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8장 – 천지척사(天地擲柶)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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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18장 – 천지척사(天地擲柶) (1)


대지를 윷판 삼아 하늘로 윷가락을 던진다. 네 개의 윷가락은 날고, 까불거리고, 부딪치고, 구른다. 도, 개, 걸, 윷, 모의 다섯 조합 중 하나가 나올 터인 데, 그것은 어느 순간에 정해지는가? 물론 하늘로 던 져진 순간이다. 그 순간 다섯 조합은 모두 긍정된다. 대지에 떨어졌을 때 나온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이미 긍정된 우연 중 하나다. 그리고 윷놀이는 계속된다.

– 작자 미상 <천지척사>


천지척사

활짝 열린 창문의 초대에 응한 햇살이 중요한 손님임을 자각하 는 듯한 느린 발걸음으로 회담장 안으로 걸어들어오고 있다. 라수 규리하는 조금 전 탁자 끝에 머물렀던 햇살이 이제 탁자 중간쯤에 미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시간이 제법 흐른 것이고, 라 수는 그 사실에 대해 화를 내지 않았다. 시간이 지연된다 해서 그에게 해될 것은 없다. 반대로 라수가 기다리는 회담 상대에게 는 막심한 도덕적 위기가 될 것이다. 지각은 간혹 사회적 지위의 과시가 될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상대방은 라수가 그런 조그마한 사실로도 상대의 지위를 무시한 채 불명예 의 수렁 속으로 밀어넣을 그리고, 황급히 내민 머리 위로 모 욕의 진흙을 뒤집어씌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 다. 따라서 지금 도착이 지연되는 것에 분통을 터뜨리는 것은 아 직 이곳에 도달하지 못한 회담 상대 쪽일 것이다. 라수는 그 사 실에 행복했다.

라수는 자신의 도덕적 승리를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복장을 잠시 살폈다. 약간 비틀어진 소매 주위를 만지작거리던 라수는, 갑자기 울화통이 터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신지요. 사도(司徒)님.”

라수는 약간 놀랐다. 말을 건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등 이며, 따라서 그의 어깨가 움직이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면 상대 방은 한숨 소리를 들은 것이다. 라는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 고 생각했다. 시모그라쥬 인들은 이제 웬만한 북부인들만큼이나 소리에 민감하다. 라수는 준비해 두지 않았던 해명을 빨리 가다 듬었다.

”이 복장이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그리고 이런 복장을 하고 있어야 하는 신세 또한.”

그리고 라수는 고개를 돌렸다. 나가는 어쩔까 하다가 웃음을 머 금기로 했다. 별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언제나 무난한 표정이다.

”제가 보기에도 이 땅에서 그 옷은 좀 더울 것 같군요. 그런데 신세라 하심은 무슨 뜻인지요?”

라수는 그 말을 나가들이 땀 흘리는 자들에게 얼마나 익숙해졌 는지에 대한 표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 생각하며 말했다.

”괄하이드 태위(太尉)가 들으면 배를 잡고 웃겠지만 나는 노병 이 된 것 같습니다. 가끔 내가 거친 식사와 불편한 잠자리, 그리 고 지저분한 옷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깨달으며 놀라곤 하지요.”

끔찍했던 지난 전쟁을 상기시키는 말이었지만 나가는 조용히 웃었다.

”우리 모두 그때를 쉽게 잊을 수는 없겠지요.”

”예. 그런데 의장님이 많이 늦으시는군요. 마케로우.”

”소메로입니다.”

라수는 약간 당혹한 표정으로 소메로 마케로우를 바라보았다. 소메로는 라수의 시선을 외면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것을 원하기에 제 주위 사람들은 저를 소 메로라고 부릅니다.”

”알겠습니다. 소메로.”

라수는 마케로우 집안의 마지막 여인을 바라보며 키타타 자보 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괄하이드의 대도에 목숨을 잃었 던 키타타는 자보로로 불려지길 원했다. 라수는 소메로와 키타타 의 차이가 성격의 차이인지, 그렇지 않으면 혈육을 잃은 방식의 차이인지 고민했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소메로는 겸연쩍은 얼 굴로 말했다.

”이렇게 늦으실 분이 아닌데 이상하군요. 다시 사람을 보내볼 까 합니다.”

라수는 가볍게 목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메로는 제자리 에 가만히 있었지만 라수는 그녀가 누군가에게 닐렀을 거라 추측 했다. 나가들은 소리에 익숙해졌지만 라수는 그들의 니름을 들을 수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날이 올지 의심스러웠다.

라수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곳에 서 있던 세미쿼와 무핀토는 라수를 위해 옆으로 조금씩 비켰다. 창가에 선 라수는 시모그라 쥬를 바라보았다.

시모그라쥬는 매혹적인 튀기였다. 고집스러운 형식주의자나 순수주의자가 아니라면 물론 고집 은 그런 자들에게 세끼 식사보다 중요하다. 튀기의 아름다움 이 무엇인지 잘 알 것이다. 물론 혼혈에는 안정적인 아름다움이 없다. 그 모든 부분은 불안하며 애써 형성된 균형은 다음 순간 언제나 무너진다. 하지만 그렇기에 혼혈은 어떤 순혈보다 동적인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다. 북부의 사도가 바라보는 시모그라쥬는 거의 춤추고 있었다. 라수는 코끼리가 백곰 가죽을 잔뜩 실은 채 대로 가운데를 걸어가고 있는 도시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시모그라쥬는 건설과 파괴, 환호와 욕설, 고귀함과 비루함을 나누는 어떤 경계선도 허용치 않았다. 그 모든 것은 뒤섞여 끓어 오르고 있었고 품위를 지키려는 어떤 시도도 이곳에서는 애처로 운 몸부림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햇빛 찬란한 지붕 위에서는 나가 인부들이 비늘을 번득이며 망 치질을 하고 있다. 그들은 훌륭한 장례식을 치른 목재들을 다룬 다는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었고 따라서 지붕 아래를 지나치다가 먼지 벼락을 맞게 된 레콘 행인의 투덜거림에는 신경 쓰지 않았 다. 물론 그들에게는 자부심 이외에 ‘듣지 못했다’는 핑계도 준 비되어 있을 것이다. 시장 한 편에서는 두 명의 인간과 나가 한 명이 그야말로 불꽃 튀기는 대치를 벌이고 있었다. ‘늙은 모친과 굶주린 자식들’에만 익숙해 있던 두 인간은 나가 상인이 내놓는 넋두리에 꽤나 당혹한 눈치였다. 나가 상인은 말라 죽어가는 나 무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리고 두 인간은 ‘그깟 나무가 말라 죽든 말든’ 이라고 말해도 되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듯 했다. 무지는 경외의 시작이며, 그들은 어울리지 않게도 ‘심려가 크시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가격은 상인을 만족 시키는 수준으로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나가들의 도시에서 나가 들을 손바닥 위에 놓고 가지고 노는 장삿꾼들도 있었는데, 꽤나 넓은 장소를 차지한 채 그릇을 팔고 있는 레콘 보부상 같은 경우 가 그러했다. 목기가 아닌 유기를 팔고 있으니 그 정도면 괜찮은 수완이다. 나가들은 적절한 장례식을 치렀음을 증명하는 제조자의 낙인이 없는 목기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격 을 깎자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부풀어오르는 레콘의 모습은 나가 손님들로 하여금 비늘을 세우며 도망치게 하기 충분했다. 그러나 레콘의 곁에 있던, 아마도 동업자인 것으로 보이는 도깨비는 간 단한 도깨비불로 도망치는 손님들의 발을 붙잡고 있었다. 묘하게 능률적인 동업자 관계다. 아마도 숙원 사업을 위한 자금 조달이 목적일 테지만, 만약 그 레콘의 평생 숙원이 당대 최고의 거상이 되는 것이라면 그 동업자 관계는 꽤 괜찮은 시작임이 분명하다. 자꾸 부풀어오르는 레콘에게 겁 먹고 도깨비가 허공에 만들어내 는 기화요초에 넋이 나간 나가들은 미친 듯이 돈주머니를 풀고 있었다.

찢어지는 고함, 걸죽한 욕설, 우마차 굴러가는 소리와 코끼리 짐 부리는 소리, 수상쩍기 짝이 없는 중개업자가 내놓은 검을 보 며 그것이 정말 자신이 요구한 진품 쉬크톨인지, 그렇잖으면 다 른 사기꾼들이 내놓은 것과 같은 사이커인지 고심하는 레콘의 신 음이 뒤범벅되어 흐른다. 그곳에서 협잡꾼과 목청 좋은 상인, 번 뇌에 빠진 구매자와 무뢰배, 내일 망해 버릴 도매업자와 건달들 이 번영의 합창을 부르고 있었다. 시모그라쥬는 그 위에 쏟아지 는 태양만큼이나 절절 끓고 있었다.

라수의 곁에 서 있던 세미쿼 역시 시모그라쥬의 모습에서 느끼 는 바가 많은 듯했다. 그는 목소리를 조금 낮춰서 말했다.

”시모그라쥬에서 하루에 움직이는 돈이 얼마나 될지 짐작하시 겠습니까? 제가 어제 들러본 주점에서 듣기로 이곳에서 금편 10만 닢짜리 부자는 부자 축에도 못 들어간다더군요.”

라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가들이 소리에 익숙해졌지만 역시 낮은 소리는 들을 수 없 을 거라는 것, (나가들에게 니름이 있듯 소리를 사용하는 자들끼리 도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눌 방법은 있다.) 시모그라쥬에 주점도 있 다는 것, (나가들이 술을 마실까? 그렇잖으면 그 주점은 북부인 전 용일까?) 시모그라쥬의 부는 짐작키도 어려울 정도라는 것, (역시 본격적인 관영 사업을 준비할 것.) 세미쿼가 어제 주점에 들렀다 는 것(빌어먹을 자식. 정보 수집을 핑계로 또 술 마셨나?) 등이 라수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들이었다. 세미쿼에게 확인해 볼 것은 마지막 생각뿐이었다.

”자네 술 마셨나?”

”아시잖습니까? 저 술 끊었습니다.”

세미쿼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옆에서 무핀토가 낄낄거리며 거 들었다.

”예. 탁자에 가위 꽂아놓고는 한 모금도 안 마셨습니다. 지독 하더군요.”

라수는 세미쿼에게 미소로 감사 표시를 했다. 그리고 이제 세 미쿼에게 내린 금주령을 철회해 달라고 대호왕에게 요청해도 되 겠다고 생각했다. 대호왕은 세미쿼가 술에 취한 채 하늘누리에 오 르다가 낙상한 이후 그런 명령을 내렸다. 그때 세미쿼가 말했다.

”사도님. 저기 좀 보십시오.”

라수는 세미쿼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지만 그곳에는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구경거리가 되지 못 할 정도로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발 앞을 지나가는 강아지에 놀라 요란하게 넘어지는 사람조차도 인파에게 정도 이 상의 시선을 받지는 못했다. 라수는 세미쿼를 바라보았다.

”뭘 보라는 건가?”

”제가 보고 있는 동안 저게 세 번째로 넘어진 겁니다.”

라수는 조금 전에 보았던 사람을 다시 보았다. 땅에 쓰러졌던 그 사람은 씩씩하게 일어나 또다시 달려오고 있었다. 라수는 신 음을 흘렸다.

잠시 후, 데오늬 달비 대사가 회담장에 들어섰다. 라수는 자신도 모르게 대사의 무릎을 살폈다. 그 무릎은 꽤나 지저분했지만 용케 다치지는 않은 듯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데오 늬 달비의 불가사의가 바로 그것이다. 소메로 마케로우에게 인사 를 건넨 데오늬는 곧장 라수에게 걸어왔다. 라수는 묻는 시선을 보내었다.

”사도님! 급하게 알려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대수호자님 께서 이곳에 오십니다.”

라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탁자 저편에 있던 소메로도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이라니, 회담장 말인가?”

”그렇습니다. 대수호자님께서는 회담 전에 사도님을 잠시 뵙고 싶어하십니다. 고소리 의장님께서는 대수호자님을 수행하여 오시 느라 늦으시는 겁니다.”

라수는 낭패라고 생각했다. 지난 1년 동안 라수는 대수호자의 방문 요청을 네 번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대수호자는 라수 가 시모그라쥬를 방문하는 틈을 타서 전격적으로 찾아온 것이다. 걱정에 잠겨들던 라수는 문득 데오늬가 왜 사람을 보내지 않고 직접 찾아온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대사관에 아무도 없나? 왜 직접 온 거지?”

”이 회담장의 위치는 비밀이잖습니까? 사도님?”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키보렌의 대수호자가 직접 온다면 비 밀이고 뭐고 없을 텐데. 사람들이 다 알아볼 것 아닌가.”

”대수호자님께서는 변복을 하고 오실 겁니다. 사도님.”

”그런가? 으흠. 알았어.”

데오늬는 다시 인사한 다음 대사관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가 회담장 안으로 빠르게 걸어 들어왔다. 들어온 나 가의 모습은 회담장에 있던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머리에는 두건을 깊이 눌러쓰고 있었고 상하의는 북부인의 것이었다. 들어 온 나가는 데오늬에게 말했다.

”어디 안 다치셨습니까, 달비 대사?”

데오늬 달비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건 아래에 서 키보렌의 대수호자의 얼굴이 나타났을 때 크게 놀라지는 않 았다.

키보렌의 대수호자 키베인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그렇게까 지 시선을 끄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곳 시모그라쥬에서 북부인의 옷은 더위 때문에 오히려 북부인들이 입기 힘들다. 하 지만 나가들은 별 무리없이 입을 수 있으며, 이국적인 것에 대한 취미를 가진 자나 북부인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갈 목적을 가진 자 들은 즐겨 그런 옷을 입는다. 하지만 나가들은 그들의 대수호자 가나가의 옷도 아닌 북부인의 옷을 입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래서 훌륭한 변복이 되지요.”

키베인은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여준 것은 떠날 때를 놓치고 그 자리에 붙잡히게 된 데오늬 달비뿐이었다. 키베인을 뒤따라온 칸비야 고소리 의장은 지각 때문 에 마음이 편치 못했고 라수 또한 뜻하지 않은 대수호자의 등장 에 긴장하고 있었다. 키베인은 그런 분위기를 눈치챈 듯 빠르게 말했다.

”도무지 만나주질 않으니 이렇게 무례하게 찾아올 수밖에 없군 요. 라수 규리하.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는 않겠습니다. 회담을 한 시간만 늦춰주시겠습니까?”

키베인의 말은 청유형이었지만 라수나 칸비야 모두 그것을 명 령형으로 이해했다. 라수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을 내보낼까요?”

”그러면 좋겠군요.”

칸비야 고소리는 목례한 다음 소메로 마케로우와 함께 회담장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세미쿼와 무핀토, 데오늬도 그들의 뒤를 따라 나갔다. 회담장에 두 사람만이 남게 되자 키베인은 말했다.

”오래간만입니다. 미안합니다만 건강과 날씨 이야기는 대충 넘 어가지요.”

”지도그라쥬에서는 대수호자님의 소재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 지고 있습니까?”

”시모그라쥬로 신아라짓 사도 라수 규리하를 만나러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그들은 몰 랐다고 말하겠지요.”

키베인의 솔직성은 라수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라 수는 말했다.

”대수호자님. 지금 당신은 신 아라짓과 접촉이 없을수록 유리 합니다. 키보렌의 대수호자가 신 아라짓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해질수록 화를 내는 자들이 많아질 겁니다.”

대수호자 키베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라 수의 말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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