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18장 – 천지척사(天地擲柶) (6)
대호왕 사모 페이. 지도그라쥬의 얼간이들은 실로 얼간이 같은 암 살 계획을 꾸몄지만, 그래도 도구를 보는 감식안은 가지고 있는 듯하 오. 그들이 도구로 선택한 것은 쥬어 센이라 불리는 남자요. 꽤 좋은 수완과 놀라운 운을 가진 자로 알려져 있지. 하지만 그 수완이나 운도 오늘로 끝날 거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마시오. 내가 그들을 데리고 사라지겠소.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주만 한다면 당신과 그 리미는 그들이 볼 수 없는 내일의 일출을 볼 수 있을 거요.
사모는 어안이 벙벙한 심정으로 그 글자들을 다시 읽었다. 하 지만 글자들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던 서명이 떠 오르지도 않았다. 사모는 문득 자신이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 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모는 도깨비지를 조심스럽게 접어 품 속에 넣은 다음 쉬크톨을 뽑아들었다. 한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 는 내용은 어쩌면 목표물을 제자리에 고정시켜두고 싶은 궁사의 소망일 수도 있지만 사모는 그 가능성을 곧 포기했다. 지난 밤 내내 사모와 그리미는 한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사모는 그 서신 의 발신인이 분명히 조력자일 거라고 믿기로 했다.
하지만 불안이 완전히 해소되기는 어려웠다. 사모는 기나긴 밤 이 될 것임을 각오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그 밤은 끔찍하게 길었다.
사모의 몸 곳곳이 긴장 때문에 발생한 통증을 호소해 왔고 쉬 크톨을 움켜쥔 손은 저려서 감각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사 모는 수시로 쉬크톨을 놓고 손을 주물러야 했다. 그런 와중에 사 모는 몇 번이나 그리미를 내려다보았지만 그리미는 한 번 뒤채지 도 않은 채 잘 잤다. 사모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불안하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몇 번이나 그리미를 깨워 자신의 불안을 나누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리미는 단순한 소녀가 아니라 함께 불안을 나눌 만큼 충분히 조숙한 아이였다. 하지만 사모는 끝내 그리미를 깨우지 않았다.
영원히 새벽이 오지 않을 것 같은 그 밤은 꽤나 소란스러운 방 법으로 끝나게 되었다.
사모는 환상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를 향 해 다가오는 덩치 큰 도깨비들과 아라짓 전사들의 모습은 충분히 사실적이었다. 예순 명이나 되는 도깨비와 인간들이 일으키는 왁 자지껄함 속에서 사모는 그들의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 녀가 할 수 있었던 말은 하나뿐이었다.
”졸립군. 하늘누리로 돌아가자. 나는 쉬어야겠어.”
왕의 상태를 이해한 전사들은 곧 침묵하며 대호왕을 옮길 준비 를 했다. 사모 페이와 그리미 마케로우를 대신하여 두 명의 전사 들이 그 자리에 남았다. 사모는 간신히 그들에게 마루나래가 돌 아올 거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딱정벌레들의 비행이 시작 되었다. 사모는 밤하늘을 날아가는 자신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 다. 하늘누리에 도착했을 때 사모는 곧장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깬 사모는 자신이 하늘누리의 궁전 침실에 누워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모는 침대 옆을 보았다. 그곳에서는 라수가 초췌 한 모습으로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모는 다시 똑 바로 누우며 말했다.
”그리미는?”
”안전합니다. 지금 사람들에게 뇌룡공과 대화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제외하면 별 이상은 없습니다.”
사모는 어리둥절하여 라수를 바라보았다. 라수는 희미하게 웃 었다.
”꿈 속에서 그랬다고 하더군요.”
라수는 그것이 별 의미없는 꿈일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 만 사모는 죽은 듯이 잠들었던 그리미를 떠올리고는 좀 다른 생 각을 했다. 그녀는 곧 그리미와 대화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암살자는?”
”한 명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곤란하게 되었지요. 증인을 제시 할 수 없으니까요. 서신을 보낸 자의 흔적 또한 찾을 수 없었습 니다.”
”서신을 보았군.”
”예. 여러 번 읽어봤지만 누구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군 요. 그럼, 쉬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라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 사모가 말했다.
”잠깐만 더 있어주겠어?”
라수는 물끄러미 사모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사 모는 태양이 침실벽에 그린 사각형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게 변화의 대가로군. 끝없이 계속되겠지?”
”그렇습니다.”
”증오와 반목이 영원할 거라는 저주처럼 들리는군. 어떤 한 종 족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단 하나의 종 족만이 승리자가 되어 세계를 지배하게 될 때까지?”
”그럴 리는 없습니다. 빛이 탄로났으니까요.”
”그렇군.”
사모 페이는 알고 있었다. 라수는 언젠가 환상벽에서 읽은 그 충격적인 내용을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도깨비와 레콘, 나가, 인간은 두억시니를 남겨놓고 빛이 되어 버렸던 첫 번째 종족처럼 완전해질 수 없다. 네 신 중 한 명이라 도 자신의 소임을 다할 수 없게 되면 더 이상 윷가락은 던져지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다른 세 종족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어떤 종족도 완전성을 획득할 수 없다. 만약 네 종족 중 한 종족 이 완전성을 획득하면 다른 종족은 변화 없는 정체에 빠져버리게 되므로.
”우리 네 종족은 모두 동시에 완전성을 얻어야 합니다. 한 종 족이라도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종족이 준비가 될 때 까지 끝없이 기다려야 합니다. 그 기다림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 겠지만, 저는 되도록 그것이 즐거움이길 바랍니다.”
”언제쯤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수천 년? 수백만 년? 수십억 년?”
사모는 그 장대한 시간보다 그 말이 옳다는 사실에 더 큰 현기 증을 느꼈다. 사모는 속삭이듯 말했다.
”길고 긴 기다림이겠군.”
”첫 번째 종족은 그래서 하늘치 유적이 너무 빨리 발견되지 않 기를 바랐지요. 우리가 지나치게 오래 기다리게 되는 것을 원하 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에 의해 딱정벌레가 하늘치 주변으로 다가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최소한, 딱정벌레를 이용하지 않고도 사람들이 하늘치의 등에 오 를 수 있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하지만 저 용맹한 티나한과 그 의 동료들은 너무 빨리 진실을 드러내었지요. 뭐, 탓할 수야 없 습니다만.”
그리고 라수는 곧 발발할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다. 하지 만 사모의 안색을 살핀 라수는 그것을 좀 천천히 이야기해야겠다고 판단하고는 그 이야기를 도로 삼켰다. 사모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짐이 믿고 싶은 누군가가 언젠가 짐에게 농담처럼 조언하더 군. 자기 완성을 위해 살아가는 자를 조심하라고.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 다가올 완전성을 기다리고 있어. 우리 당대에는 절대로 볼 일이 없는 그것을. 이 시점에서, 짐은 그 조언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혹 그대는 짐작되나?”.
”자기 완성을 위해 살아가는 자를 조심하라고요?”
”그래.”
잠깐 생각하던 라수는 곧 쏟아내듯이 말했다.
”예. 그런 말이 있지요. 폐하. 근사하게 들리는 말입니다만, 그 말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자기 완성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 는 순간 그 자는 자기 부정에 빠지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완성하 려면,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것이어야 하니까요. 자기 완성 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는 순간 그 자의 인생은 완성되지 못한 것, 부족한 것, 불결한 것, 경멸할 만한 것으로 전락됩니다. 이 멋지고 신성한 생이 원칙적으로 죄를 가진 것이라는 판결을 받게 되는 거지요. 그리고 그 자는 다른 사람의 인생마저도 그런 식으 로 보게 됩니다. 자기 인생을 뭐라고 생각하건 그건 그 작자의 자유입니다만,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그렇게 보면 문제가 좀 있 지요.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어떤 두억시니였어.”
라수는 폭소를 터뜨렸다. 사모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라수를 바라보았다.
”감동적이군요. 두억시니가?”
”그게 왜 감동적이지?”
”5년 전까지 우리는 흔히들 두억시니가 죄의 대가로 그런 모습 을 가지게 되었다고 믿고 있었지요. 신을 잃은 죄 때문에 그런 데 그 두억시니 중 한 명이 생은 원래 무죄이기에 완성하려, 속 죄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것이군요. 감탄할 수밖에 없는데요. 그 두억시니는 우리에게 닥쳐올 변화에 대비하 라고 말한 겁니다.”
라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다음 계속 말했다.
”우리가 기다리는 완전성은, 물론 저는 그것이 무엇일지 짐작 하기도 어렵습니다만, 최소한 불완전성의 반대 개념이 아닙니다. 자기 완성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는 작자들이 말하는 완전성과 는 전혀 다른 것일 겁니다. 그런 자들이 말하는 완전성은 고정이 고 정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그 완전성은 어쩌면 무 수한, 끝없는 변화일지도 모릅니다.”
”변화하는 완전성이라니, 기묘하게 들리는데.”
”예. 저 자신에게도 그렇게 들립니다. 물론 제 말은 가설일 뿐 이고 우리가 첫 번째 종족처럼 되기 전까지는 가설로 남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일지 짐작하기 어렵더라도, 이제부터 우리에게 다가올 변화를 무서워하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 이상의 변화를 감당할 수 없어서 자기 완성을 부르짖는 사람 처럼 될 필요는 없습니다. 변화는 항상 기쁜 것만은 아닙니다. 때 론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왕이 있습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
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라수는 자신이 쓸데없이 현학적 인 이야기로 피곤한 왕을 괴롭히고 있음을 깨달았다. 라수는 사과하며 물러날 것을 허락해 주길 부탁했다. 사모는 허락했다. 문 쪽으로 걸어가던 라수는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저, 그런데 폐하. 괜찮으시다면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싶 군요.”
”그렇게 해.”
라수는 빨리 말을 끝내기 위해 제자리에 선 채 말했다.
”하텐그라쥬 공략전에 참가했던 병사들 중 불면증을 호소하는 병사들이 많다는 보고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시는지요?”
”알고 있어. 그대는 귀하츠 신뷰레와 같은 현상일 거라고 했었 지. 끔찍한 기억을 견디지 못하는 거라고.”
”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해 조사하던 중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얻었습니다. 많은 병사들이 악몽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냥 잠이 오지 않는다고 말했 지요. 저는 그들에 대해 다각도로 조사해 봤습니다. 그리고 폐하 께서 잠들어 계시는 동안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불 면증을 호소하는 병사들 모두가 전쟁 동안 특별한 식사를 한 적 이 있습니다.”
”특별한 식사?”
라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시겠지요. 하텐그라쥬로 진격하던 북부군은 거의 군량을 가 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은 현지에서 조달했지요. 혹은 쓰 러뜨린 적에게서.”
사모는 비늘이 서는 것을 느꼈다. 라수는 대호왕이 그의 말을 이해했음을 깨닫고는 빠르게 말했다.
”어쩌면 이 또한 쓸모 없는 가설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환상벽과 대화를 해보았고, 소드락을 복용한 나가를 먹은 자들이 일종의 항진 상태를 경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 니다. 몸이 피로하지 않으니 잠이 오지 않는다는 거지요. 저는 그 가설에 입각하여 다른 가설을 얻어보았습니다. 제가 환상벽과 더불어 하는 일이 대개 그런 것이지요.”
사모는 라수가 암시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다급하게 질문했다.
”결론은?”
”150년 이상 장복할 경우 특별한 효과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물론 실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오래 사 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실험 내용 자체도 극단적인 상황 이 아닌 이상 실행할 수 없는 것이고.”
사모는 놀라 입을 벌렸다. 라수는 어떻게 말을 끝맺을까 고민 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못한 채 그저 고개만 숙여보인 다음 왕 의 침실에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