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7장 – 독수(毒水) (1)
생의 심오한 의문을 풀고 싶어하는 자들이 많다. 그 희망은, 당연하기에 특별히 언급되지 않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생에는 의문이 존재한다는 것 이다. 자, 어떤 지혜로운 자에 의해 그 의문이 풀렸다 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 자는 그때부터 의문 없 는 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전 제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생이다. 의문 없는 생이 생 일까?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설명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의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 혹은 그 지혜 로운 자가 사기꾼이라는 것.
<가이너 카쉬냅의 <생각하는 동물들> 서문.>
독수(毒水)
티나한은 바람에 깃털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거세고 거침없 는 바람이었다. 심장탑 51층의 면적이 작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위에서 바라보는 하텐그라쥬와 키보렌의 넓이는 광대했고 그에 대비되는 51층의 면적은 티나한에게 세워놓은 막대기 위에 서 있는 듯한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물론 그 위에 지나치게 거대한 존재들이 한데 모여 있다는 것 또한 그런 불안정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일찍이 지상의 어떤 구조물도 세 명의 화신을 한꺼번에 영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티나한은 위안을 얻기 위해 철창을 꽉 움켜쥐며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뢰할 수 있는 길잡이, 능숙한 여행가, 좀특 별한 친절함을 가진 그의 동료는, 사람이 아니었다. 티나한은 그 개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케이건이 상냥하고 부드러운 호인 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티나한은 어떤 경우에도 케이건이 자신의 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문득 티나한은 그것이 기묘 한 일임을 깨달았다. ‘어떻게? 대부분의 경우 케이건의 언동은 잘 단련되고 충분히 안정된 인격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었지만, 때론 성난 하늘치보다 더 끔찍한 것을 직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모습들을 보이기도 했다. 티나한은 파름 평원 에서 하늘치를 불러내려 3,000명이나 되는 두억시니를 학살했던 케이건을 떠올렸다.
‘왜 나는 케이건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했지? 내가 만난 그 누구보다 위험해질 수 있는 녀석인데.’
심지어 티나한은 지금도 케이건이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끔찍한 것을 상대하는 것처럼 긴 장하고 있는 아기의 반응은 티나한에겐 쉽게 납득되지 않는 것이 었다. 아기는 다시 소리 죽여 외쳤다.
”티나한! 얼음이 녹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빨리 전령시 켜!”
”여신님.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 잘 이야기하면………….”
”레콘이 대화를 이야기하는 건 거기에 물이 있다는 뜻이지. 저 까짓 물 몇 방울이 너를 죽이지는 않아!”
티나한은 창피함에 볏을 붉게 부풀리며 냉동 장치에서 흘러나 오는 물을 흘깃 바라보았다. 아기의 말대로 그런 물에 빠져죽을 리야 없지만, 심리적인 공포는 현상을 무시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티나한은 깃털을 부풀리며 그곳에서 눈을 돌렸다. 그러자 케이건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케이건의 두 눈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채 그를 향해 고정 되어 있었다. 마치 어린애가 나무작대기로 그린 낙서의 눈 같은 무의미하고 생기 없는 눈이었다. 티나한은 자신도 모르게 그 눈 에서 호의와 이해를 찾아보려 애쓰며 미소지었다.
그때 시우쇠가 갑자기 움직였다. 시우쇠는 케이건이 티나한을 바라보는 틈을 노려 팔을 들어올렸다. 케이건의 팔이 잊혀진 전설의 도래처럼 움직였다. 눈길은 여전히 티나한에게 둔 채 케이건의 오른팔이 독자적으 로 움직였다. 바라기를 문 그 오른손은 옆으로 내뻗어졌다. 티나 한은 자신도 모르게 ‘쥐었다’가 아닌 ‘물었다’고 표현했음을 깨 달았다. 그 오른손은 케이건의 어깨에 달려 있을 뿐인, 케이건과 는 독자적인 뱀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그 뱀은 입에 문 바라기를 시우쇠의 가슴에 겨냥했다. 시우쇠의 몸에서 거칠게 불티가 튀어오름과 동시에 화염의 화 신은 뒤로 튕겨지듯 날아갔다.
시우쇠의 몸에서 돌개바람에 휘말린 꽃잎들 같은 불티가 튕겨 져 날았다. 불똥과 함께 날아간 시우쇠의 몸은 51층의 바닥을 거 의 가로질러 반대편 가장자리까지 도달한 후에야 겨우 땅에 떨어 졌다. 시우쇠는 한쪽 무릎을 세우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케 이건을 바라보았다. 티나한은 볏을 뻣뻣하게 세운 채 자신도 모 르게 부리를 딱딱 부딪쳤다. 티나한을 바라보던 케이건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케이건은 먼저 시우쇠를, 그리고 바라기를 바라보았다. 시우쇠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온몸에서 불티를 날려올리고 있었다. 케이건은 고개 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시험삼아 취해 보는 듯한 동작으로 바라 기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케이건은 고개를 돌려 저 아래쪽의 하텐그라쥬를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낮은 궤도로 힘껏 휘둘렀다. 티나한과 비형은 숨이 멎는 공포를 느꼈다. 케이건이 바라기를 휘두른 순간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음과 함 께 하텐그라쥬의 한 구역이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의 형태는 기묘했다. 도시의 건물과 대로, 광장 위로 길이가 수백 미터는 족 히 될 호선이 번개처럼 치달으며 잔해의 장막이 비스듬히 뛰쳐올 랐다. 하텐그라쥬라는 얇은 도깨비지가 바라기에 의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비형이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그런 상황에서 입 을 열 수 있는 종족은 아마도 도깨비뿐일 것이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케이건이 고개를 돌려 비형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묘하게 비형과 비슷했다. 케이건 또한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 불가해함 을 느끼고 있었다. 케이건은 특유의 친절한 태도를 발휘하여 비 형과 자신 둘 다를 만족시키기로 했다.
”한 번 더 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 둘 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 나는 건지 알게 될 것 같소.”
비형이 거부의 외침을 외칠 틈은 없었다. 케이건은 다시 바라 기를 움켜쥐고 허공을 향해 있는 힘껏 휘둘렀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톱이 한량 없는 적의로 땅을 할퀴는 듯 했다. 건물은 무너진다기보다 터져버렸고 포석과 돌기둥, 건물의 처마 등이 폭풍을 일으키며 치솟았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 잔해 와 흙먼지들이 지상에 내려선 구름인 양 꿈틀거리며 압도적인 을 가진 것 특유의 무겁고 느린 모습으로 서서히 번져나갔다. 비 형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만두세요! 예?”
케이건은 비형을 흘깃 바라보고는 바라기를 얼굴 앞에 세워들 었다. 그리고 그곳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라기의 두 개의 칼날에는 각자 얼굴의 반이 비치고 있었고, 그래서 그곳 에는 세로로 쪼개진 케이건의 얼굴이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더없이 참담한 심정으로 키타타 자보로의 사체를 내려다보던 괄하이드는 폭음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하텐그라쥬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돌아보곤 다시 경악했다. 도깨비 감투를 쓴 태고의 야수가 산더미 같은 앞발로 하텐그라 쥬를 할퀴는 것 같았다. 대지를 강타하는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하텐그라쥬는 잔혹하게 찢겨져 너덜거렸다. 건물의 기 초를 이루고 있었을 육중한 돌들이 먼지처럼 가볍게 날아올라 허 공을 수놓았고 흙먼지는 심장탑을 뒤덮을 만한 기세로 피어올랐 다. 초월적인 재난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라수는 전쟁 동안 몸에 익은 습관대로 거의 반사적으로 뇌룡공 을 돌아보았다. 특별한 질문을 꺼내지 않은 것 또한 몸에 익은 습관이다. 필요할 경우 륜은 언제나 라수의 질문을 듣기도 전에 대답했다. 하지만 사모의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엎드린 뇌룡공 의 모습을 본 라수는 그가 자신의 의문을 해결해 줄 상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수는 다른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레놀이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저건 나가 살육신의 강림을 알리는 신호인가 보군요.”
”그가 나가를 다 죽일까요?”
”그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흥분 속에서도 라수는 오레놀의 대답이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오레놀은 신의 전능함을 말하는 대신 신의 무능함을 말했다. 한 가지 일밖에 할 줄 모르는 신이라는 것은 라수에겐 당혹스러운 개념이었다. 라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우리 북부군에겐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는 겁니까? 스님. 저…………… 소름끼치는 폭력은 우리와는 상관 없는 겁니까?”
”아마도 그럴 거라 생각됩니다.”
라수는 키타타 자보로의 시체를 흘깃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북부군의 안전한 퇴각을 위해 매진하고 싶군 요.”
괄하이드 규리하가 당혹한 표정으로 동생을 돌아보았다. 라수 는 침착하게 말했다.
”북부군은 저를 따라 이 사지로 왔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의 행군이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동시에 그 거대함만큼이나 무의미 한 행군이었음이 밝혀진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한 계선 너머로 안전하게 돌려보내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하텐그라쥬의 사람들이………….”
라수는 고개를 가로저어 대덕의 말을 중간에 가로막으며 말 했다.
”저 하늘치에 우리도 올라갈 수 있습니까?”
대덕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놀라운 사실 을 공유할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저곳에 계단이 있습니다. 제가 타고 내려온 계단입니다. 당신도, 다른 누구도 그곳에 계단이 있기를 원하면 그 계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딛고 올라갈 수 있습 니다.”
라수는 시험 삼아 대덕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라수는 욕설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억눌렀다. 대덕의 말대로 그곳 에는 계단이 있었다. 오레놀의 말은 계속되었다.
”처음 저 위에 올라갔을 때 우리는 유적을 만질 수 없었습니다. 지상에서 하늘치 유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그것을 볼 수만 있고 만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저 하늘치를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게 할 수도 있겠지요?”
”예? 아, 예. 가능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라수는 대호왕을 바라보았다. 사모는 무릎에 놓인 륜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쥔 채 라수를 마주보았다. 라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표정은 내부의 긴장과 흥분을 감추고 있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긴장과 흥분을 드러내고 있기도 했다. 감출 것이 없다면 감추지 않을 테니까.
”폐하, 회군을 윤허해 주십시오.”
사모는 배신감과 동정심을 거의 동시에 느꼈다. 그러나 라수의 요구에는 부당함이 없었다. 그녀는 북부의 왕이었고 북부군은 나 가를 도울 의무가 조금도 없다. 사모는 고개를 끄덕여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 사모는 라수의 눈빛 속에서 기이한 의미를 발 견했다. 사모는 그 의미에 놀랐지만, 이미 그녀의 고개는 위아래 로 움직였다.
라수 규리하는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상장군의 지시는 레콘의 목소리에 의해 증폭되어 북부군들 전체에 퍼졌다. 라수는 머리카 락을 뒤로 쓸어넘긴 다음 대호왕을 향해 말했다.
”그럼, 이제 나가 살육신의 강림을 저지할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요?”
사모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본 것은 정확했다. 라수 규리 하는 북부군을 안전하게 퇴각시킬 의무를 다하려 하고 있었지만, 그 자신에 대해서는 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괄하이드 대 장군은 놀란 표정으로 사촌동생을 향해 말했다.
”무슨 말이냐. 너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냐?”
라수는 대호왕을 향해 말했다.
”만일 폐하께서 돌아가라 하시면 폐하께서는 재위 이후 처음으 로 반란을 경험하실 겁니다. 제가 이곳을 놓칠 것 같습니까?”
사모는 어찌할 수 없는 미소로 얼굴을 물들인 채 라수 규리하 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4년 동안 방황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자 리로 돌아온 학자가 역사에 길이 남을 대사건의 목격자가 되려는 희망에 가득 차 눈을 빛내고 있었다. 사모는 고개를 조금 내저으 며 다시 륜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다시 수심이 떠올랐다. 그녀와 륜 곁에서는 베미온이 손등을 물어뜯으며 어쩔 줄 모르 는 표정으로 륜을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륜의 팔을 붙잡았다. 베미온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사모는 의아한 표정으로 베미온을 바라보았다.
”베미온 마립간?”
베미온은 끙끙거리며 말했다.
”움직이지 않아요.”
사모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베미온은 륜의 팔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잇소리를 내며 그것을 끌어올리려 했 다. 하지만 그 팔은 땅에 고정된 것인 양 움직이지 않았다. 사모 는 당황하여 륜의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사모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무릎에 올려놓은 륜의 머리는 쉽게 움직였 지만, 그 외 다른 부분들, 땅에 닿아 있는 부분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라수가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사모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륜의 머리에 대고 닐렀다.
<륜. 륜?>
대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