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1장 – 침수(浸水)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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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11장 – 침수(浸水) (11)


주퀘도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 마케로우 장군. 그렇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조처도 제시해 볼 수 있겠나?”

“별다른 방법이 있을 리 없잖습니까? 페로그라쥬, 혹은 악타그라쥬, 최악의 경우라도 시모그라쥬에서 그들을 막아야 합니다. 절대로 하텐그라쥬에 접근시키면 안 됩니다. 키보렌이 불신자들에겐 필멸의 땅임을 보여 줘야 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줘야 합니다. 나가의 모든 군단과 모든 수호 장군과 수호자들을 소환해야 합니다.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땅에서 우리의 유일한 골칫거리를 처치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좋다. 마케로우 군단장. 지금 즉시 하텐그라쥬로 떠나라.”

“예?”

“못 알아 듣겠나? 너를 마호가니 군단의 군단장으로 임명한다. 당장 휘하의 병사들을 이끌고 냉혹의 도시로 떠나라. 그곳에서 마호가니 군단을 재편한 다음 하텐그라쥬 방어 계획을 수립하도록. 그리고 뱀단지를 통해 다음 지시를 내릴 때까지 대기하라.”

비아스는 눈을 빛냈다. 주퀘도의 내부에서 듣고 있던 갈로텍이 입을 움직였다.

“잠깐, 주퀘도, 군단장은 수호 장군이어야 합니다.”

“그 멍청한 규칙은 더 이상 효용이 없음이 밝혀졌잖나, 갈로텍? 수호 장군들은 물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고 수호 장군들의 효용 또한 거기까지야. 물을 통제한다는 것은 군단을 지휘하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오늘 마호가니 군단의 대패에서 이미 증명되지 않았나? 그로스는 자신의 군단을 잡아먹었어.”

“하지만 규칙은 규칙입니다. 형평성 문제도 있거니와 수호자들의 사기 저하도 고려해야…….”

“그만, 됐어. 더 듣고 싶지 않아. 비아스 마케로우가 마호가니 군단의 차기 군단장이야. 하텐그라쥬 방어는 그녀가 책임진다. 그 사실에 대해 더 불평하겠다면 나는 자네에게 작별 인사하고 저 아래에 처박히겠어.”

갈로텍은 입의 지배를 포기했다. 주퀘도는 많은 것을 요구한 적이 없었고, 따라서 갈로텍은 그가 요구하는 것은 반드시 들어 주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주퀘도는 입이 자유로워진 것을 느끼곤 웃었다. 그때 주퀘도는 비아스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뭔가? 더 할 말이라도?”

비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호가니 군단에는 수호 장군 키베인이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갈로텍이 대경실색했다. 그는 다시 입을 움직였다.

“아뿔싸, 그렇군! 키베인이 여기 있었군. 그는 어떻게 되었지?”

“알지 못합니다.”

갈로텍은 비늘을 세게 부딪치며 머리를 감싸쥐려 했다. 하지만 그의 두 팔은 머리로 향하는 대신 주퀘도의 지배에 따라 팔짱을 끼게 되었다. 주퀘도는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키베인이 여기 있었단 말이지. 시우쇠에게 당했다면 어쩔 수 없고, 살아 있다면 아마도 즈믄누리로 옮겨지겠군. 북부군은 키베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할 테니. 좋아. 그 구출은 내가 맡는다.”

“당신이 맡는다고요?”

“그래. 가까운 곳에 흑단 군단과 대나무 군단이 있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됐어.”

혼자서 묻고 대답하는 갈로텍의 모습을 보며 비아스는 비늘 서는 기분을 약간 느꼈다. 주퀘도가 말했다.

“마케로우 군단장. 휘하의 병사들 중 나를 흑단 군단이나 대나무 군단으로 안내할 자를 찾아오도록.”

“알겠습니다.”

비아스는 몸을 돌려 떠나갔다. 주퀘도는 웃었고, 그것은 당연히 갈로텍에게 발각되었다. 갈로텍은 얼굴을 불안한 표정으로 바꾸며 말했다.

“뭐가 즐거우신 겁니까?”

“마호가니 군단에 가장 많은 수호 장군이 있다는 이유로 거기에 키베인을 배치하자고 주장한 건 너였지? 그리고 나는 거기에 반대했고.”

갈로텍은 성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뭐라고 그랬어? 류의 저속한 자랑을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군요. 좋습니다. 그건 실수였어요. 하지만 그들이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군단을 택하리라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괄하이드는 똑똑해. 수호 장군들은 현재 보급할 수 없는 병력이지. 가장 많은 수호 장군을 보유한 마호가니 군단을 쓰러뜨림으로써 그는 우리에게 상당한 타격을 준 셈이지.”

갈로텍은 침통한 심정으로 동의했다. 여신이 봉인된 이후로 더 이상 새로운 수호자의 탄생은 불가능했다. 그들에게 신명을 부여해야 할 여신이 감금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퀘도는 계곡의 살풍경한 모습을 보며 말했다.

“키베인이 전사했다고 주장해 볼 생각은 없나, 갈로텍? 어차피 종군을 고집한 것은 키베인이었어. 그가 전사했다면 지도그라쥬에서 뭐라고 하겠나?”

“매력적인 제안이긴 합니다만, 안 됩니다. 키베인이 살아 있다면 지도그라쥬의 심장탑에 있는 그의 심장이 뛰고 있을 겁니다.”

“아차! 맞아. 그렇군.”

주퀘도는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갈로텍은 그다지 품위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그 동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손을 억지로 내리며 말했다.

“키베인이 살아 있는데도 구출하지 않는다면 지도그라쥬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반드시 구출해야 합니다.”

주퀘도는 웃으며 갈로텍에게 동의했다. 그는 키보렌의 대수호자를 구출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키보렌의 대수호자는 사지를 마구 팽개친 자세로 드러누워 있었다.

그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몸가짐이었지만, 그의 주위에 있는 다른 나가들은 크게 개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릇 배에 구멍이 난 자라면 그가 세계의 폭압성과 만연한 야수성에 당황하여 울음을 터뜨린다 하더라도 용납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키보렌의 대수호자는 울지 않았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신분에 어울리는 품위를 보여 주고 있다 할 것이다. 그래서 키베인은, 주위에 있는 다른 네 명의 나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배에 난 구멍에 대해 신경 쓰면서도 자신의 위엄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

그러나 키보렌의 대수호자가 원래 위엄에 신경을 쓰는 위인이었냐고 묻는다면 대수호자는 아마도 딴청을 피울 것이다. 키베인은 복잡한 외교적 이전투구의 결과로 누구도 만지기 싫어하는 벌집이 된 채 여기저기로 떠넘겨지다가 엉겁결에 자신에게 오게 된 키보렌의 대수호자라는 지위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뇌룡공 륜 페이는 용인다운 날카로움으로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다. 키베인은 신명을 봉인당함으로써 키보렌의 대수호자라는 지위까지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 크게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았다.

대수호자라는 해괴한 지위는, 근본적으로 하텐그라쥬의 수호자들이 자신의 위업에 지나치게 도취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탄생하게 되었다.

하텐그라쥬의 수호자들은 기나긴 시간과 많은 노력을 기울여 여신을 봉인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우주를 움직이는 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과장된 맛이 없진 않지만, 꼭 무가치한 착각으로 치부해 버릴 수만도 없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자신의 위업에 대해 타인에게 존중과 찬사를 요구했다면 다른 자들은 거리낌 없이 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이상의 것을 원했고, 그 순간 하텐그라쥬의 수호자들은 자신들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여신의 힘을 얻는 것에 급급한 나머지 그 힘이 그들에게만 귀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 뇌룡공 륜 페이가 가장 뚜렷한 예였다. 하텐그라쥬의 수호자들은 자신들이 얻은 힘과 똑같은 힘을 적에게도 주고 말았다. 더군다나 용근을 먹은 뇌룡공은 수호자들이 감히 꿈에서조차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수준에서 그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실로 재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다른 도시의 수호자들은 자신들 또한 뇌룡공의 예를 본받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내란이라는 니름은 거의 형체를 지닐 뻔했다. 여신의 힘을 휘두르는 수호자들을 전면에 내세운 나가 도시들 간의 전쟁. 생각만 해도 비늘 서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텐그라쥬의 수호자들은 공통의 적인 불신자들 앞에 나가들의 대단결이 이루어질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었지만, 그것은 동족의 특성을 간과한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이었다. 나가는 냉정하다. 한계선 이북과 이남 중 어느 곳이 더 정복하기 쉬운 땅인지 고려해 보는 것을 부도덕하다고 거부하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또한 냉정한 그들이기에 나가들은 서로를 향해 언제든 칼을 뽑아 들 수 있는 인간을 답습하지는 않았다. 서로를 향해 겨누어진 사이커는 결국 공멸을 불러올 것임이 분명했다. 그 시점에서 한계선 이남 전체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등장했다. 그 어처구니없는 니름은 놀랍게도 차차 동의를 얻었다.

<우리는 왜 왕을 가지면 안 되는가? 왕이라는 것이 비록 우리가 가져 본 적이 없는 낯선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져선 안 될 까닭은 없다. 최소한 불신자들과의 전쟁이 기정 사실이 된 현재 나가의 역량을 결집시킬 구심점 역할을 할 자는 필요하다.>

괜찮은 니름이었다.

그 시점에서 하텐그라쥬의 수호자들은 두 번째 패착을 던지고 말았다. 그들은 세리스마를 내세웠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가장 먼저 행동을 시작했기에 이미 병권의 대다수는 하텐그라쥬가 쥐고 있었다. 당연히 다른 도시 출신의 수호자를 내세워야 했다. 하텐그라쥬가 모든 것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다른 도시의 수호자들을 불편하게 했다.

결국 강대한 지도그라쥬가 언짢은 심기를 드러내었다. 지도그라쥬는 하텐그라쥬에게 엄숙하게 경고했다. 그 경고는 하텐그라쥬의 수호자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우리는 나가들의 정신적 고향인 성지 하텐그라쥬에 모든 경의를 보내지만, 그 경의가 나가들의 여신에 대해 죄를 지은 하텐그라쥬의 수호자들에게도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들이 그 죄에 대해 동료들에게 사과하지도 않은 채 더 많은 것을 얻기 바란다면 그것은 참기 어려운 교만이다.>

여신에 대해 죄를 지은 자들…………. 반향은 엄청났다.

하텐그라쥬의 수호자들은 자신이 직면하게 된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을 정도의 냉정함은 가지고 있었다. 세리스마를 추대하는 의견은 이슬이 마르는 것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지루하고 복잡한 토론이 오갔고, 그보다 더 많은 시간 동안 추잡한 비난이 오갔다. 그리고 등장하게 된 것이 키베인이었다. 키보렌의 모든 의지가 지원하는 대수호자의 등장이었다. 키베인은 자신이 키보렌의 대수호자로 추대될 만큼 멍청하다는 사실을 쓴웃음으로 받아들였다. 키베인이 일어나 앉자 곁에 있던 수호자가 닐렀다.

<대수호자님?>

키베인은 쇠사슬을 무릎 위까지 끌어당겨 자세의 여유를 확보했다.

<괜찮습니다. 그냥 누워 있으려니 지루해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네.>

키베인이 결점 없는 인격과 과감한 통치력과 고귀한 신앙심을 가졌기 때문에 대수호자가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혹 있을지 몰라도, 키베인 자신은 그런 사람들에 포함되지 않았다. 키베인은 자신이 대수호자가 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지.’ 키베인은 자신의 역할이 다른 누군가를 위해 대수호자라는 새 의자에 걸레질을 해 두는 것 정도임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의 뒤를 이을 자는 더 이상 대수호자라는 역사적 근거도 사회적 동의도 없는 기괴한 지위에 낯설어하지 않게 된 나가들을 지배할 것이다. 아직 누가 그 자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하텐그라쥬나 지도그라쥬의 누군가일 것이다.

키베인은 다른 자들이 어떤 멍청이를 공동의 장난감 삼아 재미를 보는 것에 유감은 없었다. 하지만 키베인은 그 멍청이도 재미를 좀 느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키보렌의 대수호자는 종군을 천명했다. 효과는 강렬했다. 그의 명목상 지지 세력인 지도그라쥬는 크게 당황했다. 병권은 모두 하텐그라쥬 출신의 수호자들이 장악하고 있으므로 키베인이 종군한다는 것은 그 스스로가 하텐그라쥬의 영향력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하텐그라쥬 또한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통에 키베인이 혹 화라도 입는다면 지도그라쥬는 당장 하텐그라쥬를 공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키베인은 자신을 적당한 타협안으로 취급한 하텐그라쥬와 지도그라쥬 양자 모두를 당황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배에 뚫린 구멍을 붕대로 틀어막은 초라한 모습으로 즈믄누리로 끌려갈 처지에 처해 있었다.

‘그러니까 매우 고전적인 사회 이론이 증명된 것이지. 은혜는 보통 반도 돌아오기 힘들지만 앙화는 항상 두 배로 돌아온다는 거지.’

키베인은 웃으며 쇠사슬을 만지작거렸다. 그들 다섯 명은 모두 발목에 족쇄를 매달고 있었고 그 족쇄는 근처의 굵직한 나무에 연결되어 있었다. 불신자들은 영리했다. 어차피 그들이 그 거목을 어떻게 할 수도 없겠지만 혹 그럴 방도가 있다 하더라도 수호자들은 나무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키베인은 다른 수호자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보다 나무가 상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심스럽게 쇠사슬을 다루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도 갈로텍 대장군 또한 이 나무를 보면 고민할지도 모르겠군.’

키베인은 갈로텍 대장군이 그를 구하러 올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대수호자가 불신자들에게 포획되었음이 알려진다면 지도그라쥬는 하텐그라쥬를 공박할 두 번째이자 결정적인 빌미를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여신에게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대수호자마저 적에게 넘겨준 하텐그라쥬’라는 비늘 서는 고발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갈로텍은 반드시 올 것이다. 키베인은 불신자들에게 그들이 치명적인 벌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것은 어쩌면 재미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키베인은 누군가가 달려오는 모습을 목격했다.

키베인은 감탄했다.

밤을 달려오는 더운 피 생물의 몸 주위에서 열기가 춤추고 있었다. 인간 여자였다. 그리고 경쾌하기 짝이 없는 달리기였다. 제자리에 멈춰 서서 흐르는 세상이 자신을 침식하는 것을 바라보며 울어야 하는 생물의 비애는 그녀와는 관계가 없어 보였다. 춤추는 열기를 몸에 두른 채 냉기와 반목과 의심의 세계를 수치스럽게 만들며, 그녀는 오히려 세상을 추월하여 달리고 있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한가롭게 재미의 주사위를 던지던 키베인은 비늘이 서는 것을 느꼈다. 그 열인(熱人)이 자신 앞에 멈춰 섰을 때 키베인은 두 손을 들고 항복이라도 외쳐 버리고 싶어졌다.

다른 수호자들은 모두 경계하며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키베인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가 손으로 귀를 가리켜 보였을 때 키베인은 비로소 그녀가 뭔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수호자는 청력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제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아, 네. 안녕하세요! 북부군 부위 데오늬 달비입니다.”

“마호가니 군단의 수호 장군 키베인입니다.”

키베인은 말 놓으시라고 말하려다가, 수호 장군으로서 부위에게 약간의 경의를 받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데오늬는 씩씩하게 말했다.

“저는 여러분들의 형편을 살피고 몇 가지 말씀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수호 장군님. 몸은 괜찮으신가요?”

키베인은 아무래도 자신이 대표자로 낙점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자들이 대답할 기색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키베인은 천천히 말했다.

“배에 구멍이 난 사소한 문제 이외엔 별 문제 없습니다.”

데오늬는 고개를 갸웃했다.

“죄송합니다만 농담인지 진담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수호 장군님. 나가라서 그 정도는 정말 사소하다고 느끼는 겁니까? 아니면 비꼬는 투로 말씀하신 겁니까?”

데오늬의 질문을 듣자 키베인까지 혼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키베인은 자신이 무슨 의미로 그렇게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키베인의 대답이 늦어지자 데오늬는 다시 말했다.

“제가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도록 상태를 알기 쉽게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호 장군님.”

“예……, 못이 깔끔하게 움직여서 내장이 쏟아지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아물고 있습니다.”

<혹 특별히 불편한 분 계십니까?>

“소드락 한 알 먹고 쉬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그건 안 되겠지요?”

“소드락은 안 되겠습니다. 수호 장군님. 저희들의 약도 도움이 안 될 텐데, 뭔가 도움이 되어 드릴 방법이 없겠습니까? 혹 따뜻하게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수호 장군님?”

“그러면 좋겠지만……………, 잠깐만요!”

이미 몸을 돌려 달려가던 데오늬는 급히 멈추느라 넘어질 뻔했다. 데오늬가 용케 균형을 잡는 것을 보며 키베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키베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달려오는 소녀에게 말했다.

“혹 나무를 태울 생각이시라면 사양하겠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용인이십니까, 수호 장군님?”

“불을 피우는 데 나무가 사용된다는 것을 추측하는 데 용인의 감각까지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장작을 가져올 생각이었습니다. 수호 장군님. 장작은 이미 죽은 나무입니다.”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나무가 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몸이 더 아플 것 같습니다. 사양하겠습니다.”

키베인은 다른 수호 장군들을 바라보았고 그들이 모두 같은 의견임을 확인했다. 데오늬는 달리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음. 나무를 태우지 않으면 되는 거죠?”

“예? 예. 그렇습니다.”

데오늬는 다시 씩씩하게 외쳤다.

“알겠습니다! 수호 장군님!”

그리고 데오늬는 키베인이 말릴 틈도 없이 달려갔다. 불신자들의 밤눈이 그리 밝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키베인은 어두운 밤에 그렇게 앞뒤 없이 달려 어선 안 될 거라고 경고하려 했다. 그러나 곧 경고를 포기했다. 땅에 넘어진 다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시 일어나 달려가는 데오늬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의 곁에 있던 수호 장군 하나가 배에 감긴 붕대를 쓰다듬으며 닐렀다.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소녀가 풀을 한 웅큼 들고 와서 자랑스럽게 내 보인다 해도 크게 놀랄 것 같지는 않군요.>

키베인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데오늬의 인상이 비슷하게 남겨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 다섯 명은 자신들의 헛된 선입견을 탓하게 되었다. 데오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섯 수호 장군들은 꽤나 아슬아슬한 묘기를 보게 되었다.

데오늬는 작살검 두 자루를 쥔 채 달려오고 있었다. 그 작살검 끝에는 쇠투구가 꽂혀 있었고 그 쇠투구 안에는 도깨비불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데오늬는 ‘달려오고’ 있었다. 키베인은 ‘조심하세요. 불 쏟겠습니다!’라는 말도 안 되는 경고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느끼곤 당황했다. 실제로 데오늬는 걸음을 헛디뎌 수호 장군들을 질겁하게 했다. 용케 쓰러지지 않은 데오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다섯 수호 장군들도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데오늬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고 수호 장군들은 불안감에 비늘을 곤두세웠다.

수호 장군들 앞에 도달한 데오늬는 쇠투구 두 개를 자랑스럽게 내밀며 외쳤다.

“불 가져왔습니다. 수호 장군님!”

“가, 감사합니다. 도깨비가 만들어 준 건가요?”

“시우쇠 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수호 장군님.”

두 개의 쇠투구를 가장 적절한 위치에 내려놓기 위해 고심하던 데오늬는 잠시 후에야 만족할 만한 위치에 그것들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데오늬는 키베인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수호 장군님?”

키베인은 충격에서 채 헤어 나오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시우쇠가 이걸 만들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수호 장군님.”

“제가 알기로 당신들도 저 무서운 시우쇠에게 접근하기 어려워 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닙니까?”

데오늬는 경쾌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못 아신 겁니다. 수호 장군님. 그 분은 자상한 분입니다. 수호 장군님.”

키베인은 정말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그렇잖으면 데오늬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키베인은 자상한 불이라는 표현이 수사적 은유가 아닌 객관적 서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수호자의 침묵이 길어지자 데오늬는 땅에 내려놓은 투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더 가까이 놓아 드릴까요, 수호 장군님?”

“네? 아뇨. 됐습니다. 좋습니다. 따스해지니 벌써 낫는 것 같군요.”

데오늬는 방긋 웃었다.

“시우쇠님이 좋아하실 겁니다. 수호 장군님. 더 필요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수호 장군님. 그럼 다른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혹 자발적으로 북부군에게 협력하실 생각이 있으신 분 있습니까?”

키베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보는 것이 바로 모욕이라며 거세게 항의하는 동료들에게 사과한 다음 말했다.

“제 동료들은 그걸 거부할 경우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 하는군요.”

수호 장군들은 키베인의 뻔뻔함에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가의 표정에 익숙하지 않은 데오늬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채 말했다.

“보통의 경우엔 하텐그라쥬 공작께서 심문하십니다. 수호 장군님. 그 분은 어떤 거짓말도 꿰뚫어 보시고 침묵을 들으면서도 모든 것을 알아내십니다. 수호 장군님.”

조금 전 시우쇠에 대해 내린 데오늬의 인평은 의심했지만, 키베인은 륜 페이에 대한 데오늬의 설명은 의심할 수 없었다. 륜의 날카로움은 이미 그 자신이 경험했었다. ‘그 자라면 내가 한 단어만 이야기해도 내가 열다섯 살 되던 날 아침에 먹은 쥐의 성별까지 알아맞출 텐데.’ 키베인은 긴장하여 데오늬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수호 장군님. 협조하실 분이 없으시다면 여러분들 모두는 내일 이곳을 떠나게 될 겁니다.”

“내일?”

“그렇습니다. 수호 장군님. 그래서 여러분들이 장거리 여행을 감수할 만한 상황인지 알아보기 위해 제가 온 것입니다.”

“만약 우리 중 누군가가 그럴 만한 처지가 아니라면 어떻게 됩니까?”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수호 장군님. 그런 분이 있으신지 알아 보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 수호 장군님.”

“즈믄누리로 가게 되는 겁니까?”

“그 또한 제가 결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수호 장군님. 하지만 지금까지 다른 곳으로 보내진 포로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아마도 그곳일 거라고 짐작됩니다. 수호 장군님.”

키베인은 동료들과 빠르게 니름을 나눈 다음 말했다.

“걸어가는 일이라면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수호 장군님! 그럼 편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수호 장군님들!”

그리고 데오늬는 다시 달려갔다. 밤의 옷깃 사이로 사라지는 열의 잔영을 보던 키베인은 다른 수호자들을 돌아보았다.

<즈믄누리로 가게 되었군요.>

<시우쇠와 륜 페이가 없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는 심정입니다.>

풀 죽은 투로 니르던 수호 장군은 새삼스럽게 투구에 담긴 불을 돌아보며 비늘을 부딪쳤다.

<저게 ‘자상한’ 시우쇠가 만들어 준 거라고요? 그 소녀가 우리를 놀린 걸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더군요. 그 소녀는 진심으로 말하는 것 같더군요.>

<불이 자상할 수 있습니까?>

<인간을 보살피는 어디에도 없는 신의 힘은 바람이지요. 물의 힘을 다루는 우리에게 난폭한 저 불도 바람에겐 자상할지도 모르지요.>

두 개의 도깨비불에서 흘러나오는 온기는 배에 구멍이 뚫려 의기소침해 있던 그들에게 잡담을 나눌 정도의 기력을 불어넣었다. 그래서 수호자들은 그날의 패배와 그들을 구출하러 올 군사에 대한 니름을 나눴다. 잠시 후 그들의 논의는 대나무 군단과 흑단 군단 중 어느 군단이 구출을 맡을 것인지에 대한 것으로 흘러갔다. 키베인은 그들의 대화에 적당히 참가하다가 곧 빠져나와서 자신의 생각에 잠겼다.

기묘한 밤이 주위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둔 채 키베인은 그들에게 불을 만들어 보내 준 자가 바로 그 능력으로 수많은 나가를 학살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살아 움직이는 육신을 순식간에 가벼운 재 무더기로 바꾸는 불에 희생된 것도 나가였고, 쇠투구에 담긴 깜찍한 불에 위안을 얻는 것도 나가들이다.

어쨌든 살아 있는 쪽이 낫다. 그리고 오늘 죽은 자들의 경우엔 한결 더 불행하다. 그들은 여신께 가지 못하므로, 여신은 하텐그라쥬에 봉인되어 있다.

억압되어 있는 여신을 불러 보려던 키베인은 자신의 신명 또한 묶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미없는 일이었다.


대장군 괄하이드 규리하는 모닥불에 땔감을 던져 넣었다.

불티가 튀어올라 주름진 노장군의 얼굴에 기묘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발소리가 들려왔을 때 노장군은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저쪽에서 라수가 걸어오고 있었다. 피로에 지친 얼굴로 걸어온 라수는 괄하이드의 앞쪽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괄하이드는 사촌 동생을 바라보았다.

라수 규리하의 얼굴은 초췌했다. 사선을 넘나드는 4년을 보내었건만 그 혀는 여전히 매웠고 모든 것을 깔보는 눈빛 또한 여전했다. 하지만 라수 규리하라는 사내를 구성하는 다른 요소들에서는 농도 짙은 피로와 절망감, 그리고 어쩔 도리가 없는 우울이 가득 배어 있었다. 괄하이드는 사촌 동생을 잘 알고 있었다. 라수는 노 학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노 병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괄하이드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람마다 자신의 별을 가지고 있다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있지.”

라수는 고개를 들어 사촌 형을 바라보았다.

“전쟁터를 떠돌아 본 병사라면 그런 이야기 절대로 믿지 않아. 오늘 엔거 평원에서 2만 명 가까운 나가들이 불타 죽었지. 눈을 들어 하늘을 봐. 라. 하늘에서 2만 개의 별이 사라졌는지 확인해 봐. 네 시력에 이상이 없다면 하늘이 그대로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 결론은 두 가지 중 하나야. 나가들에겐 별이 없다거나, 혹은 별과 사람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 나는 후자를 지지한다. 왜냐하면 그동안 북부에서 죽어 간 수천만 명의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라수는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이 세계가 개인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은, 최소한의 지성만 가지고 있다면 얼마든지 간파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 보는데.”

“그래. 라수. 숱한 전투를 치렀지만, 나는 별은커녕 낙엽 한 장 떨어지는 꼴을 못 봤다.”

“알아. 알고 있어. 그런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하지만 노 병은 칼을 들고, 때가 되면 죽어 가지.”

모닥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매웠다. 라수는 눈을 문지르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하지만 그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는 피비린내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었다. 라수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핏물을 씻어낸 것이 언제인지 떠올릴 수 없었다. 물을 마음대로 다루는 적들과 싸우면서 북부군은 물속에 마음 편히 몸을 담그기도 어려웠다.

괄하이드는 어둠 속으로 손을 뻗어 술병을 집어 들었다. 한 모금을 마신 괄하이드는 술병을 라수에게 건네며 말했다.

“네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선의 길이 우리 북부군을 몰살시키는 거라면, 병사들은 그렇게 할 거다. 별이 그들을 위해 슬퍼하며 떨어지지 않더라도.”

라수는 받아든 술병을 입가로 가져가는 대신 만지작거렸다.

“더 이상 병력을 늘일 수 없어. 충원할 수가 없어. 이 병력으로 어떻게든 끝장을 봐야 해. 그리고 이 병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야. 나가들과 치고 박으며 조금씩 소진되다가 사라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래. 맞아.”

“수십 년 후 그때까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마지막 북부인이 나가들에게 발각되어 살해당하게 할 수는 없는 거 아냐.”

“동감이야.”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

“이해할 거다. 라수.”

라수는 술병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벌컥거리며 마셨다. 입가로 흘러내리는 술이 웃옷을 적셨다. 술병을 내려놓은 라수는 일그러진 얼굴로 불길을 응시했다.

“이해하지 못해. 나도 이해할 수 없어.”

“그렇다면 이해라는 말은 관두지. 그들도 너처럼 이해하지는 못해도 느끼기는 할 거다. 내일 아침, 그들은 손질해 둔 작살검을 집어들 테고, 네가 이끄는 대로 죽음을 향해 걸어갈 거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말이야. 왜 그런 줄 알아?”

“어째서 그렇지?”

“개좆 같은 적들이 저기 있기 때문이야.”

얼빠진 얼굴로 사촌 형을 바라보던 북부군의 두뇌는 잠시 후 숨이 막히도록 웃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호흡 곤란을 호소하던 라수는 한참 후에야 헐떡이며 동의했다.

“맞아, 정말 그래.”

그리고 라수 규리하는, 그가 저술했던 그 어떤 책에서도 사용할 수 없었던 단어들을 사용하여 나가들을 묘사했다. 그런 그에게 괄하이드는 거의 완벽한 협조를 보여 주었다. 대부분 폭발적인 웃음으로 점철된 그들의 따사로운 토론은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지만, 그 토론 전체는 대화의 마지막에 눈물이 그렁해진 라수가 비명처럼 외친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가자고, 제기랄! 가서 저 씹어 먹을 놈의 새끼들 찢어 죽이자고!”


북부의 왕은 눈을 뜨기 전부터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을 대면하기 싫다는, 모호한 불쾌감 속에서 눈을 떴다.

대호왕 사모 페이가 발견한 첫 번째 문제점은 방 안이 지나치게 밝다는 사실이었다.

사모가 늦잠을 잤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 있어 어떤 심원한 지혜까지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늦잠을 잔 이유를 파악하는 데는 고개를 한 번 돌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녀의 몸을 덮고 있어야 할 흑사자 모피는 침대 옆의 의자에 걸려 있었다. 사모는 흑사자 모피를 끌어당겨 차가운 몸을 덮으면서 의아해했다. ‘누가?’ 사모는 옷을 갖춰 입고 가면을 집어든 다음 문쪽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선 사모는 두 번째 문제를 발견했다. 륜 페이의 니름이 들려오지 않았다.

벽이건 천장이건 닥치는 대로 꿰뚫어 보는 그녀의 동생은 언제나 주의력의 일부를 그녀에게 할애해 왔다. 따라서 그녀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에 앞서 륜의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모가 방문 앞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륜의 니름은 들려오지 않았다. 사모는 의아해하며 다시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잠시 고민하던 사모는 가면을 착용한 다음 허리에 찬 쉬크톨의 위치를 점검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계단을 내려온 사모는 1층에서 기다리고 있는 세 번째 문제에 직면했다. 데오닉 달비가 처량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잔뜩 주눅이 든 표정으로 앉아 있던 데오닉 달비는 계단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칼에 찔린 사람마냥 튕겨져 올랐다.

“대호왕 폐하!”

“달비 부위.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 거지?”

가엾은 데오늬 달비에게는 대호왕의 질문이 ‘다른 사람들을 다 살해하고 여기 서 있는 거냐’는 추궁처럼 들렸다. 그녀는 비명을 내질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폐하!”

그리고 데오늬는 문을 향해 달려갔다. 사모는 혀를 찼고, 문 앞에 도달한 데오늬가 몸을 돌려 다시 달려왔을 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 물러남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허락한다.”

데오늬는 감사하며 뒤로 달려갔다. 당연한 결과로 뒤통수를 문에 쾅 부딪힌 다음, 데오늬는 그런 일쯤은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다는 듯한 태도로 밖으로 나갔다.

사모는 소란스러운 아침이 막 끝난 것인지, 그렇잖으면 이제 시작된 것인지를 고민하며 의자에 앉았다.

조금 후 문이 열렸다. 데오늬가 돌아온 것으로 생각한 사모는 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들어선 것은 희끗희끗한 백발을 머리에 얹은 거무튀튀한 얼굴의 인간 남자였다. 그는 사모의 앞에 도달한 다음 한쪽 무릎을 꿇었다.

“폐하. 교위 바르사 돌입니다.”

사모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처럼 말했다.

“돌 교위. 뭔가 설명 들을 일이 많은 것 같군. 간단명료하게 해 주게.”

바르사 돌은 그렇게 했다. 그의 설명을 들은 사모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떠났다고?”

“예. 폐하.”

“짐을 내버려 두고 모두 떠났다는 말인가?”

“저와 200명의 병사, 그리고 스물두 명의 금군은 남아 있습니다. 폐하. 저는 포로를 데리러 온 도깨비들과 합류하여 폐하를 즈믄누리로 모시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텐그라쥬 공작은!”

“함께 떠나셨습니다. 폐하의 망토를 치운 것은 그 분입니다.”

“일어나라, 돌 교위! 새로운 명령을 내린다. 우리는 지금 당장 수호자들을 풀어 주고 북부군을 뒤쫓아간다!”

바르사 돌은 일어났다. 하지만 왕의 명령을 따르지는 않았다.

“그 전에 제 말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안 돼!”

“부탁드립니다. 사모 페이.”

사모는 깜짝 놀라서 바르사를 바라보았다. 바르사는 어떤 경고도 담기지 않은 평온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모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바르사는 약간 어렵게 서두를 꺼냈다.

“수탐자들이 첫 번째 화신을 발견하여 우리들에게 보낸 이후로 3년이 지났습니다. 아직 수탐자들에게선 아무런 연락도 없습니다. 더 이상 두 번째 화신의 도래를 기다릴 여력이 없습니다. 시우쇠 님의 행방을 묘연하게 하는 방법으로 나가들의 진군을 막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라수 규리하 상장군님께서는 공격을 결정하신 겁니다. 그것은 결사적인 공격이며, 그렇기에 돌아올 수 없는 공격입니다. 어쩌면 빈사에 빠진 북부가 마지막으로 보이는 발작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희망은 남겨 두어야 합니다. 만약 그들이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실패할 경우, 폐하께서는 두 번째 북부군을 결성하셔야 합니다. 물론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폐하 이외의 다른 자에겐 시도할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입니다. 폐하께선 북부의 왕이시니까요.”

바르사는 스스로의 말에 압도되는 기색을 약간 보였다. 어쨌든 연설은 그의 취향이 아닌 듯했다. 하지만 마지막 말을 꺼내놓는 교위의 표정은 침착했다.

“따라서 폐하께서는 북부의 씨앗이 되셔야 합니다.”

사모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씨앗이라고? 날개를 펼칠 날이 다가올 때까지 땅속에 숨어 기다리는 용의 종자가 되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사모 페이는 바르사를 노려보았다.

“바르사 돌 교위.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지?”

“저는 하인샤 대사원에 있었습니다. 변경백님을 모시고 있었지요.”

“괄하이드 규리하의 부하였나?”

“그렇습니다.”

“얼마 동안 그를 섬겼지?”

“이번 전쟁이 그 분의 지휘 하에 종군한 여섯 번째 전쟁입니다.”

사모 페이는 바르사 돌이 어떤 인물인지 알 것 같았다. 괄하이드는 평생을 함께 싸운 전우라고 해도 무방한 부하를 남겨놓고 떠난 것이다.

“그런 자네가 보기에, 라수 규리하의 판단이 옳다고 보는가? 자네가 평생 섬겨 온 규리하의 수장을 사지로 끌고 가는 그 결정이?”

바르사 돌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옳은가, 그른가!”

“그 결정에 동의합니다.”

사모는 쉬크톨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바르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왕을 바라볼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미 설득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사모는 입을 열어 말했다.

“바르사 돌 교위. 북부군의 최고 명령권자가 누구냐?”

이미 그녀를 ‘사모 페이’라고 불렀던 상대에게 내미는 무기로서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바르사는 그녀를 창피하게 만들지 않았다.

“폐하.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만, 따를 수 없습니다. 반역의 죄를 물어 저를 죽이실 수는 있습니다만 그 전에 제 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이냐?”

“폐하의 말씀대로 우리는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하지만 그 방향은 북쪽이어야 합니다.”

“어째서지?”

바르사는 씁쓸한 만족감을 얼핏 비추며 말했다.

“조금 전 어르신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대나무 군단으로 추정되는 나가 군대가 엔거 평원 남쪽에 출현했습니다. 그들은 곧장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포로들을 데려가기 위해 왔던 도깨비들이 평원 전체에 도깨비불을 풀어놓고 그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만, 오래 가지는 못할 겁니다. 그들 중에 있는 한 수호 장군이 닥치는 대로 도깨비불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호 장군이……”

“도깨비들과 어르신들은 그 수호 장군이 갈로텍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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