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5장 – 철혈(鐵血) (17)
티나한의 철창은 병사 여섯 명이 손을 깨끗이 씻은 다음 잘 들고 와 보관해 두었다는 것을 맹세하고, 나늬는 즈믄누리의 딱정벌레간에야 미치지 못하겠지만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다시 설명한 다음, 혹시나 싶은 마음에 케이건의 괴상한 쌍신검도 잘 보관하고 있다고 말한 후에야, 키타타는 마침내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키타타의 이야기는 케이건이 짐작하던 대로였다. 키타타는 용을 넘기라고 제안했다. 륜은 비늘을 곤두세웠고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는 용이 아니라 용인이니 먹어도 용인이 될 수는 없소.”
“먹겠다는 것이 아니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용을 원하는 거요? 용은 위험한 생물이오. 도깨비를 협박했던 당신이 위험에 대한 제대로 된 감각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용의 위험성을 모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용이 우리에게 위험하다면 우리 왕의 적에게도 위험하지 않겠소?”
케이건은 눈살을 찡그렸다. 키타타의 안색을 살피던 케이건은 잠시 후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도?”
“무슨 말이오?”
“당신도 눈물을 먹일 새가 필요해진 거요?”
비형만이 알 듯 모를 듯하다는 표정을 지었을 뿐, 키타타 자보로를 위시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케이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로서는 고맙게도 케이건은 알아듣기 쉬운 말을 덧붙였다.
“위엄왕의 무적 병기가 되어줄 용을 원하는 거요? 당신은 당신 조카의 어리석음에 한탄했던 것 같던데. 그건 겉으로만 그런 척한 거요? 그게 아니면 용을 보고는 생각이 바뀐 거요?”
“말을 가려서 하라! 대장군은 짐의 충신이니라!”
날카로운 소리에 사람들은 고개를 돌렸다. 홀 한쪽에서 위엄왕 지그림 자보로가 몇 명의 사람들을 대동한 채 걸어오고 있었다. 키타타 자보로와 병사들은 고개를 숙였고 위엄왕은 그들 앞을 지나쳐 곧장 단 쪽으로 걸어갔다.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있었지만 비형은 그 값비싸 보이는 옷이 군데군데 그을려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했다. 단 위에 올라간 위엄왕은 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륜은 그제야 그 돌이 왕좌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륜은 왜 저런 투박한 돌을 왕좌로 삼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때 케이건이 말했다.
“별비가 할퀸 돌이겠군. 유서 깊은 물건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리 편해 보이진 않는구료.”
“왕은 지대한 책무를 지닌 사람이다. 어떤 왕좌도 편할 수 없는 법이다.”
“그 왕좌는 그렇겠군.”
위엄왕은 별 생각 없이 지나치려다가 케이건의 말투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비형은 킥! 킥! 하는 소리를 내다가 결국 폭소를 터뜨렸다. 데굴데굴 구르고 싶어 보였지만 묶여 있는지라 비형은 그냥 온몸을 떨며 웃었다. 위엄왕은 화를 내며 왜 웃는지 설명하라고 말했다. 가까스로 웃음을 멈춘 비형이 대답했다.
“폐하. 당신을 앉히고 있으려니 그 의자 기분이 편할 리 없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위엄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곧 시뻘겋게 변했다. 위엄왕은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케이건을 꾸짖었지만 케이건은 담담히 마주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위엄왕의 꾸중이 정도 이상으로 길어진다고 생각한 티나한이 짜증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그만해!”
위엄왕은 그만했다. 모든 사람들의 귓속에서 계명성의 여운이 떠도는 상황에서 케이건이 입을 열었다.
“지그림 자보로.”
“언사가 무례하다!”
“조용하시오. 지그림 자보로 왕의 조건이나 덕목에 대해 말하는 자 많지만, 나는 밤중에 사람을 납치해 오는 강도 같은 왕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소. 이 상황에 대한 만족할 만한 사과가 있기 전까지 당신은 내게 왕이 받아야 할 경의는커녕 보편적 인격자가 받아야 할 존경도 받긴 어려울 거요.”
케이건의 차분하면서도 준엄한 지적에 위엄왕은 더욱 분노했다.
“왕은 사과하지 않는다!”
“해야 할 걸.”
티나한의 경고에 위엄왕은 찔끔했다. 위엄왕은 티나한과 비형을 연결하고 있는 쇠사슬을 보다가 키타타 대장군을 쳐다보았다. 키타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도깨비의 팔을 끊지 않고는 풀지 못합니다.”
안심한 위엄왕은 티나한에게 코방귀를 뀌어주곤 륜에게 말했다.
“너, 나가. 저 용을 어떻게 하면 얌전하게 할 수 있는지 설명하라.”
륜은 분노를 삼키며 말했다.
“용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은 지붕 위에 있다. 그토록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생물은 처음 보았다. 빤히 바라보다가 병사들을 지붕 위로 올려보냈더니 휙 날아오르더군. 병사들이 없어지면 도로 내려오고. 게다가 짐에게 불을 토하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하마터면 왕궁이 불탈 뻔했다.”
비형은 위엄왕의 옷이 왜 그 지경인지 깨닫고는 다시 낄낄거렸다. 륜은 아스화리탈이 안전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위엄왕은 계속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길 어제 용이 대호에 맞서 너를 보호했다고 하더구나. 너는 저 용을 다룰 수 있느냐?”
륜이 적절한 대답을 떠올리지 못해 주춤할 때 케이건이 입을 열었다.
“용은 지혜로운 생물이오. 자신을 위협할 존재가 있으면 발아하지 않을 정도로. 당연히 자신을 보호한 자도 알아 보지. 그래서 륜을 보호했을 거요.”
“그다지 지혜로운 것 같지는 않던데. 짐은 그 용에게 많은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짐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더군.”
“지그림 자보로. 어린 아기에게 훌륭하게 자라주면 적절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하는 부모는 없소. 그 용은 이제 눈 뜬 지 하루도 되지 않았소.”
위엄왕은 케이건의 호칭에 화가 났지만 눈을 부라리며 쳐다보는 티나한의 모습에 억지로 불쾌감을 삼켰다.
“그럼 짐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 용에게 유모와 교사라도 붙여줘야 하느냐?”
비형은 그 말이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다시 웃어대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이 그 용에게 뭘 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는데. 용은 당신 것이 아니오.”
위엄왕은 당황했다. 흥분 때문에 아직까지 용의 소유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위엄왕은 륜을 돌아보며 말했다.
“좋다. 나가. 네가 저 용을 데리고 있는 이유가 뭐냐?”
“이유요? 제가 아스화리탈을 피어나게 했고 제 손으로 그를 캐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스화리탈을 보호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아스화리탈이라는 이름이군. 보호하다니?”
“용을 싫어하는 나가들과 용근을 탐내는 사람들로부터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 능력이 닿는 한, 그리고 아스화리탈이 더 이상 제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그럴 생각입니다.”
“그냥 보호하는 것이 네 목적이라는 말이냐? 용이 성장해서 더 이상 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솔직히 지금도 네 보호를 필요로 하는 것 같지는 않다만.”
“원한다면 떠나가게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친구로서 지내겠습니다.”
위엄왕은 반색하며 말했다.
“그런가? 원한다면 보내주겠다고 했지? 그렇다면 만약 그 용이 짐의 곁에 남겠다면 놓아줄 텐가?”
륜은 위엄왕의 그을린 옷을 쳐다보았다.
“아스화리탈이 그걸 원하는 것 같지는 않군요.”
위엄왕은 불쾌한 헛기침을 했다. 잠시 고민하던 위엄왕은 다른 제안을 꺼내놓았다.
“그렇다면 네 친구와 함께 짐을 위해 일할 생각은 없는가? 네게도, 그리고 아스화리탈에게도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 네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대우일 것이다.”
“저는 할 일이 있습니다. 이 분들과 함께 하인샤 대사원에 가야 되죠. 고다인 대덕이 말해 주지 않던가요?”
위엄왕은 키타타를 바라보았다. 키타타는 륜에게 말했다.
“고다인 대덕이 이 일에 관련되었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가 고결한 사제라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내 오랜 죽마고우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런 오해는 놔둘 수 없겠소. 륜. 나는 사원에 침입해서 당신들을 잡아온 거요. 고다인 대덕은 화가 잔뜩 나서 왕궁을 찾아왔소. 자신의 손님들을 구하러 온 거지. 하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돌아갔소.”
륜은 다시 케이건을 바라보았고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륜은 위엄왕을 향해 말했다.
“그럼 말씀드리죠. 저희들은 하인샤 대사원에 가야 합니다.”
“너희들 모두가 가야 하는 건가? 아니면 일부는 그냥 길잡이나 동행인가?”
티나한은 그 말에 륜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륜이 입을 열었다.
“모두 가야 합니다.”
“모두 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가야 합니다. 그러니 풀어주십시오.”
위엄왕은 눈살을 찡그렸다. 하인샤 대사원의 손님들을 억류했다는 이야기가 퍼진다면 평판이 말도 못 할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위엄왕은 손에 들어온 용을 놓아줄 수는 없었다.
“그것이 급한 용무인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가야 한다는 것만 알 뿐 언제까지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 짐이 대사원에 너희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서신을 보내겠다. 그렇다면 대사원에서 답신을 보내지 않겠는가? 그때까지 짐의 보호를 받고 있다가 답신이 도착한 후에 거취를 결정하면 어떻겠는가.”
륜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기분을 눈치챈 듯 케이건이 끼어들었다.
“당신의 제안에 대해 우리끼리 의논 좀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시겠소?”
“좋다. 나는 다시 그 용에게 가보겠다. 먼저 이 옷부터 갈아입어야겠군.”
위엄왕은 다시 일어나서 홀을 나갔다. 키타타 자보로는 병사들과 함께 남았지만 케이건은 그에게도 나가달라고 요청했다. 키타타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충분히 떨어져 있을 테니,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면 되잖소.”
“조용히 이야기를 하기가 좀 어렵소. 말을 할 줄 알지만, 나가는 귀가 어두워서.”
키타타는 케이건의 설명이 합리적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키타타는 일행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점검한 다음 자리를 비켜주었다. 넓은 홀 안에 네 사람만이 남게 되자 륜은 황급히 케이건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케이건은 말없이 한쪽 벽을 바라보았다. 그때 바닥에 엎드린 채 자신의 신세에 대해 분노하고 있던 티나한이 륜을 향해 말했다.
“뭐 한 가지 물어보자, 륜. 왜 거짓말을 했냐?”
“예? 거짓말이요?”
“그래. 하인샤 대사원에 모두 함께 가야 한다는 거. 거기 가야 할 사람은 너뿐이잖아. 우리는 너를 데려다주기 위해 고용되었을 뿐이고.”
티나한의 말에 륜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나는 누구처럼 철혈이 아니에요. 동료들을 팽개칠 수는 없어요.”
티나한은 기쁜 듯이 웃었지만 동시에 불안한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그의 등 위에 묶여 있던 비형 또한 불안한 듯이 케이건의 기색을 살폈다. 케이건이 말했다.
“지그림 자보로를 위해 일하고 싶은 생각이 있나.”
륜은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정중하게 요청을 했다 하더라도 될까 말까 한데 이런 식으로 사람을 납치해 온 자를 위해 일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백번 옳고 한 번 더 옳은 말이다! 륜!”
티나한이 반가워하며 외쳤다. 하지만 케이건의 담담한 얼굴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스화리탈을 그에게 넘길 생각은 있나.”
“예?”
“아스화리탈을 지그림 자보로에게 넘기는 것을 고려해 보겠느냐고 물었다. 용을 데리고 다닌다면 이런 일이 계속 발생할 거다. 귀찮은 일이지. 티나한이 지적한 대로 목숨의 위협까지 당할 수도 있고. 그러니 아스화리탈을 지그림에게 넘기고 자유와 보상을 받는 편이 어떠냐고 제안하는 거다.”
“당신은 정말…….”
륜은 말을 삼키며 케이건을 쏘아보았다. 케이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륜의 말을 기다렸다. 륜은 억지로 짜내듯이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스화리탈을 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 때문에 발아했고 제 손으로 캐내었어요. 아까 그 인간에게도 말했지만, 아스화리탈이 저를 원하지 않게 될 때까지는 계속 아스화리탈을 보호하겠어요.”
“용을 키우는 건 쉽지 않아.”
“물론 잘 모르니 어려운 일이 많겠지만…….”
“잘 몰라도 상관 없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처박아 놓고 신경 쓰지 않아도 용은 아무 문제 없이 자라나니까. 용을 키우기 어려운 것은 오히려 그 때문이야.”
“예? 무슨 말씀입니까?”
“륜, 나가인 네가 식물의 특징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무슨 말씀이시죠?”
케이건은 잠깐 생각한 다음 말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지. 지금 아스화리탈에겐 네 개의 다리와 날개가 달려 있어. 하지만 네가 땅 속에서 아스화리탈을 키우면 날개는 사라질걸. 날아다닐 일이 없으니까. 그 대신 앞다리가 두더지처럼 큼직해질 테지. 네가 사막에서 아스화리탈을 키우면 아스화리탈에게 낙타 같은 물주머니가 생겨날지도 모르지. 지하 수백 미터까지 내려가 물을 찾아내는 꼬리 따위가 생길지도 모르고. 그리고 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네가 만약 물 속에서 아스화리탈을 키우면 날개와 다리가 사라지고 대신 지느러미가 자라날 거다.”
비형은 느닷없이 20센티미터나 솟아올랐다. 물 속이라는 말에 긴장한 티나한이 깃털을 곤두세운 탓이다. 륜은 놀라움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상상해 보지 못했군요. 용이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자라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용은 네가 키우는 대로 자라날 거다. 그 성격은 말할 것도 없지. 그래서 용을 키우는 것은 어려워. 어떤 사람들은 키우는 대로 자라나니 얼마나 쉽냐고 말할지 모르겠다만, 그건 책임의 무거움을 통감해 본 적이 없는 자의 말일 거다. 제멋대로 키우다가 자기도 모르는 새 괴물을 만들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지. 다 커버린 용은 감당할 수도 없어. 그래서 옛날, 용이 지금보다 많았던 시절의 현인들은 혹 천우신조로 용화나 용근을 발견하더라도 그 자리에 내버려두고 떠났다. 자연에게 그 성장을 맡겨두는 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전 그 자리에 내버려두고 떠날 수 없었어요. 그랬다간 다른 나가들이…….”
“알아. 용을 캐낸 걸 잘못되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용을 키우는 일이 어렵다는 걸 이야기한 거지. 그리고 어렵기 때문에 그 일을 맡은 이상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거나 포기할 수 없다.”
“네? 포기할 수 없다고요?”
륜은 반가워하며 말했다.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네 손으로 캐내고 눈까지 뜨게 해주었으니 포기하는 건 곤란하지. 네가 그러고 싶다면, 끝까지 네가 책임지는 것이 좋다. 지그림에게 아스화리탈을 넘기는 건 책임지는 것이 아닐 거다.”
륜은 크게 기뻐하면서도 의아한 듯 말했다.
“그럼 왜 그 자에게 용을 넘기라는 제안을 한 거죠?”
“네가 책임감을 가지고 있나 알아보기 위해서. 네게 그런 것이 없었다면, 나는 지그림 자보로에게도 용을 넘기지 않겠지만 너에게도 용을 넘기지는 않았을 거다. 대신 아스화리탈을 자연에 놓아주었겠지.”
륜은 감격하여 말했다.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
“철혈이라고 말하려 했던 것이라면, 됐다. 나는 철혈이 맞으니까. 다른 누구보다도 그 강도단의 우두머리가 그것을 확인하게 될 거다.”
비형은 강도단의 우두머리라는 말에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웃고 있을 수는 없었다. 티나한이 다시 고함을 질렀기 때문이다.
“그렇다!”
티나한의 고함소리에 비형은 온몸이 흔들렸다. 티나한은 자벌레처럼 꿈틀꿈틀 기어오면서 케이건에게 외쳤다.
“어떤 소리를 하더라도 이런 강도놈들의 말은 들어줄 생각이 없어! 이 놈들은 박살을 내야 해! 게다가 제왕병 환자 녀석이야. 내가 최근 제왕병 환자 놈들을 어떻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알고 있지? 그 늙은 놈의 입에서 두 번 다시 왕이라는 말도 못 나오도록 해주겠어! 왕독수리라는 말만 듣고도 자지러지게 해주겠어! 왕파리라는 말에 졸도하게 만들어주겠어!”
티나한의 용맹한 외침은 그만 비형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말았고 그래서 멀미에 시달리면서도 비형은 왕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단어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왕거미, 왕소금, 왕개미, 왕골, 왕벌, 왕수…….”
“그만해!”
다시 벽을 바라보던 케이건은 비형의 입이 닫히자 고개를 내렸다.
“어쨌든 이 곤란한 상황은 타개해야겠소.”
“어떻게 타개하지?”
케이건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상체를 앞으로 굽혔다. 그러자 뒤로 묶인 그의 두 팔이 위로 떠올랐다.
케이건은 그 자세에서 팔을 힘껏 바닥에 내려쳤다.
쇠사슬이 돌바닥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비형과 티나한, 그리고 륜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몇 번 더 같은 식으로 손을 바닥에 내려쳤다.
그리고 세 사람은 경악했다.
케이건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손은 더 이상 쇠사슬에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티나한은 “껨!” 하는 품위 없는 비명을 질렀고, 륜 또한 비명을 질렀지만 그것은 니름이었기에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비형은 입을 쩍 벌린 채 말했다.
“역시 그랬군요. 마법사였군요?”
“마법사 같은 건 없소. 비형.”
“아, 비밀인가요? 그 비밀 지켜드리죠. 그런데 키보렌에서 당신이 잡아오곤 했던 동물들에겐 어떤 마법을 쓴 거죠?”
“경험과 끈기와 행운.”
그리고 케이건은 오른쪽 주먹을 펼쳐보였다. 일행은 그 손바닥에서 짓이겨진 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형이 쇠사슬을 풀로 바꾸는 마법 어쩌고 하는 말을 중얼거릴 때 륜이 비명처럼 외쳤다.
“히참마! 그게 바로 히참마군요!”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를 묶고 있던 쇠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그보다 더 단단한 것도 찾기 어려운 쉬크톨을 부러뜨릴 때 사용하는 풀이지. 그 자들이 딴에는 머리를 쓴다고 쇠사슬을 이용했지만, 오히려 쇠사슬이기 때문에 이런 수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을 알면 꽤 애석해할 듯하군.”
“그 풀은 도대체 언제 구했습니까?”
“그게 어느 왕이더라. 그래. 철권왕이었군. 티나한이 철권왕을 두드려 패던 곳에서 발견하곤 좀 꺾어두었다. 보다시피 쓸모 있는 풀이라서.”
케이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사람을 묶었던 쇠사슬도 풀어내었다. 그러고는 쇠사슬을 주먹에 감기 시작하는 티나한을 깊은 우려가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두 손을 쇠사슬로 단단히 감은 티나한은 주먹을 서로 부딪쳤다. 쇠사슬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고 맹포한 불꽃이 튀어오르자 티나한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케이건은 조용히 말했다.
“티나한.”
“뭐지, 케이건?”
“부디 상식적인 수준은 지켜주길 바라오.”
티나한은 씨익 웃었다. 비형은 그 웃음을 보며 티나한이 케이건의 말을 존중하긴 하겠지만 상당히 폭넓게 해석할 작정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