가 쪽으로 바쁘게 걸음을 옮 겼다.
“밥은 자네가 사는 거지?”
궁악비가 설우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낸 돈에 식비도 포함된 걸로 아는데요?”
“크흠, 그게, 자네한테 돈을 받고 난 뒤에 어디서 냄새를 맡았는지 근 처 상가 주인들이 몰려왔다네. 밀린 외상값을 받아가기 위함이었지. 그 렇게 한두 푼 갚다 보니 돈이 남아 나질 않더군.”
궁악비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 다.
그는 왕이 되고 난 뒤 씀씀이가 날로 커졌다. 매달 품위 유지비로 적잖은 돈이 지급되기는 했지만 그 걸로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세상에 감춰진 낭왕의 부끄러운 민 낯이었다.
설우진은 한참 동안 한심한 표정으 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점소이를 불러 음식을 주문했다.
궁악비가 간절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설우진을 바라봤다.
‘그래, 앞으로 힘 써야 할 일도 많 을 텐데 노인네 밥은 챙겨 줘야지.’
짧은 망설임 끝에 설우진이 점소이 에게 요리 세 개를 주문했다. 그 순 간 궁악비의 얼굴에는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요리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설우 진은 주변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쌍룡맹 지부의 무사로 짐작되 는 사내들이 나누는 얘기가 귀에 들 어왔다.
“자네, 그 소식 들었는가?”
“무슨 소식?”
“아 글쎄, 수호 가문이 본 맹과 뜻 을 함께하기로 했다네.”
“호오, 그거 뜻하지 않은 낭보로군. 수호 가문의 전력이 더해진다면 마 천 놈들과도 한번 싸워 볼 만하지.”
‘역천회 놈들, 무슨 꿍꿍이속이지? 원수나 다름없는 쌍룡맹과 손을 잡다니……..’
설우진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가 알고 있던 미래는 오래 전에 뒤틀려 버렸다. 해서 강호의 판세를 짚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가만가만, 역천회는 마천과 손을 잡고 쌍룡맹을 무너뜨린 후 역으로 마천의 뒤통수를 쳐서 강호의 패권 을 잡았어. 그렇다면 그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가능성 있지 않을까? 손을 잡는 상대만 달라졌을 어차피 뿐이잖아.’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설우진은 순 간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개입함으로써 마천과의 공 조는 깨졌지만 강호군림을 꿈꾸는 역천회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그 얘기는 곧 자신이 가정한 상황이 그 대로 재현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손님, 식사 나왔습니다.”
점소이의 낭창한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설우진은 애써 그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식사에 집중했 다.
객잔의 요리는 푸짐했다. 강을 바로 옆에 끼고 있어서인지 생선은 크고 살이 두툼하게 올라 있었다.
두 쌍의 젓가락이 경쟁하듯 생선 위를 누볐다. 둘이 먹기엔 좀 넘쳐 보이는 양이었는데 요리가 나온 지 불과 일각여도 되지 않아 생선의 뼈 만이 앙상하게 남았다.
“꺼억, 이제 좀 살 것 같네.”
궁악비가 빵빵하게 차오른 배를 매 만지며 거하게 용트림을 했다.
“낭왕 체면 좀 지키시죠, 보는 눈 도 많은데.”
“크하하, 자네가 아직 어려서 뭘 몰라서 그러나 본데, 맛있는 음식에 대한 최고의 공경은 바로 이 용트림 일세. 그만큼 열심히 먹었다는 증거거든.”
설우진의 퉁명스러운 말에 궁악비 가 호탕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 모습에 설우진은 고개를 절레절 레 저으며 품으로 손을 가져갔다. 계산을 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뜻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 다. 일단의 무리가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객잔 안으로 들이닥친 것 이다.
“모두들 그 자리에서 꼼짝 마.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못 나가니까 그 리 알아.”
숫자는 스물 남짓, 모두 짙은 황색 의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왼쪽 가슴 에 호룡이라는 글귀가 박혀 있었다.
“이 객잔은 우리 호룡방이 접수한다. 하니 오늘부터 우리에게 세금을 내라.”
꽁지머리 사내가 목청을 높였다. 그의 협박에 두툼한 살집을 지닌 객 잔 주인이 난감한 표정으로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대, 대협, 저희 객잔은 청운방의 관리를 받고 있습니다.”
“흥, 청운방이 뭐 대수더냐. 우리 뒤에는 혈사보가 있다. 설마 혈사보 를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막소총이 혈사보를 들먹이며 객잔 주인에게 겁을 줬다.
그는 석문에 자리한 호룡방의 소방주였다.
호룡방은 근자에 세력을 확장한 신흥 세력으로 혈사보와 연이 닿아 있 었다.
막소총이 혈사보를 거론하자 주인 의 얼굴색이 파리해졌다. 청운방이 의창에서 이름이 높다 하나 삼사보 중 하나인 혈사보에 비할 바는 아니 었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라. 네 대답 여하에 따 라서 오늘 이곳이 피바다로 변할 수 도 있다.”
막소총이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떠 올리며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가볍 게 두들겼다.
“저 씨부럴 놈이 뭐라 지껄이는 거야.”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궁악비가 발끈해서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 는 면상에 도끼라도 날릴 기세였다. 한데 손이 도끼 자루를 쥐려는 순 간 설우진의 손이 그의 손목을 잡아 챘다.
“지금 뭐 하려는 겁니까?”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눈 앞에서 협박을 해 대고 있지 않은 가.”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입니까? 어 차피 흔해 빠진 구역 싸움일 뿐입니 다.”
설우진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애당초 밥을 먹기 위한 목적으로 들 른 객잔일 뿐이었으니 그는 누가 이곳의 관리를 맡든 하등의 관심이 없 었다.
“어이, 빨리 결정하라고. 이곳 말고 도 돌아야 할 곳이 한가득이야.”
막소총이 주인의 선택을 재촉했다. 한데 따로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 인지 주인이 계속 시간을 끌었다. 그러고 보니 설우진에게 요리를 갖 다 줬던 점소이가 보이질 않았다.
‘이거 일이 더럽게 꼬일 수도 있겠 는걸.’
설우진은 점소이의 부재를 알아차 리고는 잔뜩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리고 아니나 다를까 정문으로 일단 의 무리가 들이닥쳤다. 푸른 색 무 복에 구름 문양을 새겨 넣은 청운방의 무사들이었다.
“크큭, 예상대로 놈들을 이곳으로 불러냈네. 고마워, 집으로 쳐들어가 기엔 좀 부담스러웠거든.”
막소총이 주인에게 손을 흔들며 의 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의창 객잔을 미끼로 청운방 놈들 을 제대로 낚았군. 아마도 각개격파 를 노리는 것일 테지.’
설우진은 단번에 눈앞에 벌어진 상 황을 읽어냈다. 그사이 청운방의 무사들이 호룡방의 뒤를 점거했다. 머릿수는 호룡방과 거의 흡사했다.
“막소총, 네놈의 간덩이가 아주 부 었구나, 감히 본방의 구역에서 도발 을 해 대다니. 내 오늘 네놈의 목을 베어 의창을 넘보는 사파 놈들에게 본보기로 삼을 것이다.”
청운방을 대표하는 고수 유연신이 검을 빼들었다.
낭창낭창한 검신이 그의 기력을 머 금고 꼿꼿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청 운방은 비류검을 사용했다. 비류검 은 부드러운 움직임 속에 날카로운 독아를 감추고 있었다.
잠시 후 유연신을 시작으로 청운방 도들이 일사불란하게 공격을 전개했 다.
‘뒷배나 믿고 설쳐 대는 호룡방 따 위는 절대 우리의 상대가 될 수 없 다.’
유연신이 자신 있게 선두로 나아갔다. 차라랑.
그의 손에 들린 연검이 경쾌하게 몸을 떨며 막소총의 면전으로 들이 쳤다. 한데 무슨 배짱인지 막소총은 그 공격을 바라만 봤다. 그 모습에 더 열이 받은 유연신은 비류검의 후 반 절초인 비천락을 전개했다.
성난 바람이 검신을 타고 휘몰아쳤 다. 순도 높은 검기였다.
그사이 둘의 간격이 좁혀졌다. 이 대로 간다면 유연신의 연검이 막소 총의 목덜미를 거칠게 휘감아 벨 터 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변수가 출연했 다. 호룡방의 무사들 중 하나가 벼락같이 달려 나와 막소총의 앞을 막 아선 것이다.
카캉.
연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공중으 로 떠올랐다. 유연신은 다급히 뒷걸 음질하며 검세를 바로 잡았다.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칠성의 비류검을 튕겨 내다니. 호 룡방에 그만한 고수는 방주뿐인 걸 로 알고 있는데…………….’
손목에서 전해지는 잔떨림에 유연 신은 눈앞의 상대가 자신보다 윗줄 의 고수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직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투권 어르신, 구명지은에 감사드 립니다.”
막소총이 들뜬 목소리로 사내의 정 체를 밝혔다.
순간 객잔 안이 들썩였다. 그만큼 투권의 이름값은 무거웠다.
투권 강유신, 그는 강남에서 손꼽 히는 권법의 대가였다.
일 권이면 천하에 못 부수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그의 권법은 강호 일절로 평가받고 있었다.
한데 의외인 건 그가 호룡방과 함 께한다는 사실이었다.
투권은 단 한 번도 세력에 속한 적이 없었다. 유수의 문파들이 그를 들이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는 끝내 자유를 택했다.
“싸울 게 아니라면 얌전히 뒤로 물러서 있어라.”
투권이 뒤를 돌아보며 얘기했다. 한눈에도 둘 사이가 그리 돈독해 뵈 지는 않았다. 하지만 막소총은 싫은 내색 없이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어찌하여 투권 대협께서 저 간특 한 무리와 함께하시는 겁니까?”
유연신이 투권에게 항의하듯 물었다.
“너희와 호룡방이 다를 게 무엇이 냐? 건방 떨지 말고 덤벼라.”
투권은 유연신의 말에 전혀 흔들리 지 않았다.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투권이 작 정하고 덤빈다면 난 삼초지적도 못 되거늘.”
유연신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분명 객관적인 전력에서 투권이 압 도적으로 앞섰다. 자신은 일류 끝자 락에 발을 걸치고 있는 데 반해 그 는 초절정에 근접해 있었기 때문이 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수도 없었다, 의창 객잔을 빼앗기는 순간 다른 곳도 연쇄적으로 호룡방에 넘 어갈 것이 뻔했기에.
결국 유연신은 고민 끝에 싸움을 택했다.
“그래도 제법 무인다운 선택을 했 군. 그에 대한 보답으로 최선을 다 해 싸워 주지.”
투권이 두 눈에 이채를 띠며 가볍게 바닥을 찼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신형이 한 줄기 바람처럼 유연신의 정면으 로 짓쳐들었다.
유연신은 뒷걸음질로 거리를 벌리 며 비류번을 전개했다. 비류번은 상 대의 힘을 역으로 되돌리는 것으로 무당의 이화접목과 비슷했다.
캉.
투권의 주먹과 맞닿은 검이 활대처 럼 심하게 구부러졌다. 그와 함께 유연신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 다. 힘에 부친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이를 악물어 내력을 쥐어짜 냈다.
텅.
휘어졌던 검신이 도로 몸을 곧추세우며 투권의 주먹을 밀어냈다.
“호오, 저걸 튕겨 내다니, 청운제일 검이라는 수식어가 과장된 게 아니 었네.”
투권과 유연신이 격렬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뒤로 멀찍이 물러서 있던 막소총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의자 위에 걸터앉았다.
공교롭게도 설우진의 옆자리였다.
“당신들 내 덕분에 돈 주고도 못 볼 구경하는 거야. 투권의 주먹은 꽤나 비싸거든.”
막소총이 거들먹거리며 자연스럽게 식탁에 놓인 술병으로 손을 가져갔 다. 그 술은 식사가 끝날 즈음에 설우진이 새로 주문한 것이었다.
‘호오, 이놈이 맹수의 코털을 제대로 간질이는군. 과연 저 녀석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맞은편에서 궁악비가 흥미로운 표 정으로 설우진의 움직임을 예의주시 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막소총 이 술병을 쥐려는 찰나 설우진이 벼 락처럼 손등을 후려쳤다.
“크윽.”
막소총이 당황한 얼굴로 손을 부여 잡았다. 마치 정으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손등이 시큰거렸다.
“네놈! 이게 무슨 짓이냐?”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 주인 허락도 없이 자리에 앉은 것으로도 모자라 남의 술까지 훔쳐 마시 려고 한 놈이 더 어이없는 거 아니야?”
설우진이 사나운 눈초리로 그를 쏘 아보며 반문했다.
순간 막소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 상대가 자신보다 한참은 어려 보이 는 청년이란 게 너무 자존심이 상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