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5장 – 철혈(鐵血) (21)
밤이나 낮 어느 쪽으로도 말하기 힘든 시간, 그리고 새벽이라는 타협적인 표현도 적용하기 곤란한 시간 속에 사모는 앉아 있었다. 음울한 빛깔로 자신을 덧칠한 채 엎드려 있는 차가운 땅은 차고 깊고 어두웠다. 어렴풋해서 아름다운 추억 같은 안개가 땅 위를 방황했다.
동쪽을 향해 앉아 있는 사모의 등 뒤에는 대호가 집채만 한 몸을 길게 누인 채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대호의 머리는 정확히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사모와 대호는 서로에게 화가 나 있었다.
자보로 성벽 앞에서 대호가 사모를 물고 도망쳤을 때 사모는 고통 때문에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였다. 대호는 야트막한 야산 하나를 골라 사모를 정상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야산 꼭대기에는 넓적한 바위가 있었다. 대호는 바위 위에 사모를 내려놓은 다음 그 옆을 지켰다.
햇빛과 별빛이 자리바꿈하는 것을 보며 대호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바람이 이슬을 떨구고 연무가 다시 풀잎에 이슬을 슬어 놓을 때도 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모는 며칠 후에야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제야 본격적으로 화를 내었다. 사모는 대호가 제멋대로 쇼자인테쉬 크톨에 끼어들었다는 점, 그리고 역시 제멋대로 자신을 물고 도망쳤다는 점을 들어 대호의 악덕을 비난했다. 물론 대호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사모가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은 그럭저럭 깨달았고 그 때문에 대호 역시 화가 났다. 물론 그 무게가 3톤이 넘는 맹수가 본격적으로 분노했다면 사모는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호는 훨씬 온건한 방법으로 자신의 불편한 심사를 표현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모를 더 화나게 만들었다. 대호는 뒷발로 흙을 차서 사모에게 끼얹었다.
사모는 턱을 꼿꼿이 세운 채 흙을 털어낸 다음 대호를 외면하며 동쪽을 향해 주저앉았다. 그리고 대호는 흙을 끼얹은 자세 그대로 서쪽을 향해 엎드렸다.
그리고 둘은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서로에게 등 돌리고 앉아 있었다.
갑자기 대호의 꼬리가 움직였다. 파리라도 쫓는 듯한 동작이었지만, 그것은 정확하게 사모의 허리를 때렸다. 사모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꼬리는 이미 대호의 등 위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사모는 대호의 뒤통수를 노려봐 주고 싶었지만 볼 수 있는 것이라곤 거대한 엉덩이뿐이었다. 어쨌든 바라보기 즐거운 광경은 아니었기에 사모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사모는 옆으로 손을 뻗어 차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허리에서 쉬크톨을 뽑아든 사모는 칼날을 갈기라도 할 듯 차돌 위에 쉬크톨을 얹었다. 그러나 사모는 칼날을 눕히는 대신 수직으로 세웠다. 그리고 칼날을 옆으로 밀어버렸다.
쉬크톨의 예리한 칼날 아래 돌 표면이 깎이며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호는 “그와옹!” 하는 난해한 비명 소리와 함께 몇 미터 이상 솟아올랐다. 허공에서 몸을 뒤집은 대호는 사모의 등을 보는 방향으로 내려섰다. 대호는 어깨털과 갈기를 잔뜩 곤두세운 채 사모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사모는 태연하게 칼날을 가는 시늉을 해 보였다. 대호는 더운 콧김을 씩씩 뿜어 대다가 다시 뒤로 돌아 주저앉았다.
5분 후 사모와 대호는 서로 부둥켜안은 채 뒹굴고 있었다. 체격의 비율이 완전히 반대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강아지를 데리고 노는 소년의 모습과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그렇게 뒹굴던 사모는 잠시 후 헐떡거리며 옆으로 누운 대호의 배에 몸을 눕혔다. 길다란 털이 그녀의 몸을 뒤덮다시피 했고 대호의 체온은 흑사자 모피의 열과 더불어 그녀를 기분 좋게 했다.
니르는 것을 듣지 못하는 대호에게 사모는 육성으로 말했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듣기는 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몸이 아파. 하지만 지금 내 고민거리는 그게 아냐.”
사모의 희망대로 대호는 사모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거대한 혀로 사모의 얼굴을 핥은 것이다. 사모는 헐떡거리며 힘겹게 그 혀를 밀어내었다.
“비늘 떨어지겠다. 살살 핥아. 내 고민은, 네가 자꾸 좋아진다는 점이야. 너 정신 억압된 거 아니지?”
대호는 물론 대답하지 않았다. 사모는 손에 잡히는 대호의 털을 아무렇게나 꼬며 말했다.
“너, 너하고 말하니 좀 이상하구나. 이름을 붙여볼까? 저 악독한 키탈저 사냥꾼들도 너희들에게 이름은 참 재미있게 붙였던 걸로 알고 있는데, 나도 재미있는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동녘이 밝아오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 체온을 높여야겠지만 사모는 그러지 않았다. 대호의 체온과 모피의 열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모는 졸음을 느끼며 말했다.
“마루나래.”
사모는 자신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대호는 고개를 들어 사모를 바라보았다.
“마루나래.”
다시 마루나래라고 말한 다음 사모는 폭소를 터뜨렸다. 대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사모를 바라보았다. 겨우 웃음을 멈춘 사모는 대호의 큼직한 얼굴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이렇게 푹신한 너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되겠다. 네 이름은 마루나래야.”
대호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사모는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사모는 어리둥절해하며 대호를 바라보았다.
“그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농담 삼아 말하던 사모는 대호의 기색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에 놀랐다. 대호를 관찰한 사모는 대호가 지평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모는 대호가 노려보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남쪽 지평선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사모는 대호의 허리를 두드리며 개념을 전달했다. 대호는 곧 허리를 낮춰 사모가 등에 올라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야산 정상에서 다시 더 높은 위치에 앉게 된 사모는 남쪽 지평선을 주시했다.
잠시 후 사모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저런…… 맙소사!>
사모는 마루나래의 목털을 움켜쥐며 다시 개념을 전달했다. 마루나래는 남쪽 지평선을 향해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를 한번 내지른 다음 북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루나래는 곧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세찬 바람을 정면으로 받게 되자 사모의 통증이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사모는 마루나래의 속도를 늦추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두려움 속에서 사모는 뒤를 돌아보았다. 수천의 무리를 이루어 남쪽 지평선을 뒤덮다시피 한 채 달려오는 것은 사모가 아는 그 무엇과도 닮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사모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