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2장 – 은루(銀淚)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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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2장 – 은루(銀淚) (15)


심장탑의 깊숙한 곳. 아니, 높은 곳.

일반적으로 은밀한 곳은 지하나 혹은 그 비슷한 곳에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200미터라는 압도적인 높이의 심장탑의 경우에는 높은 곳일수록 은밀하다. 그 누구도 올라가는 데만 수천 계단의 노고가 필요한 심장탑 상층부에 대수롭잖은 일로 올라가지는 않는다. 따라서 지금 심장탑 55층의 조그마한 방에 모여 있는 세 사람의 경우 그들의 회합이 은밀한 것임은 더없이 분명하다. 55층을 걸어 오르는 일을 감수한 회합이므로.

그런 희생은, 그러나 그들 중 두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일이다. 마지막 한 사람의 경우에는 다른 두 사람이 겪어야 했던 고생을 겪지 않았다. 왜냐하면 55층의 그 방은 그 사람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막강한 힘의 소유자임을 짐작하기 위해서 꼭 나가의 문화와 관습과 역사에 정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른 자들로 하여금 55층을 걸어 올라오게 하는 자가 가진 권력의 크기를 짐작하기 위해선 사람의 보편적 상식이면 충분하다.

그 방의 주인, 수호자 세리스마는 가장 위대한 수호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냉혹의 도시 하텐그라쥬의 수호자들 중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수호자에 속하는 그는 실로 55층에 거주할 만한 자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55층을 걸어 내려간 것도 벌써 십수 년 전이다. 풍부한 빗물이 그의 식수였고 한 달에 한 번씩 불운한 수련자들이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한 채 가져다주는, 역시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한 염소나 양, 송아지, 사슴 등이 그의 양식이었다. 세리스마는 참으로 위대한 수호자인 것이다. 불규칙적인 섭생에도 쉽게 견디는 나가이기에 그런 위대함을 구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그의 위대함에 대한 큰 흠집이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 위대한 세리스마는 지금 몹시 불행한 얼굴을 한 채 두 명의 방문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명의 방문자들 또한 편찮은 얼굴이었다. 물론 이 끔찍한 높이를 걸어 올라왔으니 세상에 다시없는 낙천주의자라 하더라도 좀 불편한 기색을 띠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형이하학적인 고민거리 이외에 그들은 형이상학적인 고민거리도 넘치도록 가지고 있었다. 두 명의 방문자 중 한 명인 스바치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보고를 계속했다.

<숲에서 옷과 책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조사자들은 그 옷과 책이 물에 적셔졌던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 어린 살인자 녀석은 심장 앞에 젖은 책을 대고 젖은 옷까지 걸친 다음 적출식을 마친 나가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나왔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심장을 적출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키지 않았겠지요.>

보고를 듣던 수호자 세리스마는 스바치의 얼굴을 보며 일렀다.

<그런데 자네는 왜 그렇게 곤혹스러워 하는 거지?>

<너무 이상합니다. 그 륜 페이라는 녀석이 적출 공포증 기미를 보였다는 것은 저와 카루도 눈으로 확인한 바입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앞뒤가 안 맞습니다.>

스바치 옆에 서 있던 카루 역시 그 이름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리스마는 일렀다.

<설명해 보게.>

<사건을 시간대 순으로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먼저 홀에 있던 륜 페이가 도망쳤습니다. 공포에 질린 것처럼 정신없는 모습이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화리트 마케로우가 홀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화리트는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 사이에 어디론가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적출식이 끝난 후 수호자들이 특수 도서실에서 화리트와 유벡스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수호자들이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륜 페이는 적출 공포증에 빠져서 특수 도서실에 숨어 있다가 다른 자들과 뒤섞여 도망치려 한 것이다. 이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실제로 적출식에 관한 무서운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던 애들이 가끔 저지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번 사건이 다른 경우들과 다른 점은, 륜이 실제로 그 시도에 성공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한 자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점이다.’ 대충 이런 결론이지요. 그리고 수호자들은 가문 평의회에 륜 페이의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나 또한 수호자야. 그걸 다 설명할 필요는 없는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이상한 점들을 살펴보려면 그걸 전부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적출 공포증 때문에 어딘가로 숨어 버리는 것은, 수호자들의 결론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럴 경우 그가 발각되었을 때 취할 행동은 울음을 터뜨리거나 발작을 일으키는 쪽 아닐까요? 수호자를 난도질하고 가장 친한 친구를 등 뒤에서 베어 버리는 것은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공포에 질리면 사람들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비이성적인 행동도 보여주지.>

<그렇다 하더라도, 그럼 륜 페이가 심장탑을 나올 때 보여준 이성적인 대처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조금 전에 그런 끔찍한 살인 행각을 벌인 청년이 침착하게 자신의 심장을 가리기 위한 수단을 강구한다는 것은 납득되지가 않습니다.>

<정신 나간 자들도 어떤 부분에선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지.>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화리트 마케로우는 왜 특수 도서실에 간 것일까요? 왜 홀에 남아서 수호자들을 기다리는 대신 특수 도서실에 가서 친구의 사이커에 죽었을까요?>

<다른 자들에게 륜이 도망쳤다는 이름을 듣고 그를 찾아보려고 한 것일지도 모르잖나.>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화리트가 홀에 들어오고 나서 그와 이야기를 나눠 봤다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화리트는 륜 페이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네의 결론은 뭔가?>

스바치는 단호하게 일렀다.

<우리 계획이 들킨 겁니다. 그 륜 페이는 치밀하게 준비된 암살자였을 겁니다. 그리고 적출 공포증에 빠진 나가가 저지른 짓처럼 보이게 하려고 그런 연극을 했던 겁니다. 그 녀석은 대로와 홀에서 두 번 그런 모습을 보여줬지요. 그리고 적당한 곳에 숨어 있다가, 화리트가 들어오자 다른 사람 몰래 이름을 보내어 화리트를 불러내었습니다. 화리트는 적출 공포증에 빠진 친구를 도와주려 했겠지요. 륜 페이는 그렇게 화리트를 유인한 다음 특수 도서실에서 살해한 겁니다.>

수호자 세리스마는 손가락을 깍지 끼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렇다면 그 불쌍한 유벡스는 왜?>

<일단 살해 현장을 만들기 위해서죠. 또한, 유벡스 사서를 잔인하게 살해함으로써 륜 페이가 친구도 죽일 수 있는 상태라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을 겁니다. 화리트만 살해하면 이상하게 보였겠지요. 절친한 친구니까요. 하지만 유벡스 사서도 죽임으로써 그것이 광기에 젖은 무차별 살인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죠.>

<하지만 왜 그런 연극을 했을까? 우리 계획이 들킨 거라면, 우리를 곧장 공격하는 대신 왜 그런 복잡한 수단을 써 가며 화리트 마케로우를 죽인 거지?>

<아마도 경고일 겁니다. 우리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중하느라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세리스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그 가정이 그럴듯하긴 하지만 자네는 중요한 정보를 모르고 있네. 화리트와 륜은 보통 친구 사이가 아니야. 그 두 사람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아. 왜냐하면……….>

<륜 페이가 한때 수련자였기 때문입니까?>

수호자 세리스마는 놀란 얼굴로 스바치를 바라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대로에서 륜이 쓰러졌을 때 화리트가 륜을 달래려 했습니다. 그때 이 화리트를 이렇게 부르더군요. 아스화리탈 세파빌 마케로우. 저는 그게 화리트의 신명이라고 짐작합니다만.>

세리스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바치는 계속 일렀다.

<그리고 화리트의 태도를 보건대 화리트 또한 륜 페이의 신명을 불렀을 거라고 짐작됩니다. 그건 들리지 않았습니다만, 상관없습니다. 서로의 신명을 안다는 것은 그들이 한때 같은 수련자였다는 의미겠지요? 그리고 아마도 륜 페이는 중도에 포기했을 겁니다.>

<그들은 일곱 살 때 같이 수련자가 되었어. 비록 륜이 중도 포기했지만 그들의 우정은 계속되었어. 15년 동안의 우정일세. 그들이 어떻게 륜에게 그런 친구를 죽이게 할 수 있겠나?>

<어떤 사람을 살인자로 만드는 방법은 많습니다. 륜이 수련자의 지위를 반납한 이후로 자기 집에만 있었다 하더라도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페이 가문엔 언제나 남자들이 많이 찾아가니까요. 지속적으로 세뇌와 교육이 이루어졌을 수 있습니다.>

세리스마는 대단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조용히 듣고 있던 카루가 일렀다.

<신경 쓰이는 것이 있습니다.>

스바치와 세리스마는 카루를 돌아보았다. 카루는 침착하게 일렀다.

<화리트는 죽기 전 자신이 살해당할 거라고 일렀습니다. 그리고 살해자의 이름도 가르쳐줬습니다.>

세리스마는 놀란 표정으로 스바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스바치는 짜증스럽다는 듯이 일렀다.

<그 황당한 이야기 이름인가? 그건 화리트의 적출 공포증이 비뚤게 표현된 거야. 자네도 그렇게 생각했잖아.>

<잠깐만.>

위대한 수호자가 일렀다.

<내가 듣지 못한 것이 있나 본데?>

스바치는 눈살을 찌푸린 채 설명했다.

<화리트는 누나인 비아스 마케로우가 자신을 죽일 거라고 일렀습니다. 하지만 그건 화리트의 적출 공포증, 누나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 그리고 비아스의 탁월한 약술이 합쳐져서 낳은 피해 망상입니다. 화리트는 비아스가 독약으로 자기를 죽일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화리트는 사이커에 죽었습니다. 륜 페이가 사이커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 모두가 봤습니다.>

<비아스 마케로우에게 화리트를 죽여야 하는 이유가 있었나?>

세리스마의 질문에 스바치와 카루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수호자는 그들의 그런 태도를 이상하게 여겼지만 잠자코 기다렸다. 잠시 후 카루가 조심스럽게 단어를 선택하며 일렀다.

<이것은 저희들의 추리가 아닌 화리트의 추리입니다만……, 비아스 마케로우는 자녀를 원한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모든 여인들이 그것을 원하겠지만, 비아스는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수단을 이용할 수도 있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비아스는 화리트에게 모종의 제의를 했고, 화리트는 그것을 거절한 모양입니다.>

이름을 끝낸 카루는 놀랐다. 세리스마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세리스마는 슬픈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나.>

<놀라시지 않으시는군요?>

<비아스 마케로우는 그런 생각을 처음 떠올린 여자도 아닐 테고, 결코 마지막 여자도 아닐 테지.>

카루와 스바치는 그만 이름이 막히고 말았다. 세리스마는 담담하게 일렀다.

<여자들이 남자들을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겉으론 남자를 생각하는 척, 위하는 척하지만, 결국 그녀들이 원하는 것은 남자들을 침대에 눕혀 놓고 그 체액을 짜내 가는 일뿐이야. 그들은 남자들이 아무런 지성이 없는 동물이었으면 더 좋을걸.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남자란 떠돌이 동물이잖나. 그리고 동물에게 거절당했다면 분노할 수도 있겠지.>

카루와 스바치는 씁쓸한 동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세리스마는 불편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름을 이었다.

<화리트의 추측 이외에 그 가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다른 증거가 있나, 카루?>

<글쎄요. 그날 그녀는 자신의 방에서 연구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녀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단순히 그녀를 본 사람이 없다고 해서 그녀가 살인자라고 할 수는 없을 텐데.>

<예. 하지만 그녀는 고명한 약술사이고 따라서 특수 도서실의 열람권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저택을 나온 다음 적출식 당일의 혼란을 틈타 심장탑에 숨어들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고는 유벡스를 죽여 특수 도서실을 비워 놓은 다음, 남동생을 거기로 유인해서 죽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비아스 마케로우는 열람권을 가지고 있네. 하지만 유벡스가 죽었으니 그날 그녀가 특수 도서실에 찾아왔는지 확인할 도리가 없군. 그렇다면 그녀에겐 화리트에 대한 증오 이외에 다른 혐의점은 없는 것이군? 물론 증오는 살인의 가장 보편적인 이유 중에 하나이지만.>

카루는 뭐라 대답하려 했지만 세리스마는 손을 내저었다.

<화리트 마케로우는 죽었네. 그의 살해범은 반드시 밝혀내어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야. 하지만 살해범을 찾아낸다고 해서 화리트가 다시 살아날 수는 없는 것처럼, 우리 계획 또한 재개될 수 없어. 계획은 실패했네. 지금부터 수련자들 중 적당한 이를 찾아봐야 할지도 몰라.>

스바치는 신경질적으로 칼자루를 움켜쥐었다가 다시 놓았다.

<1년을 더 기다리는 겁니까? 그들이 그렇게 시간을 줄까요?>

<도리가 없네. 이미 토론했던 것이잖나. 이것은 수련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나가는 적출식을 마쳐야만 키보렌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어. 그러니 다음 적출식을 기다리며 적당한 사람을 찾을 수밖에.>

이름을 마친 세리스마는 카루가 묘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호자의 시선을 본 스바치도 카루를 돌아보았다. 카루는 조심스럽게 일렀다.

<어쩌면 1년을 더 기다리지 않아도 될지 모릅니다.>

<무슨 이름인가? 남아 있는 수련자가 있던가? 몇몇이 아직 방랑을 떠나지 않고 하텐그라쥬에 남아 있다는 것은 알고 있네만 그들 중 적당한 후보자가 있었나?>

<있습니다. 좀 묘한 후보자이긴 하지만. 그는 한때 수련자였고, 키보렌의 땅을 반드시 도망쳐야 하는 이유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리둥절해하던 두 사람은 카루의 정신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어떤 이름을 발견했다.

<륜 페이! 그 살인자를?>

스바치는 경악해서 외쳤지만 카루는 단호하게 일렀다.

<만약 화리트의 가정이 맞다면 살인자는 비아스 마케로우지 륜 페이가 아냐. 하지만 륜은 한계선을 넘어 도망쳐야 되는 이유를 가지고 있지. 적출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륜 페이는 신명을 가진 수련자였어.>

카루는 세리스마를 돌아보았다.

<륜 페이를 추적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수호자 세리스마. 만약 그가 살해자가 아니라면 우리 일을 도와줄지도 모릅니다. 죽은 친구의 사명을 잇는 일이니 적극적으로 도와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리스마는 침중하게 일렀다.

<만약 살해자라면?>

<그렇다면,>

카루는 자신의 칼을 잠깐 쥐어 보였다.

<수호자 유벡스와 화리트의 복수를 해 줄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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