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6장 – 춤추는 자 (6)
비아스 마케로우는 눈을 떴다. 그녀의 시계는 퍽이나 이상했고, 잠시 동안 비아스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벽과 천장이라 짐작되는 것들은 도무지 벽과 천장으로 보이지 않았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비아스는 자신이 계단 중간쯤에 머리를 아래로 향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묘하게 생긴 벽이라 생각했던 것이 사실 천장이었고 벽이라 여겼던 것은 계단이었다. 아래로 주루룩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비아스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조금 후 비아스는 계단에 앉아 보다 정상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비아스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몽환의 산물 같은 풍경은 곧 그녀를 납득시키는 풍경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심장탑 안에 있었고 시간은 밤이었다. 저편에 그녀의 사이커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비아스는 그것을 다시 집어들었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웠고 무차별적으로 떠오르는 기억들 중 어떤 것도 현재 상태를 이해하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비아스는 참을성 있게 생각을 되풀이했다. 기이한 자세로 쓰러져 있었던 탓인지 몸 곳곳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비아스는 무거운 몸을 힘겹게 움직여 계단벽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두 다리는 계단 위에 쭉 뻗었다. 그것만으로도 통증이 상당히 가셨다. 그리고 비아스는 다시 생각했다.
다 포기하고 어디론가로 걸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때 비아스는 간신히 자신의 상황을 이해했다. 그녀는 심장탑으로 돌진했고, 뜨거운 수증기 속에서 억지로 계단을 뛰어오르다가 기절했었다. 비아스는 자신이 몇 층에서 기절했는지 궁금했지만 밤의 심장탑 안쪽에서 자신의 높이를 짐작할 방법은 없었다. 비아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 계단 위쪽에 창문으로 보이는 것이 있었다. 비아스는 벽을 짚으며 힘겹게 일어난 다음 계단을 올라갔다.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본 비아스는 실망감을 느끼며 창문 아래에 주저앉았다. 밖으로 보이는 건물들의 지붕들은 손 닿을 듯한 높이에 있었다. 아무리 높게 잡아도 3층 이상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비아스는 그 사실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분노를 느꼈다.
분노는 비아스의 자양분이었다. 한 손으로는 사이커를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입을 움켜쥔 채 비아스는 자신을 다그치며 생각했다.
‘평의회는 나를 배신했어. 가주 자리는 소메로 마케로우에게 뺏겼고, 내겐 평의회도, 마케로우 가문의 가주 자리도 남아 있지 않아. 마호가니 군단의 군단병들은…… 소용없어. 지금쯤이면 이미 하텐그라쥬 수비군에게 포함되어 있을 테지. 망할 쥬어 녀석은 벌써 지도그라쥬쯤으로 도망쳤을 테고! 그렇다면 내게 남겨진 것은 한 자루 사이커와 내 현재 위치뿐이군.’
자신도 모르게 ‘현재의 위치’ 라는 단어를 떠올린 비아스는 곧 그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자신이 쓸모 있는 개념을 찾아내었음을 깨닫고는 기뻐했다. 세리스마의 적극적인 방해 때문에 비아스는 일종의 요새라고 할 수 있는 심장탑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다. 그녀의 적이 몇 명이나 될지 짐작하기도 어려웠지만, 지금 당장은 그들 중 누구도 그녀를 잡으러 올 수 없는 것이다. 그 시간이 길지는 않을 테지만 분명히 없는 것보다는 월등히 낫다. 비아스는 그 행운에 즐거워하며 기운을 되찾았다.
그러자 오래된 기억이 그녀에게 찾아들었다. 비아스는 고개를 한번 갸웃했다가, 다시 똑바로 세웠다. 그녀의 입매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비아스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예상보다는 통증이 크지 않았다. 비아스는 그제야 자신이 느꼈던 것이 육체적인 통증이라기보다 심리적인 것임을 알게 되었다. 비아스는 벽을 짚지 않고도 몸을 똑바로 세울 수 있었다.
비아스는 잠시 계단의 위와 아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결정을 도와줄 표지는 어디에도 없었고, 그래서 비아스는 우연에 맡긴 채 위쪽을 향해 걸어올라갔다. 얼마 있지 않아 비아스는 계단에서 빠져나왔고 심장탑 3층에 서게 되었다. 그녀가 바라던 곳이었다. 비아스는 다시 한 번 쾌감을 느끼며 발걸음을 옮겼다.
비아스는 커다란 문 앞에 도달했다.
그녀는 문을 밀었다. 수호자들이 모두 전선으로 떠나는 바람에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인지 문은 그녀의 손길에 약간 저항했다. 비아스는 팔에 힘을 주어 문을 밀어붙였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길게 울리며 문이 열렸다. 비아스는 그 안으로 들어섰다. 해묵은 먼지와 양피지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비아스는 밤 속에 잠긴 특수 도서실을 죽 둘러보았다.
왜 이곳으로 온 것인지는 비아스 자신도 뚜렷하게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비아스는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그만뒀다. 비아스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어떤 가상의 흔적 같은 것을 찾아보려 했다. 그런 흔적이 남아 있을 리는 없지만, 비아스는 차가운 바닥 한쪽이 이상하게 시선을 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종의 자기 최면에 불과한 망상일 것이다.
비아스는 그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지 않은 자를 향해 닐렀다.
<그때도 내겐 사이커 한 자루뿐이었다. 화리트. 하지만 나는 유벡스를 조각내고 네 명줄을 끊었지.>
비아스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하나의 문장이 형성되며 떠올랐다. 추억 어린 사냥터로 돌아온 사냥꾼. 비아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문장은 그녀의 취향에 맞았다. 곰곰히 생각해 본 비아스는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이유였다고 판단했다. 최악의 상황이 어깨를 짓누르는 답답한 상황에서 비아스는 자신의 통쾌한 첫 번째 사냥이 이루어졌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 사냥을 되새기며 비아스는 활기를 되찾았다. 비아스는 가까운 책상으로 걸어가 그 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좋아. 계획을 세워보자.’
비아스는 심장탑 안에 있는 유용한 것들의 목록을 재빨리 구성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카린돌이었다. 그녀 자신이 소메로에게 외쳐준 니름이었다. 하지만 비아스는 그것이 현실성이 없는 발상임을 곧 인정했다. 카린돌을 찾아내어 풀어준다 해도 그녀의 육에는 이미 영이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소메로가 닐렀던 것처럼 영이 남아 있다 해도 카린돌이 소메로에 대항하여 비아스에게 협조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비아스는 일단 카린돌을 풀어주면 수호자들이 힘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 둔 다음 더 이상 카린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음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심장병이었다. 그 생각에 비아스는 어쩔 줄 모를 정도의 기쁨을 느꼈다.
‘이세리도! 아니, 소메로의 것을 먼저 깨트릴까??’
그녀는 하텐그라쥬의 모든 나가, 아니, 심장을 적출한 나가들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비아스는 그 행운을 믿기 어려웠다. 그녀가 가진 유일한 두 가지로 지목되었던 사이커와 그녀의 위치 중 후자는 이루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의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희열에 들떠 흥분하던 비아스는 문득 소메로가 자신을 저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심장탑을 향해 도주했을 때 비아스는 소메로를 한 번 돌아보았다. 소메로는 슬픈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그 어리석은 년은 내가 자기 심장병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나?”
비아스는 소메로를 비웃어주었다. 하지만 내심 비아스는 그런 행동이 주의력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소메로는 비아스가 완전히 방심하고 있을 때 가장 효과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그녀를 몰락시켰다. 그것은 예사로운 재주가 아니었고, 비아스가 안다고 믿었던 소메로의 모습에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비아스는 찜찜한 기분 속에서 소메로가 왜 자신을 저지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답은 떠오르지 않았고, 그래서 비아스는 책상에서 내려섰다. 다시 한 번 바닥을 흘겨본 비아스는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은 채 특수 도서실을 나섰다. 소메로의 심장병이나 기타 유력자의 심장병이 어디에 있는지 비아스는 알지 못했다. 필요한 심장병의 위치를 파악하려면 지금부터 꽤 긴 시간의 탐색을 해야 할 것이다. 복도로 나선 비아스는 문득 소메로가 염두에 둔 것이 그것이 아니었을까 의심했다.
‘무수히 많은 심장병 중에 하나의 심장병을 못 찾아낼 거라고? 비아스는 그것이 소메로의 생각일 거라 믿었고, 그래서 다시 난폭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언젠가 어떤 수련자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병이 수십억 개쯤 있을 줄 알았다는 그녀의 니름에 대해 수련자는 죽은 자의 심장병은 파기한다고 대답했다. 그녀의 기억대로라면 32층에 있던 갈로텍의 방에 도달할 무렵 이미 벽감에는 더 이상 심장병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전쟁 때문에 많은 나가들이 죽었지. 그렇다면 찾아보아야 할 심장병의 숫자는 더욱 줄어들겠군.’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길고 지루한 탐색이 될 것이다. 게다가 밤의 어둠 속에서 글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비아스는 잠깐 고민한 다음 다시 특수 도서실 안으로 들어갔다. 도서실 안을 뒤진 비아스는 조금 후 등롱 하나와 점화통을 찾아내었다. 등롱에 불을 붙인 비아스는 유쾌함까지 느끼며 도서실을 나섰다. 벽감이 있는 곳에 도달하여 등롱을 높이 들어올릴 때까지 그녀의 유쾌함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유쾌함은 끔찍한 경악과 분노로 바뀌었다.
그녀가 본 첫 번째 심장병에는 먹칠이 되어 있었다. 비아스는 그것이 손에 먹을 묻힌 다음 다급하게 문지른 것 같은 흔적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여러 가지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흥미로운 모습이었지만 비아스는 어떤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 비아스는 다급하게 다른 심장병들을 바라보았다. 몇 개의 심장병에는 이름이 반쯤 지워져 있었고 어떤 것은 완전한 이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심장병은 먹칠에 의해 이름이 지워져 있었다. 비아스는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절감하며 비늘을 부딪쳤다.
심장 파괴를 이용하여 누군가를 죽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며, 확률이 낮기는 하지만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이 될 수도 있다. 이곳 어딘가에서 그녀의 이름이 온전히 남아 있는 심장병을 찾아내지 못하는 한, 비아스는 먹칠이 되어 있는 심장병 중 어느 것도 깨트릴 수 없다.
등롱을 내팽개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느라 비아스의 팔에서 비늘이 사납게 부딪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비아스는 이름이 남아 있는 심장병들을 관찰했다. 하지만 온통 그녀가 알지 못하는 이름들뿐이었다. 단 한 번 비아스는 아는 이름을 발견했다.
그것은 저명한 대장장이 페니나 시에도의 심장병이었다. 화풀이 삼아 페니나를 죽일 수야 있겠지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비아스는 자신이 발견한 무서운 사실 앞에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것을 느끼며 벽감 앞에 주저앉았다. 먹칠이 된 심장병을 노려보며 비아스는 격노했다.
‘도대체 어떤 미친 녀석이 여기에 먹칠을 한 거지?”
비아스는 이 넓은 심장탑 전체를 뒤져 단 하나의 심장병을 찾아내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쉬운 일이 되었으며 동시에 쓸모없는 일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이름이 남아 있는 심장병만 조사하면 되므로 탐색해야 할 숫자 자체는 대폭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자신의 심장병을 찾아내지 못할 경우 비아스의 모든 탐색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비아스는 탐색을 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탐색을 포기하고 그 시간을 보다 가능성 높은 일에 투자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곧 그녀의 뇌리에 분명한 사실이 떠올랐다. ‘이탑 어딘가에 카린돌의 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탑의 꼭대기에는 세리스마가 있다.’
적어도 그 두 가지는 절대로 변할 리 없는 사실이었다. 비아스는 그 두 가지 중 하나를 목표로 삼아 어떤 계획을 짜낼 수 있지 않을까 고심했다. 그녀의 생각은 곧 후자로 집중되었다. 카린돌의 육체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을 꺼내는 일뿐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수호자들은 힘을 잃을 테고 하텐그라쥬를 보호할 수 없게 된다. 비아스는 세리스마를 목표로 정했을 경우 어떤 계획이 가능한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역시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비아스는 결국 자신의 행동을 약간 모호한 상태로 남겨두었다. 그녀는 심장탑 위쪽으로 올라가며 자신의 이름이 적힌 심장병이 있는지 찾아보며 그렇게 올라가는 동안 세리스마를 이용할 적당한 방법에 대해 고심해 보기로 했다. 결정을 내린 비아스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세리스마의 방은 그냥 올라갈 경우에도 길고 힘든 목적지다. 거기에 탐색이 더해지니 니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길고 고된 작업이 될 것이다. 자신감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낀 비아스는 재빨리 자신 속에서 분노를 일깨웠다. 분노가 그녀의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쉬웠다. 비아스에겐 분노할 대상이 너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