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6장 – 춤추는 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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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16장 – 춤추는 자 (2)


갈로텍은 눈을 감은 채 닐렀다.

<제기랄, 세리스마가>

“지랄을”

<하고 있겠군.〉

시모그라쥬의 고소리 저택에 누워 있었지만 갈로텍은 세리스마의 심경을 충분히 꿰뚫어볼 수 있었다. 세리스마는 몹시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심장탑을 지키고 있는 그 늙은 수호자는 하텐그라쥬에 도달한 다섯 개 군단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었을 때 세리스마가 원했던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러니까 북부군과 손을 잡고서라도 하텐그라쥬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세리스마는 그럼으로써 심장 파괴의 비밀이 지켜지기를 원했다.

하지만 갈로텍은 세리스마의 계획을 잠시 유보해 두고 독자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의 계획은 이왕 일어난 일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즉 심장 파괴에 대해 나가들에게 사실대로 고백한 다음 그것을 가주가 아닌 대수호자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대수호자는 아직 그 계획에 대해 찬성이나 반대를 니르지 않았지만 갈로텍은 그것만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서로 반목하는 가주들과 수호자들은 대수호자의 지휘 아래에 통합되며 심장병의 통제권을 가주에게 뺏기는 일도, 북부군과 손을 잡는 황당한 일도, 그리고 여신의 힘을 이토록 이른 시기에 포기하는 치명적인 일도 피할 수 있었다. 갈로텍은 이 전쟁이 4년째에 치닫고 있으며 이미 북부의 대부분이 초토화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가 살육자에 대한 희미한 단서 하나도 포착하지 못한 지금 갈로텍에게 이 시기는 ‘이토록 이른 시기’일 뿐이었다.

그래서 갈로텍은 인실롭 군단장에게 하텐그라쥬를 점령하라거나 하텐그라쥬 평의회를 장악하라는 등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갈로텍이 그런 지시를 내리지 않았기에 인실롭은 자신의 의무를 하텐그라쥬 보호 및 북부군 퇴치라는 단순 명쾌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인실롭이 하텐그라쥬 공격에 나서지 않는 모습을 본 세리스마는 당황할 것이다. 그리고 인실롭은, 어쩌면 심장탑 공격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태 때문에 하텐그라쥬를 점령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모든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갈로텍이 아는 범위 내에 한 사람뿐이다. 그런데 그 자는 허물벗기라는 상당히 난처한 곤경에 빠져 중립을 선포한 나가의 도시에 드러누워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갈로텍은 세리스마에게 상황을 전달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육체의 통증 때문에 생각의 가닥을 붙잡기 힘들었다. 조금 전 그의 니름은 숨가쁜 상황 속에서 물러나 있어야 하는 자신의 무력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갈로텍은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갈로텍은 눈을 떴고, 잠깐 동안 통증마저 잊어버릴 만큼 놀랐다. 데오늬 달비가 그의 침대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본능적인 수치심에 당황한 갈로텍은 조금 후에야 데오늬가 입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청력에 주의를 기울였다.

“나쁜 말 하시는군요, 대장군님?”

<당신 여기서, 제기랄!>

“당신 여기서 뭐하는 거요?”

“소리를 듣지 못하셔서 그렇게 했습니다. 대장군님.”

갈로텍은 필사적으로 생각해 보았지만 도저히 데오늬 달비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질문했고,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데오늬가 자신은 니를 줄 모르고 갈로텍은 소리를 들을 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허락없이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것을 해명하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갈로텍은 비늘을 부딪치며 말했다.

“왜 허락 없이 이 방에 들어온 거냐고 질문한 것이 아니라, 왜 이 방에 들어온 거냐고 물은 겁니다.”

“대수호자님께서 당신을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대장군님.”

갈로텍은 잠시 아무 말도, 그리고 니름도 하지 못한 채 데오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데오늬 또한 꼼짝하지 않은 채 갈로텍을 내려다보았다. 갈로텍은 겨우 말을 꺼냈다.

“왜?”

“대수호자님께서는 대장군께서 무력한 상황에 홀로 남겨지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장군님.”

“왜 홀로 있으면 안 되는 거요?”

“대수호자님께서는 대장군에게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데오늬는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가 곧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적은 심장병의 통제권을 가진 절대 지배자를 만들어서라도 견제해야 하는 적이므로 대장군이 이토록 무력한 상황에 놓여 있는 이때 대장군을 노릴지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대장군님.”

갈로텍은 상황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불가해한 기분 속에 빠져들었다. 갈로텍은 자신의 제안이 키베인으로 하여금 추리력을 발휘하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키베인이 허물벗기 도중인 갈로텍에게 어떤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고 결정했다는 사실도, 그래서 데오늬에게 자신이 추리한 사실을 알려주고서 보호자의 역할을 부탁했다는 것도 깨달았다. 하지만 갈로텍은 왜 데오늬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은 포로잖소?”

“그렇습니다. 대장군님!”

데오늬는 자신의 지위가 명확해지는 것을 즐거워하는 듯했다. 갈로텍은 다시 비늘을 부딪쳤다.

“그런 당신이 나를 보호한다고?”

“예. 대장군님!”

“적극적으로 제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 내 목을 따버리면 북부군에게 상당히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없는 거요?”

데오늬는 눈을 깜빡거리며 갈로텍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갈로텍은 니름이나 말을 주의하지 않아서 자신이 겪어야 했던 모든 곤경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빠졌다. 설마 내가 아라짓 전사에게 칼 던져준 나가 꼴이 된 건가? 그때 데오늬가 크게 웃었다.

“아아, 알겠습니다. 아프셔서 그렇군요. 대장군님.”

갈로텍은 데오늬의 말이 아픈 사람은 공격하지 않겠다는 의미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의미를 담기에는 단어들의 활용이 좀 이상했다. 갈로텍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아파서 뭐가 그렇다는 거죠?”

“아프셔서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대장군님.”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뭐죠?”

“대장군님이 보고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대장군님.”

“내가 보고받은 것이 뭐죠?”

“이 도시가 중립을 선포했다는 것을 보고받으셨습니다. 대장군님.”

“그건 기억하는데.”

“그러면 왜 자신의 목을 딸 것을 적극적이지 않게 제안하시는 겁니까, 대장군님?”

갈로텍은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갈로텍은 데오늬의 모든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갈로텍은 키베인이 왜 데오늬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들려준 것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갈로텍은 그 질문을 꺼내는 것이 두려웠고, 그래서 그냥 화제를 바꿨다.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습니다. 나가십시오.”

데오늬는 방긋 웃으며 자신의 얼굴을 가리켜보였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 손짓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당신이 모르는 새 당신의 곁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잖습니까.’ 갈로텍은 그 손짓에 반박할 몸짓을 떠올려보려다가, 자신이 뭔가에 말려들고 있다는 불쾌한 자각을 느꼈다. 어쩔 줄 모르게 된 그가 침묵하는 동안 데오늬는 방에 있는 의자를 붙잡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방에는 출입구 하나와 창문 하나가 있었다. 데오늬는 출입구와 창문과 침대를 모두 볼 수 있는 위치에 의자를 가져다놓고 그 위에 앉았다. 몸짓이 아니라 그냥 말로 ‘나가라’고 해도 된다는 것을 깨달은 갈로텍이 입을 열었을 때 데오늬는 뭔가를 꺼내어 자신의 무릎 위에 놓았다. 갈로텍은 기절할 만큼 놀랐다.

“그거 뭡니까!”

“역시 아프셔서 그러신 겁니다. 대장군님. 곧 기억이 떠오르실 겁니다. 이 물건은 나가의 전통적인…….”

“젠장! 나를 기억 상실증 환자로 취급하는 것은 그만둬요. 나는 그게 사이커라는 것을 몰라서 그렇게 질문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왜 사이커를 가지고 있냐고 질문한 겁니다.”

“대수호자님께서 한 자루 빌려주셨습니다. 대장군님.”

“왜?”

“맨손으로 대장군님을 지킬 수는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대장군님.”

데오늬는 모든 것이 그토록 명확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실제로 그녀의 말을 듣는 동안 갈로텍은 계속해서 자신이 당연한 사실을 질문하는 얼간이처럼 행동한다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그런 느낌은 통증 속에서 언제라도 데오늬의 물을 끓일 준비를 갖추며 더 심해졌다. 갈로텍은 자신을 지켜주려는 사람에 대해 공격을 준비하는 것이 다시 없는 얼간이 짓으로 여겨졌다. 데오늬의 태도에는 그런 특이한 점이 있었다. 마음이 불편해진 갈로텍은 데오늬를 쫓아낼 빌미를 찾아보았다.

“그 칼 쓸 줄은 압니까?”

“약속은 중요한 것입니다. 대장군님.”

멍한 표정으로 데오늬를 바라보던 갈로텍은 질문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서 데오늬가 ‘사이커는 쓸 줄 모른다. 하지만 최선을 다할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대수호자에게 대장군을 지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약속은 중요한 것이다.’ 라고 말한 것이라는 사실은 데오늬 자신만이 아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갈로텍은 5분 후 의자에서 일어난 데오늬가 방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달리기 시작했을 때도 그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대신 경고를 보냈다.

“달리든 기어다니든 상관없지만, 내 침대 옆으로 접근하지는 마시오. 내가 당신을 참아주는 것은 당신이 대수호자의 배려의 증거이며, 내가 그를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뗏목에 타게 된 레콘만큼이나 긴장해 있고 따라서 당신이 가까이 다가오면 반사적으로 당신을 죽일 겁니다. 나는 당신 몸 속의 물을 모조리 끓어오르게 할 수 있어요. 그럴 것까지도 없이 그냥 뇌 속의 물만 끓여도 충분하지. 당신은 눈 깜빡할 새에 죽게 될 겁니다.”

데오늬는 반색했다.

“목욕물도 끓일 수 있으십니까, 대장군님?”

“……예?”

“저는 이 저택에서 몸을 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저는 땀을 많이 흘리는 편입니다. 대장군님.”

갈로텍은 왜 땀이 많은지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을 끓이려면 나무를 태워야 하는데, 그건 당신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 중에 하나라고 알고 있습니다. 대장군님. 이렇게 더운 곳이니 그냥 찬물로 씻어도 무방하겠지만………….”

“이 저택에는 목욕통이 없을 겁니다. 지금 보는 것처럼 우리는 허물을 벗지 몸을 물에 담그지는 않습니다.”

갈로텍은 자신의 무시무시한 경고가 그를 무섭고 위험한 사내로 만들어주는 대신 풍부한 연료 대용품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 그다지 화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데오늬는 그런가 하는 표정을 지으며 의자에 도로 앉았다.

그리고 5분 후, 데오늬는 창문으로 쏟아져들어오는 햇빛에 쭉 뻗은 두 다리를 맡긴 채 곯아떨어졌다. 열대의 햇살이 북부인에게 야기할 만한 평범한 반응이었다. 갈로텍은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껴야 되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

자기재귀적인 우주의 특징 때문이 아닌 사소한 우연에 의해, 하텐그라쥬에 있던 비아스 마케로우는 시모그라쥬에 있는 갈로텍과 똑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망할 늙은이, 지랄을 하고 있군.>

또 다른 하루가 이미 절반쯤 타버린 후였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과 세리스마의 전설성은 정비례가 아닌 기하급수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비아스 마케로우는 그것이 하루 단위에서 시간 단위로 바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단신으로 하텐그라쥬의 심장탑을 지키고 있는 남자. 세리스마는 매시간 위대해지고 있었다.

조금 전 맑은 하늘을 보고 돌격했던 쥬어와 그의 돌격대는 심장탑 내의 무더운 공기에 기절해 버렸다. 교활한 세리스마는 돌격자들의 발목을 잡아채는 급류를 흘려보내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내었다. 계단을 채우는 물보다 훨씬 적은 양의 습기로도 심장탑의 아랫부분을 꽉 채울 정도의 수증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열대에 위치한 하텐그라쥬에 쏟아지는 태양의 열기는 엄청나다. 세리스마는 그 두 가지를 이용하여 심장탑 아랫부분을 뜨겁고 습한 공기로 가득 채웠다. 체온 조절 능력이 없는 나가들은 그 무더운 공기를 견딜 수 없었다. 갈로텍이 있었다면 그것이 라호친 사람들의 한증막과 비슷한 원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비아스에게 그런 지식은 없었지만 그녀는 그것이 곤란한 재주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화를 낼 수 있었다.

5층 계단참에서 졸도했다가 부하에 의해 질질 끌려온 쥬어는 정신을 차리고는 하텐그라쥬가 시원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비아스는 그가 깨어난 것을 확인하자마자 비늘을 부딪치며 닐렀다.

<정신 차렸으면 다시 돌격해! 물통을 들고 돌격해라!〉

쥬어는 비아스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마케로우. 세리스마는 200미터 위에 있습니다. 그곳까지 물통으로 몸을 적시면서 올라가는 것은 니름도 안 됩니다.〉

<그러면 일렬로 서서 물통을 계속 전달하면 될 거 아니냐!>

<그런 식으로 어느 정도 올라갈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면 세리스마는 다시 급류를 흘려보낼 겁니다. 계단에 일렬로 늘어선 상태에서 그런 꼴을 당하면 끔찍한 재난이 될 겁니다.>

비아스는 육성으로 살벌한 단어들을 토했다. 쥬어는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리가 없는 그 단어들에 특별한 호기심을 느끼지는 않았다.

<세리스마와 협상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협상이라고!>

쥬어는 어제부터 니르고 싶었던 것을 육성으로 말했다.

“어제 군단들이 도달했습니다.”

비아스 또한 육성을 이용했다.

“내가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하나? 그러니까 한시라도 빨리 심장탑을 점거해야 할 것 아니냐! 군단의 지휘자들은 대부분 하텐그라쥬 출신이다. 우리는 그들의 심장병을 손에 넣어야 해! 그것이 몸빠진살로 용을 잡는 유일한 방법이다.”

“세리스마 또한 저 높은 곳에 있으니 군단의 도착을 알 겁니다.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왜 그가 포기하겠습니까? 도무지 방법이 없습니다. 도깨비들처럼 딱정벌레를 타고 난입하지 않는 이상 저 높이는 그대로 그의 무기입니다. 그와 협상해야 합니다.”

옷 아래에서 계속 부딪치는 비늘 때문에 비아스의 모습은 괴이하게 보였다. 비아스는 타오르는 눈으로 쥬어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엇으로 협상하라는 거냐, 엉? 똑똑한 쥬어여, 한번 말해 봐. 세리스마가 내 무엇을 원하겠나? 협상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야 성립이 가능하다.”

쥬어는 당신이 소중한 비밀을 낭비해 버렸기 때문에 아무것도 내줄 것이 없는 것 아니냐고 되묻고 싶었다. 만약 여신의 감금을 공개하지 않았다면 비아스는 그것으로 세리스마와 협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심장 파괴의 비밀을 평의회장에서 당당하게 외치지 않았다면 역시 그것으로 협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아스는 그 모든 것을 닐러버렸다. 공개된 비밀은 아무 가치가 없다. 쥬어는 비아스에게 다른 여자들이 모르는 사실을 말하는 쾌감과 싸구려 환호에 자기 목숨을 팔아버린 것 아니냐고 말해 주고 싶었다.

머리가 너무 뜨거웠다. 쥬어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만져보았다. 그 이마는 생각했던 것처럼 뜨겁지는 않았다. 역시 그가 느끼는 뜨거움은 심리적인 것이었다. 쥬어는 주의 깊게 구축해 온 자신의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던 생애가 그 최고의 순간에서 머리 나쁜 여자에 의해 좌우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기엔 이미 지나치게 많은 걸음을 걸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쥬어는 말했다.

“평의회를 손에 넣으십시오.”

“네 방자함은 잘 알지. 계속해 봐.”

“마케로우 가문의 가주 자리는 당신이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으므로 잠시 팽개쳐둬도 되는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가주가 될 수 있는 자와 가주인 자 사이에는 심연이 몇 개쯤 놓여 있습니다. 풍비박산이 나다시피 한센 가문을 제가 그토록 원하는 것을 상기하십시오. 가주가 되신 다음, 당신에게 환호를 보냈던 기억을 아직 선명하게 가지고 있는 의원들을 공략하십시오. 평의회를 장악하는 겁니다. 당신 스스로 고백했듯 지금 당신에게는 세리스마에게 내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텐그라쥬 평의회를 손에 넣으면 당신은 똑같은 공격을 몇 번이고 더 감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세리스마는 그런 공격이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할 겁니다. 심장병에 대한 통제권은 포기하십시오. 최소한 유보하십시오. 여기서 무익한 도전을 계속할 이유가 없습니다. 품위 있는 후퇴가 필요합니다.”

비아스는 쥬어의 말에 합리적인 면이 있음을 인정하고 싶은 자신과 사이커를 뽑아 그 무례한 혀를 잘라버리고 싶은 자신을 동시에 느끼며 괴로워했다. 결국 비아스는 그 둘 모두를 포용하기로 했다. 지금은 이용하고, 필요없어진 다음에 혀를 뽑아주면 되겠군. 비아스는 자신의 결정에 씁쓸한 만족감을 느끼며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걸 시도해야겠군. 일어나!”

쥬어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그의 눈에 대로 저편에서 걸어오는 자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쥬어는 비아스에게 눈짓을 보내었고 비아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비아스는 몸을 긴장시켰다.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은 몇 명의 가주들과 그녀들의 호위자들이었다. 그중에는 이세리도 의장과 소메로 마케로우의 모습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자신의 참담한 실패를 보여준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비아스는 턱을 들어올리며 자신만만한 태도를 취했다. 쥬어는 그런 비아스를 속으로 비웃었다.

다가온 여인들은 적당한 거리에 멈춰섰다. 비아스는 사이커에 손을 얹은 채 그들이 먼저 니를 때까지 기다렸다. 이세리도 의장이 닐렀다.

<비아스 마케로우. 공격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수호자 세리스마는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자신만만하게 파도를 만들어내던 그는 이제 힘겹게 습기를 주물럭거리고 있습니다.〉

비아스는 조금 전 쥬어와 그의 돌격대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비아스는 그것이 세리스마의 노회함을 나타내는 상황이 아닌 그의 무력함을 나타내는 증거로 해석되기를 바란다는 내심을 너무 많이 드러내었다. 그녀의 희망은 성취되지 않았다. 가주들은 모두 세리스마가 훨씬 간단한 방법으로 비아스를 약올리는 기술을 터득했음을 눈치챘다. 이세리도 의장은 빙긋 웃으며 닐렀다.

<늙은 세리스마는 나이를 헛먹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군요.>

<인정합니다. 의장님. 저 높은 곳에 고독하게 앉아 한계선 북부에까지 닿는 거미줄을 짜낸 저 늙은 거미는 영리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그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확인했으니, 장난은 이 정도에서 마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비아스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나 대답의 니름을 꺼내기 전 비아스는 의장의 니름이 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의장을 미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닐렀다.

<예. 이제 장난은 그만둘 때가 되었지요. 내일까지 기다려주신다면 그를 붙잡아다 여러분 앞에 무릎 꿇리겠습니다.>

쥬어는 조금 전 그가 무료로 제공한 조언들을 망각해 버리는 비아스에 대해 신음을 흘리고 싶었다. 지체 높은 여인들이 그렇게 많은 곳에서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었기에 쥬어는 간신히 그런 욕망을 참았다. 그때 쥬어는 이세리도 의장이 측은하다는 눈빛으로 비아스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쥬어는 모든 사태를 깨달았다. 이세리도가 닐렀다.

<내니름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비아스.〉

<예?>

<이 모든 소동은, 아마도 여러분의 가문에 지나치게 오랜 기간 동안 가주가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일 겁니다. 남들이 감히 질 엄두도 내지 못하는 무거운 책임을 어깨에 진 채 가문을 이끌어가는 가주의 존재가 없다면 우리 나가도 북부의 불신자들이나 다름없는 야만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이지요.>

가주라는 단어에 비아스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조금전 쥬어의 권고를 떠올린 비아스는 그 기회가 이토록 빨리 찾아왔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하지만 비아스는 쥬어의 평가처럼 대책없이 어리석은 여자는 아니었고, 의장이 ‘소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음을 지나치지도 않았다. 그녀는 의장의 니름에서 맥락을 찾아보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보이지 않았고, 비아스는 일단 기다렸다. 의장은 그녀를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마케로우 가문을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가주 없는 상태로 방치해 둔 우리의 무관심을 용서하길 바라오. 비아스 마케로우. 이건 당신의 잘못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책임 또한 크겠지요.>

비아스는 호흡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세리도 의장이 원하는 것이 분명해졌다. 의장은 비아스가 한 모든 일에서 가치를 박탈한 다음 그것을 가주 없는 가문의 일원이 올바른 통제를 받지 못한 채 저지른 장난, 소동으로 치부하려 하고 있었다. 비아스는 그녀가 어떻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비록 패잔병이라고 하지만 그녀에겐 마호가니 군단의 잔존병들이 있었으며 또한 쥬어의 의용군이 있었다. 의장은 눈 앞에 있는 자가 하텐그라쥬 최고의 무장 세력을 소유한 자라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그때 의장이 의미가 분명한 곁눈질을 했다. 그녀의 시선이 소메로에게 머물렀음을 깨달은 비아스는 비늘이 서는 것을 느꼈다. 의장은 닐렀다.

<하지만 이제 나무랄 데 없는 자격을 가진 자가 당신의 존경받을 가문을 책임지게 되었으니, 그것은 당신만의 기쁨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기쁨이라 할 거요. 우리는 당신과 기쁨을 나누고자 가주님과 함께 찾아왔소.>

가주님! 비아스는 그 단어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의장에 말에 답례를 할 여유도 없는 상태에서 소메로를 돌아보았다. 소메로가 차분하게 닐렀다.

<비아스.>

<소메로?>

<그건 올바른 호칭이 아니다. 비아스.〉

<이해할 수 없어. 계승의 의식은?〉

<이런 전쟁통에 번잡한 의례를 고집하는 것은 형식 지상주의자의 발상이겠지. 융통성이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하고, 나는 그것을 발휘했어. 반 시간 전, 나는 마케로우 가문의 가주가 되었다.〉

<어떻게! 두세나 가주님의 생사가 아직 불명확한데! 가주님은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으셨어. 그런 상황에서 가주가 되려면 다른 가족들의 동의가………….>

비아스는 니름을 중단했다. 그리고 의혹에 찬 눈으로 소메로를 바라보았다. 소메로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모님들께서 찬성하셨다.〉

두 명의 이모!

비아스는 자신이 이모들을 배제하는 우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두세나의 여형제들인 그녀들은, 바로 그렇기에 가주 계승에 참가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인간이라면 상속을 받을 자식이 지나치게 어릴 경우 형제가 상속을 받을 수도 있지만 불사에 가까운 나가들은 자매 계승을 할 일이 별로 없다. 모든 나가들이 그것을 잘 알기에 자매들 중 한 사람이 가주가 되면 다른 자매들은 가주 계승을 깨끗이 단념한 채 가문에 더 많은 자손을 낳아주는 일에만 전념한다. 그리고 그런 자매들의 자식은 모두 가주의 자식으로 취급된다. 비아스나 소메로는 카린돌이나 화리트와 달리 두세나 가주의 친자는 아니었지만 두세나를 어머니로 여긴다. 그리고 두 명의 이모는, 이모라고 불리지만 각자 소메로와 비아스를 낳은 여인들이다.

비아스가 그 이모들이 경쟁자가 아니라고 믿었던 것은 나가의 관점에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들 또한 마케로우 가문의 일원이며 가주가 적절한 지시를 내릴 수 없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가족의 일원으로 차기 가주의 지명에 참가할 수 있다. 소메로는 비아스에게 그녀들의 의사를 알려주었다.

<반대한다면, 너는 유일한 반대자가 될 거야.>

<두 사람 다 언니를?>

〈그래.〉

비아스는 갑자기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카린돌이라면 경계했을 것이다. 화리트였다면 분노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메로가 적이라고? 자신이 모든 집중력과 대처 능력을 필요로 하는 중대한 문제에 봉착했음을 느끼고 있었지만, 비아스는 그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희극적인 기분밖에 느낄 수 없었다.

<쥬어. 네 생각은 어떻지? 우리 언니, 저 덕 있는 여인 소메로가 마케로우 가문의 가주가 되셨다는군.>

소메로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닐렀다.

<누구를 부르는 거지?>

비아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짐승 같은 신음을 흘렸다. 쥬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쥬어의 의용군들이었던 돌격 대원들 역시 대다수가 사라져 있었다. 남아 있는 몇 사람을 본 비아스는 남아 있다는 사실에서 그들이 가장 쓸모없는 자들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비아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소메로를 쏘아보았다.

소메로는 니름 없이 동생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일몰이라는 시한을 가지고 있는 이세리도는 자매들의 침묵을 방해했다.

<비아스 마케로우. 나는 소메로 가주님으로부터 가주님이 당신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니름을 들었습니다. 가주님은 당신을…….>

<끼어들지 마.>

<뭐라고?>

<끼어들지 말라고 했다.>

이세리도는 왈칵 화를 내었다. 하지만 비아스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앞으로 나서려던 이세리도는 비아스의 손이 사이커의 칼자루를 움켜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세리도는 흠칫했다. 하지만 비아스는 소메로만을 쏘아보며 닐렀다.

<그래, 가주님이 되셨다고 생각하고 있군.>

<내 생각에 찬성해 주면 좋겠군.>

<그리고・・・・・・ 나를 수호 장군들에게 넘겨주는 것이군? 그들과 손을 잡겠다는 것이군? 그리고 그들에게 심장을 맡겨둔 채 도깨비 같은 옹졸한 삶에 매달리겠다는 것이군?>

<내 삶의 가치를 평가해 달라고 부탁한 적은 없군. 비아스. 그것보다는 마케로우 가문의 가주에게 무례를 저지르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 평가해 보는 것이 어때.>

<마케로우 가문의 가주라고!>

<네 반대는 소용이 없어. 비아스. 네가 부리던 사람보다 더 모자라는 모습을 보일 거니?>

소메로를 쏘아보는 비아스의 눈에 광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비아스는 냉정하게 닐렀다.

<한 사람 더 있어.>

<한 사람?>

<마케로우 가문의 가주 계승 문제에 대해 발언권을 가진 사람이 하나 더 있어. 아주 가까운 곳에.>

소메로는 비늘을 부딪치며 비아스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비아스가 사이커를 뽑아들었다. 가주가 정해지면 순순히 단념하는 자매의 문화에 익숙해 있던 가주들은 비아스의 그런 반동적인 행동에 놀라고 당황했다. 호위자들의 뒤로 숨는 그녀들을 보며 비아스는 차갑게 웃었다.

<그 사람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 소메로?>

<비아스. 네가 알려준 바대로라면 저곳에 있는 것은 카린돌의 육이다. 그 영이 아냐. 설령 영이라 하더라도, 카린돌이 너를 편들 거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네 정신 상태를 의심할 수밖에 없군.〉

<마음대로 의심해. 하지만 나는 들어봐야겠어!>

비아스는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 돌격 대원들을 밀쳐내고 심장탑을 향해 돌진했다. 뒤늦게 가주들이 그녀를 붙잡으라고 다그쳤지만 비아스는 이미 심장탑 안으로 사라진 후였다. 호위자들은 주춤하며 서로를, 그리고 가주들을 바라보았다. 범죄자라 하더라도 심장탑 안에서는 보호되는 법이다. 사정을 깨달은 가주들은 분한 니름을 교환했다. 그녀들 가운데서, 소메로는 심장탑을 올려다보며 한없이 슬픈 기분을 느꼈다. 비아스는 완전히 돌았다. 그리고 소메로는 그 사실을 절대로 즐거워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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