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2장 – 은루(銀淚) (16)
<복수권을 요구합니다.>
가문 평의회장은 일순 고요해졌다. 물론 나가들의 모임은 항상 고요하므로 이것은 나가적인 표현으로, 즉 평의회의 구성원들 전부가 한순간에 정신을 닫았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평의회의 구성원들인 각 가문의 대표자들은 모두 의장석을 돌아보았다. 평의회 의장 라토 센은 나가들이 나이 허물이라고 부르는 허물 조각들이 얼굴과 손등 곳곳에 남아 있는 늙은 나가였다. 더 이상 허물이 깔끔하게 벗겨지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나가들 사이에서는 이 모습이 연륜의 증거와 존경의 이유가 된다. 하지만 그 위대한 라토 센도 복수권이라는 이름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복수권이라고 하셨소, 비아스 마케로우?>
<그렇습니다.>
반원형의 의석에 앉아 있던 가문의 대표자들은 겨우 약한 이름 내보낼 여유를 되찾았다. 예의를 담아 미약하게 발산되는 그들의 반응은 모두 어처구니가 없다는 쪽인 듯했다. ‘당연하지.’ 라토 센은 그녀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고 동시에 솜나니 페이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했다.
반원형 의석의 안쪽엔 두 개의 책상이 서로 마주 보는 형태로 놓여 있었다. 그곳엔 이 사건의 이해 당사자인 페이 가문과 마케로우 가문의 두 대표가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페이 가문의 장녀이자 가문의 대표자인 솜나니 페이는 페이 가문 쪽의 의자에 앉아 있었고, 지금 비아스가 무슨 이름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속으로 이를 갈던 라토 센은 편파적이라는 항의를 들을 것을 감수하며 한 번 더 시간을 끌었다.
<그렇다면 귀하의 가문은 페이 가문에게 복수의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라토 센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솜나니 페이는 여전히 멍청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그 얼굴을 보던 센 의장은 문득 솜나니 페이가 복수권이 무슨 이름인지 모를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맙소사, 그렇군. 그걸 모르고 있어!’ 센 의장은 재빨리 전략을 세운 다음 일렀다.
<매우 고풍스러운 권리를 요구하는군요. 비아스 마케로우.>
<하지만 정당한 권리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계신 의원 여러분들 중엔 전승 학에 관심이 없으신 분들도 계실 테니 내가 그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케로우 가문이 무엇을 요구하는 건지 잠시 부연하겠습니다.>
라토 센 의장은 자신이 하는 일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끔찍한 분란을 피하는 것이 의장의 첫 번째 임무이며, 그 임무를 위해서라면 잠시 창피를 무릅쓸 수밖에 없다. 비아스가 항의하려는 듯한 몸짓을 했지만 의장은 매서운 눈으로 비아스를 제지하며 일렀다.
<앉아요. 비아스 마케로우. 무엇을 이르려는지 압니다. 하지만 본인에게 편파적이라느니 하는 모욕적인 이름을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복수권은 잘 사용되지 않는 표현입니다. 당신이 그런 희귀한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 평의회에 대한 모독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 싶습니다.>
비아스는 투덜거리며 앉았다. 그리고 솜나니 페이는 이제야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이해했다는 얼굴이 되었다. 센 의장은 솜나니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승복이나 거부를 이르기 전에 그것이 뭔지 알려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의장에게 감사해하는 눈짓을 보내었지만 센 의장은 성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복수권이란 쇼자인테쉬크톨을 이르는 표현입니다.>
솜나니가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름도 안 됩니다!>
<앉으시오, 솜나니 페이! 당신에게 발언권을 허락한 적이 없소!>
솜나니 페이는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자신에게 호의를 보여주는 의장을 분노하게 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하지만 자리에 앉은 솜나니 페이는 무서운 시선으로 비아스를 노려보았다. 의장은 이제 솜나니 페이와 비아스 마케로우 양쪽에게 분노에 찬 표정을 보내며 일렀다.
<또한 다른 이름으로는 암살자 지명권이라고도 합니다. 이처럼 잘 알려진 표현이 많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비아스 마케로우.>
비아스는 마지못한 듯 고개를 숙여 보였다. 센 의장은 계속 일렀다.
<간단히 이른다면, 마케로우 가문은 화리트 마케로우의 죽음에 대한 대가로 페이 가문의 일원을 암살자로 지명할 수 있는 권리를 원하는 겁니다.>
의석에서 날카로운 이름들이 터져 나왔다. 미처 정신을 제대로 닫지 못한 의원들이었다. 그녀들은 황급히 정신을 닫으려 했지만 라토 센 의장의 분노 어린 시선을 받고 말았다. 라토 센 의장은 문득 소란을 이유로 이 의회를 폐회해 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불가능한 소망이었다. 라토 센 의장은 의원석을 매서운 눈으로 쏘아본 다음 엄격하게 일렀다.
<이제 이해하지 못하신 분들은 없는 것 같군. 솜나니 페이 이르시오.>
솜나니는 <감사합니다.>라고 일렀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비아스를 향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솜나니는 주먹을 꽉 쥔 채 일렀다.
<발자국 없는 여신께 맹세코, 이런 황당한 요구는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어떻게 감히 암살자를 지명하겠다는 겁니까? 화리트 마케로우는 남자입니다! 저희 가문은 이런 이름도 안 되는 요구를 단연코 거부합니다!>
비아스는 의장에게 발언권을 요구한 다음 일렀다.
<솜나니 페이. 쇼자인테쉬크톨에는 거부할 권한 같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남자입니다!>
솜나니는 또다시 발언권도 없이 외쳤지만 라토 센 의장은 더 이상 화를 낼 기력도 없다는 듯이 잠자코 기다렸다. 비아스는 차갑게 웃으며 일렀다.
<하지만 남자이기 전에 마케로우입니다. 화리트 마케로우는 심장을 적출하기 전에 죽었습니다. 죽은 시점에서는 여전히 마케로우였던 셈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우리 가문의 일원의 죽음에 대해 쇼자인테쉬크톨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솜나니는 이번엔 발언권을 요구한 다음 일렀다.
<마케로우는 심장탑 안에 들어간 다음 사망했습니다. 당신 가문은 심장탑까지 그를 호위해 줬습니다. 마케로우 가문의 호위자들은 분명히 살아 있는 화리트를 심장탑에 들여보내 줬고, 그리고 호위 임무를 끝냈습니다. 따라서 심장탑에 들어갔을 때부터 이미 화리트는 더 이상 마케로우의 일원이 아닙니다. 가문이 호위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가문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까? 상식적으로 이름이 안 됩니다. 만일 화리트가 적출식 도중에 사고로 죽었다면 당신네 가문은 심장탑의 수호자들을 상대로 암살자를 지명할 겁니까?>
솜나니의 반론은 그럭저럭 훌륭했고 센 의장은 많은 의원들이 그녀에게 동조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솜나니가 이른 것이 질문이었기에 비아스는 곧바로 대답했다.
<재고해 볼 가치도 없는 이름입니다. 솜나니 페이. 상식에서 벗어난 것은 그쪽입니다. 제 동생인 화리트는 당신네 가문을 자주 방문했지요. 페이 가문에 체재하는 동안 화리트는 우리 가문의 호위자들에게 호위를 받고 있었습니까?>
솜나니는 으르렁거리듯 비아스를 쏘아볼 뿐 대답하지는 않았다. 비아스는 씩 웃었다.
<그 침묵은 화리트가 당신들의 집 안에서 호위를 받지 않았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당신 논리대로라면 그때 화리트가 호위를 받지 않고 있으니 마케로우의 일원도 아니었겠군요? 이런 논리에 찬성하십니까?>
솜나니는 약이 잔뜩 올라서 외쳤다.
<륜 또한 남자입니다! 우리 가문의 일원이 아니라고요! 그자의 일로 우리 가문에 암살자를 지명하는 건 얼토당토하지 않…….>
솜나니의 전략적 실수였다. 라토 센은 정신적 신음을 흘렸다. 솜나니 페이는 ‘호위’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물고 늘어졌어야 했다. 비아스는 상대방의 실수를 놓치지 않았다.
<아니, 륜 ‘페이’입니다. 화리트 마케로우와 마찬가지로 륜 페이 역시 심장을 적출하지 않은 상태에서 살해를 저질렀습니다. 이것은 확인된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페이 가문의 일원이 마케로우 가문의 일원에게 저지른 범죄입니다. 쇼자인테쉬크톨의 구성 요건에 완벽히 들어맞습니다.>
평의회 의원들은 비아스의 설명에 감동을 받은 듯했다. 남자가 남자를 죽인 사건에 가문 대 가문의 해결 방식인 쇼자인테쉬크톨을 요구한다는 이름에 어이없어하던 의원들도 비아스의 설명이 그럴듯하다는 듯이 호의적인 정신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솜나니는 그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고, 한층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들었다. 동시에 솜나니는 비아스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저 여자는 왜 저러는 거야? 보상금을 받아내고 조용히 끝내면 그만일 것을. 우리가 이미 제의했잖아. 남자 따위에게 지불할 금액으로는 너무 많은 액수였어. 그걸 받는 쪽이 훨씬 현명해. 도대체 왜 암살자를 지명하겠다는 거지? 고작 남자잖아. 여자라면……….’
문득 솜나니는 끔찍한 사실을 떠올렸다. 그 순간 솜나니는 비아스의 의도를 이해했다. 그녀는 경악한 채 비아스를 바라보았지만 이름을 제대로 이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를 지명하겠다는…….>
비아스는 한껏 미소 지으며 일렀다.
<당신 가문에는 예의와 법도에 정통하여 모든 이의 존경을 받는 분이 계시잖습니까? 마케로우 가문은 존경과 신뢰를 담아 사모 페이를 륜 페이에 대한 암살자로 지명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