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3장 – 눈물처럼 흐르는 죽음 (16)
그 후 십여 분 동안의 경험은 티나한을 난처하게 했다.
티나한은 륜과 비형, 그리고 나늬와도 기꺼이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열 시간 가까이 앞도 제대로 볼 수 없는 미궁 속에 갇혀 있다가 빠져나온 자들끼리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이 티나한의 나무랄 수 없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비형은 피라미드를 빠져나오자마자 그와 륜을 내버려 둔 채 약간 떨어진 바위 위로 걸어가 앉았다. 그러고는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주인이 그렇게 행동하자 딱정벌레 나늬는 그 주인의 발치로 걸어가 피로한 몸을 눕혔다.
비형이 계속해서 도깨비불을 운용하느라 피곤해진 거라 생각한 티나한은 아쉬운 대로 륜과 함께 즐거워하려 했다. 하지만 륜은 비형과 반대쪽으로 걸어가서는 역시 자신을 주위와 격리시키는 듯한 몸짓을 취했다. 그러자 티나한은 그만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티나한은 륜을 달래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조심스럽게 륜에게 다가갔다.
“륜. 네 누나는 괜찮을 거야. 그 시체들이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중앙 통로에 어떤 마법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잖아? 그럼 그 유해의 폭포는 중앙 통로에서 멀리 떨어지지 못할 거야. 네 누나는 그저 힘껏 달리기만 했어도 도망칠 수 있었을 거야.”
륜은 티나한을 돌아보았다.
“그랬을까요? 하지만 우리들처럼 두억시니들이 몰려와서 길을 막았다면……?”
“아니. 두억시니들은 전부 우리를 막으려 몰려들었을 거야. 반대쪽에는 없었을 걸. 그러니 네 누나도 그곳까지 쉽게 온 것일 테고.”
“고마워요, 티나한.”
티나한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불길한 추측은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빠져나올 때 두억시니들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쯤 그 암살자는 암흑 속에서 노도처럼 몰려드는 두억시니들과 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군요.”
티나한은 찔끔하며 물었다.
“응? 어, 그게 뭔데?”
“그 유해의 폭포가 했던 말씀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티나한은 속으로 안도했다. 륜은 피라미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해의 폭포는 신을 죽이는 계획에 대해 거론했습니다. 제 기억 속에서 그런 계획을 읽었다고 주장했지요. 저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 안에 있었던 나가가 저뿐만이 아니라면, 그 유해의 뱀이 읽었다고 주장한 것은 사실 제 기억이 아니라 제 누님의 기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그 유해의 뱀은 군체(群體)였으니까요.”
“군체라?”
“예. 그 유해의 뱀은 무수한 두억시니의 유해로 이루어진 하나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폭포는 저와 또 다른 나가를 구분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티나한은 익숙하지 않은 개념들로 사고를 진행시키느라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륜은 여러 번 설명을 반복했고 덕분에 티나한은 가까스로 륜의 설명을 이해했다.
“그렇다면 네 누나가 신을 죽일 계획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다는 거냐? 그 폭포는 그걸 읽은 다음 그게 네 기억이라고 생각했고? 둘 다 나가라서 구분을 못 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잖아. 네 누나가 혹시 이야깃꾼이냐?”
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누님은 점잖은 분이에요. 그런 황당한 이야기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어디선가 그 이야기를 들으셨을 수는, 그리고 너무 황당해서 기억해 두고 계셨을 수는 있지요. 더 이상은 짐작되는 바가 없군요.”
티나한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그 동작은 륜을 위한 것일 뿐, 그 이야기 자체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신을 도대체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티나한은 그런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하지만 친누나에게 목숨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륜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고, 그래서 티나한은 괜스레 비형에게 짜증이 났다.
티나한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비형에게 다가갔다. 티나한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나늬는 더듬이를 돌려 대었지만 비형은 여전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티나한은 철창을 높이 들었다가 쾅 소리 나게 땅에 찍었고 비형은 그제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이봐. 아까 왜 불을 지르지 않았어?”
“아까 말인가요?”
“그래. 때마침 암살자가 나타났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다 죽을 뻔했잖아. 아니면 그 우라질 폭포의 일부가 되어 흘러내리게 되었거나.”
티나한을 멍하니 바라보던 비형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쩌나 싶어 바라보던 티나한은 비형이 다시 하늘에 초점을 맞춘 채 꼼짝도 하지 않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야, 이 자식아!”
“예?”
“왜 불을 지르지 않았냐고 물었잖아! 뭔가 대답이 될 만한 소리를 지껄여 보라고! 나도 싸웠고 륜도 싸웠어! 그런데 넌 왜 안 싸운 거야? 넌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였냐!”
“상관없다고요?”
“넌 죽어도 안 죽잖아! 그래서 신경 쓰지 않은 거냐!”
“불쌍하지 않아요?”
티나한은 기가 막혔다.
“뭐라고? 불쌍하다고? 우리를 죽이려 했던 놈이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우리를 죽이려 했다는 것 자체가 불쌍한 것 아닌가요?”
“도대체 무슨 소리냐!”
“천 년 만에 의식을 가지게 된 자가 자신에게 의식을 부여해 준 존재를 미워하고 파괴하려 들게 된 것이 불쌍한 일 아닌가요?”
티나한은 벼슬이 출렁거릴 정도로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불쌍한 것이 아니라 배은망덕한 거야! 자, 잠깐. 너 지금 그 새끼가 배은망덕하게 된 것이 불쌍하다고 말할 거냐?”
비형은 티나한의 벼슬을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도깨비의 입은 닫혀서 다시 열리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기다리던 티나한은 체념하고는 타이르는 어조로 말했다.
“이보라고, 비형. 너희들 도깨비가 죽어도 죽지 않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나나 케이건에겐 그런 재주가 없어. 륜 또한 심장을 뽑지 않았으니 마찬가지고.
네가 우리를 돕지 않아서 우리가 죽게 된다면, 그건 네 손으로 우리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부탁인데, 다음부터는 불을 지르라고. 그런 일이 자주 있지는 않을 거야. 웬만한 일은 내가 처리할 수 있어. 아니면 보통 때처럼 케이건이 처리하겠지.
하지만 그래도 네 결심이 필요한 일이 생길지 몰라. 그럴 땐, 비형. 제발이지 고민 따위 하지 말고 불을 질러. 대사원에서는 우리 죽어 나가는 꼴 감상하라고 너를 이 구출대에 합류시킨 건 아닐 거라고. 빌어먹을, 피를 흘리느냐 피를 묻히느냐 둘 중 하나라면 일단 피를 묻혀야 돼!”
‘피’라는 말은 도깨비를 기겁하게 했다. 비형은 분노마저도 엿보이는 눈으로 티나한을 쏘아보았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티나한은 손을 내저었다.
“어, 미안해. 흥분했어. 하지만 내 말뜻은 알겠지?”
비형은 완강히 티나한을 외면했다. 도깨비에겐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른 탓에 더 이상 말을 하기 면구스러워진 티나한은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그러고는 무너진 담벼락에 걸터앉아 자신의 도깨비 동료에 대해 소리 없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티나한은 도깨비라는 것들은 상종할 수 없는 것들이며 만약 목숨을 맡기는 동료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식의 오판을 했다간 비명횡사하게 될 뿐이라고 거듭거듭 확신하며 피라미드를 바라보았다.
잊고 있었던 암살자는 자신의 존재와 의지 양쪽을 뚜렷이 나타내는 흔적을 남겼다. 다행히도 이번의 조우는 뜻밖의 행운이 되어 주었지만 다음 번에도 그런 즐거운 만남이 될 거라는 보장은 절대로 없다.
륜 페이를 한계선 너머로 데리고 가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여정에서, 티나한은 비형에겐 되도록 기대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피’라는 말조차 듣기를 거부하는 겁쟁이에게 뭘 기대하겠는가? 티나한은 갑자기 케이건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케이건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티나한은 케이건이 걱정되었다.
“유적을 구경하러 온 거요?”
티나한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비형과 륜도 뒤돌아보았다. 숲 쪽에서 케이건이 걸어오고 있었다.
“사냥감을 추적하다가 좀 늦었소. 대피소에 갔더니 당신들이 없더군. 다행히 티나한 당신이 깃털을 많이 떨어뜨려서 찾아오는 데 무리는 없었소. 그런데 여기 유적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아셨소?”
케이건은 당황했다. 티나한이 대답 대신 그를 꼭 껴안았기 때문이다.
대피소를 향해 걸어가면서, 티나한은 케이건에게 그들이 지난 열 시간 가까이 겪었던 일에 대해 갖가지 묘사를 섞어 가며 이야기했다. 얼굴을 조금 찡그린 채 티나한의 이야기를 듣던 케이건은 티나한의 이야기가 끝나자 생각에 잠겼다.
조금 후 케이건은 하늘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암살자가 여기까지 따라왔다면 지체할 시간이 없겠군. 여러분들이 많이 피로할 거라는 것 짐작되지만 빨리 이곳을 떠나야겠소. 미안하지만 오늘 밤에는 밤새도록 걷기로 합시다.”
티나한은 신음을 흘렸다.
“이봐. 그럴 필요가 있겠어? 지금쯤은 돌이 다 식었을 거라고. 그 암살자는 빠져나올 방법을…..”
티나한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 암살자의 동생이 옆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동생은 곧 암살 대상이다. 티나한은 골치가 아팠다.
아니나다를까, 륜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티나한의 말이 맞습니다. 누님은 빠져나오기 힘드실 겁니다.”
케이건은 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너로선 다행이군.”
“하지만 그 분은 제 누님입니다.”
“네 누나가 빨리 빠져나와서 쉬크톨로 네 목을 베어 가길 바라지는 않을 거 아냐.”
륜은 비늘을 곤두세우며 사납게 말했다.
“제 불행한 처지를 비웃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저는 누님이 저곳을 무사히 빠져나오길 바랍니다.”
케이건은 륜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대피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자신의 짐을 들고 나오며 말했다.
“그럼 다행이군.”
“네?”
“돌이 식었어도 상관없어. 빠져나올 방법은 있으니까. 네 누나가 그걸 깨닫지 못하기를 바라지만, 뜨거운 돌을 이용할 정도로 영리한 여자에겐 기대하기 어려운 소망이겠군. 그러니, 그렇게 반가운 얼굴 하지 말고 빨리 짐 챙겨라. 지금 걱정해야 할 건 네 누나가 아니라 너 자신이다. 아까 말했듯이 아무래도 밤새도록 걸어야겠다.”
케이건은 그렇게 말한 다음 륜을 지나쳐 걸어갔다. 륜은 황급히 케이건의 등을 향해 말했다.
“저는 누님만큼 영리하지 못한 모양이군요. 당신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는데요? 어떤 방법이 있는 거죠?”
케이건은 륜을 흘끔 돌아본 다음 손을 들어 피라미드가 있던 방향을 가리켰다. 케이건이 가리키는 곳을 본 륜은 탄성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