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5장 – 철혈(鐵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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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5장 – 철혈(鐵血) (12)



고통과 피로감에 고개를 떨구고 있던 사모 페이는 성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대호는 그 소리를 들었다. 대호는 극히 낮은 소리로 울었고 그 아가리에 끼어 있던 위엄왕은 팔다리를 경련했다. 대호의 몸이 진동하는 것을 느낀 사모는 고개를 들었다.

자보로의 성문이 열렸다. 사모는 억지로 눈의 초점을 맞추려 애썼다. 하지만 희끄무레한 인간 같은 것이 보일 뿐이었다. 사모는 륜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조금 전 서로 대화했을 때도 사모는 사실 륜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륜의 니름만을 들을 수 있었을 뿐이다.

사모는 륜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때 성문이 다시 닫혔다. 그리고 기이하게 생긴 인간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사모는 그 인간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앞이 흐렸고, 사모는 고통 때문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구토를 간신히 억누른 사모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사모는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것은 륜이었다.

‘어째서 뜨거운 거지?”

륜의 몸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뜨거웠다. 어리둥절해하던 사모는 곧 도깨비를 떠올렸다. 사모는 감탄했다.

‘륜의 몸에 도깨비불을 붙여주었군. 그래서 조금 전엔 보지 못했어.’

사모는 륜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그 불이 지나치게 뜨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륜이 추위 속에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사모는 성루 위쪽을 바라보았다. 케이건과 티나한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비형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키타타를 흘끔흘끔 돌아보았다. 키타타는 여전히 하크렌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사모는 그 광경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온 륜은 20미터쯤 되는 거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내려왔습니다. 사모.〉

〈그래.〉

사모는 대호의 등에서 내려오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사모는 대호의 등에서 미끄러져 땅에 곤두박질쳤다. 륜은 깜짝 놀라 걸어오려 했지만 대호가 귀를 뒤로 눕히며 륜을 경계했다. 그러자 대호의 입에 물려 있던 위엄왕이 볼썽사납게 버둥거렸다. 륜은 제자리에 멈춰서서 닐렀다.

<사모! 괜찮으세요?>

사모는 한 손으로는 쉬크톨을 땅에 짚고 다른 손으론 대호의 털을 움켜쥐며 힘겹게 일어났다. 대호의 옆구리에 기대어 선 사모는 쉬크톨을 들어 옆으로 몇 번 뿌렸다. 팔이 제대로 움직이는지 확인하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그렇게 쉬크톨을 몇 번 휘두른 사모는 심호흡을 한 다음 똑바로 섰다.

<사이커를 뽑아, 륜.〉

〈사모. 저는 화리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누님도 제 결백을 아신다고 하셨잖아요.>

<증거가 없어.〉

<증거 따위 무슨 필요가 있어요! 지금 여기 있는 건 누님과 접니다. 다른 사람을 만족시킬 증거 따위는 필요 없어요. 그 자들은, 그 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에 칼을 겨누지 않아요. 지금 그러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라고요! 우리가 왜 아무 상관 없는 그 자들을 만족시켜줘야 하지요?>

사모는 다시 비틀거렸다. 아무래도 왼쪽 다리뼈가 부러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사모는 오른발에 체중을 실었다. 그 때문에 앞으로 뛸 수 없었다. 사모는 쉬크톨을 들어 륜의 허리를 가리켰다.

〈륜. 사이커를 뽑아.〉

<사모!>

사모는 노여워하며 닐렀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겠다는 거냐! 이 끔찍한 땅, 뼈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와 왕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정신 나간 인간들만이 가득한 이 비늘 서는 땅에서!>

<저는 화리트의 유지를 따라야 합니다. 이곳에서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도대체 뭔데!>

〈저도 모릅니다. 화리트는 나가의 적이 심장탑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들과 힘을 합쳐 나가의 적을 물리쳐야 된다고 했습니다.>

사모는 통증 때문에 날카로워진 정신으로 사납게 닐렀다.

<나가의 적? 심장탑에는 나가들의 심장과 수호자들밖에 없어!>

<그렇다면 수호자들이 나가의 적인가 보지요.>

사모는 이제 기가 막혔다.

<뭐야? 수호자가? 여신의 신랑들이 말이냐? 그걸 니름이라고 하는 거냐?>

<니르신 대로 심장탑에는 심장들과 수호자들밖에 없으니까요. 화리트는 분명히 나가의 적이 심장탑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수호자들이 바로 나가의 적이겠지요.>

〈너 지금 모든 나가들을 위해 봉사하시는 그 선량한 분들 b…..

<여자들 세상에 태어나 아무것도 될 수 없는 남자라서 탑에 들어간 자들입니다! 나가들의 사회를 가장 증오하는 사람을 찾아보라면 나가 도시 어느 곳에 있어도 곧장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가장 높은 건물, 어디에 있더라도 눈에 들어오는 건물로 걸어가면 되니까!>

사모는 중심을 잃고 대호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륜은 이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물론 그 분들 중엔 정말로 여신의 신랑이 되고 싶어서, 모든 나가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어서 수호자가 되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가들을 증오하고 불만과 증오로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 또한 분명히 그들 속에 있을 겁니다! 화리트를 벌레처럼 죽인 비아스 마케로우를 생각해 보세요! 벌레나 동물만도 못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여자들의 눈길에 지쳐 증오밖에 남지 않은 자들이 거기 있을 겁니다! 그 자들이 나가의 적일 겁니다. 우리의 적이라고요!>

<륜. 도무지 니름이 안 되는….>

<그 적들이 아버지를 죽였어요!>

사모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륜을 바라보았다. 당황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모는 동생이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요스비를 말하는 거야? 요스비는 병으로 죽었어.〉

<심장을 적출한 나가가 병으로 죽는다고요?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갑자기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죽는 병이라고요? 니름도 안 돼요!>

<이상한・・・・・・ 그래. 이상한 전염병이었어. 그래서 그 자의 물건을 모두 태웠잖아.>

<누님도 그 니름은 믿지 않았잖아요!〉

<뭐?>

〈누님도 전염병이라는 니름을 믿지 않으신 거잖아요! 그래서 이 사이커를 남겨둔 것 아닙니까!>

륜은 사이커를 뽑아들어 그 칼뿌리를 가리켰다. 그 순간 사모는 결연하게 대화를 중단시켰다. 대호의 허리를 밀어붙이며 앞으로 뛴 것이다.

비틀거리며 달려오는 사모와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쉬크톨을 본 륜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그렇잖아도 흔들리던 사모의 첫 번째 일격은 땅을 때리고 말았다. 륜은 사이커를 앞으로 내밀며 닐렀다.

<사모! 멈춰요!〉

하지만 사모는 다시 몸을 던지며 쉬크톨을 내찔렀다. 륜은 또다시 피했고 사모는 가슴부터 땅에 떨어졌다.

“쳐!”

티나한의 외침에 륜은 성루를 돌아보았다. 티나한은 칼싸움 중에 멍청하게 뒤를 돌아본다고 고래고래 욕설을 내뱉었다. 륜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사모는 왼쪽 팔꿈치로 땅을 괸 채 륜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일어날 수 없는 듯했다.

륜은 손을 내밀었다.

티나한이 다시 무지스러운 욕을 퍼부었다.

“미친 자식, 뭐 하는 짓이야!”

티나한은 그대로 철창을 쥐고 성벽 아래로 뛰어내릴 기세였다. 케이건은 재빨리 티나한의 팔을 잡으며 키타타 자보로를 가리켰다. 티나한은 키타타와 비형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폭풍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는 륜의 손을 바라보았지만 그것을 잡지는 않았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하면서도 사모는 기어코 자신의 발로 일어섰다. 몇 번 휘청거렸지만 간신히 똑바로 선 사모는 쉬크톨을 다시 내밀었다. 그 칼끝은 폭풍 속의 갈대만큼이나 심하게 흔들렸다. 사이커를 마주 들었지만, 륜은 제자리에 선 채 닐렀다.

<누님. 누님은 쉬셔야 해요. 몸이 나을 수 있도록 안정하셔야 된다고요.>

<걱정 마. 곧 쉴 수 있게 될 거야.>

<그런 몸으로는 안 됩니다.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저는 누님의 상대가 안 되겠지만. 제발, 누님. 만용을 부리지 마세요.>

애타게 니르던 륜은 사모의 얼굴에 번지는 희미한 미소에 의아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곧 사라졌다. 사모는 쉬크톨의 떨림을 줄이기 위해 두 손으로 칼을 움켜쥐었다.

<이건 쇼자인테쉬크톨이야. 멈출 수도, 잠시 쉴 수도, 돌아갈 수도 없어.>

륜은 니름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모는 신성한 사명을 수행하기는커녕 걷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사모는 당장 누워서 쉬어야 할 환자였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것은 륜만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위엄왕 지그림 자보로는 끝없이 흘러내리는 뜨거운 침과 지독한 노린내, 그리고 강철 같은 이빨들로 구성된 매우 협소한 세계 속에 감금되어 있었다. 공포는 시간 감각을 왜곡 시켰을 뿐만 아니라 위엄왕의 육체적 감각도 왜곡 시켰다. 위엄왕은 자신의 목 아랫부분의 존재가 어떤 몹쓸 거짓말처럼 여겨졌다. 위엄왕은 자신에게 정말 몸통이 있는 건지, 그리고 팔이나 다리라고 하는 것이 있었던 건지 의심스러웠다.

그런 그에게 가공할 고발의 순간이 다가왔다.

위엄왕은 갑자기 익숙하지도 않은 사지를 가진 인물이 되어 지금껏 갇혀 있던 세계로부터 추방되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닦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일 테지만, 위엄왕은 자신의 손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위엄왕은 그 자리에 누운 채 멀어져 가는 대호의 턱을 바라보았다. 끔찍하게 큰 턱이었다.

위엄왕을 내뱉은 대호는 륜을 향해 포효했다.

대호의 포효에 륜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성루 위에서도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티나한은 벼슬을 빳빳하게 곤두세웠다. 륜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티나한은 주저 없이 계명성을 내질렀다.

“닥쳐라, 이 고양─아!”

대호는 대단히 비위가 상했다는 듯이 어깨를 낮추며 성루를 노려보았다. 말을 알아들었을 리는 없지만 드높은 계명성은 대호를 노하게 하기 충분했다. 격분한 대호가 아직 위엄왕 위에 있는 것을 본 키타타는 티나한에게 당장 하크렌의 경동맥을 끊겠노라고 악을 썼다. 하지만 티나한은 부리를 딱 부딪쳤다.

“젠장, 저 과다 발육한 고양이 새끼가 륜을 건드리기만 했단 봐라. 자보로가 날아가든 말든 나는 뛰어내린다! 비형을 놔둔 채 케이건과 륜을 끼고 도망치면 그만이야!”

키타타의 얼굴은 해쓱해졌다. 그리고 자칫하면 피를 뒤집어쓰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비형 또한 얼어붙었다. 티나한의 제안이 매력적이라는 듯이 턱을 만지작거리는 케이건의 모습은 그 두 사람을 그리고 하크렌을 더욱 끔찍한 기분으로 몰아갔다. 다행히 대호는 륜을 향해 달려들지 않았다. 대호는 성큼 뛰어 사모 곁에 내려섰다. 사모는 큼직한 대호의 머리가 다가오자 짜증스러워하며 닐렀다.

<왜 이래, 대호? 저 인간을 물고 있으라고 했잖아.>

대호는 물러나지 않았다. 대신 머리를 옆으로 기울여 사모를 물려 했다. 사모는 놀라서 옆으로 물러났고 륜 또한 정신적 비명을 질렀다. 대호가 또다시 사모의 허리를 물려 했을 때 두 남매는 비로소 대호의 동작이 사납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모는 다가오는 대호의 입을 밀어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대호, 나를 데려가려는 거야? 그러지 마. 이건 쇼자인테쉬크톨이야.”

대호는 물끄러미 사모를 내려다보았다. 니름이 아닌 육성이기에 듣긴 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사모는 대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모는 대호의 갈기를 움켜쥐며 닐렀다.

<나는 괜찮아. 대호. 정말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누님을 데리고 가!”

대호는 고개를 휙 돌렸다. 륜은 대호를 향해 또다시 외쳤다.

“대호! 누님을 데리고 가!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누님을 쉬게 해줘. 제발 부탁이야!”

그 뜻은 갸륵했지만 륜은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사모를 가리키며 륜이 내민 것은 사이커였다. 번득이는 칼날을 본 대호는 귀를 눕히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인간들도 듣기 힘든 그 낮은 으르렁거림을 륜은 당연히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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