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0장 – 출발하는 수탐자들 (3)
그날 저녁, 사모와 륜은 무학당의 그들 방에 모여 앉았다. 마루나래는 마당에서 두억시니들과 함께 선선한 밤바람 속에 잠들기를 원했고 아스화리탈 또한 지붕 위에 앉아 있기를 원했기에 그 둘은 오붓하게 앉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주고받는 니름은 그다지 오붓한 것이 되지 못했다.
사모는 륜이 들려주는 니름을 들으며 무심히 쉬크톨의 칼몸 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인간 검법가라면 질색을 하며 싫어할 동작이었지만 사모는 쉬크톨의 견고함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다. 그래서 륜은 차가운 금속 위에 불꽃 같은 열이 드러났다가 곧 식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모는 칼몸을 누르는 손가락의 압력과 각도, 그리고 움직이는 속도 등을 자유로이 변화시키면서 온갖 온도로 칼몸을 번득이게 했다. 게다가 사모는 그것이 식는 속도까지 면밀히 계산했다. 어느 한 부분이 오랫동안 식어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어김없이 그곳에는 손가락 끝을 비스듬히 세워 누름으로써 만들어진 강렬한 획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가에겐 그림이 없었지만, 사모가 그리는 것은 ‘춤추는 그림’이었다. 물론 어떤 자연물도 닮아 있지 않았고 굳이 따지자면 수학적인 문양의 반복이었다. 수식을 시간과 면적, 그리고 열로 표현한 것 같은 춤추는 문양들. 륜은 사모가 고명한 무용가였음을 떠올렸다. 무용가는 무의식적으로 율동한다. 그것은 나가이며 무용가인 자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었다. 그린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래서 사모는 륜이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것을 무심히 멈춰 버렸다. 륜은 상실감을 느끼며 사모의 니름을 기다렸다.
<케이건이 나를 왕으로 만든 다음 죽게 내버려 둘 거라는 니름이구나?>
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건이 말하는 식으로 니른다면, 누님이 북부의 눈물을 다 마신 다음 그 독기에 죽어 버리도록 내버려 둘 작정인 겁니다.>
사모는 또다시 듣게 된 눈물을 마신다는 이야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녀는 동생의 니름과 케이건의 말에 공통적으로 함의되어 있는 묘한 의미를 지나치지는 않았다. 케이건은 ‘죽기 위해 북부로 온 당신은 북부의 왕’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바꿔 말하자면 북부의 왕은 북부에서 죽어야 되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된다.
탐탁지 않았지만 사모는 그 논리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케이건의 논리대로라면 나는 왕이 된 다음 죽어야 되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그는 나가 살육자예요. 가장 화려한 방법으로 누님을 죽일 계획에 착수한 거죠.>
<단지 나를 죽이기 위한 목적만으로 내게 무릎 꿇고 경배했다는 거야?>
<동시에 북부를 살린다는 목적도 있었겠지요. 케이건은 저를 위해 죽으려 했던 누님의 모습을 보고 그 생각을 떠올린 것이 분명합니다. 누님이 북부의 왕이 된 다음 그들의 눈물을 다 마시고 죽으면, 그들은 살아날 수 있을 겁니다.>
사모는 눈살을 조금 찡그렸다.
<지나치게 추상적이잖아. 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정도까지밖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누님이 죽으면 북부가 살아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모는 쉬크톨을 칼집에 꽂아 넣으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그 칼날을 내려다보며 닐렀다.
<이곳에 오면서………. 그러니까 길을 만드는 인간들이 있던 곳이었어.>
<시구리아트 유료 도로당 니름이십니까?>
<응? 아, 그래. 그곳에 도달하기 직전, 그 산맥에 비가 참 많이 왔지. 그때 나는 내 뒤를 쫓던 두억시니들이 불어난 계곡물 때문에 계곡을 넘지 못하는 것을 보았어. 나는 그들을 관찰했고, 결국 그들이 퍽이나 야심찬 건축학적 위업에 도전하는 광경을 목격했지. 그들은 손으로 계곡물을 퍼내기 시작했어. >
사모가 그 장면에 대한 기억을 함께 보냈기 때문에 륜은 그것을 볼 수 있었고, 그래서 실소하고 말았다. 하지만 사모는 웃지 않았다.
<나는 우습지 않았어.>
<아, 그러셨나요.>
<그래. 그래서 나무를 잘랐지.>
륜의 몸에서 비늘이 섰다.
<네?>
<내가 있는 쪽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어. 그것을 베어서 계곡에 걸쳐 다리를 만들어 주었지. 나뭇꾼 일은 처음 해 보는 것이었지만, 쉬크톨과 마루나래가 있어서 그럭저럭 할 수 있었어. >
<두억시니를 위해 나무를 죽이셨단 말입니까?>
<응.>
륜은 불안한 눈빛으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그냥 그 이야기가 떠오르는군.>
<누님.>
사모의 손에 쉬크톨이 한 바퀴 회전했다. 그것이 칼집 안으로 사라졌을 때 사모는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륜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사모는 벽에 걸어 둔 흑사자 모피를 집어 들며 닐렀다.
<먼저 자도록 하렴.>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사모는 대답하지 않았다. 륜은 그녀를 따라가겠다는 듯이 일어났지만 사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륜은 도로 바닥에 앉았다. 사모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문을 나섰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마루 가운데 선 사모는 잠시 그곳에서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축대 아래쪽에 멀리 열 덩어리가 누워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더 먼 곳, 엉겨 있는 거대한 열 덩어리들도 있었다. 사모는 마루 아래로 내려섰다.
하루 종일 쾌청한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당은 젖어 있었다. 젖은 흙을 밟으며 걸어간 사모는 곧 마당 한가운데 도달했다. 그곳엔 케이건이 상의를 벗은 채 땅에 똑바로 누워 있었다. 사지를 모두 펴고 허리 옆의 땅에 바라기를 꽂아 두어 얼핏 보면 배에 칼을 맞고 쓰러져 있는 시체로 착각하고 기겁할 모습이었지만, 체온을 볼 수 있는 사모는 그런 오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안 추워?”
“시원해.”
해가 떠 있는 시간 동안 케이건은 계속해서 먹고 쉬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땀에 젖어 행동이 불편해질 때마다 샘터에서 물을 뒤집어쓰고, 그리고 또 칼을 휘둘렀다. 긴 여름의 낮을 고려해 본 사모는 케이건이 적어도 열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고 판단했다. 그 때문에 마당은 물과 땀으로 젖어 있었고, 무학당으로 돌아온 티나한은 화를 내며 마당을 건너 뛰어야 했다. 마당 저편에 누워 있던 마루나래가 슬쩍 몸을 일으켰다. 마루나래는 몇 걸음 만에 사모에게 도달했다. 사모는 그 갈기를 잡아 힘껏 흔들어 주었다. 두억시니들도 일부 일어났다. 사모는 그들을 향해 앉아 있으라는 손짓을 하고는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케이건은 여전히 누운 채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모는 마루나래의 허리를 붙잡아 억지로 앉힌 다음 그 등에 올라 앉았다. 케이건과의 거리가 그냥 서서 내려다보는 것보다 더 멀어졌고, 그래서 사모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땅에 내려섰다. 사모는 마루나래를 밀어서 옆으로 눕히려 했다. 마루나래는 그것을 장난이라고 생각하고는 자꾸 일어서려 했다. 사모는 한참 후에야 마루나래를 눕힌 다음 그 허리에 앉아 케이건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케이건은 별을 바라보며 안쓰럽다는 듯이 조용히 말했다.
“참 말 안 듣는 방석이군.”
사모는 헐떡거리며 대답했다.
“그래도 크기에 비해 휴대는 간편해.”
“젖은 바닥에 앉기 싫은 거라면, 저쪽에 내 돗자리 있어.”
사모는 속으로 악담을 잠깐 중얼거린 다음 마루나래의 등에서 내려왔다. 잠시 후 사모는 허리에 돗자리를 끼고 돌아와서는 케이건 옆에 그것을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케이건을 내려다보았다.
“회담 준비하기 힘들군. 일어나 앉아.”
“힘들어.”
“사람들이 그러지 말라는 데도 듣지 않고 하루 종일 칼 휘둘렀으니 그건 네 책임이야. 일어나서 예의를 갖춰.”
“싫어.”
“마루나래. 깔고 앉아 버려.”
케이건의 상체가 스르륵 일어났다. 케이건은 흙먼지와 땀으로 뒤엉킨 머리카락을 붙잡아 뒤통수로 쓸어 넘기고는 사모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사모는 돗자리 뒤편에 드러누운 마루나래에게 등을 기댄 채 그런 케이건을 마주 보며 웃었다. 케이건은 말했다.
“그쪽이 편해 보이는군.”
“원하면 너도 이리 와서 기대어 앉아.”
케이건은 마루나래의 문짝만 한 머리를 흘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양하겠어.”
상체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 낸 케이건은 사모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회담 주제는 뭐지?”
“케이건 드라카는 사모 페이를 죽일 작정인가.”
“그건 이미 말했던 건데.”
사모는 케이건의 머리 한쪽에 붙어 있는 커다란 흙덩이를 보며 말했다.
“나는 ‘죽기 위해 북부로 온 자는 북부의 왕이다.’라는 말이 ‘북부의 왕은 북부에 와서 죽어야 한다.’는 말로 도치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그건 네 책임이지.”
사모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케이건의 머리에 붙은 흙덩이를 떼 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혹 인간에게도 니름을 전할 수 있을까? <케이건. 왼쪽 머리를 털어 봐. > 케이건의 왼손이 머리 옆으로 올라갔을 때 사모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케이건은 왼손을 주먹 쥐어 턱을 받쳤다. 한숨을 쉰 다음, 사모는 손으로 케이건의 왼쪽 머리를 가리켰다. 흙덩이를 털어 내는 케이건을 보며 사모는 말했다.
“내가 왕이 된 다음에 죽으면, 그게 북부인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 거지? 처음부터 없었던 것보다 더 나쁠 것 같은데.”
“그 질문에 대한 대답도 이미 했는데.”
“어느 거지?”
“차차.”
“아아, 차차 알게 될 거라는 대답 말이군. 그렇다면 이걸 물어보지. 네가 나를 죽일 건가?”
“나는 아라짓 전사다. 왕을 죽일 수는 없어.”
“그러면 내가 어떻게 죽게 되는 거지?”
“아마 심장 파괴겠지.”
“그게 뭔데?”
케이건은 사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심장 파괴에 대해 설명했다. 사모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다가 곧 비늘을 부딪쳤다. 케이건이 설명을 끝냈을 때 사모는 충격으로 굳은 얼굴을 한 채 인간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야?”
“륜에게 물어봐.”
사모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케이건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절대적 확신의 대상이 거짓으로 판명되는 것에서 오는 충격은 끔찍하다. 그 절대적 확신의 대상이 자신의 불멸성이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다. 사모는 한참 동안 낯선 것을 보는 시선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대충 어떤 전개가 되는 건지 알겠군. 내가 왕위에 오르고, 북부인들을 지휘하여 내 동족들과 싸우고, 그리고 내 동족들은 배신자인 내 존재를 깨달은 다음, 심장탑에 보관된 내 심장을 파괴하는 것이군. 그리고 나는 죽는 것이군.”
“그렇게 될 가능성이 가장 높지.”
“어떻게 죽으라는 이야기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는 거지? 지나치게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조금도. 나는 상황 속에 내포된 조건들을 조합해 보았을 뿐이야. 너는 흑사자 모피를 걸친 채 북부로 왔어. 대호는 너를 따르지. 그리고 네 심장은 하텐그라쥬에 보관되어 있고. 결론은 명확해. 너는 북부의 왕이 되기 위해 왔고 북부의 왕으로서 죽어야 하지. 그리고 남은 우리는 아마도 네게 추모를 보낸 다음, 북부를 지키고 여신을 구출할 수 있을 거야. 어쩌면 륜 페이를 고향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사모는 어이없는 얼굴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내가 왕으로서 죽는 것만으로 그 모든 일이 가능해질 거라는 거야?”
케이건은 팔의 소금기를 털어 내며 대답했다.
“너는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한 번 시도해 본 일이잖아. 너는 스스로 죽음으로써 륜 페이가 살 수 있게 하려 했지.”
“그건 쇼자인테쉬크톨이라는 규칙이 있었기 때문이야.”
“모든 사소한 규칙들은 그 속에 더 거대한 규칙의 일부를 담고 있지.”
“그 거대한 규칙이 뭔지 삼가 묻고 싶은데.”
케이건은 입을 다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 가늠하기 힘든 듯한 모습이었다. 사모는 마루나래의 털을 만지작거리며 기다렸다.
케이건은 갑작스럽게 질문했다.
“단풍에 대해서 아나?”
사모는 고개를 갸웃했다.
“들어는 봤어. 날씨가 추워지면 나뭇잎의 색깔이 변한다는 이야기 말이지?”
“그래. 너희들의 밀림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지. 그리고 직접 보게 되더라도 우리들만큼 그 색깔에 큰 감동을 받기는 어려울 거야. 이 파름 산도 가을이 되면 퍽 훌륭한 단풍이 들지. 그러고 나서 나무들은 낙엽을 떨어뜨리고 헐벗게 되지. 동물과 식물의 재미있는 차이야. 동물들은 겨울이 다가오면 더 길고 두툼한 털을 가지게 되는 놈들이 많지. 혹은 음식을 잔뜩 섭취해서 체중을 불리거나 하지. 그런데 나무들은 겨울이 다가오면 오히려 헐벗지.”
“그야 나무들은 체온을 유지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지.”
“그래. 하지만 나무들은 그 잎으로 태양을 마시지. 그렇다면 햇빛이 부족한 겨울에는 더 많은 나뭇잎이 필요한 것 아닐까? 그 편이 더 많은 햇빛을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왜 나무들은 반대로 행동하는 거지?”
“나뭇잎을 늘여서 얻게 되는 이득보다 나뭇잎을 만드는 데 필요한 양분을 아끼는 쪽의 이득이 더 크기 때문이겠지.”
“정확해.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지. 위기라고 할 수 있는 겨울이 왔을 때 나무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을 확장하는 대신 자신의 일부를 죽이는 선택을 하지. 그런데 믿기 어렵겠지만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집단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야. 사람들의 집단은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일부를 죽일 수밖에 없어. 다른 모든 구성원들을 살리기 위해 죽어야 하는 이 개인은 놀랍게도 모욕과 혐오, 심지어 폭력의 대상이 되지. 왜 그런가 하면, 집단의 구성원들이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공격하기 시작하면 그 집단이 와해되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들은 서로 공격하는 대신 만장일치하에 한 명을 공격하지. 이것을 희생양이라고 부르지. 다시 나무로 돌아가 볼까. 겨울이 왔을 때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이 서로 공격한다면 나무는 죽고 말 거야. 그래서 뿌리와 줄기와 가지는 만장일치하에 잎을 공격해서 떨어뜨리는 거야. 잎의 희생으로 나무는 살아 남게 되지. 사람들의 집단도 마찬가지야. 희생양이 죽었을 때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은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공포와 증오를 가지지 않아. 그 공포와 증오는 희생양이 죽었을 때 같이 죽었으니까.”
사모는 멍한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레콘들의 경우가 바로 극단적인 예지. 그토록 강하고 호전적인 자들은 모이면 매일같이 그 내부에서 위기가 오게 되지. 그럴 때마다 자신의 일부를 죽인다면 레콘은 오래전에 멸망했을 거야. 그래서 레콘은 아예 집단을 이루지 않아. 그리고 너희 나가들의 경우도 레콘만큼이나 인상적인 극단이지. 너희들은 너희들 중의 일부를 죽이는 대신 모든 구성원이 한 번씩 죽음을 경험하지.”
“심장 적출?”
“맞았어. 그래서 너희들에게는 왕이 필요 없어. 나무로 친다면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뿐만 아니라 심지어 꽃까지도 조금씩 희생하여 겨울에도 꽃이 만발한 나무로 남아 있을 수 있게 된 것과 비슷하지.”
“정말 독특한 관점이군.”
“무엇보다도 독특하며 신기한 것은 증오의 대상이어야 하는 그 희생양이 어느 순간부터 존경과 애정, 숭배의 대상으로 바뀐다는 점이지.”
“어째서 그렇지?”
“조금 전 희생양이 죽었을 때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은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공포와 증오를 가지지 않는다고 말했어. 질서와 평화가 도래하는 거지. 이것은 집단에겐 신비롭기까지 한 경험이야. 구성원들이 서로 공격하면 무질서와 혼란이 오는데, 그 희생양을 공격하니까 질서와 평화가 온 거지. 그런 놀라운 차이는 집단을 당황하게 하고 결국 집단은 그 희생양에게는 다른 자와는 다른 특별함이 있다고 믿게 되지. 그래서 집단은 그런 희생양에게 특별한 숭배를 바치고 다른 자들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떨어지기 직전의 나뭇잎이 가장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야. 나무의 경우 그건 단풍이라고 부르지. 집단의 경우에는 뭐라고 불리는지 짐작할 수 있을 거다.”
“……왕이라 부르는군.”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말했다.
“옛 이야기 하나 하지.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우리의 마지막 왕은 권능왕이라는 작자였다. 최악의 왕이었지. 만약 네가 권능왕에 대한 평을 목록화할 생각이 있다면 ‘호평’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로 할애할 필요가 없다. 그의 무수한 악덕들 중에서, 사람들은 주로 만민 회의장을 찾아온 키탈저 사냥꾼들을 모욕한 사건을 그의 최고의 악덕으로 꼽지. 하지만 점잖은 자리에선 차마 거론하기 난처한 악덕도 있는데, 그가 남색자였고 동시에 근친상간자라는 점이 그렇지. 그는 아들을 사랑했어.”
마루나래는 움찔했다. 사모가 그 털을 꽉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모는 곧 그 털을 놓아주고는 똑바로 앉아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혐오스러운 이야기군.”
“그래. 권능왕은 여자는 죽이고 남자는 겁탈했던 아라짓 전사의 이야기를 즐겨 거론하곤 했지. 하지만 그도 자신의 남색 경력을 자랑하거나 하기는 힘든 시대에 살고 있었어. 더군다나 상대가 그 아들이니 이중의 죄악이지. 하지만 나는 그것도 그의 최악의 악덕은 아니라고 생각해. 내가 생각하기에 권능왕이 저지른 최악의 죄는 행방불명되었다는 거야.”
“행방불명이 최악의 죄라고?”
“나는 그것이 다시 없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아라짓 전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키탈저 사냥꾼들은 다른 북부인들과 손잡기를 거부하고 돌아갔지. 북부에는 어떤 희망도 없었어. 그런 암울했던 시절, 그는 북부의 유일무이한 희망이었지.”
“그런 파렴치한 자가 어떻게 북부의 희망이…………….”
“그런 파렴치한 자였기에 그렇다. 사람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악덕을 저지른 권능왕은 쳐 죽여 마땅한 인물이 되었지. 그는 그의 죄와 함께 살해당했어야 했다. 혐오와 증오의 만장일치 속에 사람들로부터 공격당하는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키탈저 사냥꾼들을 쫓아 버림으로써 자신의 어리석음을 이미 과시했던 그 자는 북부의 마지막 희망마저도 앗아 가 버렸지.”
케이건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조금 떨구었다.
“만약 그가 행방불명되지 않았다면, 왕의 자리에서 살해당했다면,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왕의 죽음을 경험한 북부는 부활의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왕으로서 죽으면 북부는 살아날 수 있다는 이야기야?”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