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5장 – 철혈(鐵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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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5장 – 철혈(鐵血) (13)



“저 얼간이 자식!”

티나한은 머리를 홰 내두르며 탄식했다. 케이건이 재빨리 말했다.

“티나한! 뛰어내리시오. 가서 륜을 구해요!”

티나한은 당황하여 케이건을 쳐다보았다. 그가 뛰어내리면 키타타는 하크렌을 죽일 테고 끊어진 경동맥에서 솟구치는 피는 비형을 실성하게 만들 것이다. 조금 전 홧김에 외치긴 했지만, 티나한은 실성한 비형이 자보로를 불바다로 만들기 전에 도망칠 자신이 없었다. 그런 사정을 케이건에게 설명하려던 티나한은 곧 숨이 멎을 것 같은 광경을 보게 되었다.

미끄러지듯 움직인 케이건이 비형의 등 뒤로 돌아갔다. 케이건은 비형의 오금을 냅다 걷어찼고 비형은 깜짝 놀라며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비형의 머리 높이를 낮아지게 만든 케이건은 비형의 머리를 움켜쥐고는 그 목에 바라기를 가져갔다. 비형은 자신의 목을 누르는 쌍신검에 황당해하며 말했다.

“어, 케이건?”

하지만 케이건은 준절한 어조로 선언했다.

“대장군. 당신 부하를 죽이면, 나도 이 도깨비를 죽이겠소!”

성루 위로 또다시 괴괴한 고요가 흘렀다.

사람들은 이 상식을 벗어나는 광경에 이해력의 부족을 느끼며 헐떡였다. 상황을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가까스로 그 광경에 일말의 합리성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비형의 웃음소리는 사람들의 현실 감각을 다시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우하하하! 멋져요, 케이건! 들으셨죠, 대장군님? 저를 죽이겠대요! 난처해지신 것 같네요?”

키타타는 난처해하지는 않았다. 다만 쩍 벌린 입으로 침을 흘리며 세계를 부정하는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케이건은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당황하고 있는 티나한에게 다시 외쳤다.

“티나한! 어서!”

티나한은 퍼뜩 정신을 차리곤 바닥에 꽂아두었던 철창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흉벽을 뛰어넘기 전 티나한은 절망감을 느꼈다. 대호는 이미 륜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륜은 대호가 지척으로 다가올 때까지도 대호가 왜 그런 움직임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모가 화급히 외칠 때에야 륜은 겨우 대호가 사이커에 노했음을 깨달았다.

“그만둬! 멈춰, 대호!”

대호는 사모의 외침을 무시한 채 달려들었다. 륜은 비명을 지르며 사이커를 내뻗었지만 대호의 강력한 앞발이 그것을 옆으로 튕겨 버렸다. 바위라도 깨버릴 듯한 일격에 륜은 사이커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제자리에서 빙글 돌기까지 했다. 저 멀리 날아간 사이커가 땅에 꽂혔을 때 륜도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륜은 온몸의 비늘을 곤두세운 채 밤하늘을 가리고 있는 대호를 올려다보았다. 대호는 동굴 같은 입을 열어 보이며 포효했다. 그리고 대호는 그대로 륜을 삼키려 했다. 륜은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닐렀다.

<안 돼!>

륜의 배낭이 폭발했다.

티나한은 흉벽에 한쪽 발을 얹은 모습 그대로 굳어버렸다. 비형과 케이건은 티나한이 왜 뛰어내리지 않는 것인지 의아해했다.

“왜 그러는 거요, 티나한?”

티나한은 등을 보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케이건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키타타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비형은 도깨비였고, 궁금한 것은 참지 않는다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있었다. 비형은 무릎걸음으로 티나한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케이건은 어쩔 수 없이 비형에게 끌려가듯 움직였다. 키타타와 하크렌은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비형과 케이건을 따라 함께 흉벽으로 움직였다.

티나한의 곁에 도달한 비형은 흉벽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그대로 벌떡 일어섰다. 비형의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케이건은 그 때문에 뒤로 나가떨어질 뻔했다. 곤란하기 짝이 없는 인질이었다. 비형이 바라기에 상처를 입을까 봐 황급히 검을 들어 올린 케이건은 비형의 등을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이오?”

비형은 케이건의 바라기를 덥석 움켜쥐었다. 그러곤 그것으로 자기 목을 겨냥했다.

“제가 들고 있을 테니 나와서 보세요. 알아서 죽을게요. 저게 정말 제가 생각하는 그걸까요?”

케이건은 길다란 한숨을 내쉬곤 키타타를 흘끔 바라보았다. 키타타는 이제 더 이상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개입하고 싶지도 않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케이건은 비형에게 바라기를 건네준 다음 그의 등 뒤에서 돌아 나와 비형의 옆에 섰다. 그러고는 도대체 뭐냐는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음 순간 케이건은 흉벽을 움켜쥐며 신음을 흘렸다.

“드라카!”

대호는 어깨를 잔뜩 낮춘 채 으르릉거렸다. 대호의 바로 앞에는 륜이 주저앉아 있었지만 대호가 경계하고 있는 것은 륜이 아니었다. 대호는 륜의 배낭을 찢으며 공중으로 뛰쳐나온 신화적 존재를 향해 털을 잔뜩 곤두세웠다.

그것은 륜의 머리 위 몇 미터쯤 되는 곳에 뜬 채 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좌우로 펼친 두 날개는 날개 줄기에서부터 촘촘히 갈라져 함수초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고 미풍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릅뜬 두 눈에선 불꽃 같은 광채가 어렸고 그 아래에는 턱처럼 돌출한 부분이 있긴 했지만 입은 없었다. 대신 턱 양쪽을 따라 긴 홈이 패어 있었다. 가슴에 있는 두 앞발은 사납게 발톱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강인해 보이는 두 뒷다리 아래로는 넝쿨 같은 꼬리가 꿈틀거렸다. 꼬리 끝부분에는 섬모 같은 털들이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어떤 날짐승과도 닮지 않은 날개와 어떤 길짐승과도 닮지 않은 머리, 그리고 어떤 물고기와도 닮지 않은 꼬리. 그것은 용이었다. 몸길이의 반을 넘는 꼬리까지 치더라도 2미터 남짓한 작은 모습이었지만 용은 압도적인 위압감으로 그곳에 떠 있었다.

“크르르르…….”

대호는 목을 울리며 으르릉거렸다. 대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용은 천천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용의 몸 아랫부분에서는 꼬리가 기묘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꼬리 끝의 섬모는 서로 비비적거리며 경련했다. 대호는 어깨 털을 더 곤두세웠다. 튀어나온 대호의 발톱이 돌멩이들과 부딪쳐 불꽃을 튕겼다.

갑자기 용은 머리를 앞으로 내뻗었다.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었지만 륜과 사모, 그리고 케이건은 용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케이건은 지식 덕분에, 그리고 륜과 사모는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용은 그 얼굴 양쪽의 길다란 홈으로부터 차가운 기체를 내뿜었다. 대호는 황급히 뒤로 뛰었고 다음 순간 진동하던 용의 꼬리가 불꽃을 튕기며 용의 얼굴 앞으로 솟아올랐다.

기체가 맹렬하게 발화했다.

륜은 얼굴을 감싸 쥐며 몸을 옆으로 던졌다. 용의 불꽃은 눈이 멀어 버릴 정도로 뜨거웠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사모도 그 불을 똑바로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대호가 제때에 피한 덕에 용의 불꽃은 땅을 때렸다. 하지만 그 불꽃은 끊어지지 않았다. 용은 허공을 미끄러지며 두 줄기 불꽃으로 대호를 추적했다. 용의 불꽃이 땅을 훑어감에 따라 지면 위로 화염이 거칠게 범람했다.

대호는 노호하며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어지간한 나무라도 뛰어넘을 듯한 높이로 도약한 대호는 용을 향해 사납게 앞발을 휘둘렀다. 하지만 용은 날개 가닥들을 기묘하게 움직이며 대호의 공격을 피했다. 함수초 잎사귀 같은 용의 날개 가닥들은 모였다가 펼쳐지는 것, 그리고 뒤집히는 것이 자유자재였고, 양쪽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계속해서 날개의 형태가 변하는 것 같은 그런 효과 때문에 용은 새들조차 흉내 내기 어려울 복잡무쌍한 비행을 하고 있었다. 바라보고 있던 성루 위의 사람들은 용의 비행을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대호는 몇 번이나 거세게 도약했지만 그것은 바람을 잡으려 하는 것만큼이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마침내 대호는 공격을 포기했다. 허공에 뛰어올랐다가 용의 불꽃에 갈기를 꽤 태워 먹은 다음에 내린 결단이었다. 날렵하게 이리저리 뛰며 용의 불꽃을 피하던 대호는 넌더리를 내듯 크게 도약했다. 대호가 착지한 곳에는 사모가 서 있었다. 대호는 사모를 냉큼 물어 올렸다. 사모는 부정의 니름들을 쏟아내었지만 대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모를 문 대호는 다시 도약했고, 다시 땅에 내려설 때쯤에는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용은 더 이상 대호를 추적하지 않았다.

용이 토해 내던 화염은 사라졌지만 땅에는 아직 불티들이 굴러다니고 있었고 곳곳에서 잡초들이 불타고 있었다. 그 불타는 땅 위로 날개 가닥들을 흔들며 용은 륜을 향해 날아왔다.

륜은 엉겁결에 오른팔을 내밀었고 그러자 용은 그 팔 위에 내려섰다. 뒷발이 팔을 붙잡자 넝쿨 같은 꼬리는 륜의 팔에 친밀감 있게 휘감겼다. 용은 날개를 접은 다음 고개를 갸웃하며 륜을 바라보았다. 륜은 벅찬 마음으로 용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용에게서 부활한 사랑하는 친구의 이름을.

“아스화리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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