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4장 – 왕 잡아먹는 괴물 (3)
키보렌의 어둠은, 딱딱한 나무 등걸을 타고 흘러내리는 이슬로 몸을 씻고 음습한 초향 속에서 태양을 향해 소리 없이 호곡하는 그 어둠은, 신록으로 자신을 뒤덮은 대지가 완강히 햇살을 거부한 채 터무니없이 긴 시간 동안 키워온 밤의 사생아였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그 그림자들을 가로질러 남에서 북으로 움직이는 륜과 구출대 일행에게 북쪽이 가까워졌음을 알려주는 단서는 하나뿐이었다. 바로 기온. 한계선이 완연히 가까워지고 있었고 륜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암살자가 아직 뒤를 따르고 있는 상황에서 케이건은 그런 느린 전진이 달갑지 않았다.
결국 케이건은 륜에게 소드락을 복용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부작용을 염려한 케이건은 소드락의 복용을 하루 한 번으로 제한했다. 륜이 소드락을 복용한 다음 17분 동안 전속력으로 달리고, 나머지 일행이 그 뒤를 따르는 식이었다. 지쳐 빠진 륜이 고립 상태에 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케이건은 가속 상태의 륜을 따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즉 티나한에게 륜을 뒤따르도록 했다.
그래서 일행의 여행은 꽤 이상한 모습이 되었다. 해가 뜰 무렵, 부족하나마 몸을 데운 륜은 소드락을 복용한 다음 티나한과 함께 무서운 속도로 북쪽을 향해 달렸다. 그 후 17분 동안의 달리기로 티나한과 륜의 하루치 여행은 끝났다. 그리고 그들은 나머지 일행을 기다렸다.
오후가 되었을 때 케이건과 비형, 그리고 나늬가 그들을 따라잡았다. 거기서 일행은 밤을 보낸 다음, 다음 날 똑같은 일을 재개하는 것이다.
비형은 소드락의 효과에 감탄하며 자신도 먹어보고 싶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운 피 생물에겐 소용이 없소. 나가와 식물에게만 쓸모가 있지.”
“식물이요?”
“원래는 나무를 위해 개발한 약이라고 알고 있소. 그런데 나가에게도 쓸모가 있었던 거지.”
케이건이 짜낸 고심 책으로 일행은 그럭저럭 높은 이동 속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북쪽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륜의 속도는 현저하게 떨어졌다. 마침내 느린 쪽 케이건과 비형, 나늬가 정오도 되지 않아서 빠른 쪽 륜과 티나한을 따라잡는 지경에 이르렀다.
케이건은 티나한과 비형에게 이미 설명했던 것을 다시 설명했다.
“한계선 근처에서 소드락의 효과는 겨우 나가의 고향에서와 똑같은 정도의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정도요. 북쪽이 상당히 가까워진 거지. 아직까지 우리에겐 좀 더운 날씨지만 륜에겐 이미 혹한의 추위인 셈이오.”
륜은 초췌한 표정으로 케이건의 말에 동의했다.
“소드락을 두 번 복용하면 어떨까요? 오전과 오후로 나눠서 말입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암살자도 쫓아오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일 테니까. 게다가 하루 두 번 복용했다가 정찰대라도 만나게 되면 세 번째를 복용해야 해. 그러면 네가 위험해져.”
티나한이 제안했다.
“내가 륜을 업고 뛰면 어떨까?”
“소드락을 먹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달리면 륜은 얼어 죽을지도 모르오. 륜은 심장을 가지고 있소. 위험을 감수하기 어렵소.”
케이건은 잠시 고민한 다음 일행의 이동 방식을 바꿨다.
“티나한 당신이 륜을 업으시오. 당신의 깃털과 체온이라면 륜이 이 추위를 견디는 데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뛰지는 말고 우리들과 함께 걷도록 합시다. 그것도 당신이 더워지지 않을 정도의 느린 속도로 걷는 거요. 조금이라도 덥다고 생각되면 즉시 말하시오.”
비형과 티나한도 어느덧 케이건이 보는 식으로 밀림을 보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열이었고 소리에 대해서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아도 좋다. 따라서 숲이 울창한 곳은 버석거리는 소리를 마음껏 내며 돌아다녀도 좋지만 숲이 듬성듬성해서 걷기 좋은 곳은 오히려 피해야 한다. 숲을 가꾸기 위해 정찰대가 몰려올 수 있으므로, 발자국이 남는 흙이나 풀밭은 마음대로 걸어도 좋지만 발자국이 남지 않는 바위나 돌은 오히려 조심해야 한다. 체온 때문에 돌이 데워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낮의 햇빛에 노출된 뜨거운 돌은 상관없다………..
그렇게 상식을 잠재우는 데 성공한 도깨비와 레콘에게 케이건의 느닷없는 선언은 충격적이었다.
“한계선을 넘었소.”
티나한은 큰 눈을 끔뻑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제나 그제 보았던 숲과 똑같은 숲이 그들 주위에 펼쳐져 있었다. 나무들은 똑같이 장대했고 더위는 여전히 짜증스러웠다. 하지만 케이건은 자신의 말을 완전히 확신하는 사람 특유의 평온한 어조로 덧붙였다.
“모두들 수고하셨소.”
티나한은 별다른 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비형은 놀란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동료들이 저지르는 무수한 멍청한 행동을 꾸짖지 않는 것만큼이나 칭찬도 하지 않았다.
비형의 시선을 받은 케이건은 문득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비형은 그 표정이 뭔가 곤란한 실수를 저지른 직후 바우 성주를 바라보는 자신의 표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표정은 곧 사라졌고 케이건은 다시 특유의 친절하면서도 건조한 어투로 설명했다.
“한계선이 측정 가능한 형태의 선인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정찰대와 조우할 가능성이 없으므로 한계선을 넘었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거요. 물론 이제부터는 이 무법지대를 애용하는 북쪽의 무뢰배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만 생각이 있는 자라면 절대로 레콘이 있는 일행에게 다가오지는 않을 거요. 그러니 더 이상 긴장하지 않아도 좋소. 비형. 륜에게 불을 지르시오.”
평온한 어조 때문에 마지막 말의 충격은 좀 늦게 찾아들었다. 티나한에게 업혀 있던 륜과 비형은 거의 동시에 비명처럼 외쳤다.
“왜요?”
그러나 케이건이 한계선을 넘은 기념으로 륜을 구워버리자는 제안을 한 것은 아니었다. 비형은 케이건의 상세한 지시에 따라 빛은 없지만 따스한 열이 있는 도깨비불을 만들어 륜의 몸에 붙였다. 륜은 다시 원기를 회복했고 자신의 발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티나한은 감탄하면서도 왜 진작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았냐고 질문했다.
케이건이 대답하기에 앞서 륜이 먼저 대답했다.
“제 몸을 덮고 있는 이 불은 당신들의 체온과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와 마찬가지잖아. 어차피 우리도 보였을 테니 너 하나 더 보여봤자 거기서 거기……………”
“잘 이해를 못 하시는군요. 제 몸 전부가 똑같은 온도인 겁니다. 당신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한 가지 색으로 이루어진 옷을 입고 숲을 걸으면 그게 얼마나 눈에 잘 띄겠습니까? 지금 제 눈에 저 자신은 그런 식으로 보입니다.”
티나한은 이해했고, 다시 케이건에게 감탄했다. 열을 볼 수 있는 륜이라면 그런 위험을 생각해 내는 것도 당연했지만 열을 보지 못하는 케이건이 그것을 짐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전 같았다면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감탄했을 비형은 입을 다문 채 케이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눈초리를 알아차린 케이건이 비형을 돌아보자 비형은 그를 외면하며 나늬의 뿔을 쓰다듬었다. 케이건은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비형 또한 케이건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계선을 넘은 그 밤, 오래간만에 편안하게 잠들 수 있게 된 티나한과 륜이 세상 모르고 곯아떨어졌을 때 비형은 모닥불 가에 앉아 있는 케이건에게 다가갔고 케이건은 조용히 그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밤의 다섯째 딸을 닮은 별들이 밤하늘을 길게 가로질렀을 때 비형은 입을 열었다.
“무사히 이곳까지 데려와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저희들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죠?”
“특별히 고생스럽다고 느낀 적은 없었소.”
“지금까지 석 달가량 봤습니다만, 정말 잡아먹으며 터득한 지식들이 대단하시더군요. 역시 양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양치기가 아니라 늑대인 겁니까?”
“아마도 양은 양치기의 지식을 더 높이 칠 거요.”
“그리고 늑대는 자신의 지식을 평가당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활용하는 데 더 관심이 있을 테고요?”
“그럴 테지.”
비형은 갑자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케이건이 피워 둔 모닥불이 거칠게 몸부림치며 솟아올랐다. 약간의 삭정이와 나뭇잎으로 피워 둔 불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불꽃이 얼굴로 다가왔지만 케이건은 무심히 비형을 바라보았다.
그 불은 뜨겁지 않았다. 비형은 동그래진 눈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물러나지 않는군요. 제가 당신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었을 뿐이라는 것을 짐작하신 겁니까? 아니면 얼굴이 불타든 말든 상관이 없는 겁니까?”
“말하고픈 바가 뭐요, 비형.”
“먼저 조금 전에 했던 질문에 대답해 주십시오. 어느 쪽입니까?”
“앞쪽이오.”
“앞쪽이라고요?”
“그렇소. 당신이 나를 태우길 원했다면 내게 곧장 불을 질렀겠지.”
비형은 반가운 표정으로 외쳤다.
“당신, 도깨비는 잡아먹지 않을 겁니다. 그렇죠?”
“그렇소. 그런데?”
“그런데도 조금 전 당신은 도깨비의 행동을 정확히 이해했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는 일을 잘 하는 겁니다. 그런 거죠? 당신은 킴이면서도 도깨비의 입장에 설 줄 아니까 도깨비의 행동을 이해해요. 그렇다면 당신이 나가에 대해 잘 아는 것은 나가를 잡아먹기 때문이 아니라……”
비형은 흠칫하며 륜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케이건은 태평했다.
“깰 염려는 하지 마시오. 듣지 못하니까.”
“아…… 역시 그래요! 당신은 나가의 입장에 설 줄 아는 거예요. 그래요. 처음 봤을 때 당신은 말했어요. 그들이 죽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안다고. 아시는 거죠?”
“알고 있소.”
비형은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저도 그랬습니다!”
“네?”
“그 두억시니 말입니다! 티나한에게 들으셨죠?”
“들었소. 당신이 불을 지르지 않았다고 화를 내더군.”
“저도 당신과 같은 이유에서 두억시니들을 태울 수 없었어요. 신을 잃어버린 그들의 슬픔이 느껴졌어요. 그들의 슬픔과 분노가 느껴지는데, 어떻게 그들을 태워버릴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죽소.”
“네?”
케이건은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비형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그의 오른손이 앞으로 나왔다. 케이건은 비형이 일으켜 놓은 불을 오른손으로 천천히 내리눌렀다. 그러자 케이건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그 어둠 속에서 케이건은 말했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느끼면 당신이 죽소.”
비형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전율했다. 두억시니들의 피라미드를 나온 이후 그가 계속해서 고민했던 것, 그 어떤 말로도 뚜렷해지지 않던 것이 한순간에 구체화되었다.
케이건은 마치 비형의 흉내를 내듯 말했다.
“그랬잖소?”
그러했다. 그 피라미드 안에서 그러했다. 맹목적 분노 앞에서 그 분노를 보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슬픔을 보았던 비형은 그러했다.
비형은 고개를 떨구었다.
케이건이 다시 말했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는 신께선 당신들에게 죽어도 죽지 않는 목숨을 줬나 보오.”
비형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신을 죽이는 신……?”
“가서 자도록 하시오. 비형. 밤이 늦었소.”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티나한은 자신이 아직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주위의 광경은 미친 군략가의 환상 속에서도 보기 힘들 만큼 초현실적이었다.
나무들은 모두 불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불이 붙어 있을 뿐 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온갖 빛깔의 불들이 나무 주위에 어른거리고 있었고 그 때문에 나무들은 투명한 보석처럼 보였다. 나뭇가지들 사이로는 극광과도 같은 불의 너울들이 드리워져 있었고 불꽃의 날개를 단 조그마한 딱정벌레, 풍뎅이, 사슴벌레, 하늘소 등이 너울 사이를 헤치듯 날아다니고 있었다.
손가락만 한 조그만 딱정벌레들은 모두 색깔과 형태가 달랐고 제각기 다른 기수를 태우고 있었다. 도깨비나 레콘, 인간, 나가로 보이는 기수들도 군데군데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별이 담긴 유리 항아리, 회전하는 번개, 사슴뿔이 달린 새 같은 기묘한 것들이었다.
그중 장관인 것은 티끌만 한 크기의 건물들로 이루어진 정교한 도시를 등에 태우고 날아다니는 딱정벌레였다. 티나한은 그 모습에서 하늘치를 떠올리곤 잠시 가슴이 벅차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티나한은 곧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았고 얼마 있지 않아 그 만화경 같은 풍경 가운데 정좌해 있는 비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비형을 발견했을 때 비형은 두 손을 얼굴 앞에 모아 쥐고 있었다. 두 손이 펼쳐지자 그 안에서 조그마한 딱정벌레가 날아올랐다. 그 딱정벌레가 등에 싣고 있는 것은 꽃잎으로 만들어진 병이었고, 그 속에는 유리로 만들어진 꽃이 담겨 있었다.
티나한이 어이없어하고 있을 때 륜의 감탄이 들려왔다.
“화로가 식겠군요.”
륜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형은 색깔뿐만이 아니라 온도에서도 다채로운 변화를 주고 있었다. 티나한과는 좀 다른 광경을 보고 있었지만 륜이 보고 있는 것 또한 상상하기 힘들 만큼 초월적인 모습이었다.
그때 두 사람의 인기척을 눈치챈 비형이 고개를 돌렸다. 비형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지금 꾸는 것 같아.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지?”
티나한의 질문에 비형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한 잔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술이 없어서요. 어때요. 취한 것 같은 풍경 아닌가요?”
티나한은 고개를 갸웃하며 왜 술 마시고 싶은 기분인지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때 술이 뭔지 알 수 없었던 륜이 먼저 질문했다.
“술이 뭔데요?”
비형의 대답은 륜을 당혹시켰다.
“차가운 불입니다. 거기에 달을 담아 마시지요. 그런데 당신들에겐 술이 없나요?”
“아마 없나 봅니다. 그게 뭔지 상상도 안 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