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장 – 구출대 (3)
키준 산맥의 서북쪽 바이소 산.
기온은 차고 바람은 거세다. 충일함을 자랑하는 태양도 이 땅 에선 기력을 잃고 하늘을 떠도는 생기 없는 불덩이로 바뀌는 듯 하다. 산을 온통 뒤덮은 암록색의 숲은 답답하리만큼 두텁다.
그 초록의 물결 사이로 한 여행자가 바이소 산의 능선을 따라 걷고 있었다. 실팍한 지팡이나 두툼한 옷은 보통의 여행자와 별 다를 바 없지만, 여행자의 머리는 깨끗하게 삭발한 모습이었다. 승려임에 분명하지만 키준 산맥의 이 지역에서 승려의 모습은 조 금 이채롭게 보인다. 이 근처에는 사원은커녕 마을도 없다.
하지만 승려가 길을 잃은 것은 아닌 듯하다. 승려는 바이소 계 곡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그 계곡 바닥을 흐르는 개울 옆에는 분명히 건물로 보이는 것이 몇 개 놓여 있었다. 바람을 별로 타지 않을 만한 우묵한 곳에 서 있는 그 건물들은 사금 채취자나 사냥 꾼들이 지을 만한 오두막이었다. 승려는 그 오두막들을 향해 꾸 준히 걸어 내려갔다.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해가 구름 속에 들어갔나 하고 의아해하던 승려의 등 뒤에서 갑자기 돌풍이 불어닥쳤다.
강한 돌풍에 승려는 앞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덤불 에 틀어박히는 바람에 승려는 계곡 바닥까지 굴러가는 낭패한 지 경을 모면했다. 간이 콩알만 해진 승려는 헐떡거리며 하늘을 쳐 다보았다. 그리고 승려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승려가 내려온 산의 뒤편에서부터 튀어나온 것은 거대한 하늘 치였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가슴지느러미는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았 다. 입은 산이라도 집어삼킬 것 같았고 그 뒤에 흩어져 있는 수 천 개의 눈은 온갖 빛깔로 영롱하게 빛났다. 도저히 직시하기 힘 든 그 눈들을 피해 시선을 더 뒤쪽으로 옮긴 승려는 곧 탄성을 내질렀다. 사람들이 말하던 것이 그곳에 있었다.
무너진 탑과 담장, 열주, 그리고 햇빛을 받아 불타오르는 반구 형 지붕. 승려는 그것이 사람들의 말처럼 호화스럽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보석이 박힌 기둥과 금으로 뒤덮인 지붕들에 대해서 말한다. 물론 그것은 햇빛의 반사광을 저열한 욕망으로 해석한 결과다. 하늘치의 등에 있는 것은 무거운 세월 의 더께 아래에 무너진 태고의 유적일 뿐이었다. 그곳에서는 반 짝이는 돌덩이나 누런 쇠붙이가 아닌 덧쌓인 시간들이 찬란히 불타고 있었다. 승려는 눈물을 흘렸다.
등에 유적을 얹은 채 하늘을 떠가는 거대한 물고기를 보던 승 려는 한참 후에야 계곡 아래의 소란을 들었다. 승려는 일어나 앉 은 다음, 아쉬움을 억누르며 계곡 바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놀라움과 우려를 금치 못 했다.
계곡 바닥에서는 세 마리의 말들이 한 무리를 이룬 채 서 있었 다. 마차와 비슷한 배열이었지만 조금 달랐다. 일단 세 마리의 말 중 가운데 말에는 기수가 올라타 있었다. 그리고 말들은 멍에 를 매고 있었지만 그 뒤편에 연결되어 있는 것은 마차가 아니었 다. 길고 튼튼해 뵈는 밧줄이 멍에에 연결되어 있었고 밧줄의 반 대쪽 끝에는 사람들이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승려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하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을 등에 매달고 있었다.
그것은 장방형의 거대한 연이었다. 다만 보통 연의 수백 배는 넘는 크기였다. 승려는 말들이 왜 필요한지 깨닫고는 신음을 흘 렸다.
그때 승려가 듣지 못했던 신호가 울렸던 모양이다.
말들이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말들은 계곡풍을 받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밧줄이 팽팽하 게 당겨지다가 갑자기 연들이 하늘로 불쑥 솟아올랐다. 연은 모 두 다섯 개였다. 승려는 말들을 이용하여 연을 띄울 수 있다는 점은 이해했지만 그것을 지탱하거나 조종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 러웠다. 그때 승려는 말들과 연결된 밧줄 이외에 별도의 밧줄이 연에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승려는 그 별도의 밧줄이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폈다. 그것은 땅에 고정된 거대한 도르 래에 연결되어 있었다. 승려는 그들의 준비성에 감탄했다. 말들 은 연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리고 연은 거대한 얼 레라고 할 수 있는 도르래에 의해 조종되는 모양이었다.
승려의 예측대로 곧 연에 매달려 있던 자들이 단검을 뽑아들었 다. 그 사람들은 연과 말을 연결하는 밧줄을 끊었고 그러자 연들 은 말들과 분리되어 날아올랐다. 하지만 별도의 밧줄이 도르래에 연결되어 있었고 그곳에는 체격이 우람한 자들이 도르래의 손잡 이를 붙잡고 있었다.
그들은 연을 이용하여 하늘치의 등에 오른다는 대담하기 짝이 없는 계획을 시도 중이었다. 승려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 했지만 그들의 모험심에는 감동했고, 그래서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 없이 응원을 보내었다.
그때 승려는 연들 중 하나에 이상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다른 네 연들과 달리 제대로 날아오르지 못한 채 불안하게 흔 들리는 연이 있었다. 승려는 놀란 눈으로 그 연을 살폈고 곧 그 연이 아직까지 말들에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어찌된 일일 까? 눈을 부릅뜬 승려는 그 연에 탄 자가 엉뚱한 밧줄을 잘랐음 을 깨달았다. 그 자는 말과 연결된 밧줄 대신 도르래와 연결된 밧줄을 잘라버린 것이다. 계곡 아래쪽에서는 사람들이 욕설과 비 명을 질러대었고 그 연과 연결된 말들을 몰던 기수는 머리 끝까 지 화가 나서 폭언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연은 무지막지한 힘으 로 솟아오르고 있었고 자칫하면 말까지 끌려 올라갈 정도였다. 기수는 모진 결심을 한 듯 검을 뽑았다. 승려는 부정의 고함을 질렀지만 들릴 리가 없는 거리였다.
기수가 연줄을 끊자마자 연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승려는 벌떡 일어나서 그 연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밧줄이 모 든 끊어진 그 연은 지상과의 모든 연결을 잃은 채 바람에 떠밀려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승려는 그 연에 탄 자에 대한 동정 심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 연에 탄 자는 죽도록 무서울 것 이다.
마침내 연은 서서히 아래로 떨어졌다. 연은 승려가 있는 능선 쪽으로 떠밀리듯 내려왔다. 연이 추락하는 순간 승려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요란한 충돌음이 일어났다. 승려는 떨리는 가슴을 내리누른 채 연을 향해 달려갔다. 가슴이 조마조마하여 움직이기도 힘들었지 만 승려는 힘껏 달려갔다. 부러진 나무들을 타넘으며 승려는 자 신이 보게 될 끔찍한 모습을 각오했다. 마침내 승려는 추락지점 에 도달했다.
그리고 승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얼이 빠져버렸다. 부러진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의 잔해 속에서 한 사람이 몸을 고 정시키고 있던 줄을 거칠게 뜯어내며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향해 무지스러운 욕설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연에 탔던 작자임은 분명하다. 주위의 잔해 속에는 연의 잔해 또한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승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연이 낙하 속도를 줄 여주었더라도 충돌 당시의 속도는 몸이 으스러질 정도였을 것이 다. 도대체 어떻게 된 작자일까?
그때 승려는 상대방의 키가 거의 3미터에 달한다는 사실을 깨 달았다. 터무니없이 큰 연 때문에 승려는 지금껏 그 자가 얼마나 거대한지 모르고 있었다. 승려는 곧 어떻게 된 사태인지 이해했다. 하지만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그래서 승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괘, 괜찮으십니까?”
“너 뭐야! 약 올리냐!”
상대방은 무시무시한 부리를 승려에게로 휙 돌렸다. 승려는 오금이 저려왔다.
“지나가다가 추락하는 것을 보고 달려왔습니다. 어디 다치시진 않았습니까?”
분노 때문에 어쩔 줄 몰라하던 상대방은 그제야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안 다쳤다. 제기랄, 안 다쳤다고! 이제 안심이냐?”
“대단하군요. 그렇게 떨어졌는데 안 다치시다니. 레콘이 아니 셨다면 죽었을 겁니다.”
레콘은 부리를 딱 소리나게 부딪쳤다. 인간이라면 코방귀를 뀌 는 것에 해당하는 몸짓이었다. 승려는 경외감을 감추지 못한 채 레콘의 팔다리를 훑어보았다. 곳곳에 찰과상을 입었는지 깃털이 군데군데 피에 젖어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은 곳은 없는 모양이다. 승려는 그를 만져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 만 레콘은 승려가 바라보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은 채 하늘을 날고 있는 네 개의 연을 쳐다보았다.
승려 또한 하늘을 쳐다보았다. 나머지 네 개의 연은 하늘치에 게로 접근하고 있었다. 레콘은 발을 동동 굴렀다.
“조금만 더 가! 조금만 더!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여, 제발! 밧줄 더 풀어, 이 잡것들아!”
하지만 행운은 이 대담한 모험가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연하자면 100미터쯤 멀었다.
연줄은 하늘치에게서 약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동이 나 고 말았다. 연들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어쩔 줄 몰라했지만 하늘 치는 그들의 머리 위를 유유히 지나갔다. 계곡 아래쪽 사람들은 연이 위험에 처하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들이 밧줄을 다 시 감아들이고 있는 것을 본 레콘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레콘은 벼슬을 쥐어뜯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승려는 가쁜 숨을 가다듬고는 좌절한 레콘을 위로했다.
“정말 대담무쌍한 계획입니다. 저는 거의 성공하는 줄 알았어 요. 하늘치가 약간만 더 낮게 날았으면 틀림없이 성공했을 겁니다.”
레콘은 승려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계곡 건 너편의 하늘로 유유히 헤엄쳐가는 하늘치의 꼬리 지느러미만을 바라보았다. 하늘치는 조금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헤엄치고 있었 다. 그들이 고독한 비행을 계속한 이래 수천 년 만에 비로소 지 상의 존재들과 만날 뻔했다는 것, 그리고 불과 100미터의 거리만 남겨둔 채 그 접촉이 실패했다는 사실은 저 거대한 생물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듯했다. 하늘치는 완벽히 무관심한 모습으로 저편 하늘로 사라져갔다.
마침내 하늘치의 모습이 산맥 너머로 사라졌을 때는 많은 시간 이 지난 후였다. 감동에 젖어 있던 승려는 레콘이 일어나서 깃털 을 터는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레콘은 부서진 연을 돌아 보며 투덜거리다가 갑자기 노기에 차서 외쳤다.
“롭스 이 자식, 죽여버릴 테다! 100미터나 모자라다니!”
승려는 롭스가 누군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 자의 목숨이 명재경 각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승려는 레콘을 말리 려 했지만 다음 순간 레콘은 이미 산 사면을 뛰어내려가고 있었 다. 뛴다기보다는 난다에 가까웠다. 승려는 부리나케 그 뒤를 따 라 달려갔다.
숨 넘어갈 지경이 되어 계곡 아래쪽에 도달한 승려는 사태가 예상보다 훨씬 덜 심각한 것을 알게 되었다. 레콘은 롭스라고 짐 작되는 털복숭이 인간을 향해 화를 내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롭 스는 레콘을 상대로도 조금도 기죽지 않은 모습이었다. 심지어 그 롭스는 레콘을 쩔쩔매게 만들었다.
“이 우라질 대장놈아, 네가 연에 타겠다고 발광하지만 않았어 도 연줄은 충분히 남았어! 그 지랄 같은 고집 때문에 태워줬더니 엉뚱한 밧줄을 잘라서 연을 박살내냐!”
승려는 눈을 크게 떴다. 인간이 저럴 수는 없다. 레콘을 상대 로 저렇게 마구 말할 수 있는 것은 같은 레콘뿐이다. 놀라움 속 에서 롭스를 관찰하던 승려는 잠시 후에야 롭스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대장이라 불린 레콘은 면구스러운 투로 말했다.
“젠장. 흥분했단 말이다. 마침내 하늘치의 등에 오른다고 생각 하니까 흥분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어, 그리고 내가 제대로 밧줄을 잘랐더라도 어차피 실패했을 거 아냐? 다른 연들도 못 올 라갔어!”
“그러니까 처음부터 연에 타겠다는 소리는 안 했어야지! 우리 가 말렸잖아! 연줄이 모자라게 된 건 네녀석의 고집 때문이라고! 대장 네놈을 날려올리느라고 다른 밧줄이 부족했던 거야!”
레콘은 폭풍 같은 숨소리를 냈지만 뭐라 대꾸하지는 못했다.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도 사태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피식거릴 누구도 롭스의 목숨을 걱정하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그 때 롭스가 승려를 발견했다.
“응? 중인가? 무슨 볼일이 있나?”
승려는 이 방자한 질문에 화를 내지 않았다. 그의 추측이 맞다 면 롭스는 현재 그 겉모습과 달리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 서 승려는 공손히 손을 모아 합장하며 말했다.
“저는 오레놀이라고 합니다. 여기 계신 레콘께 용무가 있어서 왔습니다.”
레콘은 그 말에 놀라 눈을 껌뻑거렸다.
“무슨 말이냐? 지나가던 길이라고 한 것 같은데?”
“이곳으로 오던 중이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계신 분들의 지휘자인 티나한이라는 이름의 레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당신이 그 분인 것 같군요.”
“내가 티나한이긴 한데, 나를 왜 만나러 온 건데?”
“저는 하인샤 대사원에서 왔습니다.”
갑자기 티나한의 벼슬이 굳어졌다. 롭스 또한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황급히 말했다.
“아, 그러시군요. 잠시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인간으로 바뀌셨습니까?”
“예? 아, 아니요. 도깨비입니다. 킴이 편하시겠습니까?”
오레놀은 웃으며 그 군령자(群靈者)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편하실 대로 하셔도 좋습니다만 모습이 인간이시니 아무래도 인간이 앞으로 나와주시면 제가 덜 혼란스럽겠군요.”
오레놀의 예측대로 롭스는 군령자였다. 다수의 영을 가지고 있는 군령자가 아니라면 어떤 인간이 레콘을 향해 마구 대할 수 있겠는가. 티나한을 상대한 것은 롭스 속에 있던 어떤 레콘의 영이었을 것이다.
오레놀의 요구대로 인간의 영을 전면에 내세운 롭스는 티나한 과 함께 그를 근처에 있는 오두막으로 데리고 갔다. 다른 사람들 이 따라오려 했지만 롭스는 그들을 모두 쫓아버렸다.
오두막 안은 지저분하고 어두웠다. 티나한은 연장과 잡동사니 가 잔뜩 쌓여 있는 탁자 한 귀퉁이를 슬쩍 들어 간단히 탁자를 치우더니 오레놀을 그 옆의 의자에 앉게 했다. 그리고 롭스는 궤 짝에서 술병과 그릇을 꺼내어 탁자 위에 놓았다. 하지만 오레놀 은 술을 사양했다. 롭스는 어깨를 으쓱인 다음 그릇을 치워버렸 다. 그러고는 술병째로 한 모금 마신 다음 티나한에게 건네었다.
“다른 건 없군요. 물이라도?”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가 날짜를 아주 잘 잡아서 왔군요. 굉 장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공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티나한이 고집만 부리 지 않았어도.”
롭스는 그렇게 말하며 티나한을 쏘아보았다. 티나한은 부리를 딱 부딪쳤고, 오레놀은 미소지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입과 부리를 다물었다. 잠시 탁자 주위는 끔찍한 침묵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티나한이 못 견디겠다는 듯이 외쳤다.
“좋아! 오레놀이라고 했지? 도대체 며칠 밀렸지?”
“반년입니다.”
티나한은 기겁한 얼굴로 롭스를 돌아보았다. 롭스는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벌써 그렇게…… 아니, 언제 시간이 그렇게 흘렀죠? 죄송합니다. 외진 곳에 있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절대로 떼 어먹으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 대사원에서는 여러분들의 성실성을 의심하지는 않았습니 다. 무슨 착오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제가 사정을 알아보러 온 것입니다.”
오레놀은 그렇게 말한 다음 약간 미안한 듯한 웃음을 지었다.
“이왕이면 여러분들이 성공하신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왔습니다.”
“성공할 수 있었어! 너도 봤잖아!”
티나한이 탁자를 내리쳤다. 매우 당연하게도 탁자는 박살이 나 고 말았다. 오레놀과 티나한은 얼빠진 표정으로 부서진 탁자를 내려다보았고 롭스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신음을 흘렸다.
“아주 거덜을 내는구나. 젠장.”
티나한은 고개를 떨구었다. 부서진 탁자를 대충 밀어낸 롭스 는, 그제야 마음이 좀 가라앉은 듯 차분하게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스님. 저희들은 지금 원금은커녕 이자 도 드릴 형편이 못됩니다. 이 탁자라도 드려야 할 형편인데, 불 행하게도 그것마저 우리의 존경하는 대장께서 박살을 냈군요. 하 지만 저희들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직접 보셨으니 더 설명드릴 필요도 없겠군요. 저희들의 계획은 완벽합니다.”
“아, 네. 정말 대단한 광경이었습니다. 저는 대사원을 떠나올 땐 반신반의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치의 등에 올라가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이젠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대단히 위험하게 보이긴 하지만 성공할 가능성도 있음직하군요. 그런데 성공하셨을 경우 어떻게 내려오실 작정이셨죠?”
“연줄을 타고 도로 내려올 겁니다. 연이 하늘치의 등에 올라서 면 도르래 쪽에서 밧줄을 끊는 거죠. 그러면 올라갔던 사람은 언 제든 밧줄을 타고 내려올 수 있습니다.”
오레놀은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도대체 이성이라는 것을 가지 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2,000미터는 족히 될 높이에서 밧줄 을 타고 내려오다니, 오레놀이라면 죽었다 깨도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레놀은 그 광경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성공하지 못했죠?”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제발 조금만 더 말미를 주십시오. 방금 전 그건 마지막 연습 같은 거였습니다. 예, 그렇게 생각하면 되 죠. 준비도 연습도 다 끝났으니 다음 번엔 반드시 성공합니다!”
“예. 그러시길 바랍니다.”
오레놀의 대답에 롭스는 눈을 크게 떴다.
“말미를 더 주시는 겁니까?”
티나한 또한 기대감이 가득 담긴 눈으로 오레놀을 바라보았다.
오레놀은 팔목에 건 염주를 꺼내어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겠습니까?”
롭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 머뭇거리던 롭스는 겨우 입을 열었다.
“여섯 달 정도가 필요합니다.”
오레놀은 롭스를 빤히 바라보았고 롭스는 그 시선에 얼굴을 붉혔다. 오레놀은 조용히 말했다.
“반년을 더 기다리라는 말씀입니까?”
“반년 후면 확실히 성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치의 이동에 대해 많은 것을 조사했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우 리가 기록한 장부가 있습니다.”
그리고 롭스는 오두막 한 구석에 쌓아둔 두꺼운 장부를 가져왔 다. 양피지를 묶어서 만든 그 장부는 얼마나 뒤적거렸는지 귀퉁 이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롭스는 그 책에 기록된 숫자들과 기 호들을 가지고 오레놀의 넋을 반쯤 흩어놓았다. 오레놀은 롭스의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결론은 그럭저럭 알아들었다. 롭스는 향후 여섯 달 이내에 일곱 마리의 하늘치가 바이소 계곡 을 지나갈 텐데, 그중 두 마리가 적당한 고도로 통과하게 될 거 라고 자신하는 듯했다.
“다른 다섯 마리는 덩치가 훨씬 큽니다.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 다만 하늘치는 덩치가 클수록 더 높이 날지요. 물론 덩치가 큰 녀석의 등에는 더 굉장한 유적이 있지만 거기까지 날아오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좋은 바람이 분다고 판단한 이 바이 소 계곡에서도 그 정도 높이까지는 날아오를 수 없습니다. 오늘 통과한 것 같은 조그마한 녀석만이……………..”
오레놀은 그 대목에서 신음을 흘렸다.
“저희들의 연으로 날아오를 수 있는 높이에서 날아다닙니다. 그런 꼬마들을 기다리려면 여섯 달은 필요합니다.”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우려를 느끼지 않을 수 없군요.”
롭스는 눈을 부라렸다.
“우려라니요! 우리의 예측에 이견이라도 있냐?”
롭스의 말투가 중간에 바뀐 것을 보니 다시 레콘의 영이 뛰쳐나온 듯했다. 오레놀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하늘치를 오늘 처음 본 사람입니 다. 당연히 여러분들의 말씀을 믿습니다. 제가 느끼는 우려는 하 늘치가 아니라 여러분들에 관한 겁니다. 이자도 갚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향후 여섯 달 동안 이곳에서 어떻게 지내실 생각입니까?”
롭스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한숨을 쉬며 장부를 덮었다. 티나한 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젠장. 힘들 테지. 하지만 버틸 수 있어. 바이소 산에는 먹을 만한 것들이 있어. 어떻게든 여섯 달은 버틸 수 있을 거야. 그러 니 그건 걱정하지 마. 너희들은 상환 기간만 연장해 주면 돼.”
“여러분들은 꽤 인원이 많더군요. 말들도 있고.”
“그래도 버틸 수 있어. 말이 있으니까 정 안 되면 밭뙈기라도 갈면 되는 거야.”
“여섯 달 뒤에 여러분들이 모두 굶어죽거나 도망치기라도 하면 저희들은 빌려드린 돈을 상환받을 수 없을 텐데요.”
“그런 일은 없어! 나는 반드시 하늘치의 등 위에 올라갈 거라 고!”
오레놀은 다시 염주를 만지작거렸다. 티나한은 그 염주가 신경 에 거슬린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꺼내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롭스는 젊은 승려의 입에서 현실성이 없 으니 장비를 모두 압류하겠다는 말이 나올까봐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오레놀이 말했다.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뭐? 무슨 제안인데?”
“대사원에서는 레콘 한 명을 필요로 합니다.”
“레콘?”
“예. 그래서 대사원에서는 티나한 당신이 대사원을 위해 어떤 일을 해 주길 바랍니다. 그것을 해 주신다면 지금까지 빌려가신 돈을 모두 탕감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여섯 달 동안 필 요하신 자금을 다시 빌려드리겠습니다.”
티나한과 롭스는 이 굉장한 조건에 그만 넋이 나간 듯했다. 롭 스가 먼저 정신을 수습하고 말했다.
“그 일이라는 것이 뭡니까?”
“다시 인간이신가요? 죄송합니다만 그 일의 내용은 일을 할 분 에게만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간이 넉 달 정도 필요할 테고,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는 것은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롭스는 오레놀이 마지막에 끼워넣은 말이 티나한을 겨냥한 것 이라고 생각했다. 위험한 일이라고 했을 때 도망가는 레콘은 어 디에도 없다. 과연 티나한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흥. 얼마나 위험하기에?”
하지만 오레놀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오레놀은 걱 정스러운 눈빛으로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이런 비유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물에 빠지는 것만큼이나 위험합니다.”
티나한의 벼슬이 뻣뻣하게 곤두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