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7장 – 독수(毒水) (2)
사모의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륜은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용 인들의 흔적을 읽었다. 그들 중에는 선한 자도, 악한 자도 있었고 어리석은 자도, 지 혜로운 자들도 있었다. 태어났고 살아갔던 그들은 세계의 모퉁이 마다 도저히 지워질 수 없는 흔적들을 남겨두었고 그 흔적들은 모두 륜이 품어안아야 할 것들이었다.
세계가 그를 향해 니르고 있었다. 지층의 비좁은 틈을 힘차게 흐르는 지하수의 맥류. 나무 우듬 지를 기어올라가는 사마귀의 작디 작은 허파가 내뿜은 바람. 창 공의 바람은 자유롭다. 타버린 동물의 배에서 흘러나오는 침출 수. 역동적인 암반의 춤. 다음 동작은 아마도 2만 년 후. 아니, 1만 7000년 후, 저 나뭇잎의 추락 때문에.
륜이 가진 날카로움은 본능의 수준에서 발휘되고 있었다. 심장 을 뛰게 하고 허파를 부풀리는 것처럼 륜은 자신의 상처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개입했다. 륜의 피가 상처 부위를 우회하면서 더 이상 실혈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흘린 피 또한 보충되었 다. 륜의 몸은 눈을 깜빡이는 데 필요한 힘보다 더 적은 노력으 로 흘려버린 피를 보충했다. 몸을 누인 땅으로부터 륜의 몸은 거 침없이 물기를 흡수했고 물에 용해될 수 있는 모든 성분들 또한 물과 함께 흡수되었다. 식물이 그 뿌리로 양분을 빨아들이는 것과 유사한 작용이었다. 그리고 땅으로부터 흡수한 물질들을 육체 에 더하기 위해 체내의 조성비가 눈 깜빡할 사이에 수십 번 이상 바뀌었다. 그 변화는 번갯불 같았다. 그 때문에 륜의 몸은 유지 에 필요한 모든 것을 ‘소화’ 없이 얻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 은 모두 상처 자체에 대한 죽음과 유리, 그리고 재생과 부활로 돌려졌다.
그 순간, 륜은 지상에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생명체가 되어 있었다. 생물은 자신이 무생물로 바뀌는 것을 막는 기제를 가지고 있으 며 그 능력이 다한 순간 무생물로 바뀐다. 그러나 몸에 꽂힌 작 살검으로 바람을 느끼고 땅에 닿은 몸으로 양분을 흡수하며 흡수 한 물을 태워 체내의 불로 변화시키는 륜은 그 순간 경계에 걸쳐 있었다. 생물도 무생물도 아닌 존재. 하늘이 열린 이래 처음 을 피운 나무. 그의 몸은 생명의 빠르고 긴박한 박자와 무기물의 장대하고 느린 호흡 양자를 모두 경험하고 있었다.
륜은 자신의 몸이 자신을 구제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극도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누구나 알 듯 세상에는 놀 라서 죽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죽었다고 믿는 순간 사람 은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떠하건 죽어버릴 수 있다. 그리고 륜이 처해 있는 위험은 자신의 생존성을 의심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었다. 륜은 스스로를 둘러싼 자연의 흐름, 무기물의 흐름에 자신을 투사하고 싶은 견딜 수 없는 욕망을 느꼈다. 그것은 아름 다웠고 심오했다.
죽음은 순박한 탈출이었다.
아스화리탈만이 륜을 이해했다. 작살검이 륜을 찌를 때 아스화리탈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 아스화리탈은 날개를 접은 채 륜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스화리탈을 성장시킨 그 존재는 지금 경계에 걸쳐져 있었고 무 엇으로든 성장할 수 있는 용은 륜이 무엇으로 바뀐다 해도 괘념 치 않았다. 용은 륜이 그대로 멈춰버릴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 각했다. 형태 없는 뿌리로 대지와 직접 대화하고 영원성 속에 자 신을 고정시키는 미래가 륜의 앞길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아스 화리탈은 그에 대해 아무런 유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용은 어떤 부름을 느꼈다. 용은 고개를 좌 우로 돌려 자신을 부른 존재를 찾으려 했다. 수직 날개 뿌리부분 에 돋아난 가벼운 털들이 용의 움직임에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하지만 아스화리탈의 시야 어디에서도 그런 존재는 보이지 않았 다. 문득 용은 자신이 착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용을 부르고 있는 것은 지금 이곳이 아니었다. 용은 난처하다는 기분을 느 꼈고 그에 따라 그의 분화공들이 가볍게 벌름거렸다. 그때 또다 시 부름이 들려왔다.
용은 그 부름을 거절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아스화리탈은 날개를 펴 지금이 아닌 이곳이 아닌 곳을 향 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