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0장 – 출발하는 수탐자들 (8)
하텐그라쥬의 공회당은 주로 가문 평의회를 위해 이용된다. 하지만 그 외에도 몇 가지 공적 업무를 취급하기도 하는데, 기록 보관소 또한 그런 공적 업무가 취급되는 곳이다. 기록 보관소는 평의회 일지를 보관하며 그 외에도 여러 종류의 기록물을 보관한다. 그리고 유언장이나 계약서 등의 중요 서류에 대한 위탁 보관을 하기도 한다. 비아스 마케로우가 공회당의 기록 보관소를 찾은 것 또한 중요한 서류를 맡기기 위한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비아스는 기록 보관소에 들어온 후 꽤 긴 시간이 지나도록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잔뜩 흥분한 기록 보관소장을 향해 비아스는 약간 짜증스럽게 닐렀다.
<콘수마 발텐. 물론 니르신 것처럼 사람에게는 개인차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 이외에 다른 약술사라도 80세 이상의 연령에게 소드락 복용을 권하지는 않을 겁니다.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심장을 적출했는데 무슨 문제가 생긴다는 겁니까?>
<물론 저도 전쟁이라는 것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전쟁이라는 것은 상당한 육체적, 정신적 긴장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드락을 복용한 가속 상태에서 그런 긴장을 계속 경험하는 것은 심장을 적출한 나가에게도 무리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수호자들은 연령 제한을 두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긴장? 잘 닐렀어요. 만약 이 성전(聖戰)에 나가지 못한다면 나는 긴장과 분노 때문에 죽고 말 겁니다!>
비아스는 성전이라는 니름에 놀라지 않았다. 하텐그라쥬에서 이미 널리 쓰이고 있는 니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니름이 내포하고 있는 바는 다시금 비아스를 놀라게 했다.
비아스는 나가가 교조적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사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며 사제 계급 또한 없는 레콘조차도 어떤 면에서는 교조적이라 할 수 있다. 레콘들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룩해야 하는 숙원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며, 그 숙원에 대한 타인의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건 이룩하고 말겠다는 그런 태도는 실로 교조적이다. 왕을 찾길 원하는 인간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깨비들의 모습 또한 교조적이라는 특성에 부합한다. 하지만 나가는 현실주의자이며 비이성적 태도를 거부한다. 심장 적출에 의해 획득한 불사의 육체는 다른 자들의 육체보다 훨씬 소중하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도 없는 일에 목숨을 걸고 도전하는 레콘과 같은 태도는 현실적인 나가에겐 도저히 불가능하다.
성전이라니! 그들의 마지막 전쟁이었던 대확장 전쟁도 실로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산 것을 먹는 나가에겐 숲이 필요했고 곡물을 먹는 불신자들에겐 개간된 땅이 필요했다. 대확장 전쟁은 대단히 현실적인 가치관의 대립이었으며 그곳에는 교조적인 태도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이성적인 나가들이 성전을 니르고 있는 것이다.
‘기적 때문일까?’
비아스는 다른 이유를 떠올리기 어려웠다. 수호자들은 여인들에게 실제로 행사되는 기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최고의 의사 결정자인 가주를 잃고 혼란과 두려움에 빠진 여인들은 수호자들이 행사하는 기적에 경도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비아스는 그런 설명에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두억시니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까?’
비아스는 그 설명이 더 마음에 들었다. 소중한 불사의 육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여인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설명으로는 콘수마 발텐이 보여주는 것 같은 태도를 설명할 수 없었다. 수호자들은 성전 참가 희망자들에게 나가다운 기준을 발표했다. 보다 전쟁에 익숙한 인간들이었다면 전쟁 경험이 풍부하다거나 무기를 잘 쓴다거나 체력이 높은 자를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 경험이 있는 나가들이 존재할 리 없으며 – 굳이 찾아본다면 정찰대 경험이 전쟁 경험과 가장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빗길에 미끄러진 경험을 가지고 풍부한 항해 경험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불사의 몸을 가진 나가들에겐 무기 다루는 기술이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따라서 수호자들은 소드락의 과다 복용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체력을 요구했다. 그런데 여든 살이 넘은 기록 보관소장이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소드락의 과다 복용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하텐그라쥬 전체에 만연해 있었다.
<부탁입니다. 비아스 마케로우. 당신과 같은 우수한 약술사가 보장해 준다면 우리 연배의 사람들이 훨씬 쉽게 성전에 참가할 수 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호자들이 지나치게 깐깐한 기준을 내세우고 있다고 투덜거리고 있어요.>
<콘수마. 나가서 싸우는 것만이 전쟁은 아닐 텐데요. 어, 그러니까 저는 언젠가 병참이라는 니름을 읽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싸워야 하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무기 등을 공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명을 하면서도 비아스는 자신이 니름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가들의 식량 수송대는 산 동물을 수송해야 할 것이다. 차라리 적군을 잡아먹는 쪽이 나을 것이다. 무기는 대장장이들이나 만드는 일이다. 콘수마에게 대장간 일을 하라고 니르면 결코 행복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아스는 상대방이 자신보다 더 전쟁에 대해 모를 거라는 것을 확신하며 계속 병참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스스로를 바보로 만드는 기분이었다.
결국 비아스는 다 포기하고는 수호자들을 만나게 되면 한 번 언급하겠다는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콘수마는 만족하며 비아스의 용건을 들어주었다. 비아스는 들고 갔던 서류를 내보였다.
<이 서류를 보관소에 맡기고자 합니다.>
<보통의 보관함으로 충분하겠군요. 잠시 기다리시죠.>
콘수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를 떴다. 홀로 남게 된 비아스는 자신이 들고 온 서류를 들추었다.
양피지 열두 매로 이루어진 그 간단한 문서는 카린돌의 유언장이었다. 갈로텍에게 유언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비아스는 그것이 협박을 목적으로 꾸며 낸 가상의 유언장일 거라고 생각했다. 카린돌을 좋아해 본 기억은 전혀 없지만 비아스는 여동생에 대해 알고 있었다.
‘멍청한 년. 꽁꽁 얼어 있다고? 어쩌면 그들은 서로 닮은 자매일지도 모른다. 카린돌은 지금을 사는 사람이었고 자신이 죽은 다음엔 세상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니를 것이다. 그 상관없다는 니름에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세상이 박살 나든, 그렇잖으면 원수들이 득세하여 행복하게 살든 ‘상관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아스 자신이 할 법한 말이다. 그런 카린돌이 유언장 따위를 쓸 리는 없을 것이다. 자신이 죽은 다음에 적들에게 타격을 입히느니 살아서 사이커로 찌르는 편을 택하는 것이 보다 카린돌의 성격에 부합한다. 아마도 비아스가 현재 느끼고 있는 위화감, 즉 나가들 사이에 만연한 교조적 태도에 대한 위화감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본다면 카린돌뿐일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비아스는 그 유언장이 거짓니름일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유언장은 존재했다. 엄밀하게 니른다면 그것은 카린돌이 작성했다고 주장하는 ‘공증인의 인장이 찍힌’ 유언장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유언장의 초고, 아니, 차라리 비망록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갈로텍이 닐러 준 것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11년 전, 페이 가문에서 발생한 요스비라는 남자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자신의 목격담과 륜 페이의 정신 속에서 읽어 낸 내용, 그리고 그것에서 비롯된 추리가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벌써 여러 번 읽었던 내용이지만 비아스는 다시 그것을 꼼꼼하게 읽었다. 그리고 그 문서가 어떤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현재로선 심장 파괴에 대해 폭로한다고 해서 갈로텍이 니른 것처럼 다룰 수 없을 정도로 큰 일이 발생할 것 같지는 않았다. 분노한 여인들이 수호자들을 공격하고 심장탑을 파괴하는 일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비아스는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예감했다. 즉 그렇잖아도 기적을 부리는 수호자들에게 겁을 먹고 있는 여자들이 그들에게 완전히 굴복하게 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어떻게 생각해 보아도 비아스는 폭로가 결코 현명하지 못하다는 결론밖에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심장 파괴는 수호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지켜온 비밀이었다. 비아스는 그것이 결코 쓸모없는 비밀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에겐 현재 수호자들에게 대항할 방법이 아무것도 었고, 따라서 비록 현재로선 무용한 비밀이라도 장래에는……………. 비아스의 몸이 굳었다.
비아스는 자신이 은연중에 수호자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수호자들은 그녀를 속이고 이용했다. 비아스의 몸에서 비늘이 부딪쳤다.
‘남자 따위가!’
비아스는 갈로텍이 왜 자신을 아직까지 죽이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거부한 남동생을 베어 죽인 여자가 끝까지 고분고분할 거라고 믿었던 걸까? 그렇게 자신만만한 건가? 비아스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면 나 같은 여자는 죽였어. 이용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아. 그렇게 나를 우습게 봤단 니름이지? 좋아. 그건 네 최악의 실수였어!’
비아스는 분노 속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시 어느 곳에 있더라도 눈에 들어오는 심장탑을 보며 비아스는 증오를 불태웠다.
‘당장은 비늘을 눕혀 주지. 온순한 척하겠어. 하지만 갈로텍. 불사를 획득하기 직전 등 뒤에서 칼을 맞았던 화리트를 생각하라고. 네 속에 있으니 잘 알 테지. 너는 네 영광의 순간이 다가오는 걸 무서워해야 해.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할 때, 갈로텍. 네 등 뒤엔 내가 있을 거야!’
콘수마는 곧 돌아왔다. 비아스는 보관함에 서류를 넣은 다음 봉인했다. 그리고 참조인 항목에 자신의 이름만을 기입했다. 이제 그 서류는 자신만이 읽을 수 있다. 비아스는 갈로텍에게 그것을 가져다줄 생각이 없었다.
‘공갈을 위한 거짓니름이었어요.’
그리고 다시 성전 참가의 연령 제한을 언급하기 시작한 콘수마의 니름을 자르며 닐렀다.
<알겠습니다. 수호자들에게 실험을 제안하겠습니다. 소드락을 복용하고 모의 전투라도 벌여 보자고 니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들이 성전에 종군할 수 있는지 객관적인 통계를 얻을 수 있겠지요.>
콘수마는 그 제안에 열렬히 찬성을 보내었다. 비아스는 웃으며 닐렀다.
<그런데 통계라는 니름에서 떠올랐습니다만, 평의회 일지를 참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안내해 드리지요. 따라오십시오.>
콘수마 발텐은 손수 비아스를 안내하여 평의회 일지가 보관되어 있는 보관소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의 요청에 따라 11년 전의 평의회 일지를 꺼내었다.
비아스는 곧 원하던 기록을 찾아낼 수 있었다. 11년 전, 하텐그라쥬에 기묘한 전염병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발병자는 남자 한 명뿐이었으며 따라서 전염병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었다. 하지만 평의회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발병자의 소지품과 사체를 모두 소각하는 처치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었다. 비아스는 카린돌이 가상의 사망 사건을 꾸며 낸 것은 아니라는비아스는 그럴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결론을 얻었다. 11년 전 페이 가문에서는 실제로 요스비라는 남자가 의문사를 했던 것이다. 비아스는 그 사건이 이렇듯 단순하게 취급된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심장을 적출한 나가가 돌연사했는데 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걸까?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때 그녀의 곁에 있던 콘수마가 웃으며 닐렀다.
<아아, 그 기록을 보십니까?>
<예? 아, 그렇습니다. 11년 전 전염병으로 누군가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것이 제 일에 관련된 것이 아닐까 해서 조사해 보고 싶었습니다.>
콘수마는 정신적 웃음을 터뜨렸다. 비아스는 어리둥절해졌다.
<전염병이라니, 우스꽝스러운 니름이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이렇게 기록이…….>
<이 사건을 기억합니다. 죽은 남자는 지커엔 가주를 화나게 했어요. 그 가문의 아이 중 하나를 공공연하게 아들이라고 불렀지요.>
<아들이요? 남자가?>
<그렇습니다. 그 남자, 제정신이 아니었을 겁니다. 지커엔 가주는 대단히 화가 났지요. 그리고 갑자기 그 남자가 ‘전염병’으로 죽은 거죠.>
콘수마는 전염병이라고 니르며 동시에 그 니름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는 감정을 덧붙여 보였다. 비아스는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의 나가들은 지커엔 페이 가주가 정신 나간 방문자를 해치운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커엔 가주를 존중하여 ‘소각’ 처분을 내린 것이다. 즉 지커엔 가주는 그것이 진짜 전염병이라고 믿었고 다른 자들은 지커엔 가주가 전염병을 빙자해서 남자 한 명을 태우길 원했다고 믿은 것이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피투성이가 된 남자를 태운 것이다. 비아스는 그것을 확인했다.
<확실히 소각했습니까?>
<물론이죠.>
콘수마의 니름에 담긴 의미는 분명했다. 전염병이 무서워서 태운 것이 아니라 재생하지 못하도록 태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요스비는 그때 그들의 생각과 달리 실제로 죽은 상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 심장 파괴를 실시한 수호자들, 그리고 그것을 목격한 륜과 카린돌뿐이다.
<알겠습니다. 그다지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군요.>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콘수마는 저명한 약술사인 비아스가 전염병이라는 니름을 믿었다는 것이 재미있다는 듯 계속 웃었다. 비아스는 적당히 부끄러워하는 척하며 콘수마에게 작별을 고했다. 기록 보관소를 나오며 비아스는 11년 전, 그 일을 알게 된 나가들이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자기 아들이라고? 미친 녀석이었군. 그 녀석은 어디에서 그런 황당한 개념을 얻은 거지? 불신자들과 사귀기라도 한 건가?>
비아스의 걸음이 갑자기 멈춰졌다. 비아스는 몸을 돌려 기록 보관소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조금 전 떠올렸던 생각을 다시 되짚어 보았다.
갑작스러운 충격이 그녀를 엄습했다. 비아스는 고개를 홱 돌렸다. 이번에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심장탑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개념들이 떠올랐고 비아스는 그것을 연결 지었다. 그러자 차츰 뚜렷한 의미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비아스는 정신없이 그 의미에 빠져들었다. 하텐그라쥬의 대로를 지나던 여인들은 굳어 버린 듯 멈춰 서서 얼굴을 계속 일그러뜨리는 그녀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비아스는 그것도 깨닫지 못했다.
스바치는 방문을 두드렸다. 무의미한 짓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바치는 계속 문을 두드리며 닐렀다.
<빨리! 빨리 열라고! 어서 이 문을 열어!>
밖에서 수호자의 짜증스러워 하는 니름이 들려왔다. 시간은 한밤중이었고 수호자는 그런 시간에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그러는 거야?>
스바치는 다급하게 닐렀다.
<카루가 허물을 벗으려고 해! 나를 다른 곳에 가둬줘. 그렇잖으면 카루를 다른 곳에 옮기든가!>
<뭐? 허물벗기?>
반문하는 니름에는 놀라워 하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스바치는 호통을 쳤다.
<그래! 제기랄, 어서 이 문을 열어!>
밖에서 들려오던 니름이 멈췄다. 스바치는 초조하게 문을 바라보며 계속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다시 날카로운 니름이 들려왔다.
<문에서 물러서! 문에서 보이는 벽에 몸을 붙이고 앉아!>
스바치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바닥에 누워 있는 카루를 조심스럽게 돌아간 스바치는 맞은편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문이 열렸지만 누가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스바치는 사이커를 쥔 몇 명의 남자들이 문 바깥쪽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스바치는 황급히 손으로 바닥에 있는 카루를 가리켰다.
<젠장, 보라고!>
사내들은 스바치와 카루가 모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것은 모두 네 명이었고 두 명은 카루의 곁에, 그리고 다른 두 명은 스바치에게 다가와 사이커를 겨누었다. 그러고 나서야 문쪽에 수호자가 나타났다. 수호자는 방 안의 광경에 위험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섰다. 스바치를 한 번 바라본 수호자는 허리를 숙여 카루를 내려다보았다. 스바치의 니름대로였다. 카루는 힘없는 표정으로 누운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그 얼굴에서는 윤기를 잃은 비늘들이 피부에서 분리되고 있었다. 수호자는 탐탁잖은 표정을 지었다.
<허물벗기가 맞군.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당연하잖아! 혼자 있게 해줘!>
<갇혀 있는 주제에 별걸 다 원하는군. 너희들의 편의를 위해 감방을 두 개로 늘이라는 거냐?>
감방을 두 개로 늘이려면 방을 또 하나 비워야 했다. 심장탑은 감옥이 아니며 방을 마련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감시할 인원도 늘어나야 했다. 수호자는 그것 때문에 짜증을 느꼈다. 스바치는 경악하여 닐렀다.
<그럼 이곳에서 허물을 벗으라는 거냐?>
<네가 눈 감고 있으면 되겠군.>
<이런 짐승 같은 놈아! 인정머리도 없는 거냐!>
수호자는 다른 남자들이 동요하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수호자나 수련자가 아니었고 수호자들에 의해 급히 모집된 남자들이었다. 따라서 수호자가 그런 가혹한 처사를 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들은 실망하고 분노할 가능성이 높았다. 수호자는 자신이 선택할 길이 제한되어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래, 좋아. 다른 곳으로 옮겨주지.>
<나를?>
수호자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스바치를 바라보았다. 허물벗기 때문에 힘이 빠져 있는 카루를 옮기는 것이 훨씬 안전한 것은 당연했다.
<내가 그렇게 멍청한 줄 아나? 너희 둘. 그 녀석을 들어 올려.>
카루의 좌우에 있던 자들이 사이커를 칼집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카루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힘이 빠진 카루는 자꾸만 쓰러지려고 했고 그래서 두 사람은 카루를 양쪽에서 붙잡았다. 그러나 카루는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다시 뒤로 휘청했다. 두 사람은 그만 카루를 놓치고 말았다.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난 카루는 그대로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카루는 양손에 든 사이커로 스바치의 좌우에 있던 남자들의 눈을 찔렀다.
<으아아악!>
남자들은 고통에 찬 니름을 토하며 쓰러졌다. 카루를 부축하던 남자들은 기겁하여 자신의 허리를 내려다보았고 칼집이 비어 있음을 깨달았다. 카루는 홱 몸을 돌려서는 그대로 수호자를 향해 돌진했다. 허물벗기 때문에 카루가 꼼짝도 못 할 지경일 거라 생각했던 수호자는 의외의 상황에 미처 대처하지 못했다. 카루의 두 사이커는 한 치의 벗어남도 없이 수호자의 눈을 찔러 들어갔다. 돌격의 속도와 매서운 증오 때문에 두 자루의 사이커는 그대로 수호자의 머리를 관통했다.
<안 돼!>
사이커를 뺏겼던 두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때 바닥에 앉아 있던 스바치가 벌떡 일어나 자신의 좌우에 있던 남자들의 사이커를 뽑아 들었다. 두 남자를 포위한 스바치와 카루는 그대로 둘을 쓰러뜨렸다. 그러고 나서 스바치는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카루는 쓰러진 다섯 남자를 난도질한 다음에야 스바치를 바라보았다. 스바치가 기대어 있던 벽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카루는 얼굴에 붙어 있던 비늘들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그것은 카루가 스바치의 등에서 뜯어낸 피부였다. 맨손으로 그것을 뜯어내는 것은 지독하게 힘들었다. 물론 스바치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었다.
<괜찮아?>
스바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다리가 비틀거렸다. 스바치가 쓰러지기 직전 카루는 재빨리 그를 부축했다. 그리고 계획을 실행하기 전부터 주장했던 것을 다시 주장했다.
<미안하지만, 스바치. 역시 도망쳐야겠어.>
<안 돼! 카린돌을 구해야 해! 그러면 모든 사태를 끝낼 수 있어!>
<그곳에도 지키는 자들이 있을 거야. 그 몸으로 싸울 수는 없어.>
<등가죽 좀 벗겨진 건 아무렇지도 않아!>
<스바치. 여기 이 녀석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당한 거야. 하지만 다른 수호자들은 여신의 힘을 쓸 거야. 정상적인 몸이라도 그런 자들과는 상대가 될 수 없어. 도망쳐야 해!>
<………제기랄, 도망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어! 우리 심장은 이곳에 있어. 수호자들은 간단히 우리를 죽일 거라고!>
카루는 스바치의 지적에 놀랐다.
<그렇군. 그렇다면 심장병을 가지고 도망치면 되지 않을까? 내 심장병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 자네 것도. 여기 오르내리면서 본 적이 있어. 여기서 멀지 않아.>
<카루! 심장병이 심장탑을 떠나도 상관없다면, 왜 여자들이 이곳에 놔두겠어? 자기 집에 놔둬도 되지. 심장병은 심장탑에 있어야 해. 그렇잖으면 소용이 없어.>
카루는 자신의 학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염증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럴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숨 가쁘게 고민했다. 심장병을 가지고 떠날 수도 없고, 놔두고 간다면 심장 파괴를 당하니 소용이 없었다. 카루는 잠깐 동안 수호자들의 심장병을 모조리 깨어 버리면 어떨까 하는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200미터나 되는 심장탑을 오르내리며 수호자들의 심장병만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들이 이름을 알지 못하는 수호자들도 많았다. 카루는 문을 닫으며 닐렀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군. 일단, 자네. 이 수호자 친구의 옷을 입어. 나도 다른 녀석의 옷을 입겠어.>
<무슨 생각이야?>
<더 니를 시간이 없어. 우리는 도망쳐야 해. 빨리 옷 갈아입어!>
스바치는 카루를 노려보다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수호자의 옷을 벗겼다. 카루 또한 남자들의 옷 중 피가 적게 묻은 것들을 골라 입었다.
다음 날 아침, 대금을 가지러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던 갈로텍은 기괴하기 짝이 없는 광경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는 눈앞에 있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바라보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갈로텍은 비늘을 부딪치며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카루와 스바치가 갇혀 있던 방에 도달한 갈로텍은 방 앞을 지키고 있던 자들이 없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갈로텍은 황급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갈로텍은 문을 쾅 닫았다. 문에 기대어선 갈로텍은 고개를 숙인 채 헐떡거렸다. 그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