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2장 – 땅의 울음 (13)
사모 페이는 천천히 가면을 붙잡았다. 가면 없이 개방된 장소에 섰던 것이 오래간만이었기에 사모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가면을 손에 든 그녀는 자신이 충분히 침착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의 주위에 있던 두억시니들은 각자 편한 자세로 앉거나 눕거나 접은 채 기다렸다.
사모는 눈을 떴다.
아찔할 정도로 반가운 열기가 그녀의 맨얼굴에 와 닿았다. 태양이 뿌리는 찬란한 축복 속에 그녀는 키보렌을 보았다.
눈 높이 이상의 공간에는 자신을 체념해 버린 듯한 잎들이 나뭇가지에 가당찮은 부담을 주며 관능적으로 늘어져 있다. 그러나 물기가 잔뜩 오른 그 싱그러움을 보지 않더라도 길 잃은 바람이 실수로 다가올 냥이면 어김없이 몸을 살랑살랑 흔들어 대는 모습은 참으로 생기가 넘친다. 말라 바스러진 후에도 땅에 닿지 못한 채 숲의 머리에 널브러진 나뭇잎들은 조그마한 바람에도 호들갑스러워진다. 비가 올 모양이야! 그러나 요괴처럼 빛나며 이글거리는 태양 때문에 오히려 검푸르게 보이는 하늘 어디에도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일사병에 걸린 바람이라면 잔뜩 있다. 나뭇잎을 희롱하는 것으로 모자라 바람은 재를 퍼 올렸다. 날아든 재가 사모와 마루나래, 그리고 두억시니들을 휘감아 돌다가 사라졌다. 사모는 시선을 눈 높이 아래로 낮추었다.
잿더미와 그을린 돌, 그리고 가차 없이 녹아 내려 원래 무엇이었을지 짐작키도 어려운, 혹은 짐작하고 싶지 않은 물체들이 혼돈스럽게 쌓여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은 아직껏 뜨거웠다.
사모 페이는 죽은 페로그라쥬를 밟고 서 있었다.
돌무더기 사이에서 살을 뚫고 튀어나온 뼈처럼 불쑥 솟은 목재 끝에서는 조그마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불의 꽃잎을 피운 한 떨기 꽃처럼 보였다. 일반적으로 횃불과 같이 특별히 처리된 경우가 아니라면 그런 목재가 끝에 불을 달고 있을 수는 없지만, 그 목재는 기괴하고 복잡한 재난의 순간들을 거쳐 자연스러운 횃불로 바뀌어 있었다. 즉 반쯤 탄화된 목재는 돌무더기에 파묻힌 아래쪽으로부터 연료를 그 머리 부분에서 타오르는 불에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들기름을 빨아 올려 불을 태우는 등잔의 심지와 같은 원리다. 사모는 돌무더기에 감춰져 있는 연료가 무엇일지 상상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사모의 눈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뜯어 먹고 있는 쥐 한 마리가 들어왔다. 불에 타 무너진 사육장에서 뛰쳐나온 것이 분명한 그 쥐도 페로그라쥬를 덮친 재앙에서 나름의 전상(戰傷)을 얻은 모양이었다. 등의 털이 타 버려 분홍빛 살갗이 드러나 있었다. 상처에서 진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쥐가 열심히 뜯어 먹고 있는 것은 새카맣게 타 버린 쥐였다. 사모는 비늘을 부딪쳤고 쥐는 못마땅하다는 듯 사모를 쏘아보고는 곧 어딘가로 달려갔다. 사모는 고개를 돌렸다.
페로그라쥬의 심장탑이 어디 있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그 높이 때문이 아니다. 무너진 심장탑은 언덕과 같은 돌무더기로 바뀌어 있었다. 다만 돌의 양이 워낙 많기에 무너진 후에도 인상적인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풍겨 나오는 고기 굽는 냄새는 마루나래를 유혹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모는 마루나래를 엄격하게 제지했다. 그녀는 페로그라쥬 사람들의 심장이 불타 버렸던 장소에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사모는 도시 외곽에서 보았던 시체들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는 분명했다. 불타는 도시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사람들도 심장탑이 무너진 순간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을 것이다. 그 때문에 사모는 생존자에 대한 기대를 거의 하지 않았다. 적출을 하지 않은 어린 나가라면 심장탑의 붕괴에서도 안전했겠지만 자기 집 밖으로 별로 나와 보지 못했을 그런 어린 나가들이 도시를 덮친 미증유의 환란에서 살아남았으리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녀의 예상대로 어디에서도 니름은 들려오지 않았다. 소음에 묻혀 버리는 비명과 달리 니름을 방해하는 것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나무가 많이 나기에 고급 서판을 생산해 내던 페로그라쥬의 마지막 모습 앞에서, 사모는 질문을 던졌다.
<륜. 이것이 북부인들에게 저지른 나가의 죄에 대해 네가 집행한 징벌이니?>
사모는 서글픔을 느꼈다. 페로그라쥬의 처참한 마지막 모습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북부에서 보낸 4년 동안 그녀는 나가의 손에 자행된 처참한 살육을 수도 없이 보았다. 낭자한 유혈과 피 냄새로 뒤범벅이 된 그런 광경에 비해 소각된 페로그라쥬의 모습에는 불이 가져다주는 묘한 깨끗함이 있었다. 사모가 느낀 서글픔은 그 폐허의 모든 곳에 남겨져 있는 무감각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집행은 네가 했지만 판결을 내린 것은 네가 아니겠지. 륜. 나는 누가 이 참상을 원했는지 알고 있어. 베미온 굴도하, 키타타 자보로, 그리고 귀하츠 신뷰레가 이것을 원한 것이겠지. 너는 그들의 도구야. 하지만, 하지만 너는 생각할 수 있는 도구야. 그런데 이 무감각함은 뭐지? 저주받을 용인의 감각 같으니! 너무도 예민하게 주위를 느끼는 네겐 더 이상 너 자신을 느낄 힘이 남아 있지 않아.>
사모는 마루나래의 갈기를 움켜쥐었다. 마루나래는 떨리는 그녀의 손길에 불안함을 느낀 듯 사모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들을 위해 죽는 것은 왕인 나의 일이야. 네가 아니야! 너는 케이건 드라카가 되어선 안 돼.>
사모는 가면을 다시 착용했다. 마루나래에 오른 사모는 금군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놔두지 않겠어.>
마루나래가 걸음을 뗐다. 두억시니들은 서서히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페로그라쥬의 잔혹한 폐허는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사모는 그 안으로 들어온 것을 후회했다. 뒤로 돌아서 지금이라도 도시를 우회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을 때 비로소 사모는 페로그라쥬를 벗어났다. 도시에 지나치게 가까웠기에 숲의 청신함은 부족했지만 사모는 최악의 악몽 같은 도시를 빠져나온 것만으로도 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남쪽을 향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