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2장 – 은루(銀淚) (18)
솜나니 페이는 마치 자기 팔다리가 잘 붙어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하는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사모 페이는 쉬크톨을 돌아보았고, 솜나니는 그제야 사모를 똑바로 보며 정신을 열었다.
<무슨 니름인지 알겠니?>
사모는 긍정에 해당하는, 하지만 명확한 단어로는 환원될 수 없는 니름으로 닐렀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비슷하지만 나가의 이런 불명확한 니름에는 보다 복잡한 여운들이 담긴다. 지금 사모는 자신이 이해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긍정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니른 셈이다. 솜나니는 그 불명확한 니름을 꾸짖듯 냉정하고 확고하게 닐렀다.
<륜을 추적해서, 죽여. 그리고 그 목을 가져와야 해. 쇼자인테 쉬크톨이 완료되었다는 증거가 필요하니까.>
사모는 여전히 쉬크톨을 바라보면서 닐렀다.
<그렇잖으면 내 목이라도?>
<그런 니름은 하지 마!>
<암살자나 암살 대상 중 하나만 죽으면 되는 거잖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륜이 죽어야 해. 가서 륜을 잡아. 힘들겠지만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야. 그 멍청한 놈은 심장을 가진 채 도망쳤어. 네가 못 잡더라도 정찰대원들이 잡아줄 거야. 오래 걸리지도 않을걸. 그러니 너는 쫓는 시늉만 하다가 돌아와도 돼.>
문득 솜나니는 사모의 정신 속에서 기묘한 얼룩 같은 것을 발견했다. 솜나니는 그 얼룩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것이 확고한 의지라기보다는 감정적 지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솜나니를 전율하게 했다. 솜나니는 사모의 손을 확 움켜쥐었다.
사모는 놀란 눈으로 페이 가문의 장녀를 바라보았다. 솜나니는 사모의 정신과 융화시켜버리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니름을 쏟아내었다.
<안 돼.>
<언니.>
<네가 죽을 필요는 없어. 똑바로 생각해! 륜은 어차피 살 수가 없어. 심장을 가진 나가가 키보렌에서 어떻게 살아간단 니름이야? 게다가 그놈은 수호자와 수련자를 죽였어. 아무리 남자의 소견머리라고 해도 감싸줄 수 있는 게 있고 감싸줄 수 없는 것이 있어. 그놈에게는 네 동정심조차 과분해! 사실 네가 죽여주는 것조차 과분한 일이야!>
솜나니는 다시 비아스에 대한 증오를 느꼈다. 이것은 지독한 모욕이다. 고작 남자 하나를 잡기 위해 가문의 가장 존경받는 여인을 암살자로 요구하다니. 하지만 솜나니는 라토 센 의장의 니름을 다시 떠올렸다. ‘차라리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도록 해.’ 솜나니는 자신의 기억을 그대로 사모에게 보내었고, 그래서 사모 또한 라토 의장의 니름을 듣게 되었다. 사모는 고개를 떨구었다.
<알았어요. 여자가 책임져야겠지요.>
그리고 사모는 쉬크톨을 덥석 집어들었다. 뭔가 니르려던 솜나니는 그 기세에 놀라 정신을 닫았다. 쉬크톨을 집어든 사모는 그 칼날을 천천히 뽑아내었다.
쉬크톨은 사이커와 비슷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인간이나 도깨비, 혹은 레콘이 귀한 쉬크톨을 가지고 있다면서 자랑스럽게 내어놓는 칼은 모두 사이커이며, 쉬크톨 자체는 한 번도 키보렌 밖으로 반출된 적이 없다. 사모조차도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것이 사이커인지 쉬크톨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사모는 잠시 그 칼날을 바라보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엔 돌탁자가 놓여 있었다. 솜나니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사모는 쉬크톨을 높이 들어올렸다. 사모는 단숨에 돌탁자를 내려쳤다. 불꽃이 튀어오르며 돌탁자의 귀퉁이가 아래로 떨어졌다. 솜나니는 쉬크톨의 위력에 놀라며 사모를 돌아보았다. 사모는 쉬크톨의 칼날을 검사하고 있었다.
<이가 빠지진 않았군요.>
<역시 쉬크톨이군. 부러뜨리는 방법은 알고 있지?>
<히스파의 잎으로 닦아준 다음 돌에 세게 내려치면 되죠.>
<그래. 잘 알고 있구나. 그럼 준비해라.>
<예.>
솜나니는 사모의 방을 떠났다. 혼자 남은 사모는 쉬크톨의 날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사이커와 같은 파형문이 들어 있는 쉬크톨의 날엔 사모의 얼굴이 기이하게 비치고 있었다. 사모는 고개를 돌려 바닥에 떨어진 돌조각을 바라보았다. 돌조각을 바라보던 사모는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사모는 옆에 있던 의자에 주저앉았다. 불현듯 그녀의 머릿속으로 륜과 나눴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저는 당신이 가지지 않을 아이의 대용품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내 아이는 되어줄 수 없더라도 친구는 되겠지?’
사모는 맥없이 웃었다. 자신이 낳지 않은 아이도, 우정을 나눌 친구도 없어진 곳에 남은 것이라곤 목을 베어야 하는 암살 목표밖에 없었다. 사모는 쉬크톨을 들어올려 왼팔에 얹었다. 그리고 그것을 잡아당겼다.
사모는 쉬크톨의 예리함에 다시 놀랐다.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혹 살이 안 베인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쉬크톨의 칼날에는 사모의 피가 묻어 있었다. 사모는 손수건을 꺼내어 그 피를 닦아내었다. 이제 쉬크톨은 같은 피가 흐르는 자를 찾아낼 것이다. 사모는 시험 삼아 쉬크톨을 들어 이곳저곳을 가리켜 보았다. 예상대로 모든 곳에서 손잡이가 따스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페이 가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밖으로 나간다면, 쉬크톨은 륜이 세상 끝에 있더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피붙이의 피를 마시기 위한 검으로서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다. 칼날에 묻은 피와 같은 피를 찾아내므로.
다음날, 사모 페이는 하텐그라쥬를 떠났다.
체온이 서서히 상승했다. 드러난 피부들에서 스며든 열기가 피의 흐름을 타고 보다 어두운 곳의 피부로 옮겨졌다. 마침내 그 열기가 눈 주위와 머리까지 올라왔을 때 륜은 눈을 떴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륜은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는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는 나무 아래의 훤히 드러난 자리에 누워 있었다. 나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달리다가 허기져서 아르마딜로 한 마리를 먹은 것이 실수였다. 나가들은 보통 아르마딜로를 잘 잡지 못한다. 아르마딜로의 딱딱한 피부는 체온을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아르마딜로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버틴다는 실수를 저질렀다. 륜 같은 초보 사냥꾼이라 하더라도 웅크린 아르마딜로를 밟고 나가떨어지게 된다면 그걸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사이커의 예리한 날 앞에 아르마딜로의 갑옷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 닷새 만에 포식을 하게 되자 륜은 걷잡을 수 없이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허락할 수 없는 여유다. 하지만 륜은 여전히 나무 아래에 누운 채 멍한 시선으로 위를 바라보았다. 나뭇가지들은 도대체 어느 가지가 어느 나무에 속하는 건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뒤얽혀 있었다. 나무꾼의 도끼 같은 것은 접한 적이 없는 그 거대한 나무들은 화석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 뒤얽힌 나뭇가지를 보며 륜은 혈관 같다고 생각했다. 서로를 휩싸며 자라 있는 나뭇잎들은 혈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초록색 피였다.
화리트의 몸에서 솟아나던 피처럼.
륜은 소스라치듯 일어나 앉았다. 륜은 속으로 화리트를 원망했다. 우정 때문에 화리트는 륜의 정신에 강력한 매듭을 만들어두었다. 그것은 죄책감을 관장하는 부분이었고, 륜은 그것을 도무지 풀 수가 없었다. 륜은 화리트의 죽음을 저지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이성적 판단일 뿐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륜은 자신이 화리트를 사랑한 것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왜 너를 위해 마음껏 슬퍼할 수도 없게 만들었나, 화리트!’
분노하던 륜은 요스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요스비에 대한 슬픔을 화리트에게 돌려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감정은 그런 식으로 배분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약간 과한 감정을 덜어서 약간 모자란 쪽으로 옮겨놓는 식은 불가능하다.
대신, 아버지의 죽음에서 느꼈던 공포가 륜을 사로잡았다. 요스비의 마지막 모습 위에 유벡스의 모습이 겹쳐졌고, 또한 그 위에 화리트의 모습이 겹쳐졌다. 륜은 공포에 질린 채 다급하게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어.’
륜은 주위의 관목으로 다가갔다. 나뭇잎에서는 이미 이슬이 마르고 있었다. 륜은 위쪽에서부터 나뭇잎을 조심스럽게 털기 시작했다. 하지만 맨 아래쪽 나뭇잎까지 내려왔을 때도 이슬은 얼마 모이지 않았다. 륜은 아쉬운 대로 그걸 마시고는 입을 훔쳤다. 그리고 륜은 해의 방향을 가늠했다.
‘저쪽이 동쪽인가. 그럼 북쪽은 저기로군.’
뱃속이 묵직했고, 륜은 불편함을 느꼈다. 음식을 씹지 않는 나가는 소화가 느리다. 쥐보다 더 큰 것을 먹은 적이 없던 륜은 자신의 상태가 꽤 낯설었다. 자신의 위 속에서 토막 난 고깃덩이들이 거의 원형을 유지한 채 굴러다니고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자 륜은 불쾌함까지 느꼈다.
“익숙해져야 할 일이야. 어차피 남자들은 죽을 때까지 이런 식으로 식사하잖아.”
목소리를 들은 륜은 겁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자신의 혼잣말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동시에 륜은 자신이 소리에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키보렌 밀림 안에는 실로 풍부한 소리들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륜은 자신이 듣는 소리가 결코 모든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약한 청력이 포착할 수 있는 소리는 대단히 제한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륜은 압도적일 정도의 소리들에 넋을 잃었다. 전에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였지만 륜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니를 수 있었다.
숲이 깨어나는 소리를 들으며, 륜은 북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친구의 죽음에 슬퍼할 수조차 없게 된 륜에게 남은 것은 친구의 유언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가 떠난 자리엔 은빛 섬광이 가늘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