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1장 – 침수(浸水)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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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11장 – 침수(浸水) (9)


승패는 우애 깊은 쌍둥이며, 승전의 밤인 그 밤은 당연하게도 패전의 밤이기도 했다. 엔거 평원에서 지리적으로 상당히 먼 곳, 그러나 패전의 잔존자들에게 심리적으로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서, 나가들은 고통과 공포의 타협점을 찾아내느라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나가들은 거의 울지 않는다. 패배에 서러워하며 우는 나가의 모습이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공포는 전혀 다른 문제다. 심장이 없는 생물을 죽이기 위해 동원되어야 하는 수단이 초현실적인 것이어야 함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수단을 간단히 동원할 수 있는 존재 둘과 맞닥뜨려야 했다는 것은, 불사에 가까운 그들 냉혹한 존재들에게도 떨칠 수 없는 충격을 선사했다. 발 딛고 있는 것이 굳건한 반석이 아닌 쓰레기 언덕임이 밝혀졌을 때 느끼게 되는 당황은 말할 나위 없이 거대하다. 하물며 그것이 자신의 불사성과 관련된 문제라면 심적 충격은 간단히 몇 배로 늘어난다. 위엄을 갉아먹고 자긍심을 내동댕이치게 하고 주위의 모든 곳에 초점을 맞추게 하는, 하지만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드는 감정, 두려움.

그들은 모든 생명체에게 익숙하지만 도깨비와 나가들에게만은 낯선 필멸의 공포라는 감정을 가혹한 대가를 치르며 체득하고 있었다.

이름 없는 그 계곡에 모인 나가들 중 그런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나가는 둘 뿐인 듯했다. 그 특별한 두 사람 중 한 명인 갈로텍 대장군은 가눌 길 없는 분노에 비늘을 부딪치고 있었다. 갈로텍은 방금 들었던 니름을 반복했다.

<1만 8000명이라고?>

<예. 대부분은 시우쇠와 륜 페이가 해치운 숫자입니다.>

<수호 장군들은 어떻게 되었나, 마케로우 장군?>

<돌아온 분은 없습니다. 전원 사망하거나 체포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갈로텍은 의미가 될 수 없는 광포한 니름을 토해 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계곡에는 2,000명 남짓한 나가들이 지쳐 쓰러져 있었다. 마호가니 군단의 잔존자들인 그들 가운데서 약간의 위엄이라도 유지하고 있는 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직껏 몸에 작살검을 한두 자루씩 꽂고 있는 자들이 많았고 비늘이 홀랑 타 버려 개구리 같은 비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나가들도 많았다. 그나마 그런 자들은 오히려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사지가 제대로 달린 자들 중 많은 수가 그 번듯한 사지를 흔들며 발작하고 있었다. 전투 전에 복용하지 못한 소드락을 도망치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일인 지참량인 세정을 한꺼번에 복용하는 것이 정신 나간 짓이라는 것을 모르는 나가는 없었지만, 시우쇠와 륜 페이의 동시 등장은 나가의 이성마저 태워 버릴 불꽃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그 끔찍한 괴물들에게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고통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괴물의 먹잇감이 되어 신음하고 있었다. 고통과 분노, 비탄의 니름들 때문에 그곳은 니름을 들을 수 있는 자들에겐 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아수라장이었다. 갈로텍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때 비아스가 질문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도착하셨습니까?>

<뭐라고?>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도착할 수 있으셨던 건지 질문했습니다. 사흘 후에 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만.>

<시우쇠가 엔거 쪽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혼자 말을 타고 왔다.>

<말? 아, 네. 승마술을 가진 분이 있으신가 보군요. 아쉽군요. 몇 시간만 기다렸으면 좋았을 텐데.>

갈로텍은 믿을 수 없었다.

<잠깐. 아쉽다고 했나, 마케로우 장군?>

<네.>

<그걸 니름이라고 하는 건가! 1만 8000명이 학살당했는데 하는 니름이 고작 아쉽다는 건가!>

비아스 마케로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의미가 되기 직전의 무의미들을 연속적으로 흘려보냈다. 갈로텍은 비아스가 니르고 싶은 바를 간단히 깨달았다. 갈로텍은 분노했다.

<내가 뭘 놓치고 있다는 건지 닐러보겠나?>

<닐러 드려도 되겠습니까?>

<닐러!>

<지금껏 적들은 시우쇠의 정확한 위치를 노출시키지 않는 방법으로 북부의 불신자들을 보호해 왔습니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우리는 시우쇠가 있는 곳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곳에 시우쇠가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탓에 북부군과 우리는 지루한 심리전을 벌여 왔습니다. 우리가 한 지역을 공격하면 그들은 일단 판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공격이 진짜 공격인지, 그렇지 않으면 시우쇠를 유인해 놓고 다른 곳을 치기 위한 위장 공격인지.>

갈로텍은 어이 없다는 듯이 닐렀다.

<전략의 창안자에게 전략의 개요를 설명해 줄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죄송합니다만 제가 원하는 방법으로 닐러 드리도록 해 주십시오.>

<계속해.>

<그런 유인은 성공할 때도 있었고 실패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항상 이기는 계책입니다. 시우쇠가 우리의 유인에 넘어오면 그를 내버려 두고 다른 지역을 공격하면 그만 이었습니다. 넘어오지 않으면 그냥 물러나면 됩니다. 가장 나쁜 경우라고 해 봐야 우리가 진짜 공격하려고 마음먹고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킨 장소에 시우쇠가 나타나는 경우입니다만, 이 경우에도 우리는 수호자들로 하여금 시우쇠를 묶어 두게 하고는 도망치면 그만이었습니다. 오늘 그로스 군단장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사가 불확실한 자네 상관을 헐뜯으려는 건가?>

<아닙니다. 그들이 시우쇠를 노출시킬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우쇠를 노출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다른 지역을 공격하니까.>

<무슨 니름인가?>

<오늘, 그들은 시우쇠를 노출시켰습니다. 그 덕분에 그들은 1만 8000명이나 되는 아군을 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만족하기엔 적은 숫자가 아닐까요? 제가 그 숫자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갈로텍은 정신적 신음을 흘렸다. 그는 비아스가 무슨 니름을 하는 건지 깨달았다.

<예. 시우쇠가 이곳에 나타난 이상 우리는 내일이나 모레쯤 이곳에서 먼 지역에서 불신자들을 18만 명이라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시우쇠를 노출시켰을까요?>


농가의 내부는 환희로 가득했다. 피와 땀을 채 닦아내지 못한 험상궂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지만 북부군의 장수들은 승리에 배불러 있었고, 완벽하게 만족한 얼굴로 라수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라수가 꺼내놓은 서두는 그들을 더욱 만족시켰다. 라수 규리하는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는 이곳으로 쫓겨오긴 했습니다만, 그것은 저들의 착각과 달리 우리의 선택입니다.”

괄하이드 규리하는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입소문이나 짐작으로 약간씩 알고 있던, 하지만 아직은 그 전모를 깨닫지는 못했던 전략에 대한 설명에 북부군의 다른 장수들은 집중했다. 라수는 벽에 붙여놓은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난 몇 달 동안의 패배를 통해 우리는 나가 수뇌부로 하여금 이곳에 시우쇠님이 없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나가들은 다른 어딘가에 있을 시우쇠 님을 감지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고 그동안 우리는 이곳까지 큰 경계를 받지 않고 다가올 수 있었습니다. 적들이 엔거 평원을 전장으로 선택하리라는 것은 자명했습니다. 그들은 폐하와 우리를 한꺼번에 붙잡길 원할 것이고, 이곳으로 우리를 몰아넣으면 흑단 군단, 마호가니 군단, 대나무 군단의 3개 군단이 우리를 대 포위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마호가니 군단이 나설 것 또한 분명했습니다. 어르신들의 보고를 따른다면 마호가니 군단이 보유한 수호자가 가장 많고, 따라서 하텐그라쥬 공작을 상대하기 위한 최적의 부대였습니다.”

라수는 잠깐 멈춘 다음 말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마침내 마호가니 군단을 패주시켰습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승전의 흥취에 자제력을 잃은 젊은 장수들에게서 짧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라수는 엄격한 얼굴로 그들을 침묵시키고서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의 즐거움은 이해합니다만 승리는 패배할 기회를 한 번 더 얻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강조해 두고 싶습니다. 예. 우리는 오늘 마호가니 군단을 패퇴시킴으로써 그들에게 짓밟혔던 슈라도스 사람들의 복수를 달성했습니다. 적들은 꽤 화가 나겠지요. 하지만 그 이성적인 나가들은 곧 이 지점에서 우리가 시우쇠 님을 노출시켰다는 사실에 의아해할 겁니다. 왜냐하면 시우쇠 님의 모습이 확실히 노출된 지금, 그들은 북부의 다른 지역을 초토화할 수 있으니까요.”

장수들은 창백해졌다. 북부군 최고의 지략가가 내놓은 예측은 정확했다. 나가들이 전장을 북부 전체로 넓히지 않는 것은 본질적으로 북부군이 시우쇠의 위치를 계속 모호하게 유지해 왔다는 것에 기인한다. 시우쇠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기에 나가의 수호자들은 기후 조절에 마냥 매달릴 수 없었고, 기후가 바뀌지 않기에 나가들은 어느 정도 이상 북진할 수 없었으며, 나가들이 북진할 수 없기에 시우쇠는 전선 배후의 넓은 북부 지역을 통해 쉽게 이동하며 이곳저곳에 출몰했다. 나가들에겐 분통 터지는 악순환이었다.

그러나 북부군이 가진 가장 빠른 연락 수단인 어르신 전령도 동시 대화가 가능한 나가들의 뱀단지에 비하면 도저히 빠르다 할 수 없었다. 나가들은 시우쇠가 출현할 때마다 수백 킬로미터 저편에서 기온을 대규모로 변화시켜 북진하곤 했다. 그 때문에 북부군 또한 시우쇠의 모습을 함부로 노출시킬 수 없었다. 장수들은 걱정에 잠겨 서로를 바라보다가, 그래도 라수 규리하라면 뭔가 생각이 있었을 거라 믿는 눈으로 북부군의 두뇌를 바라보았다. 라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갑자기 엉뚱한 말을 꺼냈다.

“햇수로 4년째입니다.”

장수들은 어리둥절했다. 그에 상관하지 않은 채 라수는 회상하는 어조로 말했다.

“여기 계신 많은 분들이 3년 전의 세퀴라도 공방전을 기억하시겠지요. 저는 그 날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바로 그날 시우쇠 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지요. 하지만 그 분이 도착하기 직전 우리들은 이미 패배를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예, 24일 밤낮에 걸친 공방전의 마지막 날, 싸우다 죽기 위해 성문을 열고 돌격하기로 결정하셨던 여러분들의 곁에, 대호왕 폐하와 하텐그라쥬 공작, 아스화리탈, 그리고 두억시니들까지 있었지만, 저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괄하이드 대장군은 여러분들이 저를 비난하지 않았다고 제게 알려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야 고백합니다만 저는 그때 성벽 위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몸에 기름을 붓고 있었지요.”

세퀴라도에 있었던 장수들 중 일부가 신음을 흘렸다. 라수는 싱긋 웃었다.

“여러분과 같은 무용이 없는 저로서는 돌격을 시도해 봤자 적 한 놈 잡지 못하고 죽을 것이 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건 섭섭하더군요.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긴 했지만 적 한 놈 잡지 못하고 죽는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더군요. 예. 저도 별 볼 일 없는 규리하 사내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기름통을 들고 성벽 위로 올라갔습니다. 나가들이 성 안으로 들어오면, 어느 놈이 지휘자인지 알아낸 다음 몸에 불을 붙이고 뛰어내릴 작정이었 습니다. 그리고 뜨겁게 안아 줄 계획이었지요.”

지코마 상장군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물에 숨어 있었던 거라는 말씀은……?”

라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시우쇠 님 앞에 나가려면 기름은 일단 씻어야 했으니까요. 그 분 근처에 가면 타 죽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대충 씻어내고서야 나설 수 있었던 겁니다.”

“하긴 좀 의심스러웠습니다. 아무리 당황하셨다 하더라도 우물 속에 숨거나 하실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러면 왜 숨었던 거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글쎄요. 그런 분신 특공을 하려 했다고 말하려니 좀 부끄럽더군요. 그리고 그때 그렇게 말했다면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오래된 오해가 풀리는 것을 느끼며 장수들은 한숨과 웃음을 지어 보였다. 라수는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 또한 변명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날 그 성벽 위에서, 몸에서 나는 지독한 기름 냄새마저 잊은 채 제가 했던 생각을 들려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날 저는 우리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화신을 바라보면서 이제 살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죽었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도깨비의 영처럼 말입니다.”

라수는 갑자기 불타는 눈으로 장수들을 바라보았다.

“시우쇠 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지 3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나가들을 기만하며 그들의 북진을 늦추어 왔고 그 파상적인 공격에서 간신히 건져 낸 자투리 병력들을 조금씩 규합하여 겨우 여왕 폐하의 군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엔거에서 마침내 4년 만에 대승까지 거뒀습니다.”

장수들이 다시 기뻐할 준비를 갖췄다. 하지만 라수는 빠르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제게 속으셨습니다.”

장수들이 당황했다. 세미쿼 장군이 외치듯 말했다.

“속다니요? 무슨 말이오. 라수 상장군님?”

“오늘의 승리를 기뻐하시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가슴 아픕니다만, 이 승리에 의해 우리는 돌아갈 수 없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번엔 무핀토 장군이 이맛살을 찡그렸다.

“돌아갈 수 없다니. 무슨 말이오? 우리가 돌아갈 곳이라도 있었소? 즈믄누리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니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오늘 시우쇠 님은 이곳 엔거에서 노출되었습니다. 저는 조금 전 이곳을 선택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엔거에서 남쪽으로 뭐가 있는지 아십니까? 차례로 말씀드리면 페로그라쥬, 악타그라쥬, 시모그라쥬가 나옵니다. 익숙지 않은 지명이겠지만 뭔가 연상되는 것은 있으시겠지요. 예. 나가들의 도시입니다. 그 다음에는 뭐가 나오는지 아십니까?”

라수는 갑자기 몸을 돌려 지도를 짚었다. 그 손가락 끝은 상당히 남쪽에 있었고 그 위치가 시사하는 바를 깨달은 장수들은 전율을 느꼈다. 라수는 지도에 씌어 있는 글자를 음미하듯 말했다.

“하텐그라쥬. 침묵의 도시. 우리는 그곳으로 진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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