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4장 – 왕 잡아먹는 괴물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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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4장 – 왕 잡아먹는 괴물 (12)


이른 아침, 잠에서 깬 비형은 기지개를 켜다가 티나한의 모습을 발견했다. 티나한은 그에게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비형은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티나한은 철창을 세워 든 채 먼 곳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비형은 하품을 하며 말했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티나한. 뭘 보고 있어요?”

티나한은 아무 말 없이 손만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비형은 눈을 비빈 다음 티나한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산길 아래쪽에서 일군의 무리가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대충 봐도 쉰 명쯤 되어 보이는 그 무리는 모두 인간이었고 무장을 하고 있었다. 비형은 놀란 표정으로 티나한을 돌아보았다.

“케이건과 륜을 깨울까요?”

“아니. 놔둬.”

“네?”

티나한은 대답하지 않은 채 앞으로 걸어갔다. 비형은 어쩔 줄 몰라하다가 티나한의 뒤를 따라갔다.

티나한은 그들과의 거리가 50미터쯤 남았을 때 다시 멈춰 섰다. 산길 중간에 선 티나한은 철창을 높이 세워 든 채 그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비형은 머뭇거리며 그의 옆에 섰다.

티나한과 비형을 발견한 무리는 잠시 소동을 일으켰다. 선두에 선 자가 어떤 신호를 보내었고 그러자 무리는 멈춰선 채 경계하듯 티나한과 비형을 바라보았다. 무리는 잠시 의견 교환을 하는 듯했다. 잠시 후, 그들 가운데서 긴 수염을 기른 노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노인은 괴상하게 꼬부라진 지팡이를 짚고 있었고 그의 뒤로는 무장한 인간 두 명이 따라왔다.

티나한에게 가까이 다가온 노인은 평화로운 일로 다가왔다는 듯이 빈손을 들어 보였다. 티나한은 왼손으로 노인의 동작을 흉내 내었다. 노인은 산을 오르느라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말했다.

“안녕하시오. 여행자.”

“안녕한가.”

“나는 외눈의 예언자라는 사람이오.”

비형은 고개를 갸웃했다. 티나한 또한 의심스럽다는 듯이 노인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눈 다 있는데?”

자칭 외눈의 예언자라는 자는 그런 대답이 나올 거라는 것을 짐작했다는 듯이 우아한 동작으로 자신의 왼쪽 눈을 가리켜 보였다.

“이 왼쪽 눈은 현재를 볼 수 없소. 대신 미래와 과거를 보지. 그래서 외눈의 예언자라 하오.”

“오호. 미래와 과거를 보신다라. 그럼 당신이 저 자들의 우두머리인가?”

“아니오. 우리들을 지휘하시는 분은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노인은 공손한 자세로 손을 들어 일행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비형은 어렵잖게 노인이 가리킨 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남보다 훨씬 화려한 복장을 하고 백마에 탄 인간이 노인의 손이 자신을 가리키자마자 턱을 오만하게 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사태를 짐작한 비형은 귀찮다는 심정이 되었지만 티나한은 진지하게 질문했다.

“저 자가 누군데?”

노인은 감히 입 밖으로 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한다는 듯이 목소리를 낮췄다.

“현명왕 폐하시오.”

비형은 티나한에게 그만 돌아가자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티나한은 몹시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현명왕 폐하? 허! 그럼 왕이란 말이야?”

“조금 전 이 눈이 미래와 과거를 본다고 말씀드렸잖소? 나는 저분을 보자마자 저분의 과거, 그리고 저분의 선조들의 과거까지 모두 보았소. 그 끝에서 내가 본 분이 누군지 짐작하시겠소? 바로 영웅왕 폐하였소. 저분은 영웅왕 폐하의 55대손이오.”

티나한은 손뼉을 딱 쳤다.

“그 말 정말이야?”

노인은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세상에 그보다 더 확실한 것이 없을 만큼 분명한 진실이오. 저분은 위대한 현명왕 폐하이시오.”

“너 잘 걸렸다!”

산 위쪽에서 케이건은 천둥 같은 계명성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라기를 당겨 쥔 케이건은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산 아래쪽을 본 케이건은 더욱 놀랐다. 티나한이 그 무시무시한 철창을 머리 위로 들어 빙빙 돌리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회오리가 일어날 지경이었다. 케이건이 어떻게든 그 사태를 이해해 보려 애쓰고 있을 때 다시 티나한의 노성이 들려왔다.

“제 발로 걸어오다니, 아주 잘됐다. 이 자식들아, 내가 누군 줄 아냐? 바로 왕 잡아먹는 괴물이다!”

케이건은 한숨을 내쉬곤 바라기를 도로 내려놓았다. 그러곤 애처로운 비명과 함께 인간들이 공깃돌처럼 하늘로 날아오르는 광경을 무시한 채 조용히 아침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티나한이 으스대는 목소리로 “잔치는 끝났어.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고 외칠 때도 웃음을 터뜨리는 대신 그 소동 속에서도 곤히 자고 있는 륜을 흔들어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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