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6장 – 춤추는 자 (7)
화재와 홍수로 만신창이가 된 키보렌에 아침 햇살이 떨어졌다. 륜은 착잡한 기분 속에서 키보렌을 바라보았다. 다른 나가의 도시와 달리 이곳은 그가 태어난 곳이었다. 물론 집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그에게 하텐그라쥬의 숲에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친숙함은 없었다. 그 숲은 다른 모든 숲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단 하나, 그가 기억할 수 있는 추억이 있었다. 그 비늘 서는 탈출의 날, 륜은 이 근처 어딘가에서 가슴에 댔던 젖은 책을 팽개쳤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주위를 자세히 둘러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밤 도시에서 걸어온 거리를 떠올린 륜은 그 지점이 이 근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추억을 되새기는 것은 화리트의 죽음을 떠올리게 했고 륜은 또다시 죄책감을 떠올리는 것에 실패했다.
륜은 속상하는 기분에서 멀어지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자세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륜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북부군 전체를 둘러볼 수 있었다.
다른 병사들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무기를 점검하거나 하며 소일하고 있었다. 그들에겐 더 이상 양식이 남아 있지 않았고 당장 전투를 중단하고 대규모 사냥이라도 벌이지 않는 한 내일은 굶주린 채 싸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에 대해 고민하는 병사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이 전투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받아들인 지도 오래였다. 륜은 그들이 그 사실에 대해 아무런 유감이 없으며 심지어 자랑스러움까지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서글픔을 느꼈다.
그때 그의 감각에 평범하지 않은 것이 포착되었다. 륜은 그 느낌에 집중했다.
륜은 경악했다.
륜은 믿기 어려운 느낌에 다시 한 번 탐색했다. 하지만 그가 포착한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륜은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당황하여 쳐다보는 병사들 사이를 정신없이 달려갔다. 병사들은 잠시후 더 당황했는데, 아스화리탈이 륜의 뒤를 따라 달렸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더 이상 륜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채 당면한 압사의 문제에 대해 집중했다. 그들이 실로 진지한 태도로 몸을 날렸기에 아스화리탈은 누군가의 발을 밟거나 하는 난처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륜을 따라갈 수 있었다.
아스화리탈이 쿵쾅거리는 소리는 라수 규리하를 기겁하게 했다. 라수는 고개를 돌렸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괄하이드 역시 어리둥절하여 같은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깐 동안 두 명의 규리하 사내들은 잠깐 동안 륜이 드디어 아스화리탈의 신뢰를 잃고 쫓겨 다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무서운 추측을 떠올렸다. 하지만 아스화리탈이 륜을 짓밟지 않도록 주의 깊게 속도를 조절하며 쫓아가는 것을 본 그들은 그런 추측을 벗어버릴 수 있었다.
몇 번이나 쓰러질 뻔하며 정신없이 달려간 륜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용인의 능력을 얻은 이후 처음으로 륜은 자신의 감각이 틀렸기를 애타게 원했다. 숲 저편, 인간의 시각은커녕 나의 시각으로도 볼 수 없는 곳에서 다가오는 자들을 보며, 륜은 자신이 ‘본’ 것이 잘못된 환상이기를 소원했다. 그러나 용인의 감각은 그의 소망을 배신했다.
숲 아래에서 일군의 무리가 걸어나왔다. 인간과 레콘, 도깨비, 그리고 딱정벌레가 걸어왔다. 모두 그가 아는 얼굴들이었지만 륜은 반가움을 표시할 겨를도 없이 처절한 심정으로 그 뒤를 바라보았다. 그 뒤편에는 스물두 명의 두억시니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대회에 탄 나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가는 그에게 익숙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극심한 좌절을 견딜 수 없었던 륜은 무릎을 꿇었다. 앞쪽에서 걸어오던 자들은 륜의 반응에 놀라고 의아해하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뒤쪽을 바라보았다. 뒤쪽에 있던 나가는 대회에서 내려섰다. 그녀는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왔고 그동안 륜은 계속해서 현실을 부정했다. 마침내 륜의 앞에 도달한 대호왕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륜. 오래간만이구나.>
<어떻게…… 도대체 왜 오신 겁니까?>
사모는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륜은 그녀 자신이 니르는 것보다 더 정확한 대답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륜은 알았다.
<케이건 드라카의 헛니름을 믿으시는 것이군요. 이건 쇼자인테쉬크톨이 아닙니다. 누님이 죽는다 해서 제가 살아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헛니름이라기보다는 헛소리라고 해야겠지. 그리고 나는 북부의 왕이다. 내가 어디에 있어야겠어?>
<북부지요. 누님. 제발 돌아가세요! 대호왕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텐그라쥬를 공격한 자들 가운데 대호왕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누님은 이 전쟁이 끝난 이후에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륜. 우리는 이미 돌아와 있어.〉
륜은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무릎을 펴 일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닐렀다.
<우리가 추방되듯 떠나와야 했던 낙원에 이렇게 돌아왔구나. 뼈를 얼리고 살갗을 딱딱하게 만드는 추위 대신 찬란한 햇빛이 종일토록 쏟아지고, 비탄을 불러일으키는 불모의 황야 대신 아름다운 나무들이 가득한 땅. 그림자 속에서도 춤추는 열기를 발견할 수 있고 밤은 침전하는 목향에 물드는 곳. 이곳이야말로 나가의 낙원이겠지.〉
사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그렇지 않아. 키보렌은 낙원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낙원에 돌아와 있어.〉
<갈라졌던 두 개의 칼날이 하나로 합쳐져……………. 도대체 그게 무슨 니름입니까? 바라기요?>
<나를 읽은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나도 그게 무슨 니름인지 모른다는 것도 알겠지. 하지만 대충은 알 것 같구나. 나는 너와 만난 것이 즐거워. 무엇보다도 즐거워. 네가 키보렌을 떠났을 때 나는 너를 쫓아 키보렌을 떠났어. 그리고 네가 북부를 떠났을 때 나는 다시 그곳을 떠나왔어. 세상의 어느 곳이 낙원이지? 낙원은 어디에 있지? 륜. 내가 낙원에 있다면 그건 네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야.>
<누님.>
<일어나, 륜. 일어나! 그렇게 무릎을 꿇고 나를 올려다보지 마. 내가 안을 수 있게 일어나.〉
륜은 일어났다.
사모는 천천히 그를 포옹했다.
그 포옹은 힘겨운 포옹이었으며 환희의 포옹이었다. 륜의 맥박은, 그 고동치는 심장의 느낌은 사모에게 낯선 것이다. 하지만 꼭 끌어안고 있을 때 서로의 맥박은 구분되지 않는다. 사모는 그것을 자신에게 없는 심장의 맥박으로 느꼈다. 온몸으로, 모든 정신으로, 사모는 느닷없이 오래된 추억으로 되돌아갔다. 적출을 받기 전의 그녀에겐 맥박이 있었다. 잠자리에 홀로 누웠을 때 귓가에서, 목에서, 아니,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안인지 밖인지조차 알 수 없는 곳에서 다가오던 멀어지던 심장의 고동. 맥박은 소리가 아니다. 사모는 다시 어려지는 것을 느꼈고 그것은 두려운 추락감이었다. 그래서 사모는 더욱 세게 륜을 끌어안았다. 그럴수록 륜의 맥박은 더욱 분명하게 느껴졌다.
옆이나 뒤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의 포옹은 슬프다. 가장 가까이 있지만, 그 순간부터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가장 가까운 이별이다.
사모는 륜을 놓아주었다. 륜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멀어져야 했다. 그 밀어냄이 사모의 근육에 일어나기 전부터 그것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륜은 자신도 모르게 그 밀어냄에 잠깐 저항했다. 용인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짧은 저항이었다. 그리고 륜은 사모를 마주보았다.
<누님.>
<자, 륜! 일단 다른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해보자.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할 수 있는 내일을 찾아낼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륜은 어떤 반응도 떠올릴 수 없어 그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사모를 만족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안심하게 했다. 사모는 다시 한 번 충동적으로 륜을 끌어안은 다음 재빨리 그를 놓아주었다. 륜은 그제야 수탐자들을 바라보았다.
티나한을 본 순간 륜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티나한은 가장 순박한 레콘의 욕망, 즉 무시무시하고 상대하기 어렵고 항상 경계해야 하는 존재로 보여지길 바라는 유치하지만 탓하기는 어려운 욕망을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욕망을 느끼는 것은 그 등에 업고 있는 아기 때문이었다. 륜은 물어보지 않고서도 그 아기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화신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신생아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에 수탐이 길어졌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신체가 아기일 거라 짐작하지 못한 것은 륜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륜은 수탐자들이 느꼈던 것과 같은 놀라움을 느꼈다. 그리고 륜은 티나한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흥미로운 경향을 발견했다. 거친 사내로 보여지고 싶다는 욕망과 등 뒤에 있는 화신의 존재가 결합되어 티나한의 마음속에서는 독창적인 욕망이 자라나고 있었다. 티나한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살아 움직이는 제단으로 취급되길 바라고 있었다. 어쨌든 제단은 존경받는 것이니까. 륜은 언젠가 티나한의 기분이 우울할 때 사용하기 위해 그것을 기억해 두기로 했다. 그리고 유모나 보모에 관련한 농담은 절대로 꺼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즐거움 속에서 기억해 두었다.
륜은 티나한의 등 뒤에 있는 아기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아기는 시우쇠와 마찬가지로 륜이 읽을 수 없는 상대였다. 그 조그마한 모습에 담겨 있는 것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었다. 그래서 륜은 비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비형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륜은 비형의 즐거움에 약간의 어색함을 느꼈다. 비형은 사모와 륜이 다시 만났다는 사실에 무조건적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 기쁨은 남매의 재회 뒷면에 감춰진 무수한 이유들과 무수한 뒷이야기, 그리고 무수한 상황들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순수하고 거대한 기쁨이었다. 그의 기쁨 앞에서 륜이나 사모가 경험하고 느끼고 고려해야 하는 많은 상황들은 티끌처럼 가벼운 것이 되어 둥실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런 즐거움은 륜에게 완전히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그런 고민들, 재회를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게 만드는 고민들도 모두 륜 자신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형의 즐거움은 륜의 일부에 대한 부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륜은 고마워하기로 했다. 그리고 륜은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륜은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어떻게……!>
륜은 케이건을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용인의 능력을 얻은 이후에 다시 만난 케이건은 그가 전혀 모르는, 그리고 앞으로도 알기 힘든 사람이었다. 케이건의 팔이 그리는 단순한 선은 수백 개의 사건의 총합이었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의 사건들은 한 사람의 생에 한두 번밖에 있기 어려운 사건들이었다. 케이건의 어깨가 뻗어가는 선은 감정의 단층선이었다. 그곳에는 지독한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원래 살아 움직였던 것들의 모호한 부호밖에 될 수 없는 것들이 드러나 있었다. 산 자의 어깨에 있을 수 없는 화석들이 그곳에 있었다. 케이건의 눈에 대해서 륜은 할 니름도 말도 없었다. 그는 그 눈을 오랫동안 보기도 어려웠다.
한 사람이 한 권의 책이라면, 케이건 드라카는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아스화리탈의 용근을 먹은 이후로 륜이 누군가를 읽을 수 없었던 것은 이것이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시우쇠였고 두 번째는 아기였다. 그들은 화신이었고 사람의 눈으로 읽어낼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륜은 케이건에게서 세 번째로 난독성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우쇠나 아기와는 다른 경우였다. 시우쇠와 아기가 읽을 수 없는 문자로 씌어진 책이라면, 케이건은 도서관이었다. 서가에서 책을 뽑아 읽듯 륜은 케이건의 무엇이라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전체를 알려면 한없이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케이건은 일부가 아닌 전체의 존재였다. 따라서, 무엇이든 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륜은 여전히 케이건을 알 수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 두드러짐 없이 서 있지만 사람이라고 보기 힘든 난독성 존재. 륜이 케이건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정의는 그것뿐이었다.
그 모든 관찰과 이해는 수탐자들을 죽 둘러보는 찰나의 시간에 이루어졌다. 륜이 관찰을 끝냈을 때 수탐자들은 뒤늦게 다가와 반가움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때쯤 아스화리탈의 뒤를 따라온 괄하이드 규리하와 라수 규리하, 북부군의 다른 장수들도 도착했다. 그들은 사모 페이가 왔다는 사실에 놀라고 당황했다.
라는 원망마저 내비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 어찌하여 이곳에 오신 겁니까.”
사모는 가면 아래에서 웃었다. 그 웃음은 물론 라수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짐이 아직 너희들의 왕이더냐? 너희들은 왕을 내팽개치는 것을 취미로 삼는 자들이더냐?”
“어떤 말로도 용서를 구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겠습니다. 폐하는 저희들의 뜻을 모르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 너희들이 제멋대로 떠나서 제멋대로 죽어버리면 두 번째 너희들을 만들어내라는 것이지. 그건 어쩐지 너희들이 여자들에게 항상 요구하는 일 같구나.”
라수는 못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대호왕을 바라보았다. 나가인 사모가 불신자의 태도를 비꼴 수 있다는 것은 그녀의 현명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을 향한 그녀의 애정 또한 나타낸다. 관심이 없으면 알 수 없는 법이니까. 라수는 고개를 떨구었다. 륜 페이에 대해 경계심을 품었던 그도 사모 페이에 대해서는 그런 것을 느낄 수 없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무엇이 기다릴지 알 수 없는 목적지 대신 출발점에 희망을 남겨둔 제 소심함을 그렇게 표현하시면 저로선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짐이 네 희망이라면 너는 희망과 함께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리고 네 다른 희망도 너에게 도달했다. 두 번째 화신께서 너희들에게 오셨다.”
라수는 반가움에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 다른 장수들도 수탐자들의 면면을 살폈다. 관찰을 끝낸 라수는 아무런 놀라움도 표현하지 않은 채 티나한의 등 뒤에 있는 아기를 가리켰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저 분이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신체겠군요.”
라수는 논리로 경악을 구축할 수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세미쿼 장군과 무핀토 장군은 기가 막힌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고 키타타 자보로 장군은 입을 벌린 채 뺨을 쓰다듬었다.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티나한에게 눈짓을 보냈다. 티나한은 아기를 등에서 내렸다. 아기를 품에 안으려던 티나한은 곧 생각을 바꿔 비형에게 건네었다. 비형은 히죽 웃고는 아기를 안아들었다. 케이건이 말했다.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신체였으며, 이름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화신이십니다.”
라수는 여전히 놀라움 없는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뒤이어 괄하이드와 다른 장수들이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비형의 품에 안긴 채 그들을 죽 둘러보던 아기가 부리를 열었다.
“빛나는 아이들이 여기 모여 있구나. 로페산 삵쾡이 무핀토여. 사람들이 너를 얕은 자라 말하는 것에 지나치게 신경쓰지 마라. 물론 너는 깊이가 있는 사내는 아니다. 하지만 깊이가 있는 사내는 깊이가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준다는 것 외엔 이렇다 할 장점이 없다. 그런 자들을 천시할 필요가 없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키타타 자보로, 사라진 씨족의 말예여. 네 복수에 씨족들이 찬성해 줄 것인가를 걱정하지는 마라. 어떤 자들은 군자연하며 너에게 씨족들은 네가 살아남아서 다시 씨족을 번성시키기를 원할 거라고 말하겠지. 헛소리다. 죽은 자는 죽은 자다. 그런 말에는 늙은 자와 죽은 자를 우상으로 만들지 않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삶을 무서워하는 나약한 것들의 소리 없는 절규가 배어 있다. 네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거라. 초저녁 방랑자 세미쿼여. 임신했다는 이유로 네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된 네 부인은 여섯 달 전 순산했다. 네 아내는 그 아기에게 네가 남겨준 이름을 붙여주지는 않았다.”
“규리하의 변경백 괄하이드여. 왕의 적과 싸울 수 있게 된 그대를 축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과거의 전쟁들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네가 싸우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은 대도 한 자루면 족하다. 그 대도가 누구의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라수 규리하여. 전우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괄하이드의 말에 지나치게 신경쓰지 마라. 그것은 전사인 네 형의 방식이다. 네 방식은 네 것이어야 한다.”
라수는 고개를 들어 복잡한 시선으로 여신의 화신을 바라보았다. 그때 저편에서 불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 뭣들 하냐?”
사람들은 주춤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시우쇠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시우쇠는 비형과 무릎을 꿇은 사람들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저 도깨비를 왕으로 추대하는 거냐?”
사람들은 시우쇠의 엉뚱한 말에 당황했다. 라수가 똑바로 서서 설명했다.
“저희들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화신을 뵙고 경배를 드리는 중입니다.”
“응?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 왔나? 어디에 있는데?”
“비형이, 여기 있는 도깨비가 안고 계신 분입니다.”
시우쇠는 비형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보군. 뭘 안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군. 그런데 안겨 있다니, 아기인가 보지.”
사람들은 시우쇠의 말이 의미하는 바에 당황했다. 그때 비형에게 안겨 있던 아기가 그들을 다시 놀라게 했다.
“라수. 누구를 향해 설명하는 거지? 시우쇠가 오기라도 했나?”
사람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케이건이 시우쇠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우쇠 님. 오래간만입니다. 저는 케이건입니다. 그런데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을 보실 수 없으신 겁니까?”
“못 봐.”
케이건은 고개를 홱 돌려 아기를 쳐다보았다. 아기는 씩 웃었다.
“시우쇠가 대답했니?”
케이건은 눈꺼풀을 꿈틀거렸다.
“그러면 듣지도 못하시는 겁니까?”
“그래. 못 들어.”
그들은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의 눈은 시우쇠와 아기 모두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우쇠와 아기는 서로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며 마치 존재하지 않는 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때 케이건이 문득 시모그라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는 아기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시우쇠 님은 고소리 의장을 통해 말을 전달하신 겁니까?”
“맞아. 나는 너를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그리고 시우쇠도 너와 똑같이 할 수 있고. 하지만 나와 시우쇠는 서로 그럴 수 없어. 저기쯤 있는 모양이군. 풀이 타고 있어.”
타인을 통해서만 서로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는 두 신 사이에서, 사람들은 심한 당혹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