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1장 – 침수(浸水) (8)
륜은 모두 다섯 명의 수호 장군들을 구할 수 있었다. 빌파 삼부자는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수호 장군들을 못 박았지만 도주하던 나가 병사들이 구출해 가거나 불운하게도 시우쇠와 맞닥뜨린 수호 장군들도 많았기에 포로로 잡을 수 있었던 숫자는 그 정도였다.
그리고 그 다섯 명은 모두 륜의 제안에 동의했다.
완전히 탄화된 여섯 번째 수호 장군을 내려다보던 륜은 가까이 다가오는 시우쇠를 느꼈다. 여신의 힘으로 느낀 것은 아니었다. 시우쇠는 그 몸에 물기라곤 가지고 있지 않았고, 따라서 엔거 평원에 있는 자들 중 륜이 제대로 추적하기 힘든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용인의 날카로운 감각은 시우쇠의 접근에 따라 뜨거워지는 온도를 느꼈다.
고개를 돌린 륜은 그를 내려다보는 화염의 눈을 발견했다. 시우쇠는 아스화리탈을 흘끔 올려다보곤 말했다.
“몇이나 구웠어?”
륜은 울컥하는 기분을 억누르며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굽는다고 하셨습니까? 제 친구 중에 사람을 대상으로 썬다느니 하는 말을 사용하는 이가 있었지요. 그 자의 어투와 비슷하시군요.”
“그래서, 얼마나 구웠냐고?”
“모르겠습니다. 족히 몇 천 명은 될 것 같군요.”
“흐음. 나도 그 정도 구운 것 같군.”
륜은 더 참지 못했다.
“제 동족입니다. 시우쇠 님.”
시우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봐. 갇힌 여신의 신랑. 골육상잔의 비극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거냐? 태우기로 작정했으면 그런 건 집어치우지 그래?”
“당신은 독자(獨)의 화신이지만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잔학한 운명 때문에 동족을 땔감 삼아 희망의 불을 지펴야 하는 처지에 빠져 있지만, 그것에 무감각해지기는 어렵습니다.”
용인의 예민함으로도 시우쇠의 다음 말을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상대는 사람의 예민함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시우쇠는 빙긋 웃더니 발을 뒤로 당겼다.
그리고 탄화된 수호 장군을 걷어찼다.
먼지와 재가 뒤섞여 작은 구름이 일어났다. 륜은 입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시우쇠는 물러나지 않았다. 사체의 재 구름 속에서 시우쇠는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어려운 것 아니야.”
“예?”
“너절한 단어로 처지 골치 아프게 만들지 말라고. 가로막으니까 태우는 거야. 살을 지지고 뼈를 녹이고 골수가 끓어오를 때까지 태워 버려. 잿더미 위에 네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 그러면 돼.”
“뭐가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겸허함을 알게 되지.”
“네?”
시우쇠는 반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연하지도 않았다. 시우쇠는 그대로 륜과 아스화리탈을 남겨 둔 채 그 언덕을 떠났다. 화신은 떠나며 말했다.
“대호왕에게 전해라. 이 주위에 숨어 있는 놈들 몇 명 더 태우고 돌아가겠다고.”
떠올랐던 재와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화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용과 용인은 잠시 후 몸을 돌려 화신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원수부에서는 모처럼의 대승에 고무된 장수들이 열기를 잔뜩 뿜어 대고 있었다. 평소 륜이 근처에 다가오는 것조차 꺼림칙해 하던 많은 장수들이 반갑게 륜을 맞이했다. 물론 그들 중 몇 명은 나가 앞에서 무수한 나가를 살해한 일을 즐거워해도 되는 건가 의심했다. 륜은 눈치 빠르게 그것을 깨달았고 웃음으로써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들과 자신 양쪽을 괴롭히는 대신 필요한 말만 전달한 다음 조용히 원수부를 떠나 왔다.
원수부를 떠나온 륜은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와 갑옷을 벗었다. 그의 천막 옆에는 아스화리탈이 거대한 몸을 누이고 있었고, 따라서 북부군의 진지 전체에서 가장 한적한 곳이기도 했다. 륜은 의자 하나를 가지고 천막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아스화리탈의 머리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해는 기울고 있었고 진지 곳곳에서 불이 켜지고 있었다. 륜의 천막 주위는 승전 후의 진지를 채우고 있는 흥분된 기류에서도 자유로웠다.
어두운 하늘로 잔인한 새들이 날고 있었다. 유사 이래 모든 전투의 승리자들인, 사체의 내장을 탐내는 새들이다. 밤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륜은 그 활기찬 불덩이 같은 뜨거운 새들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땅 위를 오가는 온기들을 보던 륜은 갑자기 구토할 뻔했다.
가까스로 메슥거림을 억누른 륜은 등 뒤에 있는 자를 향해 말했다.
“그래. 와도 된다. 베미온.”
륜의 등 뒤 어둠 속에서 한 인간 남자가 걸어 나왔다.
머리카락은 뒤엉킨 철사 같고 뻣뻣한 수염은 고슴도치에 필적할 지경이다. 그나마 체모가 적은 눈 아래나 이마 같은 부분도 시커먼 땟국물에 덮여 있었다. 구부정한 허리는 그때까지 쌓아온 고통을 암시했고 기이하게 떨리는 팔다리의 움직임은 죽을 때까지 가져가야 할 공포를 드러내고 있다. 남자라는 대명사보다는 수컷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아니, 생명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품위조차 잃어 버려 차라리 한 물체라 불러야 할 ‘그것’에겐 놀랍게도 지성의 흔적을 읽을 수 있는 두 눈이 달려 있었다. 그 눈이 륜을 바라보았다.
“저, 젖었어요.”
륜은 억지로 미소 지으며 그 남자의 발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남자의 발에 묻어 있던 물기가 주위의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남자는 몇 번이나 바닥을 만져 본 다음 그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칭얼거렸다.
“나, 나를, 나를 씻기려고 해.”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륜은 질문했다.
“누가?”
“데오늬, 데오늬 달비.”
륜은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애가 물을 튀기며 달렸나 보구나.”
“씻기려고 했어요! 혼내줘요!”
륜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 착한 소녀에게 베미온의 고발을 전해 주면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어딘가로 달려갈 것이다. 하지만 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혼내줄게.”
베미온 굴도하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륜을 놀라게 했다.
“너무 혼내지는 마. 착한 아이야. 내 딸의 친구가 될 수 있을 텐데…….”
륜은 가까스로 자신을 억눌렀다. 놀란 나머지 급히 대응하는 바람에 몇 번이나 상황을 악화시켰던 기억이 충동적으로 움직이려는 그의 몸을 붙잡았다. 호흡을 고른 다음, 륜은 베미온 굴도하가 당황하지 않도록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베미온 마립간?”
베미온은 바닥을 보며 뭐라 중얼거렸다. 륜의 말을 알아들은 기색은 없었다. 륜은 조심스럽게 한 번 더 불렀다.
“베미온 마립간?”
베미온 굴도하의 상체가 기이하게 움직였다.
다음 순간 베미온은 땅에 얼굴을 부딪치며 통곡했다. 륜은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나 베미온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하지만 베미온은 놀라운 힘으로 륜을 뿌리치며 계속 땅에 이마를 부딪쳤다.
“탑이 빠져 죽는다! 탑이 빠져 죽는다!”
륜은 베미온의 팔을 잡아 뽑듯이 잡아당겼다. 그래서 베미온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들이받는 기세로 안겨 왔을 땐 륜은 숨이 막힐 뻔했다. 륜은 가까스로 함께 쓰러지는 대신 베미온을 끌어안았다. 베미온은 륜에게 안긴 채 목을 놓아 울었다.
상고토의 맹주이자 판사이의 마립간이었던 사내는 짐승 같은 소리로 통곡했다. 그를 끌어안은 채 다독이던 륜의 눈에서도 어느새 은루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우라고. 륜 페이.”
륜은 비늘을 세우며 고개를 들었다. 저편에서 황혼을 등진 채 시우쇠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스화리탈이 고개를 들었고 그 간단한 동작 끝에 용은 무려 15미터 높이에서 시우쇠를 쏘아보게 되었다. 시우쇠는 용에게도, 나가에게도, 정신 나간 인간에게도 적합한 기묘한 거리에 멈춰 서서는 팔짱을 낀 채 륜을 바라보았다.
“태워. 그렇게 해줘.”
륜은 비늘을 사납게 부딪쳤다.
“이 분은 나으실 겁니다.”
“넌 그 녀석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너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군.”
“네?”
어떤 암흑 속에서도 놓칠 수 없는 시우쇠의 시선이 륜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베미온이 왜 너를 따른다고 생각하나? 아마도 용인인 네가 어머니가 자식에게 베풀 수 있을 정도의 예민함으로 그를 보살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있겠지? 그렇지 않아. 베미온은 정신이 나갔지만 생물의 마지막 감각은 잃지 않았어. 죽음을 찾아내는 감각 말이야. 북부군 전체를 통틀어 가장 죽음에 가까운 것은 너와 나뿐이지. 호흡과도 같은 자연스러움으로 죽음을 행사할 수 있는 자들은 우리 둘뿐이라고.”
륜은 흠칫했다. 시우쇠의 눈에서 불길이 앞으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래. 그래서 베미온은 너를 따르는 거야. 우두머리 코끼리가 대호를 향해 걸어가는 그 감각으로 그는 네게 다가가는 거지. 그를 왕으로 만들어줘. 륜 페이. 가장 가련한 자에서 가장 위대한 자로 재탄생하게 해줘.”
“재탄생? 재탄생은 없습니다. 잿더미가 남을 뿐이죠!”
“신의 제안을 무시하려는 건가?”
“당신은 신이 아니라 화신입니다!”
“발음의 차이 외의 다른 차이를 지적해 보겠나?”
륜은 침묵했다. 그리고 두 팔로는 베미온 굴도하를 더욱 세차게 끌어안았다. 시우쇠는 빙긋 웃었다.
자신을 죽이는 신의 화신은 작별 인사 없이 떠났다.
시우쇠의 모습이 충분히 멀어진 다음에야 륜은 베미온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베미온 마립간의 검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눈물로 젖어 있는 얼굴을 본 륜은 베미온이 그것을 깨닫기 전에 재빨리 물기를 증발시켰다.
“베미온. 너는 살고 싶지?”
베미온은 콧소리를 심하게 내며 말했다.
“탑이 빠져 죽고 있어.”
“그래. 너는 나을 거야.”
“탑이 빠져 죽고 있어.”
“나는 오늘 6,000명을 태워 죽였어.”
“탑이 빠져 죽고 있어.”
“손 한 번 놀려서 그렇게 했어. 용인의 예민함 따위 도깨비나 줘 버리지. 평원 저편의 풀잎 위로 이슬 한 방울이 구르는 것까지 깨달을 수 있는 예민함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저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걸까? 제기랄! 이 예민함이라는 것이 칼로 도려낼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그게 뼈 속에 있는 것이라도 주저 없이 도려내었을 거야. 나는 알고 있어. 그게 6,217명이라는 것을!”
승전의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