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2장 – 은루(銀淚)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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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2장 – 은루(銀淚) (9)


냉혹의 도시 하텐그라쥬는 침묵 속에서 소란스러웠다.

나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행사가 있는 오늘 같은 날에도 하텐그 라쥬는 건설된 이후로 항상 그러했듯이 고요했다. 그곳에서는 어 떤 말소리도, 고함도, 노래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오직 나 가에게만 허락된 정신의 언어를 들을 수 있는 존재라면 하텐그라 쥬의 대로와 건물, 골목과 광장을 가득 메운 니름에 넋을 잃을 지경이 될 것이다. 흥분한 어린 나가들은 거칠다 싶을 정도로 정 신을 열어젖히고 있었고 그들의 호위자들은 그것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고 있었다. 거기에는 목소리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전장(戰場)에서처럼 모두가 흥분하 여 제멋대로 떠들고 고함을 지르는 곳에서는 침묵을 지키는 인간 이 오히려 불쾌감과 불안을 느낀다. 주위의 난폭한 감정과 정신 들에 동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니름을 사용하는 나가들은 그런 작용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며, 따라서 모두가 흥분하여 정신을 열어젖히고 떠드는 이곳에서 억지로 정신을 닫아거는 것은 정신 에 대단히 해롭다.

그래서 륜 페이는 대로 가운데서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고 말았 다. 그는 지금껏 완고하게 정신을 닫아걸고 있었다.

륜을 호위하던 남자들은 당황하여 륜을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심장 적출을 하기 위해 심장탑으로 향하는 나가들이 가득했고 그 들은 모두 이쪽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호위자들 중 경륜이 많은 늙은 나가가 재빨리 침착을 회복했다. 호위자들 은 륜을 들어올려 옆 건물의 계단에 기대어 앉혔다. 쏘바라는 이름의 늙은 나가는 다른 호위자들로 하여금 주위를 가리도록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륜을 관찰했다.

<륜? 정신 차려라, 괜찮으냐? 나 쏘바다.>

륜은 두 눈을 쏘바에게 향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륜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던 쏘바는 문득 륜이 입을 뻐끔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륜이 목소리를 내고 다는 것을 깨달은 쏘바는 당황하며 청각에 주의를 기울였다. 청 각을 사용한 지가 너무 오래되었기에 쏘바는 한참 후에야 륜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안 돼……, 갈 수 없어. 안 돼…….”

쏘바는 륜이 왜 이런 행동을 보이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과거 경험 속에서도 적출식 때 이런 모습을 보였던 어린 나 가들이 있었다. 물론 륜처럼 심각한 모습을 보인 나가는 없었지만.

<정신차려, 륜! 괜찮아. 아무런 일도 없어.>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다고!”

<죽는 것이 아냐. 심장을 꺼낼 뿐이야. 오히려 죽음을 피하게 되는 거야. 자, 진정해. 륜.>

“아냐, 죽는 거야. 죽게 될 거야. 그렇게, 나도, 나도!”

<나도? 페이 가문에 적출식 도중에 사고를 만난 사람이 있었나?> 

쏘바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의 호위자들을 둘러보았지만 대답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자들이 가문의 일을 알 리 가 없다. 다시 륜을 돌아본 쏘바는 륜이 허리에 찬 사이커를 꽉 움켜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륜이 칼부림이라도 할까 두려워진 쏘바는 륜의 어깨를 힘껏 눌렀다.

<죽지 않아.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 륜. 자, 일어나. 적출식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죽는 거야! 더운 피 때문에 사냥당하게 돼!> 

“싫어! 싫어! 그러지 않을 거야. 아무도 내 심장을 가져갈 수 없어! 집에 돌아가. 집에 돌아가요!”

쏘바는 낭패감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르게 되었다. 그는 누군가 이 난국을 해결해 줄 사람이 없나 찾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때 그의 눈에 어떤 사람이 들어왔다. 쏘바는 날카로운 니름을 발 했다.

<화리트! 수련자 화리트!>

대로를 걸어가던 화리트는 느닷없이 자신에게 쏟아져오는 니 름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를 호위하고 있던 카루와 스바치는 검을 움켜쥐기까지 했다. 주위를 살피던 세 사람은 곧 이상한 모 습으로 몰려 있는 나가들을 발견했다. 화리트는 그들의 등 뒤에 주저앉아 있는 친구의 모습을 발견했다.

<륜?>

화리트는 황급히 걸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 스바치가 화리트 의 팔을 움켜잡았다. 스바치는 화리트에게 정신을 집중시키며 닐렀다.

<안 돼. 함정일지도 모른다.>

화리트는 당황했지만 정신을 집중할 수는 있었다.

<함정?>

<우리 계획이 들킨 건지도 몰라.>

<륜은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어요! 오히려 가지 않으면 더 수상하게 여겨질 텐데요?>

스바치는 고개를 가로젓고 싶었다. 륜 페이 주변에 몰려 있는 나가들은 너무 많았다. 하지만 화리트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스바치와 카루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의구심은 쏘바가 반가운 니름을 보내었을 때야 겨우 해소 될 수 있었다.

<자네 여기 있는 륜의 친구지? 이 친구를 좀 달래줄 수 있겠 나? 적출공포증인 것 같아. 우리는 이 친구에 대해 도통 알지를 못하니.>

화리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륜의 옆에 걸터앉았다. 륜은 화리트 를 보지 못한 것처럼 계속 하늘을 향해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목소리를 내고 있어.>

쏘바가 설명했을 때 화리트 역시 그것을 깨달았다. 화리트는 청력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자 곧 륜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 려왔다.

“집으로 돌아가, 안 돼! 집은 안 돼. 집에는 갈 수 없어. 나는 갈 곳이 없어. 나는 죽을 거야. 나는…….”

화리트는 륜의 상태가 대단히 심각하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륜의 어깨를 부여잡은 다음, 화리트는 자신의 정신을 최 대한 집중시켜 마치 송곳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

<디듀스류노 라르간드 페이!>

최대한 집중된 화리트의 니름은 주위의 나가들에게 들리지 않 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륜의 모습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륜은 눈을 껌뻑거리더니 화리트를 돌아보았다. 초점을 잃은 채 방황하던 그의 눈에 화리트의 모습이 어리기 시작했다. 

<아스화리탈 세파빌 마케로우?>

륜의 집중되지 못한 니름은 주위 사람들에게도 들렸다. 다른 사람들은 이 이상한 호칭에 의아해했으나 카루와 스바치는 그 니 름에 흠칫했다. 그들은 재빨리 서로를 쳐다보고는 그들이 잘못 듣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화리트는 륜의 어깨를 꼭 부여잡 으며 계속해서 륜에게만 닐렀다.

<좋아. 륜. 정신차려. 일어날 수 있겠어? 아니, 이 니름은 잊어버려. 잠시 앉아 있는 것이 좋을 것 같군.>

화리트가 집중된 니름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가까스로 깨달은 륜은 자신의 정신을 집중시켰다.

〈내가 어떻게 된 거지? 여기는 어디야?>

화리트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센 저택의 대문 앞이야. 네가 어떻게 된 건지는 오히려 이쪽에서 묻고 싶은데.>

화리트는 적출 공포증이라는 니름은 꺼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했지?>

<생각?>

륜은 그렇게 닐렀지만 그 얼굴은 마치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니름을 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화 리트의 눈에 륜이 꽉 움켜쥐고 있던 사이커가 들어왔다. 화리트 는 그 사이커를 턱으로 가리켜보였다.

<가문의 선물이야? 근사해 보이는군. 난 끈 자를 때나 쓸모가 있을까 싶은 단검 한 자루 받았어.>

륜은 화리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자 신의 허리를 내려다보았다. 륜의 시선은 그 사이커에 고정되었 다. 화리트는 륜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륜이 다시 정신을 열었을 때 그 니름은 어색할 정도로 안정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꼴불견을 보인 모양이군. 도와줘서 고마워, 화리트.>

<뭐? 아, 그래. 일어날 수 있겠어?>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손이 사라진다면 어깨가 아픈데.> 

화리트는 가까스로 쓴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화리트가 손을 치우자 륜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마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 기라도 했다는 듯이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러나 륜은 다시 움찔 하며 멈춰섰다. 륜의 시선을 따라가본 화리트는 심장탑을 보게 되었다.

화리트는 륜의 어깨를 툭 쳤다. 륜은 잠에서 깨어나듯 흐리멍 텅한 눈으로 화리트를 돌아보았다. 화리트는 이럴 때 어떻게 닐 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륜, 가야지?>

<응? 아, 그래. 가야지.>

하지만 륜은 여전히 발을 뗄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화리트는 좀더 친구와 있어주고 싶었지만 저쪽에서 스바치와 카루가 초조 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럼 심장탑에서 보자. 잘 갈 수 있는 거지?>

<물론이야>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지만 륜은 반복해서 닐렀다.

<물론 갈 수 있어.>

륜의 호위자들은 화리트가 륜과 동행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호위자의 숫자가 비슷하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한쪽의 호위자 숫자가 너무 적을 경우 함께 걸어가는 것은 다른 가문에 호위를 의탁하는 것처럼 보일 가능성이 높다. 지체 있는 가문에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의 상상력이 약간 더 풍부했다면 화리트가 잠시 후면 상관없어질 가문의 명예에 그 렇게 크게 신경쓰지 않을 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 정도의 상상력은 없었고, 그래서 륜의 호위 자들은 화리트에게 감사한 다음 륜과 함께 앞장서 걸어갔다.

뒤에 남겨진 화리트는 슬픈 표정으로 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 다. 화리트의 감정은 그로 하여금 친구의 고통을 감싸주며 함께 걸어갈 것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그의 이성은 동료들과 함께 있을 것을 종용했다. 가까이 다가온 카루는 고개를 내저으며 닐렀다. 

<열흘 전의 네 방문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나 보군. 화리 트. 적출 공포증이라는 니름은 들었지만 저렇게 심한 경우는 처 음 봤는데. 심장탑에서 난동이라도 부리지 않을지 걱정되는군.> 

<수호자들은 그를 잘 다룰 겁니다.>

<그러길 바라겠군. 칼도 큼직한 것을 찼던데, 난동을 부리면 큰일이겠어.>

화리트는 더 이상 륜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걸음 을 떼며 이야기를 돌렸다.

<그럼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지요. 무룬 강을 어떻게 알아보죠?> 

<그건 걱정 마. 그것과 같은 강은 어디에도 없다. 북쪽으로 죽 올라가다가 반대쪽 기슭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강을 만나면, 그게 무룬 강이야. 못 보고 지나치기가 어렵지.>

<제가 호수나 바다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물맛을 보면 바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테고, 흐르고 있으니 호수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을 거다. 그 다음은 물이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면 돼. 아주 간단하지.>

그리고 스바치와 카루는 야외 생활에 대한 조언을 늘어놓기 시 작했다. 그들이 경쟁적으로 들려주는 지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키보렌에서 나가가 굶어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사냥에 충분히 능숙해지기 전까지는 그런 황당하고 수치스럽기까 지한 사망의 가능성도 있다. 심장을 뽑은 나가는 사고로 죽지는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고 언제나 과감하게 행동하라.’ 

흥이 오른 카루는 자신의 첫 사냥 때 멧돼지의 엄니에 꿰인 채로 질질 끌려 가면서도 그 목을 졸라 죽였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어 화리트를 몽롱하게 만들었다. 만약 화리트가 이전에 멧돼지를 보 았다면, 즉 졸라죽인다는 것이 불가능한 그 굵은 목을 보았다면 웃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고마워요.>

자신이 사냥했던 멧돼지를 용과 대적이 가능한 괴수로 만들고 있던 카루는 잠깐 어리둥절해하며 화리트를 바라보았다. 화리트 는 다시 한 번 감사했다.

<고마워요.>

카루는 무슨 니름이냐는 듯이 물으려 했다. 하지만 카루는 곧 마음을 바꿔먹고는 씩 웃었다.

<가서 심장을 뽑자고.>

스바치 또한 씩 웃었다. 화리트는 더 이상 니르지 않은 채 친 구가 걸어간 길을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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