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9권 – 8화 : 떨어지는 별(2)
떨어지는 별(2)
솔직히 그는 이번 일을 가벼이 여 겼다. 그 상대는 무가가 아닌 일개 상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벌써 반 절이 넘는 희생자가 났다. 이런 상 태에서 설무백을 데려간다 한들 그 공이 과를 덮을 수는 없었다.
‘이게 다 저 늙은이 때문이야.’
나철휘가 검을 들고 궁악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조된 감정을 보여 주듯 그가 내 디딘 걸음마다 굵직한 족적이 생겼다.
그 모습을 보면서 궁악비는 힘겹게 혈부를 들었다.
아직 그에겐 낭인으로 해야 할 일 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천지기마저 소진된 그에게 혈부는 너무나 무거웠다. 이를 악물고 들어 보려 해도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너무 애쓰지 마십시오. 어르신께 선 최선을 다했습니다.”
궁악비의 등에 업혀 있던 설무백이 그의 귀에 대고 힘겹게 말을 뱉었 다.
그의 안색은 창백했다. 부상을 당 한 몸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녔으니 몸도 마음도 지칠 만했다.
‘크큭, 나도 많이 늙었나 보군. 겨우 이 정도 위기에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려 하다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던 궁악비 의 몸에서 전에 없이 강한 투기가 발산됐다.
“장주,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버 리지 말게. 화린을 피웠으니 곧 자 네를 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달려올 걸세. 하니 내가 저놈의 발을 묶어 놓을 동안 조금이라도 멀리 달아나 게.”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쓸데없는 고집은 부리지 말게. 한 명이라도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 한 명이 꼭 저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 자네여야만 하네. 왜냐하면 이 계약서에 목숨을 바쳐 자네를 지 키겠다고 수인했거든.”
궁악비는 웃으며 설우진과 함께 작 성한 계약서를 내보였다.
그제야 설무백은 궁악비의 등에서 내려왔다.
허벅지를 다친 탓에 한 걸음을 내 디딜 때마다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 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걸었다.
‘어르신의 결의를 헛되이 할 수는 없다.”
설무백은 진심으로 살고자 했다. 하나 그것을 순순히 보고 있을 나철휘가 아니었다.
“네놈은 내 허락 없이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나철휘가 검을 휘둘렀다.
그가 노리는 곳은 설무백의 발목이 었다. 살려서 데려가야 하니 허튼짓 을 못하도록 아예 발을 잘라 놓을 심산인 것이다.
하지만 나철휘의 시도는 궁악비의 시의적절한 대응으로 무산됐다. 궁악비는 소극적으로 검을 막아서 기보다는 나철휘의 빈틈을 노리고 일격을 가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나철 휘의 옆구리로 파고드는 혈부는 강 기를 머금고 있었다.
옆구리로 파고드는 살기에 나철휘는 다급히 몸을 반전시키며 검의 방향을 틀었다.
카캉.
혈부와 검이 강하게 맞물렸다. 궁악비는 설무백이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쉬지 않고 공격을 이어 갔다.
‘다 죽어 가던 놈이 어떻게 이런 힘을 낼 수 있는 거지?’
나철휘는 손아귀에 전해지는 은은한 통증에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사이 설무백은 오른쪽 다리를 잡 아끌며 달렸다.
조금이라도 궁악비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이에 나철휘는 조바심이 났다.
요마들을 잃은 마당에 설무백까지 데려가지 못한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게 분명했다.
나철휘는 귀찮게 따라붙는 궁악비 를 떨쳐 내기 위해 광혼마기를 한계 까지 끌어올렸다.
검에 붉은색 검기가 맺혔고 그 검 기의 색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짙어졌다.
‘크큭, 저게 소문으로만 전해 듣던 마강인가?’
궁악비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마강은 이름 그대로 마기를 근간으 로 하는 강기의 일종이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마도의 무사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초상승의 비기다.
‘조금 더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그래도 이 정도면 내 역할은 충분히 한 셈이겠지.’
궁악비의 손에서 혈부가 떨어졌다. 그의 몸은 급격하게 생기를 잃어 가 고 있었다.
선천지기가 바닥난 상태에서 마지 막 남은 잠력까지 끌어 썼으니 몸이 온전할 리 없었다.
한데 그의 얼굴엔 어울리지 않게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서걱.
마강을 머금은 나철휘의 검이 궁악 비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거친 마강의 특성 때문일까? 궁악비의 목은 너덜너덜 찢긴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낭인들의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쨍그랑.
“이거 너무 마셨나?”
설우진이 발치에 나뒹구는 술잔을 보며 굵은 검미를 사납게 찡그렸다. 지금 그가 머무르고 있는 곳은 통 천문의 안가 중 하나인 소촌의방이 었다.
그는 고월장에서의 임무를 마친 뒤 곧장 비검대와 함께 이곳으로 왔다. 마천과 역천회의 추격을 뿌리치고 부상당한 비검대원들을 치료하기 위 함이었다.
그는 소촌의방에 도착한 직후 그대 로 기절했다.
비검대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했 지만 실제 그의 부상은 꽤나 심각한 수준이었다.
급박하게 의원이 붙었다.
그는 먼저 몸에 박힌 화살들을 밖 으로 빼내고 몸 안에 뒤엉킨 기혈들 은 침술과 탕약을 통해서 풀어냈다. 치료는 사흘간 이어졌다.
그는 매일같이 고열, 두통과 씨름 하며 생사를 넘나들었고 나흘째 되 던 날 그는 정신을 차렸다.
죽음의 위기를 극복해 낸 덕분인지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기세가 예사롭 지 않았다.
설우진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술부 터 찾았다.
의원이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대주님, 가만히 계십시오. 깨진 잔 은 제가 치우겠습니다.”
같이 술을 마셨던 유건호가 황급히 몸을 그려 깨진 잔을 수습했다. 첫 만남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던 두 사람이지만 유건호는 이제 그의 충실한 그림자가 돼 있었다. 고월장 에서 보여 준 설우진의 용맹함에 흠 뻑 취한 것이다.
“이제 그 대주라는 호칭 좀 그만 붙이지.”
“섭섭하게 왜 그러십니까?”
“내가 전에도 분명히 얘기했을 텐데, 임시직이라고.”
설우진은 가까이 다가서는 유건호에게 단호히 선을 그었다.
하지만 유건호는 끈덕지게 매달렸다.
거머리가 따로 없었다.
‘하아, 이놈 정말 질기네. 빨리 이 곳을 나가든지 해야지.’
넉살 좋게 웃으며 말을 건네는 유 건호를 보며 설우진은 술을 병째 입 으로 가져갔다.
독한 화주가 목울대를 타고 거침없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크윽.”
입안에서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의원이 그 모습을 봤다면 정말 기 함했을 것이다.
“혹시 놈들과 관련된 소식 들어온거 있어?”
“아직까지는 잠잠합니다.”
“하긴, 둘 다 이번 일을 떠들고 다 니기에는 낯이 뜨거울 테지.”
설우진은 그들의 속내를 짐작했다. 마천과 역천회. 두 세력 모두에게 이번 일은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일 것이다.
외부에서 인위적으로 알린다면 모 를까 그 안에서 먼저 말이 새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 했다.
타다닥.
두 사람이 담소를 이어 가고 있을 때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하나의 인 영이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비검대의 막내인 청운하였다.
“대, 대주님, 큰일 났습니다.”
청운하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설 우진을 쳐다봤다.
“뭔데 그리 호들갑이야? 혹시 마천 이랑 쌍룡맹이 전면전이라도 붙은거야?”
“그, 그게 아니라 서, 설가장 쪽에 변고가………….”
순간 설우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말해 봐. 설가장이 어떻게 됐다고?”
“마천의 무리가 설가장을 습격했다 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다수가 죽고…….”
“서, 설마, 부모님께 변고가 생긴 것은 아닐 테지?”
와장창.
오른손에 쥐고 있던 술병이 강하게 조이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졌다.
“일단 보고받은 바로는 설가장에 그분들의 시체는 없었다고 합니다.”
‘노도문이 제 역할을 해낸 건가?’ 설우진은 그 얘길 듣고 가장 먼저 노도문을 떠올렸다.
마천의 마두들이 아무리 사납다 한 들 드넓은 장강 위에 떠 있는 노도 채의 배를 쫓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다급히 천뢰도를 챙겨 들고 의방을 나섰다.
유건호가 돕겠다고 따라나섰지만 이미 그의 신형은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마천, 만에 하나 내 가족의 신변 에 조금의 이상이라도 생겼다면 그 때는 내 모든 걸 걸고 네놈들을 때 려 부술 것이다.”
설우진의 두 눈에 짙은 살의가 번졌다.
“아하, 조금만 발이 느렸어도 이 양반과 함께 동반으로 저승 구경할 뻔했네.”
용문걸이 반대편 침상에 누워 있는 설무백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그는 한 식경 전, 설가장으로 향하 던 중 우연히 길가에 쓰러져 있는 설무백을 발견했다.
당시의 설무백은 출혈이 심해 기력 이 엄엄했다.
당장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용문걸은 길게 고민할 새도 없이 설무백을 업고 포구로 내달렸다.
평소 같았으면 동행했던 고두발에게 시켰을 일이다.
한데 이번엔 그리할 수가 없었다.
왜?
진한 살기를 뿌려 대며 달려오는 나철휘 때문이었다.
용문걸은 고두발을 앞세워 보내고 정말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수적들 사이에선 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대단한 무위를 지닌 그이지 만 멀리서도 확연히 그 존재감이 느 껴지는 나철휘는 도저히 상대할 엄 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그 어린놈 과 손을 잡아서.’
용문걸은 스멀스멀 밀려드는 공포 감에 설우진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 를 갈았다.
정말 이런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걸 알았다면 죽어도 설우진이 내민 손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이미 뒤늦은 후회였다.
우여곡절 끝에 용문걸은 나철휘보 다 한발 앞서 배에 도착했다.
그는 인사를 건네는 수하들에게 얼 른 배를 출발시키라며 악을 내질렀 다.
순간 수십 개의 노가 힘차게 강물 을 휘저었고 빠르게 포구에서 멀어 지는 노도채의 배를 본 용문걸은 그 제야 설무백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나철휘는 쉬이 추격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포구에 묶여 있던 소선에 몸을 싣고 노도채의 뒤를 맹렬히 쫓았 다.
그는 노를 쓰지도 않았다. 강물에 장력을 쏟아 부으며 속도를 끌어올 렸다.
이에 용문걸은 작살 공격을 지시했 다.
날이 시퍼렇게 선 수십 개의 작살 들이 소선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나철휘는 배를 멈추지 않았 다.
왼손으로는 쉼 없이 장력을 쏟아 내고 남은 오른손으로 검을 휘둘러 작살을 쳐 냈다.
그사이 배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용문 걸은 재빨리 표적을 바꿨다. 나철휘 대신 배 자체를 공략하고자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소선은 노도채의 집중된 공격을 버 텨 내지 못했다.
소선 곳곳에는 물이 차올랐고 나철 휘가 구멍을 막아 보려 애썼지만 의 미 없는 몸부림이었다.
결국 나철휘는 소선과 함께 장강의 물결 속으로 사라졌다.
“형님, 이제 어쩔 거요?”
술을 가져온 고두발이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음, 그 미친놈이 또 쫓아올지 모르니 일단 구룡탄으로 가자. 그곳이 라면 누가 와도 안전할 테지.”
구룡탄은 장강에서 물길이 사납기 로 악명 높은 곳이다.
기본적으로 물살이 센 데다 하루에 도 몇 번씩 암류가 일어나 멋모르고 들어갔다간 죽기 십상이었다.
“꼭 가야겠수?”
고두발이 불만 어린 표정으로 반문했다.
구룡탄에 가면 가장 바쁘게 움직여 야 할 이가 자신이라는 걸 알기 때 문이다.
“네가 그 미친놈을 못 봐서 그래. 내가 간발의 차이로 배에 탔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어도 이 목이 무사하지 못했을 거다.”
“쳇, 알았다.”
고두발은 투덜대며 타를 잡고 있는 부하에게 걸어갔다.
잠시 후 선수가 가파르게 오른편으 로 꺾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