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4장 – 왕 잡아먹는 괴물 (9)

랜덤 이미지

눈물을 마시는 새 : 4장 – 왕 잡아먹는 괴물 (9)


케이건과 비형, 티나한, 그리고 나늬가 떠난 후 몇 시간쯤 지났을 때 또 다른 방랑자가 남쪽에서부터 높새바람 탑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방랑자는 익숙하지 않은 황야의 냄새에 불안한 듯 코를 벌렁거렸다. 내딛는 발마다 피어오르는 황야의 살비듬 같은 먼지들도 방랑자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였다. 하지만 가벼우면서도 굳건한 발 디딤 어디에도 그 불안은 나타나지 않았다. 감정의 가장 깊은 부분에서부터 방랑자는 불안을 표현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방랑자는 자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에 대해 타인의 찬성을 요구해 본 적은 없었다. 저등한 자들의 동의는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모욕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토록 위대했기에 방랑자는 자신의 불안을 인정하지 않았다. 절구통보다 더 큰 머리에서부터 웬만한 인간의 허벅지보다 더 굵은 꼬리에 이르기까지 보이는 것이라곤 제왕다운 위엄뿐이었다. 그렇게 대호는 늠름하게 황야를 가로질렀다.

대호에겐 이름이 없었다. 오래 전, 키탈저 사냥꾼들은 가장 무서운 대호들에게 존경을 담아 이름을 붙여주었다. 무라 마립간의 애마를 입에 문 채 성벽을 뛰어넘었다는 저 위대한 별비 같은 대호가 그러했다. 밤하늘을 뛰면 별이 다 사라진다 하여 그 거대한 대호에게 ‘별을 쓸어내는 빗자루’라는 의미의 이름을 붙여준 키탈저 사냥꾼들은, 만약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이 위풍당당한 대호에게도 그들 특유의 작명 감각을 발휘하고 싶어할 듯하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지상에 없었다. 그리고 대호는 자신의 이름을 짓지는 않았다. 문득 대호는 이름을 가지면 어떨까 생각하며 자신의 등에 실린 나가를 흘끔 돌아보았다.

나가는 대호의 등에 엎드린 채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대호는 자신이 이름을 가진다면 그 나가에게서 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무너진 탑이 가까워졌다. 높새바람 탑을 바라보던 대호는 그 주위를 감도는 온갖 냄새에 놀랐다. 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대호는 귀를 뒤로 젖힌 채 철사 같은 수염을 곤두세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대호는 그들이 이곳을 떠났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냄새가 배인 곳에는 다시 사람들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대호는 탑을 피하고 싶었다. 냄새들 중에는 곤란하게도 레콘의 것도 있었다.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대호였지만, 레콘만큼은 꺼림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대호는 등 위에 실려 있는 나가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대호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탑 안쪽에 들어섰다.

천장이 없어 하늘이 보였지만, 탑은 동풍을 막아주었다. 탑 가운데 선 대호는 뒷다리를 구부려 앉았다. 그러자 등 위에 실려 있던 나가는 스르륵 미끄러져 땅에 처박혔다. 대호는 불안한 듯 끙끙거리며 나가의 목을 가볍게 물려 했다. 새끼를 운반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나가의 목 주위 피부는 대호 새끼의 그것처럼 유연하지 못했다. 대호는 조금 고민하다가 앞발을 서투르게 놀려 나가를 뒤집어 놓았다. 나가는 팔다리를 맥없이 던지며 똑바로 누웠다. 시체 같은 모습이었다.

대호는 나가 옆에 몸을 바싹 붙인 채 옆으로 누웠다. 그리고 큼직한 왼쪽 앞다리를 조심스럽게 나가의 몸 위에 얹었다. 앞다리 하나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나가의 몸 대부분을 덮을 수 있었다.

반 시간 가까이, 대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람을 막아주는 탑 안에서 반 시간 동안 대호의 체온을 전달 받자 나가는 마침내 눈을 떴다. 의식은 아직 불분명했지만 나가는 무시무시한 추위에 본능적으로 대호의 품을 파고들었다. 대호는 나가가 그러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다시 얼마 후, 마침내 나가는 완전한 의식을 회복했다. 잠깐 동안 나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지 못해 어리둥절해했다. 심지어 나가는 자신이 누군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가는 추위에 너무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하며 조바심내지 않은 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마침내 나가는 자신이 사모 페이임을, 그리고 자신이 길이가 몇 뼘씩 되는 대호의 털 속에 몸을 깊이 파묻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모는 미소 지으며 일어나 앉았다. 두 다리를 대호의 배 밑으로 밀어 넣으며 사모는 대호의 허리에 머리를 얹었다. 그 자세에서 고개를 돌린 사모는 대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대호.>

이름을 듣지 못하는 대호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사모는 똑같은 말을 육성으로 말했고, 그러자 옆으로 누워 있던 대호는 고개를 조금 들어 사모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땅바닥에 머리를 뉘였다. 사모는 빙긋 웃고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무너진 탑 안쪽에 앉아 있음을 깨달은 사모는 밖으로 나가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뿐, 그녀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지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간 그대로 기절해 버릴 것이다. 오늘 하루 종일 그랬던 것처럼. 대호의 털 속으로 머리와 두 팔을 파묻으며 사모는 잠깐 동안이라도 몸을 뜨겁게 할 방도가 없을까 고민했다.

<나도 너처럼 긴 털을 가지고 있으면 좋을 텐데.>

대호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사모는 지난 며칠 동안 계속해 온 고민을 다시 떠올렸다.

사모는 자신이 정말 대호를 정신 억압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키보렌의 끝자락, 넓은 초원에서 느닷없이 대호와 마주쳤을 때 사모는 그 모습에 압도되고 말았다. 대호는 코끼리 떼와 대치하고 있었다. 사모는 대호가 코끼리를 사냥할 작정임을 깨달았지만 보통의 육식 동물에게선 볼 수 없는 괴상한 모습에 놀랐다. 그 큰 체격 때문에 수풀 속에 몸을 숨긴다거나 하는 것이 불가능하긴 하겠지만, 그렇더라도 정면에 앉아서 그렇듯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일반적인 포식 동물의 모습에 비추어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더군다나 달아나지 않은 채 마주보고 있는 코끼리 떼의 모습은 더욱 이상했다.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사모가 바라보는 가운데 코끼리 가운데서 늙고 거대한 암코끼리 한 마리가 걸어 나왔다. 사모는 그 암코끼리가 무리의 지도자임을 깨달았다. 지도자가 앞으로 나오자 대호는 바로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섰다. 암코끼리가 먼저 도전의 포효를 내뿜었다. 길다란 코를 울리며 내뿜은 소리는 천지를 울릴 듯했다. 대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다만 발톱을 곤두세웠다.

두 거수(巨獸)의 투쟁은 격렬하고 비극적이었다. 하지만 사모는 그 놀라운 싸움보다 다른 코끼리들의 반응에 더욱 놀랐다. 한자리에 모여 있던 코끼리들은 싸움이 시작되자 흩어져서는 먹이를 먹기 시작했다. 암코끼리의 등에 뛰어오른 대호가 그 목을 물고 발톱을 잔뜩 세운 앞발로 코끼리의 눈을 할퀴어 마침내 암코끼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을 때도, 코끼리 무리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대호 또한 그런 코끼리들을 무시한 채 그 자리에서 암코끼리의 숨통을 끊고 그 살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마치 각자 좋아하는 음식을 앞에 두고 사이좋게 식사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사모는 사태를 깨달았다. 암코끼리는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대호는 암코끼리에게 결심을 끝낼 기회를 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힘을 합쳐 싸우면 쫓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왜 그러지 않지?>

사모는 코끼리들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코끼리들의 지혜로운 정신 속에는 꽤 쓸만한 개념들이 많았고 덕분에 사모는 어렴풋이 사정을 깨닫게 되었다.

대호의 배를 채우는 데는 한 마리의 코끼리면 충분하다. 하지만 대호와 싸우게 되면, 분노한 대호는 먹지도 않을 코끼리들을 모조리 때려눕힐 것이다. 그런 식이 되면 코끼리들은 모두 죽게 되고 대호 또한 굶어 죽게 된다. 그 무서운 포식자와 지혜로운 피식자들은 이미 오래 전에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그때 코끼리의 갈비뼈 사이에 머리를 박고 있던 대호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사모가 숨어 있는 바위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사모는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도망칠 방도를 궁리해 보았지만 그런 방법은 없었다. 주위는 개방된 초원이었고 사모는 대호보다 빨리 뛸 수 없었다. 사모는 바위 뒤로 몸을 더욱 움츠렸다.

나가인 사모가 아니었더라도 발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대호는 그토록 조용히 다가와서는 느닷없이 바위 뒤로 머리를 내밀었다. 피에 젖은 대호의 거대한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쳤을 때 사모는 엉겁결에 정신 억압을 시도했다.

대호는 그녀를 잡아먹지 않았다.

대호는 공격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았다. 엉덩이를 땅에 붙인 채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호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모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대호는 그녀의 뜻대로 움직여주었다. 그녀가 개념과 의지를 보내면 대호는 그대로 행동했다. 하지만 그런 정확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사모는 대호가 정신 억압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대호는 분명 어리석은 생물이 아니었다. 그녀가 추위 때문에 기절하여 아무런 지시를 내릴 수 없는 상황에서도 대호는 적절한 행동을 취하여 그녀를 다시 깨어나게 했다. 그런 영리한 생물을 억압하는 것은 대단히 높은 수준의 정신 억압자들에게도 벅찬 일이다. 그리고 사모의 정신 억압 능력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못 되었다. 사모가 쥐를 손질하는 데 정신 억압 능력을 사용하곤 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부엌칼로 대호를 잡은 꼴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나가들의 표현대로 몸 빠진 살로 용을 잡은 것이거나. 사모는 육성으로 질문했다.

“대호. 내가 정말 너를 정신 억압한 거니?”

대호는 여전히 머리를 옆으로 누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목을 길게 빼서 대호의 얼굴을 바라본 사모는 대호가 이미 잠들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모는 웃으며 다시 대호의 털 속으로 몸을 파묻었다. 그리고 내일의 일에 대해 걱정했다.

각오하고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한계선 북부의 추위는 사모를 놀라게 만들었다. 대호의 등에 탄 채 이동한 몇 시간은 사모를 그대로 기절시켰다. 내일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임은 분명했고, 사모는 무슨 수를 내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런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은 사모에겐 날씨를 바꾸려 시도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일로 여겨졌다. 사모는 절망감 속에서 잠들었다.


무적왕의 또 다른 이름은 토디 시노크였다. 그가 54년 동안 자신의 이름으로 여겼던 것은 사실 후자였다. 그러나 페치렌의 피혁상 토디 시노크가 영웅왕의 49대손 무적왕으로 바뀌는 데는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다. 무적왕은 이제 토디 시노크라는 이름을 거의 잊어버렸다.

무적왕은 자신의 천막을 바라보았다.

무적왕의 부대가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천막은 무적왕 자신의 천막 하나뿐이었다. 피혁을 거래하며 쌓은 재산 모두를 처분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적왕은 하나 이상의 천막을 장만할 수 없었다. 그나마도 원래 피혁상이었기에 가지고 있던 가죽을 이용하여 딸과 함께 만든 것이다. 무적왕은 ‘그날’이 오면, 그러니까 왕국을 재건하고 수도를 정하고 궁궐을 건설하게 되면 그 천막을 왕가의 보물로 간직할 소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왕손들에게 ‘이것이 내 첫 번째 궁전이었단다’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 소망에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선지자는 그것이 왕의 체통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신의 목소리를 듣는 이 성스러운 인간을 설득하는 것은 무적왕에겐 언제나 벅찬 일이었고, 그래서 무적왕은 그 소망을 내비치는 것을 되도록 삼가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이 고집 센 노인이 못 이기는 척 승낙해 주는 날이 올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지금, 무적왕은 왕손들에게 들려줄 이야기에 살을 덧붙이고 있었다. ‘바로 이 천막에서 너희 어머님은 못된 마귀가 씌워놓은 나가의 껍질을 벗으시고 인간이 되셨단다.’

무적왕은 넋을 잃은 채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왕손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딸이 못된 뱀의 아이를 낳다가 죽은 이후로 무적왕은 자손에 대한 생각을 잊을 날이 없었다. 딸을 떠올린 무적왕은 잠시 침울해졌다. 그러나 무적왕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지자는 늘상 왕은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무적왕은 그 말을 따르려 애써 왔다. 지금도 무적왕은 희망찬 생각을 떠올렸다.

‘이제 곧 왕비가 생길 것이다. 나늬 같은 미녀일 거야. 그리고 왕자와 공주가 태어나겠지. 다시 가정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거야.’

무적왕의 열성적인 노력은 성공했다. 실제로 무적왕의 입가엔 미소가 떠올랐다. 천막에서 나오던 선지자는 그 미소를 발견하고는 덩달아 웃었다.

“폐하. 소인입니다. 즐거운 생각을 하셨습니까.”

“아, 선지자인가. 천막을 보고 있자니 즐거움이 짐의 마음을 가득 채우더군. 그녀는 괜찮은가?”

“예. 지금 편히 누워 계십니다.”

“그 모습은 정말 흉하더군. 나가들은 모두 그렇게 생겼나?”

선지자는 잠시 웃었다.

“폐하. 이 북부에 사는 사람들치고 나가를 본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그 마귀가 나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저도 그것을 마귀의 일종으로 여기지 나가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럭저럭 괜찮게 생긴 생물이더군요. 어쨌든 나가 또한 선민 종족이잖습니까? 만약 나가들이 우리를 보면 우리가 물고기처럼 괴상하게 생겼다고 질색할 겁니다.”

“그런가? 하지만 짐은 그런 모습을 사랑할 수야 없을 것 같아. 언제쯤이면 그녀가 나가의 껍질을 완전히 벗고 짐에게 나늬처럼 고운 모습을 보여줄까?”

“저는 마귀들의 마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 사특한 지식들은 너무 가까이하면 필경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저는 그것을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마귀가 도망쳤고, 이렇듯 왕의 곁에 모셨으니 이제 곧 인간이 되실 거라 생각합니다. 조금 전 제가 살펴보았을 땐 이미 몸 전체에서 피부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음. 그런데 말이야. 짐이 만지니까 피부가 일어났었지. 그럼 계속 만져야 되는 것 아닐까? 저렇게 홀로 놔둘 것이 아니라?”

“아닙니다. 폐하께서 그 성스러운 손으로 그분을 일깨우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제부터는 그분 혼자서 자신의 노력으로 스스로를 찾아야 합니다. 저 사악한 발 달린 뱀이 폐하의 시험이었던 것처럼, 이것은 그분의 시험인 것입니다. 시련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무적왕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 마귀는 선지자 그대의 시험이었던가?”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말이야. 그 마귀, 괜찮을까? 어, 아버지가 생전에……”

“정의왕 폐하 말씀이십니까?”

아버지에 대해 묻는 선지자의 질문에 무적왕은 ‘절대로 남의 돈을 떼먹지 않는 분이셨다’고 대답했고, 그러자 선지자는 즉석에서 그런 멋진 이름을 지어 보였다. 무적왕은 자신의 기억력을 탓하며 말을 정정했다.

“그래. 정의왕께서 생전에 피혁을 사러 온 레콘 한 명과 크게 언쟁을 벌인 일이 있었어. 옆에서 보고 있던 짐은 젊은 혈기에 분노를 참지 못해 물동이를 가져와 그 레콘에게 퍼부으려고 했지. 그런데 정의왕은 재빨리 나를 만류하셨지. 그리고 그 레콘을 돌려보낸 다음 짐을 꾸짖으셨네. ‘레콘이 물을 제일 두려워한다고 해서 레콘에게 물을 뿌리는 것은 천하에 둘도 없는 바보짓이다. 아무 해도 끼치지 못하면서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복수자만 만들 뿐이니까.’라는 것이 정의왕의 설명이셨어. 그 말씀을 생각하다 보니 짐은 자네가 걱정스러워.”

“정의왕 폐하께선 매우 현명하신 분이셨군요. 그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아까 그것은 레콘이 아니라 마귀입니다. 진짜 레콘이라면 모를까, 그런 마귀 따위는 몇 번을 되돌아온다 해도 모두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네! 짐이 자네를 만난 것은 영웅왕의 가호일세.”

선지자는 위엄 있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운명입니다. 폐하의 운명이 저를 폐하께 이끈 것입니다.”

무적왕은 거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때 선지자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이 검 또한 폐하의 운명이십니다.”

선지자는 등 뒤에서 륜의 사이커를 꺼내어 공손히 내밀었다. 무적왕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감탄했다.

“이거, 사이커잖은가?”

“아니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폐하께 그 따님을 보내며 주신 결혼 예물입니다. 당연히 제왕에게 어울리는 검일 터, 이 검은 분명 쉬크톨일 것입니다.”

“쉬크톨!”

무적왕은 놀라며 사이커를 뽑아들었다. 만곡한 그 칼날은 밤 속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전(前) 피혁상은, 54년 동안 만져본 칼이라곤 가죽 자르는 투박한 손칼뿐임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자신 속에 숨어 있던 검사(劍士)의 본능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선지자는 머리를 조아렸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한계선 북부로는 단 한 자루도 넘어오지 않았다는 명검 쉬크톨입니다.”

무적왕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 받아 든 칼을 두 손으로 쥔 무적왕은 그것으로 밤하늘을 겨냥해 보이며 외쳤다.

“하늘이여! 잊혀졌던 왕손에게 내려주신 귀한 뜻에 감사드리나이다. 그날이 오면, 맹세하겠나이다. 나 무적왕은 바로 이 검으로 1,000마리의 소를 잡아 하늘 앞에 제를 올리겠나이다!”

선지자는 그 앞에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무적왕 폐하 만세!”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