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7장 – 독수(毒水) (4)
다시 비행하던 아스화리탈이 날개를 접었을 때 어디선가 쾌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탈저 사냥꾼들의 사냥 기호야. 흑사자와 용.”
”흑사자와 용이요?”
”둘 다 나가에 의해 멸종한 것들이지. 키탈저 사냥어로 읽으면 케이건 드라카가 되네. 그 친구가 사용하는 이름은 거기서 따온 걸세.”
아스화리탈은 주위를 관찰했다. 그리고 용은 자신이 즈믄누리 의 성주 서재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표현 이라 하기 어려웠는데, 성주의 서재는 용의 거체가 들어갈 만큼 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아스화리탈의 몸 상당 부분은 서재 바닥 에 가라앉아 있었고 따라서 서재에 있는 것은 아스화리탈의 머리 와 목 일부분이었다. 라호친의 풍경과 달리 서재의 풍경은 훨씬 정상적이었지만, 아스화리탈은 사물들의 윤곽이 조금 기묘하게 번득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스화리탈은 그 사실에 대해 다시 숙고했다. 그러나 스스로를 만족시킬 만한 대답을 얻을 수 없었고 그래서 아스화리탈은 도깨비들을 바라보았다.
용의 앞쪽에서, 두 명의 도깨비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용 은 그중 한 명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즈믄누리의 성주 바우 머 리돌이었다. 즈믄누리의 11대 성주이며, 살아 있는 성주다. 즈믄 누리의 장대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 성주가 열한 명뿐이었던 것 은 성주들 대부분이 어르신의 형태로 남아서 자신의 불운을 슬퍼하며 긴 세월을 다스리곤 했기 때문이다. 바우 머리돌은 아직 죽지 않았고 그 또한 다른 열 명의 성주들과 마찬가지로 죽 은 직후에 성주 자리를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어르신들이 할 법한 재미있는 일에 전념할 야망을 품고 있었지만, 아마도 그 야망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아스화리탈은 바우 성주와 대화를 나누 고 있는 도깨비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스화리탈은 그 도깨 비를 알고 있었다. 즈믄누리의 무사장 사빈 하수언이었다. 그 직 함은 만약의 경우 피를 볼 일이 도깨비에게 발생했을 때 그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무서운 의미였지만, 사빈은 크게 신경쓰지 않 았다. 도깨비의 역사에서 그런 불운한 처지에 빠져야 했던 무사 장은 한 명뿐이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나설 지도 모른다는 풍문만으로도 저 페시론 섬의 악당들이 맞이해야 했던 최후를 떠올리며 스스로 사태를 해결해 버렸다.
자신의 직업에 대해 만족스러워하지는 않지만 도깨비답게 거 기서 불운의 소지를 발견하지도 않는 두 도깨비를 보며 아스화리 탈은 흥미로운 기분을 느꼈다. 아스화리탈은 그들의 대화에 주의 를 기울였다.
”그렇긴 하겠습니다만, 저라면 그런 위험한 곳에 들어갈 때의 동료가 제정신이라는 확증이 있는 편이 좋겠습니다. 혹 그 킴이 늘상 먹던 나가에 질린 나머지 별식으로 도깨비를 먹고 싶어하면 실로 곤혹스러운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말게. 케이건의 분노는 모조리 나가들에게 돌려져 있어. 그리고 그에게 다른 분노를 살 수도 없어.”
”분노를 살 수 없다고요?”
”그래. 서신에서 본 것처럼 그에겐 더 뺏을 수 있는 것도 없 어. 나가들이 모조리 다 빼앗아 갔으니까. 좀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가를 제외한 자들에게 있어서 케이건은 세상에 서 가장 안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분노하게 할 수 없으니 까.”
사빈은 성주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스화리탈은 이 해했다. 케이건은 안전하다. 나가를 제외한 자들에 대해서만. 그 런데 케이건이 자신의 위험성을 드러내는 상대는 종족으로서의 나가다. 개인인 나가에게, 케이건은 때론 충성을 바치고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사모 페이와 요스비가 그런 일탈의 대상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문득 아스화리탈은 6,800년 전에 보았던 ‘하늘치’를 떠올렸다.
그는 요스비를 닮았다.
아스화리탈은 그것이 기묘한 생각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 인해 주면서도 그 생각에 매료되었다. 요스비는 ‘하늘치’와 비슷 하다. 문득 아스화리탈은 요스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부름이 다가왔다.
’저 곳으로, 그때로.’
아스화리탈은 날아올랐다.
아스화리탈은 밤의 하텐그라쥬에 도달했다. 그리고 앞에는 심 장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하마터면 심장탑을 들이받을 뻔했던 아스화리탈은 수직 날개를 곧추세우며 동시에 두 장의 수평 날개 를 비틀었다. 공중에서 멈춘 아스화리탈은 눈 앞에 한 나가의 얼 굴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창문을 통해 용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갈로텍이었다. 그러나 용은 갈로텍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갈로텍은 용에게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스화리탈은 허공에 뜬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떤 폭력적인 기분이 아스화리탈을 휘감았고 용은 갈로텍의 머리를 짓눌러주고 싶다는 욕망을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 용은 이 모험이 허락하는 것이 오직 관찰뿐임을 깨닫게 되었다. 아스화리탈은 홧김에 앞발을 휘둘렀지만 갈로텍의 상반신을 으깨 고 심장탑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을 그 공격은 허공을 갈랐다. 아 스화리탈은 포기한 채 갈로텍을 바라보았다.
갈로텍이 갑자기 비늘을 조금 세우며 닐렀다.
<용이라도 한 마리 날아올 것 같은 으스스한 밤이군요.>
아스화리탈은 경이감을 느꼈다. 갈로텍은 비어 있는 공간을 바 라보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가 하고 있는 모든 행위는 아니었다. 아스화리탈은 갈로텍과 자신의 유사성을 발견했다. 그 유사성은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에 속한 두 사람 사이에 공명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스화리탈은 문득 자신을 사람으로 표현했음을 깨달았 다. 아스화리탈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누구지?’
아스화리탈의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 한 구석이 갑자기 일그러 졌다. 그러자 다음 순간 아스화리탈은 파름 산에 있게 되었다. 용은 눈앞에서 쥬타기 대선사와 오레놀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뭔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던 대선사가 말 을 했다. 아스화리탈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내 꿈에 어디에도 없는 신이 현몽하셨다. 신께서는 내 게 도탄에 빠진 세상을 구하기 위해 조만간 용의 모습으로 세상에 화신(化身)하실 거라고 알리셨다.”
순간 아스화리탈은 깨달았다. 공포 때문에 용의 모습으로 지금이 아닌 이곳이 아닌 곳을 떠돌고 있지만 그는 용이 아니었다.
<디듀스류노 라르간드 페이. 나는 륜 페이다.>
륜은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벼락이 번득이는 세 장의 날개와 다섯 가닥의 꼬리 대신 나가의 팔다리가 그곳에 있었다. 륜은 몸을 돌렸다. 저편에서 아스화리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는 륜 자신이 등에 작살검을 꽂은 채 쓰러져 있었다. 순간적인 감정의 동요가 일어났지만 륜은 곧 자신을 진정시켰다. 아스화리 탈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륜은 이해했다. 사람이 감당하 기 힘든 이 무서운 여행에서 륜은 자신도 모르게 강력한 친구의 모습을 빌렸다. 아니, 그것은 여행도 아니었다. 진흙탕에 남겨진 발자국을 읽으며 지나간 동물의 모습을 추측하는 사냥꾼처럼 륜 은 세계에 남겨진 자국을 읽으며 과거를 보고 있었다.
’네 모습을 빌려줘서 고마워.’
용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용에게는 입이 없었다. 그리고 눈 주위의 근육들 또한 미소를 짓기에 적합하지 않은 형태였다. 하 지만 륜은 아스화리탈이 미소를 지었음을 깨달았다. 그 미소는 그 이름의 원래 소유자의 미소와 닮아 있었다. 륜은 웃으며 다시 주의를 기울였고, 하텐그라쥬의 심장탑을 바라보았다. 갈로텍은 세리스마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세리스마와 갈로텍은 요스비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륜 페이도 요스비에 대해 알게 되었다.
’세상이 나에게 니르고 있어.’
륜은 요스비를 직시했다.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처럼, 요스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요 스비의 강력한 정신 억압 능력은 그 자신의 정신 구조에도 지속 적이고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어떤 의미에서도 그는 돌았다는 판 정을 피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병리적 정신 상태 였음에도 불구하고 요스비는 폭력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그것은 대부분의 이들에게 그저 유쾌하게 보이는 성격이었고 어떤 자들 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인식되었다. 케이건이 바로 그 러했다. 그랬기에 흑사자와 용의 자손은 그 나가를 받아들였다. 그 순간, 륜은 다시 날아올랐다. 오로지 편의를 위해 륜은 당 분간 그것이 어떤 여행이라는 착각을 유지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