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5장 – 철혈(鐵血) (16)
륜은 페이 저택의 정원에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륜은 자신의 주위에 다섯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화리트 마케로우는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손에 쥔 건 붓이었지만 글자가 쓰여지고 있는 것은 양피지가 아니었다. 비늘이 돋은 딱딱한 것이었고, 그래서 화리트는 글을 쓰며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륜은 화리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려 사모 페이에게 질문했다. 저것이 뭐냐고. 사모는 웃으며 닐렀다.
<물론 요스비의 가죽이지.>
륜은 정원 한쪽을 바라보았다. 요스비는 나무 기둥에 기대어 서 있었다. 등의 가죽을 벗겨 화리트에게 주었기 때문에 요스비는 등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 난처한 자신의 처지를 알아달라는 듯 요스비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 순간 요스비의 왼팔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케이건이 그 팔을 잘라 먹었기 때문에 요스비는 가짜 팔을 붙이고 있었다. 팔이 떨어지자 요스비는 몹시 당황해했고 륜은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화리트가 화를 벌컥 내었다.
<제발 조용히 해! 쓰는 데 방해되잖아!>
륜은 화리트가 왜 웃음소리 같은 것에 신경 쓰는 건지 알 수 있었다. 비아스가 그를 죽인 이후로 화리트는 소리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화리트의 등 뒤로 다가간 비아스가 또다시 화리트를 베어 죽였다. 화리트는 언짢아하며 닐렀다.
<제기랄, 또야? 좀 쓸 수 있게 내버려 줘!>
륜은 화리트가 도대체 뭘 쓰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륜은 그것을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알고 있었다. 다섯 번째 나가에게 물어보면 된다.
하지만 다섯 번째는 신을 잃고 두억시니가 되어 있었기에 물어볼 수 없었다. 륜은 화리트를 쳐다보았고 화리트는 넌더리를 내며 용 아스화리탈로 변신했다. 그리고 아스화리탈은 용의 불꽃으로 다섯 번째 나가의 두억시니 껍질을 태웠다. 그러자 다섯 번째 나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나가는…………….
“그 나가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륜은 눈을 떴다. 목소리에 눈을 떴다는 것이 그에겐 꽤 신기한 일로 여겨졌다. 또한 깨어나지 않았다는 말에 깨어나는 경험 또한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 경험을 반추해 볼 시간은 없었다. 륜은 자신이 꽤 괴상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
륜은 굵은 쇠사슬에 의해 결박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놀란 륜은 비늘을 부딪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밝고 화려했다. 륜에겐 대가문의 홀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또다시 놀란 륜은 조금 후에야 비형과 티나한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에 또다시 경악했다.
티나한과 비형은 등을 맞댄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의 몸 또한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등에 묶인 비형 때문에 똑바로 누울 수 없었던 티나한은 옆으로 누운 채 소름 끼치는 악담을 퍼붓고 있었는데, 륜은 그 레콘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결박을 풀고 행동으로 자신의 심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이 훨씬 티나한다운 일이었다. 하지만 곧 또 다른 목소리가 륜의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조심하시오. 레콘. 당신은 물론 그 쇠사슬을 끊을 수 있겠지. 솔직히 레콘을 제압하려면 쇠사슬을 새로 만들어야 할 거요. 우리는 그럴 시간이 없었소. 그래서 우리는 당신이 힘을 잘못 사용했다가는 도깨비의 팔을 찢게 되도록 묶어 놓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소. 그리고 도깨비 당신도 마찬가지요. 함부로 불을 일으켜 쇠사슬을 녹이려 들면 벼슬 달린 당신 동료를 태워 먹고 말 거요.”
티나한의 등 뒤에 묶여 있던 비형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밧줄이 아니라 쇠사슬을 선택한 것이군요?”
“그렇소. 그걸 녹이려면 꽤 뜨거운 불을 만들어야겠지?”
티나한이 격노하여 외쳤다.
“팔 따위 타도 좋다! 비형! 이거 녹여, 당장! 가만두지 않겠어!”
“……팔이 타는 게 아니라 아예 녹을 텐데요?”
“뭐? 팔을 못 써? 그럼 밟아 죽이겠어!”
“……다리도 묶여 있는데요?”
“쪼아 죽인다!”
비형은 티나한의 투지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팔다리가 손상되는 것쯤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저 투지 넘치는 전사 티나한이라면 비형의 팔을 찢고서라도 결박에서 풀려나겠다는 식의 발상을 해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과연 티나한은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의견이 필요해, 비형. 명예가 중요할까, 팔이 중요할까? 아무래도 전자 쪽이겠지?”
비형이 진땀을 흘리며 대답할 말을 생각하고 있을 때 또 다른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다리는 괜찮으시오?”
륜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그들처럼 쇠사슬에 묶인 케이건이 기둥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륜은 그 모습에 놀랐다. 묶여 있긴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모습이던 다른 사람들에 비해 케이건의 모습은 흉측하기 짝이 없었다. 얼굴 곳곳이 부어 있는데다 옷도 갈가리 찢어져 있었다. 륜은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사람이 저런 꼴로 바뀔 수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륜 일어났나. 그런데 다리는 괜찮으시오. 대장군?”
륜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천장이 높은 홀 같은 곳에 누워 있었고 약간 떨어진 곳에는 한 단 높은 층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가운데 큼직한 돌이 있었다. 돌의 모습은 특이했다. 그 뒤로 세공이 잘된 등받이 같은 것이 만들어져 있었고 좌우에는 화려한 팔걸이도 있었다. 돌로 만들어진 의자 같은 모습이었지만, 아름다운 등받이와 팔걸이에 비해 정작 돌 자체는 거칠고 투박했다.
돌 앞쪽, 단 아래에는 몇 명의 병사를 거느린 키타타 자보로가 서 있었다. 키타타는 케이건의 질문에 얼굴을 찡그렸다.
“사실 서 있기도 힘드오. 당신 인간 맞소? 어떻게 물어뜯을 생각을 한 거요?”
비형은 헛바람을 삼키며 마침내 케이건이 식용 대상 범위를 확대시켰나 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케이건의 대답은 그런 공포를 불식시켰다.
“다섯 사람이 내 팔다리를 움켜쥐고 있었소. 그리고 당신은 나를 걷어차려 했고, 선택의 폭이 좁았다고 생각하오만.”
비형은 안도했지만 륜은 더 참지 못하고 외쳤다.
“케케케케……!”
륜은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그제야 륜은 몸이 싸늘하게 식어 있음을 깨달았다. 비형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는 륜의 몸에 도깨비불을 씌웠다. 체온이 좀 올라가고 나서야 륜은 제대로 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케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우리가 왜 이렇게 되어 있는 겁니까?”
케이건은 날씨 이야기라도 하는 듯한 평온한 태도로 대답했다.
“잠든 사이에 저자들이 사원에 침입해서 우리를 붙잡아 왔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 지경이 되어 있는 거죠?”
“그런 납치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온몸으로 보여준 결과지.”
“어, 저, 당신이 그렇게 싸웠는데 왜 저는 이렇게 잡혀 있는 거죠? 소리는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렇게 묶일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는 없는데요?”
비형과 티나한도 그 질문에 케이건을 보려 했고, 그 때문에 륜은 그 두 사람도 자신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잡혀 온 것임을 깨달았다. 물론 비형과 티나한은 서로 등을 맞대고 묶여 있는지라 서로 케이건 쪽을 보기 위해 잠시 소동을 일으켰다. 케이건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새벽녘에 저 자들이 객실에 불을 뺐다. 륜 너는 얼어붙었지. 그래서 깨닫지 못했어. 이곳에 햇빛이 잘 들어와서 이제야 정신을 차린 거지.”
륜은 왜 몸이 얼어붙었는지 알게 되었다. 케이건은 계속 말했다.
“나는 왜 방이 차가운지 알아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당했고, 티나한 당신은 자다가 쇠망치로 머리를 맞았소.”
“어? 그랬냐? 아까부터 뒤통수가 좀 뻐근하더라니. 난 이런 괴상한 자세로 잠을 자서 그런 줄 알았어.”
키타타와 병사들은 티나한의 말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비형이 조바심을 내며 질문했다.
“저는요? 저는 왜 잠에서 깨지 못했죠? 마비약을 썼나요? 아니면 독침? 그렇잖으면 어딘가의 신비한 약초?”
“……당신은 그냥 자다가 묶인 거요.”
“자다가요?”
“코끼리가 밟고 지나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자더군. 아마 도깨비불을 끄고 자서 그럴 테지.”
비형은 크게 기뻐했고 그런 비형의 태도는 키타타 대장군과 병사들에게 다시 곤혹스러운 불가사의를 선사했다. 케이건은 잠을 잘 자는 것이 훌륭한 품성의 증거로 통하는 도깨비의 풍습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 대장군에게 질문했다.
“원하는 것이 뭔지 말해보시오. 죽이지 않고 이렇게 공들여 붙잡았으니 원하는 것이 있겠지. 대장군.”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소. 우리는 그렇게 무도한 자는 아니오. 게다가 도깨비도 있잖소. 저 도깨비는 죽여도 그 영이 즈믄누리로 돌아가 자신의 살해를 고발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소.”
“쓸데없는 걱정을 하셨소. 대장군.”
“뭐요?”
“쓸데없는 걱정이라 했소. 복수가 걱정되었던 거라면 그냥 죽였어도 상관없소. 도깨비 군단에 의한 복수 따위는 없었을 테니까. 죽은 비형이 즈믄누리로 돌아가면 도깨비들은 그를 환영한 다음 어르신으로 대접해 줄 거요. 비형도 복수 따위에 매달리는 대신 어르신이 되면 하려고 계획했던 일에 착수했겠지.”
“예. 저는 해몽서를 집필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어르신에게 어울리는 일이잖아요?”
비형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티나한은 기막힌 듯이 비명을 질렀다.
“야! 케이건! 그런 걸 가르쳐주면 어떻게 해!”
키타타 자보로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케이건은 침착하게 말했다.
“괜찮소. 티나한. 그렇더라도 우리를 죽이지는 못하니까. 대장군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뭔지 짐작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소. 아마 용일 테지.”
륜은 비늘을 부딪치며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스화리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케이건은 계속 말했다.
“용의 분노를 사지 않으려면 우릴 쉽게 죽일 수는 없겠지.”
대장군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뭐라 말하려 했을 때였다. 비형이 비명을 질렀다.
“나늬는 어쨌어요?”
“나늬? 미녀 나늬가 뭐 어쨌다는……”
“제 딱정벌레요! 제 딱정벌레 이름이 나늬예요. 나늬는 어쨌어요?”
키타타 대장군과 병사들은 언젠가 티나한과 케이건이 비형의 작명 감각에 대해 느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티나한은 낄낄거렸고 키타타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인상적인 작명 감각이군. 당신의 그 미녀라면 마구간에 잘 있소. 병사들이 나무와 꽃도 잔뜩 가져다줬고. 이제 내 이야기 좀…….”
“잠깐, 내 철창! 이 자식들, 내 철창은 어떻게 했느냐!”
키타타는 기어코 분노의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불가항력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