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4장 – 왕 잡아먹는 괴물 (10)
무적왕과 선지자가 감동적인 언사를 나누고 있는 동안 천막 안에서는 륜이 고통과 수치심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지독한 고통 자체는 매년 한두 번씩 겪던 것이라 익숙했지만 이 살을 에는 혹한의 땅에서 이런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허물을 벗고 있다는 것은 륜을 더없이 비참한 기분 속으로 몰아갔다. 도깨비불을 놓도록 배려했던 케이건과 달리 무적왕 일행은 천막 안에 불을 피우지도 않았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선선한 밤이었기 때문이다. 그 추위만으로도 륜을 죽일 정도였지만, 조금 전까지 그의 곁에 앉아 부끄럽게도 몸 곳곳을 눌러대며 “곧 벗겨지겠군요. 기운 내십시오.” 어쩌고 하는 소리를 지껄이던 노인은 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처참한 기분을 선사했다.
끊임없이 은루를 흘리던 륜은 문득 비늘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다음 허물벗기는 어디서 하게 될까?’
방문할 가문 같은 것은 없다. 한계선을 넘어왔기 때문에. 돌아갈 수도 없다. 심장을 적출하지 않은 비에나이기 때문에. 륜은 다음 허물벗기 또한 이곳 혹한의 땅 북부에서 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며 몸을 떨었다. 아니, 다음 허물벗기뿐만이 아니다. 살아 있는 나날 동안 계속 그렇게 해야 한다. 모든 것을 그의 입장에서 고려하여 세심하게 보호해 주던 케이건과 무참하게 결별당한 상태에서, 륜은 비로소 한계선 북부의 공포를 뼈저리게 절감했다.
요스비는 닐렀다.
<작별이군. 내 아들아.>
그 니름만 남겨놓고 죽은 요스비처럼 되고 싶지 않았기에 륜은 심장 적출을 거부한 채 키보렌을 떠났다.
화리트는 닐렀다.
<가! 디듀스류노!>
그래서 륜은 이곳, 나가들이 꿈에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혹한의 땅까지 왔다.
그러나 냉혹한 죽음을 피해, 우정의 완성을 위해 찾아온 이 땅에서 륜이 발견한 것은 죽음과도 같은 추위와 광신이라는 미쳐버린 우정뿐이었다. 륜은 정신적 웃음을 터뜨렸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희극이었다. 은루로 볼을 적신 채 륜은 크게 웃었다.
무엇보다도 웃기는 것은, 륜은 자살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심장을 적출하지 않았기에 언제라도 원하면 이 희극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륜은 그럴 수 없었다. 화리트는 그에게 자신의 사명을 ‘부탁했다.’ 륜의 정신을 완전히 지배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그 부탁은 륜에겐 본능보다 더 중요했다.
화리트가 그의 죄책감을 완전히 매듭지었기에 륜은 마음껏 화리트를 저주했다.
<이용 같은 자식, 이 도깨비 같은 자식아!>
륜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나가처럼 욕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깨비는 그의 동료였고 용은 그의 배낭 속에 있었다. 고개를 돌릴 힘조차 없었기에 륜은 힘겹게 눈만 움직여 배낭을 곁눈질했다. 그의 배낭은 옷가지와 함께 천막 한쪽에 놓여 있었다. 자칭 선지자라는 노인은 륜의 사이커에만 관심이 있어 다른 짐은 뒤지지 않았다. 요스비의 유품을 뺏겼다는 사실에 다시 슬퍼하며 륜은 배낭을 향해 닐렀다.
<아스화리탈. 그래도 네가 발견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하지만 곧 그들이 내 짐을 뒤지겠지. 그러니 제발 눈을 떠라. 눈을 떠서 도망가. 자신도 보호하지 못한 채 부끄러운 알몸을 드러내고 있는 나는 너를 더 이상 보호해 줄 수 없어.>
배낭이 꿈틀거렸다. 륜은 놀라서 배낭을 주시했다. 하지만 곧 륜은 그것이 자신의 눈에 어린 은빛 눈물 때문에 일으킨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배낭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움직였잖아! 그때 분명히 움직였어. 제발 눈을 떠! 부탁이야!>
륜의 시야 속에서 무엇인가가 급하게 움직였다. 륜은 황급히 눈꺼풀을 깜빡여 은루를 짜내었다. 움직인 것은, 그러나 이번에도 배낭이 아니었다.
천막 자락이 급하게 쳐들려진 곳에는 선지자가 그림자가 잔뜩 드리워진 얼굴을 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그토록 어두운 까닭은 빛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가가 볼 수 있는 그 빛은 분명 열이었다. 수치심 속에서도 륜은 이 밤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뜨거운가 의아해했다.
륜이 본 열의 반 정도가 비형의 작품이라면 나머지 반 정도는 티나한에게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티나한이 휘두르는 철창은 공기와 마찰하며 달아올랐고 땅을 스칠 때마다 대지에서 불꽃을 무더기로 퍼 올렸다. 어설프게 선지자의 흉내를 내어 보려는 병사들이 물통을 들고 달려왔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케이건이 바라기를 휘둘러 물통을 박살 내었다.
무장하고 있는 마흔 명의 병사들이 있었지만 티나한과 케이건에게 작은 상처 하나도 입히지 못했다. 나늬에 탄 비형이 그들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며 병사들의 두 눈에 뜨겁지는 않지만 대단히 밝은 도깨비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두 눈을 가리는 환한 어둠 속으로 아무렇게나 무기를 휘둘렀지만 동료의 다리를 베거나 자기 턱을 때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비형은 케이건이 가르쳐 준 그 기술에 완전히 푹 빠져버렸고, 그런 매혹은 꽤 인상적인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즉 비형은 병사들의 두 눈을 가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의 머리에 토끼 귀를 달아주고 등에 딱정벌레 날개를 달고 엉덩이에 다람쥐 꼬리를 붙여주었다. (가끔 물고기 꼬리도 있었다.) 도무지 비정한 전장의 광경이 될 수 없는 그 모습에 분노의 화신처럼 습격에 뛰어들었던 티나한마저도 더 이상 분노를 불태울 수 없었다. 티나한은 하늘을 향해 제발 이 웃기는 짓 좀 멈추라고 외쳤지만 딱정벌레 날갯짓 소리 때문에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던 비형은 웃으며 대답했다.
“뭐 별것 아닙니다! 특별히 보고 싶은 것 있으세요?”
결국 티나한은 두 손 든 채 철창을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앞이 보이지 않아 허둥거리는 병사들의 뒤로 걸어가 그들의 뒤통수를 툭툭 치기 시작했다. 물론 병사들은 픽픽 쓰러졌다. 습격이 시작된 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무적왕의 야영지에는 더 이상 서 있는 병사가 없었다. 오직 무적왕만이 경악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케이건은 무적왕을 완전히 무시한 채 쓰러진 병사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케이건의 모습을 본 티나한은 한 번에 두세 명씩의 병사들을 주워 날랐다. 졸도한 병사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케이건은 비형을 향해 손짓했다. 비형은 나늬를 착륙시켰다. 다가오는 비형을 향해 케이건은 간단한 주문을 했다.
“비형. 불로 저 자들 주위에 울타리를 만드시오. 나오지 못하도록.”
비형은 씩 웃고는 손을 휘둘렀다. 졸도한 병사들 주위로 불의 원이 화르르 피어올랐다. 병사들이 감금되자 케이건은 바라기를 다시 등 뒤에 건 다음 무적왕을 향해 걸어갔다. 티나한과 비형, 그리고 나늬가 그 뒤를 따랐다.
무적왕은, 제위 이후 최고의 용기를 보여주었다.
무적왕은 허리에 찬 사이커를 뽑아들어 케이건의 가슴을 겨냥했다. 티나한은 폭소를 터뜨렸지만 케이건은 나직이 말했다.
“이렇게 소란스럽게 찾아온 점 사과하겠소. 하지만 당신들이 내 동료를 억압하고 있으니 예의를 갖출 여유가 없었소.”
“도도도동료?”
케이건은 무적왕이 조금도 더듬지 않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소. 뭔가 오해를 하셨던 듯한데, 당신들이 데려간 자는 내 동료인 나가요. 우리는 그를 돌려받고 싶소. 그리고 지금 당신이 들고 있는 그 칼 또한 내 동료의 물건이니 돌려받아야겠소.”
조금 전 목격한 무시무시한 위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케이건의 차분한 말투는 무적왕을 꽤 혼란시켰다. 그러나 무적왕은 차츰 자신들이 뭔가 말도 되지 않는 실수를 저지른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 느낌은 마침내 무적왕 자신의 지난 1년 동안의 여정에도 적용되었다.
전(前) 페치렌의 피혁상 토디 시노크는 쓰러진 병사들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내가 도대체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그 질문 자체는 어떤 인생을 사는 누구에게라도 몇 번씩은 찾아오는 것이지만 토디 시노크에게 그 질문은 각별했다. 토디의 손에 들려 있던 사이커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발칙한 것들! 감히 왕에게 명령을 하느냐!”
광포한 외침과 함께 천막의 휘장이 거칠게 젖혀졌다. 그 뒤에서 나타난 것은 선지자였다. 순간 티나한이 야수의 신음을 흘리며 앞으로 돌격했다.
“너!”
케이건이 재빨리 티나한의 왼팔을 움켜잡았다. 달리는 말을 붙잡으려 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잠깐 동안이지만 케이건은 두 발을 완전히 땅에서 뗀 채로 끌려갔다. 케이건의 존재를 깨달은 티나한이 걸음을 멈췄고 반대쪽에서 비형이 오른팔에 매달린 덕분에 케이건은 가까스로 두 발을 도로 땅에 붙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비형이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티나한이 비형을 깨닫지 못한 채 철창을 쥔 오른팔을 마구 움직였기 때문이다.
“너 이 새끼, 그걸 뿌렸겠다! 내게 감히 그걸! 너 오늘 뼈 개수 두 배로 늘어나는 줄 알아라!”
호통을 치던 티나한은 문득 무적왕이 입을 쩍 벌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티나한은 케이건을 돌아보았고 케이건은 손을 들어 티나한의 오른팔을 가리켰다. 자신의 오른팔을 본 티나한은 그 팔뚝에 거의 기절한 도깨비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티나한이 비틀거리는 비형을 똑바로 세워놓는 동안 선지자가 가래 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네 이놈들! 왕에게 감히 명령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감히 왕을 위협하는구나! 그 무엄한 언동에 꿈쩍이라도 하실 폐하가 아니시다!”
티나한은 다시 벼슬을 곤두세웠지만 케이건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케이건은 선지자를 향해 말했다.
“노인장. 그 나가를 돌려주시오.”
“허튼 소리하지 마라. 이분은 우리의 국모님이시다! 왕손을 배출하실 거룩한 태의 주인이시다! 보아라!”
선지자는 옆으로 몸을 틀어 무엇인가를 들어 올렸다. 잠시 후 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 비형과 티나한은 신음을 흘렸다.
선지자는 륜을 두 팔로 안아 든 채 걸어 나왔다. 륜의 모습은 끔찍했다. 거의 모든 살갗이 윤기를 잃은 채 희게 말라 있었고 그것들이 찢어지고 갈라지며 썩은 나무껍질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륜은 마치 찢어진 천 조각을 대충 기워 만든 것처럼 보였다. 선지자는 승리감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봐! 보아라! 이제 이분은 너희들이 씌워놓은 추악한 껍질을 벗고 계신다. 너희들은 너무 늦었다!”
케이건은 선지자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 케이건은 륜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 주위의 허물은 이미 많이 떨어져 나간 상태였고 꼼짝할 수 없는 몸 대신 그 눈이 륜의 감정을 보내어 오고 있었다. 니름을 들을 수 없어도, 케이건은 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가는 그런 짓을 좋아하지 않소. 노인장.”
“나가가 아냐! 우리 왕비님이시다!”
“그렇게도 왕을 원하오?”
“뭐라고?”
케이건은 무적왕을 흘깃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왕이 무엇이오?”
“뭐라고?”
“키탈저 사냥꾼들이 부당한 모욕을 받고 만민 회의장을 떠난 이후 팔백여 년 동안 이 북부에는 더 이상 왕이 없었소. 저 아둔한 자칭 권능왕과 어리석기로는 마찬가지인 그 아들을 거론하는 것은 웃음거리도 되지 못할 것이오. 이 땅이 팔백여 년 동안 잊고 있었던 그 자, 그리고 이 땅이 팔백여 년 동안 찾아내려 애쓰는 그 자, 왕은 뭐요. 말해 보시오.”
“가장 위대한 자다. 만물의 하나뿐인 주인이시고 법칙의 절대적 수호자이시다! 홀로 위대하신 그분에게 이 땅의 모든 영광이 모여들고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만 영광에 이를 수 있다! 저 간특한 키탈저의 야만인들이 내렸던 저주 따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침내 우리에게 돌아오신 분이다!”
“틀렸소.”
“틀렸다니, 무슨 소리냐!”
“다른 모든 자들처럼 당신도 왕을 알지 못하오. 그래서 저런 자를 고르는 실수를 하고 말았지. 아마도 알면서 저지르는 종류의 실수일 거라 짐작하오.”
케이건은 여전히 선지자를 보며 손으로는 토디를 가리켰다. 토디는 그 손이 무기라도 되는 양 뒤로 물러나다가 기어코 주저앉고 말았다. 케이건은 선지자를 향해 말했다.
“당신도 저 자가 왕이 아니라는 것을 알잖소?”
“닥쳐라! 거룩한 왕좌에 네 오물을 던지지 마!”
“이제 그만하시오. 당신은 과거 운수(雲水)였다고 들었소. 그렇다면 나가의 허물벗기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을 거라 믿소. 저 자가 왕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당신은 그 자가 나가라는 것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거요.”
티나한과 비형은 놀란 눈으로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케이건은 조용히 덧붙였다.
“그렇잖소?”
선지자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그의 늙은 팔에 륜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는 듯했다. 선지자는 몇 번 더 비틀거리다가 기어코 륜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비형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도깨비의 발은 곧 멈췄다. 선지자가 쓰러진 륜의 위로 몸을 숙였기 때문이다.
“가까이 오지 마!”
선지자는 마치 사냥감을 밟고 선 야수처럼 두 손으로 륜의 가슴을 짚은 채 사나운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티나한이 철창을 움켜쥐며 케이건을 슬쩍 훔쳐보았다. 케이건은 티나한의 눈빛을 거의 정확하게 읽었다. ‘할까?’ 케이건은 고개를 조금 가로저었다. 선지자는 몹시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나가라고? 나가라고? 똑똑히 봐라, 이놈들아!”
선지자는 륜의 피부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비형은 뒤로 돌아서 구역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주저앉아 있던 토디도 고개를 돌렸다. 이미 분리되어 있던 허물은 쉽게 떨어졌지만 아직 채 분리되지 않은 허물은 핏방울을 튀기며 뜯겨졌다. 그렇게 생살이 뜯겨 나올 때마다 륜의 몸도 들썩거렸다. 마치 산 채로 사람을 찢는 형국이었다. 티나한은 다시 애타는 눈으로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할까? 하게 해줘!’ 하지만 케이건은 절대로 고개를 세로젓지 않았다. 케이건은 팔짱을 낀 채 륜의 허물을 잡아뜯는 선지자를 냉정히 바라보기만 했다.
마침내 대부분의 허물을 찢어낸 선지자는 두 손에 허물 조각을 꽉 움켜쥔 채 두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눈이 있다면 봐라, 이게 나가냐!”
토디는 질린 눈으로 선지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무릎 앞에 있는 것은 군데군데 살점이 뜯겨져 나가고 붉은 피에 젖어 있었지만 분명 인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가였다. 토디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 선지자!”
선지자는 고개를 홱 돌려 토디를 바라보았다. 잔뜩 치켜뜬 그 눈에는 기괴한 빛이 일렁거렸다.
“보소서, 폐하! 왕비 마마이십니다!”
토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아냐…… 그건 나가야. 인간이 아니라고. 인간이 아냐!”
선지자는 울컥하는 표정으로 토디를 보다가 다시 땅에 누워 있는 륜을 보았다. 선지자는 곧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왕비 마마시잖습니까?”
“당신, 당신 미쳤군! 완전히 돌았어!”
선지자는 무릎을 꿇은 채 토디에게 기어갔다.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폐하! 도대체 무엇이 그 눈을 흐리고 있는 겁니까?”
선지자가 토디에게 기어가자 케이건은 재빨리 륜에게 다가갔다. 신음도 내지 못하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륜을 향해 케이건은 짧게 시선을 준 다음 천막의 휘장을 움켜쥐었다. 휘장이 북 찢어졌고, 케이건은 그것으로 륜의 몸을 덮었다. 그동안에도 선지자는 계속 토디에게 기어갔다.
“폐하, 폐하! 어찌해서 하늘이 내려주신 폐하의 짝을 못 알아보신단 말입니까!”
“가까이 오지 마!”
“폐하, 제발……!”
선지자는 갑자기 기어가는 것을 멈추고는 허리를 세웠다.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그 손에는 조금 전 뜯어낸 륜의 허물이 아직까지 쥐어져 있었다. 오른손에 쥐어진 얼굴 부분의 허물은 섬뜩하게도 일그러진 웃음으로 선지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지자는 노성을 내질렀다.
“고얀! 이것 때문이군!”
“이봐, 뭐 하는 거냐!”
휘장으로 감싼 륜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던 케이건은 갑작스러운 티나한의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선지자는 병사들을 감금하고 있던 불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걸 태워야 해! 이 저주받을 마법이 폐하의 눈을 가리고 있는 거야!”
선지자는 불길에 허물을 집어넣었다.
“사특한 마법아, 물러가라!”
허물이 화르르 불타며 불티가 튀어 올랐다. 동풍은 그 불 붙은 허물을 낚아채어서는 선지자에게 뒤집어씌웠다. 눈에 불티가 들어가자 선지자는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륜을 안고 있어서 움직일 수 없었던 케이건은 황급히 비형을 불렀다.
“비형! 불! 불을 없애시오!”
하지만 고개를 돌린 비형은 케이건의 품에 안긴 륜의 피투성이 몸을 보고는 다시 구역질을 시작했다. 케이건은 티나한을 부르려 했다. 그러나 얼굴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던 선지자는 이미 불속에 뛰어들고 말았다. 케이건에게 안겨 있던 륜마저 움찔할 정도의 소름 끼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토디는 보았다.
선지자의 펑퍼짐한 옷자락을 타고 흐르는 불꽃 외에 다른 불꽃을.
입 안에서, 귀에서, 동공 안에서, 온몸의 땀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불.
‘몸 안에서부터 타고 있어.’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기에 토디는 자신의 눈을 비볐다. 다시 눈을 떠 바라보았지만 토디는 이제 더 이상 선지자를 볼 수 없었다. 이제 그곳에 있는 것은 사람의 형상을 한 불덩이뿐이었다. 바람처럼 달려간 티나한이 욕설을 내뱉으며 선지자의 몸을 털었다. 깃털에 불이 옮겨붙어 그 자신마저 위태로운 처지에 빠졌지만 티나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지자의 몸을 덮은 불이 사라졌을 때 선지자는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티나한은 그을린 깃털과 재로 뒤덮인 채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두 눈을 가린 채 고개를 떨구었다.
두 눈을 뜨고 호흡까지 제대로 하고 있었지만, 토디는 거의 의식을 잃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머릿속은 차가웠다. 토디는 그 순간 딸을 생각했다. 뒤이어 토디는 딸이 사랑하던 피혁 가공장의 일꾼도 떠올렸다.
그리고 토디는 지극히 차가운 정신으로, 왜 딸이 일꾼과 눈이 맞았다는 추측보다 바라보기만 하는 것으로 여자를 임신시키는 뱀의 이야기가 훨씬 사실적으로 느껴졌던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잠시 후 누군가 그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토디는 고개를 돌렸다.
케이건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케이건의 두 팔에는 피투성이가 된 륜이 천에 싸여 안겨 있었다. 케이건의 무표정한 얼굴 가운데 두 눈은 묘하게 슬퍼 보였다. 토디는 그런 눈을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케이건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잔치는 모두 끝났소. 이제 집으로 돌아가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