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장 – 구출대 (1)
하늘을 불사르던 용의 노여움도 잊혀지고
왕자들의 석비도 사토 속에 묻혀버린
그리고 그런 것들에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생존이 천박한 농담이 된 시대에
한 남자가 사막을 걷고 있었다.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해묵은 금언.
구출대
그보다 더 적합한 이름이 없어 그저 ‘마지막 주막’이라 불리는 곳에 남자가 다가온 것은 푼텐 사막의 여행자들이 잠자리를 찾아 드는 새벽녘이었다.
주막 주인은 남자가 도달하기 한 시간 전부터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보통의 경우 주인은 그보다 일찍 길손을 발견하는 편이 다. 광활한 푼텐 사막에서는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사구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들도 장애물은 되지 못한 다. 왜냐하면 ‘마지막 주막’이 있는 위치는 30미터 높이의 바윗 덩이 위였기 때문이다. 직경 40미터쯤 되는 그 바위의 윗부분은 모조리 마지막 주막에 의해 점령당해 있었다. 그런 특이한 위치 에 있었기에 주인은 주막을 향해 걸어오는 길손을 몇 시간 전부 터 발견하곤 했다. 그 길손들은 대개 동쪽이나 서쪽, 그리고 북 쪽에서 와서 마지막 주막에 머물렀다가 다시 동쪽이나 서쪽, 그리고 북쪽으로 떠났다.
하지만 남자는 남쪽에서 오고 있었다. 주인이 거의 신경쓰지 않는 방향이었고, 그래서 주인은 한 시간 거리에 이를 때까지 남 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주인은 남자가 길을 어지간히도 잘못 들었다가, 주막을 지나치 기 직전 가까스로 불빛을 발견한 것이 틀림없다고 짐작했다. 그렇게 판단한 주인은 남자가 주막까지의 남은 거리를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줄여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끔 무료 한 시선을 돌려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지만 다른 길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검은 고체를 연상시키던 사막의 하늘에 조금씩 물빛이 배어들 었다. 남자의 모습은 이제 완연히 커져 있었다. 대략 10분쯤 후 에 도착하겠다고 판단한 주인은 주전자와 물그릇을 준비해 둘 요 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던 주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주인은 눈살을 찡그리며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엇이 자신의 주의를 끌었는지 알아차렸다.
남자의 뒤편으로 검은 선이 뒤따르고 있었다. 밝아진 하늘 아 래에서 주인은 그 검은 선이 지평선까지 점점이 이어져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주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가 뭔가 무거운 것 을 끌고 있는 것일까? 바람은 그다지 불지 않았고 따라서 남자가 뭔가 묵직한 것을 끌고 있다면 그 자국은 빛이 강해지는 이 시점 에 그림자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혹 남자의 낙타가 죽어 버려서 남자는 어쩔 수 없이 귀중한 짐을 끌고 오는 것일까? 주 인은 남자의 등뒤를 자세히 보려 했지만 남자는 무릎까지 오는 펑퍼짐한 방풍복을 걸치고 있어서 그 뒤쪽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조금 후, 주위가 더 환해지자 주인은 자신의 상상이 너 무 온건했음을 깨달았다. 주인은 놀라움 속에서 자리에서 일어 났다.
남자의 발 뒤로 이어지는 검은 선은 어떤 액체가 모래 속으로 배어든 자국이었다. 그리고 어떤 여행자도 일부러 물을 흘리지는 않을 것이다. 메마른 사막의 모래조차도 완전히 빨아먹지 못하고 검붉은 자국을 남겨놓게 만든 그것은 피였다.
“이보오. 괜찮은 거요?”
커다란 천으로 머리와 입 주위를 가린 채 걸어오던 남자는 느 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작은 사구 위 에 서 있는 주막 주인을 보곤 손을 어깨 쪽으로 가져갔다.
“누구냐?”
“저기 주막에서 온 사람이오. 주막으로 오던 중 아니었소?”
주인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전히 손을 목 뒤에 놓아둔 채 말했다.
“더 다가오지 마시오. 비무장이오?”
“난 도적이 아니오. 설마 도적이 맨몸으로 낙타도 타지 않고 다 닐까. 난 저 주막 주인이고 당신을 보다가 도와주려고 온 거요.”
“뭘 도와주겠다는 거요? 설마 주막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겠다 는 것은 아닐 테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주인은 다시 남자의 뒤쪽을 훔쳐보았 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자 그 자국이 피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 질 뿐이었다. 주인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본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거 말이오? 신경쓰실 거 없소.”
“피를 그렇게 흘리는데 신경쓰지 말라는 거요?”
“내 피가 아니오.”
주인은 어리둥절해져서 남자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남자는 주인이 관찰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남자는 등뒤로 커다란 자루 같은 것을 끌고 있었다. 자루는 검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것이 피의 길을 만들고 있는 원인이었다. 주인은 흠칫하여 남자의 목 쪽을 쳐다보았고 방풍복의 옷깃 너머 에서 솟아나온 커다란 칼자루를 발견하곤 치를 떨었다. 거대한 검을 매고 피가 배어나오는 자루를 끌고 있는 남자라니.
“자루 속에 든 것이 뭐요?”
“이미 말했지만 신경쓸 필요 없는 것이오.”
“그거 피잖소!”
“인간의 피가 아니오.”
남자는 퉁명스럽게 대답한 다음 주인을 내버려둔 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남자가 다시 움직이자 주인은 그 자루가 얼마나 무거 운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사람을 넣어도 두 명은 넣을 것 같은 그 자루는 모래 위에 커다란 자국을 남기며 끌려갔다. 험악한 눈 으로 남자의 등을 쏘아보던 주인은 조금 후 남자를 앞질러 걸어 갔다.
“먼저 가서 준비 좀 하겠소이다.”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주인은 주막을 향해 달음박 질쳤다. 물론 말한 바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주막에 당도 하기 직전까지 주인은 자신의 칼을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쓴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커다 란 장검의 소재는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어차피 칼 한 자루로 남자를 대적할 생각도 아니었던 주인은 계단을 올라서자마자 고 함을 질러 식솔들을 깨웠다.
영문을 모른 채 달려나온 아내는 칼이 어디에 있냐는 남편의 질문에 당황했다. 다행히도 약간 늦게 나온 젊은 아들은 칼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고 칼을 쓸 일이 생긴 듯하자 흥분하여 달려갔다. 주인은 설명을 강요하는 아내를 부엌에 밀어넣다시피 한 다음 물그릇과 주전자를 탁자 위에 내어놓았다.
그때 바위를 올라온 남자가 주막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다음 주전자가 놓인 탁자 쪽으로 걸어갔다. 남자의 뒤쪽에는 여전히 그 끔찍한 자루가 뒤따르고 있었고 그래서 바닥에 핏자국이 남았다. 주인은 그 모습에 눈살 을 찌푸렸다. 탁자에 도달한 남자는 방풍복을 벗어 의자에 걸쳐 둔 다음 배낭을 벗었다. 그리고 손을 목 뒤로 가져갔다.
주인은 잠깐 동안 피가 배어나오는 자루를 잊어버렸다. 주인은 한 번도 그런 칼을 본 적이 없었다. 30센티미터쯤 되는 칼자루 위에는 역시 30센티미터쯤 되는 고동이 달려 있었다. 고 동이 그토록이나 긴 이유는 분명했다. 길이가 120센티미터는 될 듯한 거대한 칼날 두 개가 나란히 부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 치 다리가 붙어버린 쌍둥이 같은 모습의 검이었다.
그 해괴한 쌍신검(雙身劍)은 착용하는 방법도 독특했다. 남자 는 가죽끈과 연결 쇠고리들로 이루어진 복잡한 장신구를 가슴 위 쪽에 묶고 있었다. 그 왼쪽 어깨 쪽에는 둥그스름한 어깨 보호대 가 붙어 있었고 등쪽, 목 뒤에서 조금 내려간 곳에는 걸이 모양 의 쇠붙이가 부착되어 있었다. 남자의 쌍신검은 그 걸이에 걸리 게 되어 있었다. 칼집은 있지도 않았다.
남자는 쌍신검을 탁자 위에 놓아둔 다음 의자에 앉았다. 그리 고 머리와 입 주위를 감싼 천을 풀기 시작했다.
그때 주인의 아들이 칼을 들고 돌아왔다. 다행히도 눈치 빠른 아들은 칼을 등 뒤에 숨긴 채 걸어왔다. 주인은 눈짓을 해서 아들을 어두운 구석 쪽으로 물러나게 한 다음 남자에게 다가갔다.
“자루에 든 것이 뭔지 설명해 주시겠소?”
천을 다 푼 남자는 그것을 탁자 위에 놓아두었다. 땀과 모래로 덩이진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고 며칠 동안 다듬지 않은 수염은 남자의 입 주위를 시커멓게 뒤덮고 있었다. 그 볼썽 사나운 얼굴을 주인에게로 돌린 남자는 엉뚱한 말을 꺼냈다.
“여기가 마지막 주막 맞소?”
“그렇게들 부르지. 남쪽으로는 더 이상 주막이 없거든.”
“그렇더군.”
무심히 넘어가려던 주인은 문득 남자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는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남쪽에서 오셨단 말이오?”
“거기서 왔소.”
차라리 하늘에서 왔다고 하는 편이 믿기 쉬울 것이다.
“거참, 남쪽에는 아무것도 없소.”
“키보렌이 있소.”
“하, 키보렌? 물론 그게 있지. 무수한 나무들도 있고 빌어먹을 정도로 많은 짐승들도 있지. 그리고 나가들도 있고. 그러니 아무 것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잖소.”
비웃는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는 또다시 엉뚱한 말을 꺼냈다.
“편지를 주시오.”
“예?”
“이곳이 마지막 주막이라면 케이건 드라카에게 온 편지가 있을 텐데.”
주인은 다시 눈을 크게 떴다. 분명히 그런 편지가 있었다. 수 십일 전 북쪽에서 죽을 지경이 되어 걸어온 대사원의 승려는 케 이건 드라카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며 서신 하나를 건네주었다. 오레놀이라는 이름의 그 승려는 며칠 동안이나 몸조리를 한 다음 겨우 북쪽으로 돌아갔다. 고개를 끄덕일 뻔한 주인은 퍼뜩 정신 을 차렸다.
“먼저 내 질문에 대답해 주시오. 자루에 든 것은 뭐요? 그리고 남쪽에서 왔다니, 그건 무슨 말이오?”
케이건 드라카라는 이름의 남자는 주전자를 들어올렸다. 주인 은 재빨리 끼어들었다.
“한 그릇에 두 닢이오. 여기 물값은 비싸지. 물이 나오기 때문 에 주막이 가능하거든.”
케이건은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물그릇에 물을 따랐 다. 물을 다 따른 다음에야 케이건은 주인의 질문에 대답했다.
“내가 남쪽에서 온 것은 푼텐 사막을 적게 가로지르기 위해서 였소. 내 출발지는 카라보라였소. 거기서 남쪽으로 해서 키보렌 에 들어섰소. 그 다음 죽 서쪽으로 오다가 다시 북쪽으로 발걸음 을 돌려 이 주막으로 왔소.”
주인은 소리내어 콧방귀를 뀌었다. 케이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푼텐 사막의 동쪽 끝 카라보라는 주막에서 200킬로미 터 이상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200킬로미터나 되는 사막 여행을 피하려면 남자가 말하는 것처럼 남쪽으로 빙 돌아오는 편이 낫 다. 푼텐 사막의 남쪽 끝에서부터 주막까지는 불과 50킬로미터 거리다.
하지만 그 말은 거꾸로 말해서 키보렌 밀림 속을 200킬로미터 가량 걸어야 한다는 의미다. 나가들이 득시글거리는 키보렌 밀림을 가로지르는 200킬로미터의 여행. 같은 거리의 바다 위를 걷는 편이 훨씬 안전할 것이다. 주인이 그것을 지적하려 할 때 케이건 이 자루를 가리켰다.
“자루에 든 것은 그 여행을 통해 얻은 거요. 풀어보시오. 내가 남쪽에서 왔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 거요.”
주인은 미심쩍은 눈으로 자루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케이건 드 라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케이건은 동편 두 닢짜리 물로 목을 축일 뿐이었다. 주인은 조심스럽게 자루를 풀어보았다.
잠시 후, 부엌에 있던 주인의 아내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비명 에 주저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