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4장 – 왕 잡아먹는 괴물 (4)
그날 아침, 식사가 끝나고 다시 일행이 여행을 재개하려 했을 때 케이건은 일행을 멈춰 세웠다.
“비형. 나늬에 륜을 태우고 대사원으로 가시오.”
일행은 놀란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티나한이 말했다.
“어, 그럴 필요가 있어?”
“한계선 이남에서는 정찰 대원의 주목을 끄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땅으로 걸어왔지만, 이제 한계선을 넘은 상황에서 괜히 늑장을 부릴 필요는 없소. 대사원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은 륜이오. 그러니 티나한 당신은 좀 천천히 걸어가도 괜찮을 거요. 물론 당신이 마음먹고 달린다면 그리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겠지.”
“응? 그럼, 너는?”
“나는 가지 않소.”
비형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가지 않는다고요?”
“그렇소. 당신이 륜을 태우고 하늘로 날아간다면 나는 더 이상 필요 없을 거요. 여러분들을 데리고 키보렌에 들어갔다가 다시 무사히 나온 걸로 내 일은 끝난 것 같소. 그러니 나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오.”
“하지만, 대사원으로 가서 사례를 받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사례?”
“어, 즈믄누리는 이 일에 저를 파견하는 대가로 대사원으로부터 금편 200개를 받기로 했습니다. 티나한 당신도 하늘치 유적 발굴에 필요한 지원을 받기로 했죠?”
티나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말했다.
“나는 사례 때문에 이 일을 한 게 아니오. 나가를 제외한 자들 중 키보렌과 나가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한 거요. 그리고 대사원에는 약간의 빚 비슷한 것도 있고. 그 때문에 나는 이 일에 참여했소. 그러니 나는 받을 사례가 없소.”
“하지만, 어, 당신의 일은 대사원까지 륜을 데려다주는 일이잖습니까? 여기는 아직 대사원이 아닌데요?”
“딱정벌레에는 두 사람까지만 탈 수 있잖소.”
비형은 우물쭈물하며 티나한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티나한 또한 할 말이 없었다. 케이건의 말은, 그들이 지난 석 달 동안 들어왔던 그의 말과 마찬가지로 반대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말이었다. 비형이 륜을 태우고 날아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륜을 목적지에 데려다주는 방법이었다. 그 비행에 케이건은 필요가 없었다.
케이건은 다른 사람들이 반대하지 않을 것을 안다는 듯이 자신의 짐을 챙겨 들었다. 배낭을 매고 바라기를 등에 건 케이건은 일행을 빠르게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비형의 얼굴이었다. 비형은 울 듯한 얼굴을 한 채 케이건을 보고 있었다.
짧게 한숨을 쉰 다음 케이건은 말했다.
“헤어지기 전에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고 싶소. 비형. 키탈저 사냥꾼들의 옛이야기요. 괜찮겠소?”
“예? 아, 무슨 이야기죠?”
“네 마리의 형제 새가 있소. 네 형제의 식성은 모두 달랐소. 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 독약을 마시는 새, 그리고 눈물을 마시는 새가 있었소. 그중 가장 오래 사는 것은 피를 마시는 새요. 가장 빨리 죽는 새는 뭐겠소?”
“독약을 마시는 새!”
고함을 지른 티나한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자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물을 마시는 새요.”
티나한은 벼슬을 곤두세웠고 륜은 살짝 웃었다. 피라는 말에 진저리를 치던 비형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시면 죽는 겁니까?”
“그렇소.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사는 건, 몸 밖으로 절대로 흘리고 싶어 하지 않는 귀중한 것을 마시기 때문이지. 반대로 눈물은 몸 밖으로 흘려보내는 거요. 얼마나 몸에 해로우면 몸 밖으로 흘려보내겠소? 그런 해로운 것을 마시면 오래 못 사는 것이 당연하오. 하지만.”
“하지만?”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하더군.”
륜과 티나한은 알 듯 모를 듯하다는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비형은 환한 표정이 되었다. 그 밝은 얼굴을 보며 케이건은 그대로 작별 인사까지 해치웠다.
“잘 가시오.”
일행은 당황하여 허둥거렸지만 케이건은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간격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들이 뭔가 그럴듯한 인사말을 떠올렸을 때 케이건은 이미 소리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구릉을 넘는 케이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비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티나한은 투덜거렸다.
“원 참. 귀찮은 녀석들 겨우 떨쳐내니 속 시원하다는 투로군. 뒤도 안 돌아보고 내빼냐?”
그러나 륜과 비형은 티나한의 말에 동감하지 않았고 티나한조차도 자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지난 석 달 동안 케이건은 단 한 번도 그들을 귀찮아하지 않았다. 인내심만으로 그 긴 시간을 참아 넘기긴 어려웠을 것이다.
티나한은 결국 솔직하게 말했다.
“쳇. 헤어지니까 섭섭하네. 녀석이 모든 걸 신경 써 줄 때는 마음이 탁 놓였는데, 막상 떠나고 나니 키보렌에 있을 때보다 더 불안하군.”
비형은 빙긋 웃으며 나늬를 향해 손짓했다.
“또 만날 수 있겠죠?”
“그럴 거야. 반드시.”
티나한은 그럴 거라고 믿었다. 생각할수록 티나한은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는 강한 확신을 느꼈다.
뛰는 것에 가까운 속도로 일행과 멀어진 케이건은 구릉 하나를 완전히 넘은 후에야 걸음을 조금 늦췄다.
일은 끝났다. 하인샤 대사원이 벌이는 온갖 이상한 일들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덧붙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케이건 또한 그들에게 설명을 요구한 적은 없다. 가끔 그 승려들이 세상에서 오직 케이건만이 할 수 있는 임무를 요청할 때도, 케이건은 그들이 임무의 중요성을 잘 설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임무이기에 그것을 수락했다.
그 오랜 봉사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덧붙인 지금, 케이건은 만족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행한 일에 만족감을 느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또다시 승려들이 그를 불러야만 하는 일이 생길 때까지, 케이건은 카라보라의 오두막을 보살피며 나가들을 요리하는 나날을 평화롭게 보낼 것이다.
목가적 살육의 나날.
케이건은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풍경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본 케이건은 자신이 걸음을 멈췄음을 깨달았다. 케이건은 자신의 발을 가만히 내려다본 채 그렇게 서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살지. 누구도 내놓고 싶지 않은 귀중한 것을 마시니. 하지만 그 피비린내 때문에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아.”
케이건은 허리를 낮추며 바라기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핏발 선 야수의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케이건은 조금 전 들려온 목소리가 자신의 목소리임을 깨닫고는 어이없는 기분을 느꼈다. 똑바로 선 케이건은 칼자루를 놓은 다음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 도깨비에게 괜한 말을 했군.”
이름이 뭐더라?
케이건은 도깨비와 레콘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가 당황한 것은 오히려 륜의 이름이 아직까지 잊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요스비 때문일 것이다.
요스비의 아들이라고 했다. 미친놈!
“내가 요스비의 아들이야! 이 빌어먹을 자식아, 네가 요스비에게 받은 건 어쩔 수 없이 흘려야 했던 몇 방울의 체액뿐이다. 그런 주제에 아버지라고? 나는 요스비의 왼팔을 먹었다!”
케이건은 광포하게 걸음을 뗐다. 마치 그러면 빨리 륜의 이름을 잊을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륜의 이름은 도통 지워지지 않았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뽑아 륜의 이름이 담긴 머리의 일부분을 잘라내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내가 요스비의 아들이다!
“내 아버지들은…….”
케이건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바라기를 뽑아들었다. 그러나 이미 무릎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케이건은 바라기로 땅을 짚으려 했으나 쌍신검은 옆으로 미끄러졌다. 케이건은 무릎과 턱을 호되게 부딪히며 땅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의 손을 벗어난 바라기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이어 쓰러졌다.
케이건은 땅에 볼을 댄 채 바라기를 바라보았다. 볼이 쓰라렸지만 무시했다. 잠시 후, 케이건은 피식 웃었다. 입김에 휘말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케이건, 이 얼간이 자식아.”
“케이건, 이 멍청한 녀석아.”
“케이건…….”
내 이름이 뭐더라.
“케이건? 거기서 뭐해요?”
케이건은 눈을 떴다. 그제야 케이건은 자신이 기절했음을 깨달았다. 땅을 짚으며 일어난 케이건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도깨비가 걸어오고 있었다.
‘비형 스라블이야.’ 기억이 마구 떠올라 케이건은 현기증을 느꼈다. ‘나늬라는 이름의 딱정벌레를 가지고 있는’ 케이건은 비틀거리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오, 이런 빌어먹을. 잊어먹지 않았던 건가?” 케이건은 겁에 질렸다. ‘설마 다른 것들도?”
“케이건, 괜찮아요?”
‘정말 걱정스러운 듯이 묻고 있어.’ 케이건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데 저 표정은 즐거워하는 것도 같군. 이상해. 걱정스러운 건데, 동시에 즐거운 거야. 비웃는 건가?” 아니었다. ‘그럼, 다시 만나서 즐겁다는 거야?”
비형이 말했다.
“다치신 모양이군요. 이거, 기뻐해야 될지 슬퍼해야 될지 모르겠는데요?”
“다치지 않았소. 그런데 기뻐할 이유는 뭐요?”
비형은 큼직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멀리 가기 전에 따라잡았으니까요. 이제 왜 따라왔냐고 물으실 거죠?”
“묻겠소.”
비형은 두 팔을 옆으로 쫙 펼쳐 비극적으로 말했다.
“나늬가 륜을 태우지 않아요! 어쩌면 좋죠?”
말투와는 달리 비형의 얼굴은 즐거워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