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5장 – 철혈(鐵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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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5장 – 철혈(鐵血) (20)


“잔치는 끝났다! 집에 돌아가….. 잠깐. 여기가 너희 집이던가?”

지그림 자보로를 쥐고 흔들던 티나한은 잠시 자신의 말에 혼란을 일으켰다. 그 때문에 지그림은 티나한의 관심에서 잠시 해방되었다. 하지만 지그림은 그 사실에서 행복을 느낄 수 없었다. 티나한은 지그림의 왼쪽 발목을 움켜쥔 채 흔들고 있었고, 따라서 티나한이 그의 존재를 잊어버렸다는 것은 지그림이 그대로 떨어졌다간 목뼈에 상당한 무리가 갈 높이에 거꾸로 매달린 채 방치된다는 뜻이 된다. 지그림의 입장에서는 어쨌든 지붕 위로 도망치는 모험은 시도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지그림은 상대방의 관심을 끈다는, 보통의 피해자가 선택하기 힘든 선택을 해야 했다. 지그림의 악쓰는 소리에 티나한은 가까스로 지그림의 존재를 깨달았다.

“말실수했다. 다시 하자. 잔치는 끝났다! 나는 이만 떠나겠다! 아냐, 아냐. 젠장! 이건 근사하지 않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그림은 다시 수십 미터나 되는 높이에 방치되고 말았다. 아래쪽을 바라보았지만, 그다지 인생의 즐거움을 환기시킬 만한 장면은 없었다. 저 아래 왕궁의 마당에서는 여기저기가 심하게 상한 병사들이 심하게 손상된 무기들 사이에 널브러져 있었다. 케이건과 비형이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다지 품위 향상에 도움 되는 일이라 할 수 없으니 죽은 척은 그만하고 일어나라’고 권하고 있었지만 병사들은 절대로 그 말을 따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문득 생각난 듯 지붕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티나한의 손아귀에 붙잡힌 채 허공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지그림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티나한. 적당히 하고 내려오시오. 잘못해서 놓치기라도 하면 당신은 후대인들에게 상당한 갈등을 던져주게 될 거요.”

“갈등?”

“자보로의 후대인들이 별비의 발톱 자국이 남은 돌과 마립간의 머리 자국이 남은 돌 중 어느 것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할지고민하게 될지도 모르잖소.”

엎어져 있던 병사들 중 몇 명의 등이 들썩거렸다. 확실히 죽은 자는 없는 듯했다. 티나한은 낄낄거리며 지붕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지그림은 숨이 막히는 비명을 내질렀지만 티나한은 사뿐하게 마당에 내려섰다. 그리고 티나한은 지그림을 놓아주었다. 불쌍하게도 지그림은 바닥에 주저앉아 심하게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케이건은 그런 지그림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마당 한쪽엔 어깨에 아스화리탈을 얹은 륜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키타타 자보로가 주저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반쯤 녹아내린 검이 떨어져 있었다. 티나한의 압도적인 폭력에서 조카를 구출하기 위해 키타타는 인질을 잡는다는 시도를 했다. 그가 륜을 목표로 정한 것은 다른 사람들도 이해할 만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하늘에서 갑자기 날아든 아스화리탈은 키타타를 좌절시켰다.

한때는 그의 자존심만큼이나 날카로웠지만 이제는 쇠몽둥이 정도의 치명성밖에 발휘할 수 없게 된 자신의 검을 바라보던 키타타는 다가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케이건을 본 키타타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조금 전 자연의 크나큰 실수를 발견했소.”

“그게 뭐요?”

“레콘 같은 끔찍한 종족을 세상에 낸 것.”

륜은 마당을 둘러보며 키타타의 말에 찬성했다. 케이건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도 자연의 실수 한 가지를 발견했소.”

“뭔지 말해 보시오.”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없는 용에 집착하여 레콘 길손을 화나게 만드는 어리석은 자들을 내었다는 것.”

키타타는 슬픈 눈으로 케이건을 올려다보았다. 케이건은 말을 이었다.

“다음에는 좀 더 경의를 가지고 길손을 대접하는 편이 좋을 거요. 대장군. 손님 방의 불을 빼거나 자는 손님의 머리를 쇠망치로 후려치는 대신.”

“유념할 만한 권고인 것 같군.”

의외로 담담한 키타타의 대답에 케이건은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조카이자 마립간의 명령이라서 억지로 한 거였소?”

키타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케이건은 뒤를 흘깃 돌아보았다. 그들에게 걸어오는 비형의 뒤쪽으로 여전히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지그림 자보로를 본 케이건은 다시 키타타에게 말했다.

“저 상식 부족한 이에겐 말해 봐야 헛수고일 테니 당신에게 말해 두겠소. 키타타 자보로 왕 놀음을 하고 싶다면 그건 지그림 자보로의 자유일 거요. 하지만 수백 년 동안 그 많은 사람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성취하지 못한 것에 도전할 때는,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더 유익한 일이 있지는 않을까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거요. 자보로는 좋은 땅이오. 당신 씨족은 항상 훌륭한 마립간들을 배출했고, 좋은 땅과 좋은 마립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왕 놀음 이외에도 많을 거요. 그에게 말해 주시오.”

“많은 일이 있지만 왕 놀음은 안 된다?”

“왕 놀음 이외에도 좋은 일이 많다는 거요.”

키타타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급한 건 왕 아니오? 너무 오랫동안 왕이 없었소.”

케이건은 키타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신도 왕을 원했소?”

“약간은. 그래서 내 조카를 제때에 말리지 못했던 것이겠지.”

“그랬군. 그렇다면 묻겠소. 왕이 무엇이오?”

뒤에서 다가오던 비형은 케이건의 질문에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키타타는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하늘을 보며 말했다.

“사금을 모아 황금을 빚는 불이오. 사토를 모아 첨탑을 쌓는 물이오. 별빛의 미약한 열을 모아 강철을 제련하는 저 최후의 대장장이처럼, 제멋대로 흩어지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이면 가장 위대한 일조차 쉽게 성취해 낼 수 있는 인간의 의지를 한 곳에 집중시키는 자요.”

“틀렸소.”

“틀렸다고?”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당신도 왕에 대해 알지 못하오. 그러니 왕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 전까지는 당신의 마립간을 왕으로 만들려 하지 마시오. 당신이 알지도 못하는 것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오. 하지만 당신은 위대한 마립간을 만들 수는 있을 거요. 그리고 위대한 마립간은 위대한 왕보다 더 위대하오. 그들은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으니.”

“행복하게? 그럼 왕은? 왕은 사람을 불행하게 한단 말이오?”

케이건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케이건은 륜에게 손짓을 했다. 륜은 그 손짓에 따라 비형과 티나한에게 걸어갔다. 륜을 따라 몸을 돌리기 전, 케이건은 키타타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 백일몽에서 깰 때가 되었소. 황혼의 빛이 따스해 보이더라도 현명한 자라면 그 속에 배어 있는 냉기를 느낄 수 있을 거요. 차가운 밤을 대비하시오.”

티나한은 케이건의 말에 감탄하며 그것을 열심히 외기 시작했다. 그래서 티나한에게 말하려 했던 케이건은 비형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케이건은 반쯤 열었던 입을 다시 다물고는 생각에 잠겼다. 비형은 그런 케이건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시죠?”

“당신의 나늬가 륜을 태우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이제 알았소. 용 때문일 거요. 나늬는 용에게 겁을 먹은 거지.”

비형은 탄성을 지르며 륜의 어깨에 앉아 있는 아스화리탈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계속 말했다.

“따라서 저 용이 륜과 떨어지면 당신은 륜을 태운 채 곧장 대사원으로 갈 수 있소.”

“어, 그럼 당신은 우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고요?”

비형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고 티나한과 륜도 당황해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그런데 저 용이 륜의 곁을 떠날지 의심스럽군. 게다가 용이 주위를 날아다니면 딱정벌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의심스럽고. 말이 겁을 먹어도 기수의 생명이 위험하오. 고공에서 딱정벌레가 겁을 집어먹으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에 대해서 숙련된 딱정벌레 기수에게 묻고 싶소.”

비형은 소름 끼치는 재난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티나한마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륜은 무슨 일이 있어도 딱정벌레에는 타지 않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설명을 끝낸 비형은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그러니 그냥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계속 걷도록 하지요. 문제 있나요?”

케이건은 잠시 생각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소.”

비형과 티나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비형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질문했다.

“당분간? 그럼 머지않아 문제가 생긴다는 건가요?”

“우리는 이 땅을 벗어나 슈라도스로 갈 거요. 메헴이 자보로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면 별로 재미없는 곳이 될 테고 페치렌으로 가려면 강을 건너야 하오. 우리들에겐 좀 난관이 많은 여정이라 하겠소.”

비형은 세 배로 부풀어 오른 채 하늘을 바라보는 티나한을 흘끔 돌아보고는 다시 질문했다.

“그럼 슈라도스군요. 그런데 슈라도스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없소.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문제일 뿐.”

“뭐가 있는데요?”

케이건은 갑자기 륜을 바라보았다. 륜은 고개를 갸웃했다. 케이건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시구리아트 유료 도로.”

“시구리아트 유료 도로? 그게 왜 문제죠? 도로 통행료를 내고 지나가면 되잖아요.”

“물론 그렇소. 하지만 나는 그 산양 연모자들이 용에게 어떤 통행료를 책정할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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