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4장 – 왕 잡아먹는 괴물 (11)
병사들에게 지급했던 무기와 옷가지 전부를 그대로 넘겨주고 거기에 자신의 남은 돈까지 모두 나눠준 토디가 마지막으로 처리한 것은 발 달린 뱀이 담긴 목함이었다. 토디는 병사가 가져온 목함을 받아들고는 잠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곤 그것을 뒤집었다.
뱀 사체는 힘없이 떨어졌다. 토디는 그것을 발로 밟아 뭉개 버렸다. 그동안 그의 눈에선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뱀의 사체를 형체도 없이 뭉개 놓은 다음, 토디는 눈물을 닦아내고는 목함을 가져온 병사에게 목함을 건넸다.
“비단으로 감을 댄 것이고 함 자체도 좋은 것이다. 비싸게 팔 수 있을 거야.”
병사는 감사의 말을 하며 목함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토디가 뭉개어 놓은 뱀에 향해 있었다. 약삭빠른 그 병사는 귀한 구경거리가 될 수 있고 어쩌면 비싸게 팔 수도 있는 그 기형 뱀이 더 탐났다는 기색이었다. 토디는 그런 병사의 속내를 뻔히 짐작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토디는 고초를 겪은 륜에게 자신의 말을 선물하려 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것을 사양했다. 아픈 몸으로 승마를 새로 배우는 것은 어렵고 게다가 가산을 다 정리한 토디가 새 출발을 하려면 말이라도 한 마리 있어야 할 거라는 것이 케이건의 설명이었다. 토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말에 올라 떠났다. 병사들은 제각기 죽이 맞는 자들끼리 무리를 지어 각자의 방향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케이건에게 같이 다녀도 되겠느냐며 다가왔다.
“당신들 꽤 세더군요. 뭔가 큰일을 하는 것 같은데, 우리도 한 다리 끼고 싶소.”
“우리는 지금 대사원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소. 당신들을 받아 줄 수 없소.”
“장차라도 뭔가 큰일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나도 칼 한 자루는 제대로 쓸 줄 알아요. 어, 혹시 당신들 중 누가 왕이 될 생각은 없소? 내가 보기엔 당신들은 가능할 것 같은데. 당신들은 오가다 만나는 그런 잡놈들하고는 뭔가 근본부터가 다른 사람들 같다고.”
“아무래도 어렵겠소.”
“어이, 씨. 되게 깐깐하게 구네. 한 다리 끼자니까. 사나이들끼리 배포가 맞으면 함께 다닐 수도 있고 뭐 그런 거 아니오.”
케이건은 끝까지 조용한 어투로 달래어 그들을 돌려보냈다. 하지만 비형이 보기에 그들이 물러나기로 결심한 데에는 옆에서 눈을 부라리기 시작한 티나한의 영향이 더 큰 것 같았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미적거리던 자들까지 모두 떠나자 비형은 턱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아무도 도와주겠다고 하지 않는군요. 결국 우리 일인가요?”
“우리가 합시다. 당신의 딱정벌레도 도움이 될 거요.”
비형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나늬에게 땅을 파도록 명령했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뽑아 들더니 별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그것으로 땅을 팠다. 그러나 티나한은 자신의 철창으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맨손으로 땅을 팠다. 륜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세 사람은 큼직한 구덩이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쯤 해도 떠올랐다.
비형이 물러나 등을 돌리고 있는 동안 케이건이 조심스럽게 선지자의 사체를 구덩이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케이건과 티나한은 구덩이를 덮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잠시 무덤 옆에 섰다. 일출이 만들어내는 길다란 그림자들이 무덤 위를 덮었다. 티나한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망할 자식. 내가 복수해 주기도 전에 죽고 말았어. 어쨌든, 무슨 말 한마디 해야 하는 거 아냐? 케이건 네가 해 봐.”
“별로 하고픈 말이 없소. 관두도록 합시다.”
그리고 케이건은 몸을 돌렸다. 비형과 티나한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무덤을 향해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무덤을 떠났다.
토디 시노크와 다른 병사들이 떠난 지 한참 지난 시간이었지만 워낙 넓은 평야인지라 아직까지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케이건은 토디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형은 그 뒤로 슬쩍 다가갔다. 그리고 한동안 케이건과 함께 토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말을 탄 토디는 가장 멀리까지 가 있었다. 이젠 조그마한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비형은 흙 묻은 바지를 툭툭 털며 말했다.
“케이건. 어제 당신이 했던 질문 제가 해도 될까요?”
케이건은 고개만 조금 돌려 비형을 보았다가 다시 토디를 바라보았다. 비형은 그것이 승낙일 거라 생각하고는 말했다.
“왕이 도대체 뭐죠?”
케이건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비형은 옆으로 다가온 나늬의 뿔을 쓰다듬으며 계속 말했다.
“성주, 영주, 마립간, 추장, 족장.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이끄는 사람들이 있죠. 하지만 왕은 없어요. 왕이 되겠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만 있을 뿐. 뭐, 꽤 큰 도시를 차지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물론 오래 못 갔지만. 저는 그 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은 야망이 남보다 큰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야심이라고 하던가요? 아니, 지배욕인가?”
케이건은 묵묵히 비형의 말을 듣고 있었다. 비형은 고개를 죽 돌려 사방으로 멀어지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뭐, 어쨌든 그게 제 단순한 생각이었죠. 왕이 되려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은 자들이라는 거죠. 하지만 그렇지가 않더군요. 아주 당연한 건데,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어요. 왕이 되려는 자들은 그에게 지배당하고 싶은 자들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그 지배당하고 싶은 사람들이 중요한 거죠. 그에 비하면 왕이 되려는 사람들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도 그래서 토디 씨를 건너뛰어 선지자를 상대한 거죠?”
케이건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비형은 계속 말했다.
“예.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마음이 아무리 커도 아무도 그를 왕으로 여기지 않으면 그렇게 세상을 떠돌아다닐 수는 없는 거죠. 누군가가 있어야 해요. 그를 왕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이. 그래야만 그는 모든 걸 버리고 그렇게 떠돌아다닐 수 있죠. 그렇다면, 왕은 도대체 뭐죠?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왕은 왕이 되고 싶어하는 저 제왕병 환자들의 목표인가요, 아니면 그 제왕병 환자를 왕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자들의 목표인가요?”
“눈물을 마시는 새요.”
“네?”
토디의 모습이 지평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케이건은 그 지평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왕은 눈물을 마시는 새요. 가장 화려하고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빨리 죽소.”
“왕이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시는 사람인가요?”
“저 토디 시노크는 이제 선지자가 흘리던 눈물을 받아먹지 않아도 되니 살아남을 수 있을 거요.”
비형은 알 듯 모를 듯하다는 표정으로 케이건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 토디의 모습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케이건은 몸을 돌려 륜에게 걸어갔다.
륜은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어젯밤 케이건이 천막의 천을 찢어 그의 몸에 난 상처들을 싸매어 주고 옷을 입혀주는 동안 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륜은 입도 벙긋하지 않은 채 땅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케이건은 그런 륜을 보다가 그대로 그의 곁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러고는 자신의 짐과 함께 놓아둔 여우를 집어 들었다.
주둥이와 네 다리가 모두 묶인 채 긴 시간 동안 내버려두었기에 여우는 케이건의 손이 닿아도 요동치지 않았다. 케이건은 그것을 어깨에 맨 채 다시 륜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그것을 륜의 앞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륜은 여우를 쳐다보는 대신 계속 땅만 바라보았다.
“허물을 다 벗었으니 뭘 좀 먹어야 하겠지. 그걸 먹어라. 지금 먹지 않으면 곧 죽어 버릴 거다.”
륜은 대답하지 않았다. 케이건은 여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강제로 먹이고 싶진 않다.”
륜이 갑작스럽게 말했다.
“어젯밤, 제 니름을 들으셨나요?”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인간이야. 니르는 걸 듣는 재주는 없다.”
“저 인간이 제 허물을 쥐어뜯을 때, 제가 니르는 니름을 못 들으셨나요?”
“듣지 못했다. 뭐라고 닐렀는데?”
“죽게 내버려두라고 닐렀어요.”
“그랬나.”
“들으신 줄 알았어요. 그 인간이 저를 쥐어뜯을 때도 가만히 내버려두시기에.”
“그런 건 아냐. 허물은 거의 다 벗겨지고 있었다. 물론 몇 군데는 아직 벗겨지지 않아서 상처가 생겼지만, 너희들은 어차피 흉터에 신경 쓰지 않잖나.”
“흉터?”
“네 피부에 남은 상처 자국을 말하는 거다.”
륜의 비늘들이 듣기 거북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나가에 대한 케이건의 지식에 비춰 볼 때 그것은 부끄러워하는 동작이었다. 케이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너처럼 적출하지 않은 나가도 다음 허물을 벗을 때 그 흉터들이 모두 사라지겠지. 그래서 상처쯤 생겨도 상관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섣불리 너를 구하려다가 그 선지자를 자극하게 되는 것이 더 위험했었다.”
륜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다음에 허물을 벗을 때도 저는 이곳에 있겠죠?”
“이곳?”
“북부요. 저는 이제 다시는 남쪽으로 갈 수 없는 것이죠?”
“심장을 적출하지 않았으니 내려가면 죽겠지.”
“나가가 이 땅에서 살 수 있나요?”
“몹시 힘들지.”
“저는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너는 그걸 감수하고 온 것일 텐데.”
륜은 다시 침묵했다. 여우가 죽어가는 것을 의식한 케이건이 다시 그를 다그쳤을 때 륜은 내뱉듯 말했다.
“저는 친구 대신 온 겁니다.”
케이건의 눈이 커졌다. 그들의 곁에 다가와 있던 티나한과 비형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륜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륜을 응시하며 말했다.
“설명해 봐.”
륜은 지금껏 다른 종족에게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라 여겼기에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를 모두 꺼내 놓았다. 륜은 고개를 숙인 채 친구 화리트와 그의 죽음, 그리고 자신이 그 일을 대신 맡게 된 사정을 모두 설명했다. 비아스 마케로우라는 나가가 자신의 남동생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어서 몇 번이나 되물었던 비형은 결국 나가 여인들은 모두 남동생 죽이기를 보람차고 유익한 취미 생활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비형은 친누나에게 쫓기는 륜에게 그걸 물어보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륜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 누나가 왜 너를 쫓는 건지 짐작되는군.”
“네. 심장을 적출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아냐.”
“네?”
륜은 놀란 표정으로 케이건을 올려다보았다. 케이건은 그 얼굴을 향해 말했다.
“이제 바라보는군. 어쨌든 네 추측은 틀렸다. 너희 나가 남자들은 정말 너희 사회에 대해 잘 모르는군. 하긴 참여할 일이 없으니. 쇼자인테쉬크톨은 가문에 부과되는 핏값이다. 심장을 적출하지 않은 남자를 처리하는 데 그런 방법을 쓰진 않아. 너는 화리트 마케로우의 살해 혐의를 덮어쓴 거야.”
륜은 경악했다.
“어, 어떻게 제가? 제가 왜 친구를 죽인단 말입니까? 그럴 수는 없어요!”
“하지만 너는 현장에서 도망친 유일한 사람이지. 의심받는 것이 당연해.”
“어떻게 그런……, 그래서?”
“그래. 페이 가문의 일원인 네가 마케로우 가문의 일원인 화리트를 죽인 셈이니, 마케로우 가문으로서는 쇼자인테쉬크톨을 요구할 수 있게 된 거다. 물론 남자들끼리의 일에 가문의 해결책을 쓴 건 좀 이상하다만, 아마도 너와 화리트 모두 심장을 적출하기 전에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둘 모두 각자의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그래서 마케로우 가문에서는 너희 누나를 암살자로 지명했을 테지. 아마도, 이 모든 일 또한 그 비아스 마케로우라는 여자의 획책일 것이다. 자기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그랬겠지.”
륜은 충격 속에서 말을 잊었다. 그가 다시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을 때 그것은 니름이었다. 당연히 케이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륜은 당황하며 말로 바꿨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이상한 질문이군. 물론 추측이야. 하지만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는군.”
륜은 그제야 의문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사모에게서 쇼자인테쉬크톨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륜은 화리트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륜은 눈앞에서 비아스가 화리트를 죽이는 것을 목격했다. 또한 륜과 화리트가 둘도 없는 친구임은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런 상황에서 륜은 자신이 살해의 죄를 덮어쓸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륜이 두려워한 것은 자신이 심장을 적출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었다.
“니름도 안 돼……. 이건 니름도 안 돼.”
“니름도 안 되고 말도 안 되겠지만, 어쨌든 너는 네 친구의 유지를 따를 각오를 했겠지. 그러니 어서 먹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
“제기랄, 그 입 좀 닥쳐요!”
케이건은 륜의 패악스러운 외침에 입을 다물었다. 륜은 비늘을 곤두세우며 외쳤다.
“제 누님이 저를 죽이려 하고 있어요! 그것도 제가 짓지도 않은 죄 때문에! 이 상황에서 먹고 기운 내라는 말을 하는 건가요!”
물끄러미 륜을 바라보던 케이건은 손가락을 세 개 펴 보였다.
“세 가지만 말하겠다.”
륜은 사나운 눈으로 케이건을 쏘아보았다. 케이건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직이 말했다.
“첫째, 나와 네 주위에 있는 다른 두 명은 네가 말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때문에 너는 네 누나에게 죽임당하지 않고 이곳까지 왔다. 네 누나 또한 아직 너를 죽이지 못했고, 둘째, 네 친구가 마지막에 원한 것은 자신의 살해자가 처벌되는 것이 아니라 사명이 완수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너는 비아스 마케로우의 죄상이 밝혀지는 것보다 친구가 위임한 사명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셋째가 가장 중요하지.”
“……그게 뭐죠?”
“빨리 안 먹으면 저 여우 죽는다.”
비형이 킥 하는 소리를 내었다. 얼빠진 눈으로 케이건을 바라보던 륜도 끝내 미소를 짓고 말았다. 케이건은 웃지도 않으며 말했다.
“네가 이 땅에서 겪어야 할 고통에 대해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알겠다. 네가 평안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땅에 돌아갈 수 없는 사정도, 그리고 너와 네 누나의 비극도 이해했다. 그래서 어쩔 테냐. 저것을 먹고 우리와 함께 걸어갈 테냐? 이곳에 주저앉아 네 모든 비극을 향해 저주를 퍼부을 테냐? 이도 저도 싫다면 남쪽으로 돌아가 네 누나의 칼날에 목을 내어줄 테냐? 나는 선택이 쉬울 거라고 본다. 륜 페이. 네 선택은 무엇이지?”
륜은 일어나 여우를 먹었다. 그리고 그날, 일행은 황야를 벗어나 산맥으로 접어들었다. 그날 일어났던 유일한 사건은 비형이 한 가지 발견을 한 것뿐이었다. 비형은 여우 한 마리를 산 채로 삼키는 륜이 남자들에게 알몸을 보인 것을 창피스러워 한다는 사실에 몹시 재미있어 했고 그 사실을 가지고 계속 농담을 하여 륜을 거의 울 뻔하게 만들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토디 시노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말을 뜯어먹고 있는 대호를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대호가 다가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 토디 시노크는 그렇게밖에 판단할 수 없었다. 대호는 일격에 말의 두개골을 부수어 버렸다. 토디는 안장과 함께 공중을 한참 동안 날아간 다음에야 겨우 땅과의 극적인 조우를 성립시킬 수 있었다.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에도 토디는 차마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하지만 비명을 질렀더라도 별 상관은 없었을 것이다. 대호는 토디를 완전히 무시한 채 말을 뜯어먹었다.
심장이 멎을 듯한 공포의 순간이 지나가자 토디는 말에 대한 동정심에 눈물이 왈칵 솟는 것을 느꼈다. ‘나 때문에 이런 해괴한 곳에 끌려와 그렇게 비통하게 죽는구나.’ 하지만 계속 동정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토디는 대호가 말을 뜯어먹는 동안 어떻게든 도망칠 궁리를 했다. 하지만 말의 뼈를 씹어 먹는 대호의 흉흉한 기세에 토디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심지어 토디는 다리를 덮고 있는 안장에서 발을 빼내지도 못했다. 그래서 토디는 대호에게 말이 풍족한 식사이길 애타게 기원했다. 그는 자신이 입가심거리가 되는 것을 절대로 바라지 않았다.
“저게 말이라는 건가? 재미있게 생겼군.”
토디는 기겁하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더욱 놀랐다.
그가 생전 두 번째로 보는 나가가 서 있었다. 토디는 공포에 빠진 채 나가를 바라보았다. 나가는 추운 듯 두 팔로 가슴을 감싼 채 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것 때문에 내 명령을 무시하고 이쪽으로 달려온 것이군. 배가 많이 고팠나 봐.”
어제 만났던 그 나가인가? 그러나 나가에게 익숙하지 않은 토디도 그것이 착각임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나가는 어제 만났던 륜과는 무시할 수 없는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나가는 여자였다.
그 여자 나가는 토디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사모 페이라고 한다. 보다시피 나가야. 너는 인간이지? 그런데 저게 말 맞아?”
“마, 말입니다.”
“말이 아니었어? 음. 이름이 참 기네. 말하고 친척쯤 되는 거야?”
토디는 사모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사모 페이는 토디의 다리를 덮고 있는 안장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사모는 다만 괴상하게 생긴 구속 장치 같은 것이 다리를 묶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인간이 아직 일어서지 못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모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아들었다.
토디는 마침내 진짜 쉬크톨을 보게 되었다.
“살려주세요!”
사모는 놀란 표정으로 토디를 바라보았다. 불행히도 토디에겐 나가의 표정을 분간할 정도의 식견이 없었다. 토디는 땅에 엎드리며 울부짖었다.
“뭐든 다 드리겠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사모는 토디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봐. 이미 네 말을 죽였잖아.”
사모는 그러니 다른 걸 더 받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토디는 그렇게 해석할 수 없었다.
“걸어갈 수 있습니다! 걸어갈 수 있어요! 그러니 제발 살려주세요. 가지고 있는 건 뭐든 드리겠습니다. 이건 어떻습니까? 예. 걸어가려면 짐 같은 건 필요 없죠. 그러니 다 가지세요!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이 목숨은 당신에겐 필요 없는 것이잖습니까.”
그리고 토디는 사모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자신의 배낭을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그를 제지하려던 사모는 불신자들의 물건에 약간의 호기심이 생겼기에 그냥 내버려두었다(그리고 안장을 옆으로 치워 버리는 토디를 보며 자신이 뭘 오해했음도 깨달았다.). 잠시 후 토디는 커다란 모피 한 장을 꺼내어 보였다. 페치렌의 피혁상이었던 토디는 손에 익은 솜씨로 모피를 쫙 펼쳐 보였다. 손님에게 물건의 장점을 열심히 설명하는 장사꾼의 자세 그대로였다.
“보십시오! 이 완벽한 검정색을 보십시오!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건 염색을 한 것이 아닙니다. 원래부터 검정색이었어요. 흑표범 가죽이 이렇겠습니까, 흑마 가죽이 이렇겠습니까? 이 완벽한 털을 보세요! 안목이 있으시면 아실 겁니다.”
사모는 놀란 눈으로 그 천을 바라보았다. 토디는 검은색이라고 말했지만 사모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건…….”
“그렇습니다! 이건 흑사자 가죽입니다. 만져보세요. 예! 한번 만져보세요. 어서요!”
사모는 쉬크톨을 꽂아 넣고는 그 가죽을 만져보았다. 그녀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그 가죽은 내부에서부터 발생하는 열로 따스했다.
“어떻게 이걸 가지고 있지?”
토디는 왕이 되면 망토를 만들어 입으려고 간수해 두었던 것이라고 말했고 그 설명은 사모를 혼란시켰다.
“왕? 네가 왕이 된다고?”
“미친 꿈이었죠. 나이 오십 줄에 찾아온 늦바람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탓하진 않겠습니다. 그건 제 탓이었죠. 조금만 주의 깊게 봤으면 그 중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모두 제 잘못이죠. 아가씨, 아니, 마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사람이 나이를 이렇게 먹으면 그동안 뭐하고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주 미친 짓도 하는 것이고요. 제가 바로 그랬습니다.”
토디의 설명은 당연하게도 사모를 조금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사모는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너 왕이야, 아니야?”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 알겠어. 사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꽤 좋은 것을 가지고 있군. 이걸 주고 싶다고?”
“물론 드리겠습니다!”
토디에게 그것은 새 출발을 할 밑천이었다. 그 때문에 토디는 병사들에게 모든 것을 나눠주면서도 흑사자 모피를 들킬까 봐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새 출발을 하려면 어쨌든 목숨이 붙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당연했다. 토디는 모피를 높이 들어 올리며 어서 받으라는 몸짓을 했다.
하지만 사모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허리춤을 뒤진 사모는 곧 큼직한 꾸러미를 꺼내었다. 토디의 눈이 번득였다. 그의 노련한 장사꾼의 감식안은 사모가 꺼내어 든 것이 무엇인지 곧 깨달았다. 북부에서 쓰이는 것과는 모양이 좀 달랐지만 그것은 분명히 금전 주머니였다.
“그걸 뺏을 생각은 없어. 하지만 내 마음에 드는 물건이야. 그러니 대가를 치르고 받도록 하지. 그리고 저 말에 대해서도 대가를 치르겠어.”
그동안 밀림만을 이동했기에 사모는 페이 가문을 떠났을 때 가지고 왔던 금편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모는 곧 당혹했다.
토디는, 무적왕이 아닌 토디 시노크는 분명 뼛속부터 장사꾼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냥 주겠다고 했던 일을 깨끗이 망각한 듯 토디는 흥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사모에게 흥정이라는 것은 꽤 낯선 것이었다. 대호가 말을 맛있게 뜯어먹는 동안, 사모는 지금 위협을 당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 아닌가 하는 불안한 느낌을 받으며 쩔쩔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