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 5장 – 철혈(鐵血) (4)
사방으로 나부끼던 깃털이 서서히 내려떨어지는 가운데, 티나한은 두 손을 툭툭 털었다.
“잔치는 모두 끝났다. 집으로 돌아가라!”
“아무래도 병이 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비형이 륜을 돌아보며 질문했다. 륜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르륵 떨어지는 티나한의 깃털 아래 인간들은 후줄근하게 두들겨 맞아 쓰러져 있었다. 원망의 눈빛과 신음이 티나한에게 집중되었지만 티나한은 부리를 딱 부딪치며 땅에 꽂아 둔 철창을 쑥 뽑아 들었다. 거만한 걸음걸이로 걸어온 티나한은, 부풀어 올랐던 깃털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그의 앞쪽엔 케이건이 앉아 있었다. 비형과 륜은 이제 흥미롭다는 표정을 케이건에게 돌렸다. 비형이 병이라 진단한 활동에 티나한이 매진하는 동안 케이건은 다른 두 사람과 달리 아무런 흥미도 관심도 없는 표정으로 조용히 풀만 뜯고 있었다. 티나한은 겸연쩍어하며 말했다.
“어, 내가 5분도 걸리지 않을 거라고 했지? 음. 5분 안 됐지?”
케이건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끝났으면 출발해도 되겠소?”
“끝났어. 해도 돼.”
쓰러져 신음하고 있던 ‘철권왕’—그는 맨주먹으로 차돌을 깨는, 실로 왕에게나 어울리는 용력을 가지고 있어 왕으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설명을 들은 티나한은 자신의 부리를 때려보라고 내밀었다. 무릎에 두 손을 짚은 채 부리를 내민 레콘에게 철권왕은 무모하게도 주먹을 휘둘렀다. 차후 그가 다시 왕이 되려 한다면 그는 자신을 편수왕(片手王)이라 칭해야 할지도 모른다.—은 고통 속에서도 의아한 표정으로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철권왕은 조금 전 자신과 자신의 군대를 박살 낸 두억시니 같은 레콘이 조그만 인간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비형은 화는 조금도 안 내고 친절함은 무한대로 발휘하는 케이건의 성격이 어떻게 레콘을 쩔쩔매게 만드는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고 싶었지만 케이건이 걸음을 이미 옮긴 후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싸움은 끝났지만 티나한의 흥분은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는 케이건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티나한은 기세 오른 목소리로 비형과 륜에게 수다를 떨었다.
“난 말이야. 제왕병 걸린 잡놈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별 신경을 쓰지 않았지. 사실 약간이지만 동질감도 느꼈어. 하늘치에 올라가는 일이나 왕이 되는 일이나 도전인 것은 마찬가지잖아? 그래. 도전이라고. 하지만 이제부터는 가만두지 않겠어. 내 눈앞에 그런 잡놈들이 얼씬거리는 것은 절대로 봐넘기지 않을 거라고. 이제 확실해. 그런 놈들은 두들겨 패서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오히려 도와주는 거야.”
륜은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게 된 사실을 확인해 보았다.
“그러니까 그 제왕병이라는 것은 진짜 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죠?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비꼬아 말하는 거죠?”
“그래, 맞아.”
“북부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은가 보죠? 하긴, 조금 전의 그것이 벌써 네 번째였으니.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업도 포기하고 헛된 꿈을 쫓아 방랑하는지 모르겠군요. 게다가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뭐죠? 그 사람들은 왕의 신하가 되고 싶은 사람인가요?”
비형은 반색하며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입을 열기 전, 비형은 케이건이 들려줬던 설명을 자신이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비형은 다시 입을 다물었고 누군가의 부하가 된다는 개념이 거의 없는 티나한은 어깨를 으쓱였기에 륜의 질문은 대답을 얻지 못했다.
길잡이 케이건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다시피 한 채 여행하고 있었기에 티나한과 륜, 비형은 그들이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케이건은 사막이나 황야, 계곡, 고산 등 일행에게 부담이 갈 만한 지형을 피하는 여정을 수립했기에 여행은 수월하기도 했다. 그러나 케이건에겐 걱정이 있었다. 쉬운 여정은 필연코 사람들의 도시를 만나게 된다. 케이건은 며칠 동안 그 사실에 대해 고민하다가 나머지 일행에게 의견을 구했다. 다른 일행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케이건의 설명을 들었지만 머릿속으론 ‘찬성!’이라고 말할 시간만 기다렸다.
“내일이나 늦어도 모레까지는 자보로에 들어가게 될 거요. 자보로를 다스리는 세도 마립간에 대한 세평은 다양하지만 그가 누대에 걸쳐 자신들의 땅을 지켜온 강인하고 수완 좋은 씨족의 후손임에는 많은 이들이 찬성해 줄 것이오. 안정된 땅이라는 거지. 좀 별나다는 평가도 있긴 하지만.”
비형이 반색하며 말했다.
“아, 세도 마립간에 대해서는 저도 압니다. 옛날에 만나기도 했지요. 옛날에 저희 성주님이 도깨비 감투를 상품으로 내걸고 씨름판을 벌인 적이 있어요. 그때 즈믄누리를 찾아오셨지요. 그렇게 연세 지긋하신 킴이 왜 그런 장난감을 탐내셨을까요?”
티나한은 피식 웃었다. 도깨비에겐 도깨비 감투가 장난감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다른 자들에겐 그렇지 않다.
“꽤 비참한 꼴 보고 돌아갔겠군. 그렇지?”
“예. 체격 괜찮은 킴들도 몇 명 데려오셨지만 모두 호되게 나가떨어졌죠.”
그리고 비형은 해묵은 의문을 다시 제기했다.
“그러고 보니 케이건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판막음을 했죠?”
“더 이상 덤비는 씨름꾼이 없어서.”
케이건은 판막음의 상식적인 정의로 대답해 버리곤 계속 말했다.
“어쨌든 비형 당신이 바우 성주의 몸종이니 세도 마립간이 우리를 박대하지는 않을 거요. 비록 조금 전에 당신이 거론한 유쾌하지 못한 추억이 있다 하더라도. 하지만 륜에 대해 설명하거나 하는 일은 번거로울지도 모르오. 쓸데없는 의심을 받을지도 모르고. 그러니 여러분들이 야외에서 먹고 자는 일에 진력이 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땅을 피할 수도 있소. 하지만 자보로에는 사원이 있소. 마립간에겐 들르지 않더라도 사원에 들러 혹 우리에게 온 지시 사항이 있는지 들어보는 것은 괜찮은 일일 듯하오.”
세 사람은 기다리던 일을 해치웠다.
“찬성!”
케이건은 별말 없이 다시 일행을 선도했다.
케이건이 예측한 대로 그들은 다음 날 오후 무렵 지평선에 걸려 있는 성벽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케이건은 배낭에서 방풍복을 꺼낸 다음 륜에게 입도록 했다. 그리고 사막을 여행할 때 쓰던 천으로 륜의 얼굴과 머리를 다 가렸다. 티나한은 륜이 이제 인간과 비슷하게 보인다고 평했고 비형은 가짜 수염과 가짜 눈썹, 의족, 안대, 가발, 나무손 등의 ‘조그만’ 손질을 더하여 완벽을 기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열성적으로 제안했다. 케이건은 비형의 의견을 진지하게 경청한 다음 품위 있게 무시했다.
“두억시니로 보여질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되오.”
그날 저녁, 일행은 자보로에 접근했다.
시구리아트 산맥의 남단부가 푼텐 사막에서 불어오는 열풍을 막고 있는 지점에 위치한 자보로는 성에 둘러싸인 거대한 도시였다. 륜은 그 모습에 대단히 놀랐다. 륜은 왜 사람들이 도시에 드나들기 어렵게 저런 큰 담을 쌓아 두었냐고 질문했다. 비형과 티나한이 각자 설명했지만 케이건의 설명만큼 깔끔하진 못했다.
“키보렌 밀림과 마찬가지지. 우정 없이는 들어오지 말라는 거야.”
케이건의 설명은 정확했지만 덕분에 일행의 분위기가 조금 묘해졌다. 그런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비형은 짐짓 놀랐다는 듯이 성벽의 일부를 가리켜 보였다.
“봐요. 륜! 저게 뭔지 알겠어요?”
륜은 비형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성벽의 위쪽 가까이, 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돌들 사이로 좀 기묘한 돌이 끼어 있었다. 형태는 성벽을 이루고 있는 다른 돌과 마찬가지였지만 그 빛깔이나 재질은 다른 돌과 달라서 눈에 잘 들어왔다. 비형은 감탄하며 말했다.
“저건 일부러 표시하기 위해 다른 색깔의 돌을 끼워 둔 겁니다. 대호 별비가 무라 마립간의 말을 물고 바로 저기로 넘었다고 하더군요. 말로만 들었는데 진짜 저렇게 해 두었군요. 원래 있던 돌에는 별비의 발톱 자국이 났고 그건 마립간 궁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그렇죠, 케이건?”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륜은 성벽을 올려다보며 질문했다.
“그런데 왜 중간쯤에 끼여져 있죠? 그 대호가 성벽을 뚫은 건 아닐 텐데.”
“별비가 저 성벽을 뛰어넘은 다음 무라 마립간은 화가 나서 성벽을 더 높였어요. 그래서 저 돌은 저렇게 성벽 중간쯤에 끼여 있는 거죠. 그런데 저 높이를 넘었다면, 와! 도대체 얼마나 높이 뛴 거죠?”
티나한이 자신 있게 말했다.
“흥. 저까짓 것. 한쪽 발로도 뛰어넘을 수 있어. 해 볼까?”
비형이 진짜로 한쪽 발로 뛰어넘어 보라는 곤란한 제안을 꺼내기 전에 케이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관두시오. 티나한. 자보로 사람들을 불쾌하게 할 필요는 없소. 그 사람들도 마음속으론 저 성벽이 딱정벌레에 탄 도깨비나 당신들 레콘에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소. 하지만 입 밖으로 내어 인정하진 않지. 당신에게 적의가 없다 하더라도, 고생해 가며 저런 성벽을 쌓은 자들의 눈앞에서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건 분명 무례한 일일 거요. 정문으로 갑시다.”
케이건의 만류가 바람직한 것이었음은 정문을 지키던 병사들의 태도에서 드러났다. 병사들은 도깨비가 포함된 일행에게 특별히 적의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 게다가 티나한이 성벽을 뛰어넘지 않은 것에 매우 감명을 받은 눈치였다.
“자보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상식 있는 분들이신 듯해서 기쁘군요.”
티나한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병사들의 우두머리는 곧 설명을 덧붙였다.
“이곳을 찾으시는 다른 레콘들은 저 성벽을 그냥 훌쩍훌쩍 뛰어넘곤 해서 골치지요. 물론 우리 같은 인간들이 나무뿌리나 돌멩이 같은 것을 뛰어넘는 것처럼 별 생각 없이 그러시는 거라는 걸 이해합니다만, 저 성벽의 건설자인 우리들에겐 좀 불쾌한 일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성벽 바로 뒤에는 성벽에 기대어 사는 빈민들이 있습니다. 그 자들은 갑자기 움막의 지붕을 뚫고 떨어지는 레콘에 질색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넘으면…….”
케이건은 병사의 수다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을 중단시켰다.
“그럼 수고하시오.”
그리고 케이건이 지나치려 할 때였다. 병사가 갑자기 손을 내밀어 케이건을 정지시켰다. 케이건은 의아한 얼굴로 병사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병사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은편 여섯 닢입니다.”
“무슨 말이오?”
“아, 조금 전에 하려던 말을 끝까지 못 했는데, 그런 식으로 넘으면 통과세를 받을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쫓아다니며 받아야 하지요. 귀찮은 일입니다.”
비형은 어이없는 얼굴로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티나한은 이미 화를 내고 있었고 그것은 부풀어 오른 벼슬에서 잘 드러나고 있었다. 케이건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 기억에 자보로가 산적이나 유료 도로처럼 통과세를 받았다는 기억은 없소만.”
“흠. 얼마 전부터 받게 되었지요. 한 사람당 은편 여섯 닢.”
“글쎄. 온당한 처신이 아닌 것 같소. 그런 식이라면 어떤 여행자도 자보로를 찾지 않을 텐데, 그럼 곤란을 겪게 되는 것은 자보로가 아니겠소?”
“나야 뭐 알겠습니까. 명령을 받았으니 그렇게 하는 거지요. 그리고 내가 위엄왕에게 받은 것 중에는 통과세를 내지 않고 무단으로 들어서려는 자를 처벌할 권한도 있습니다.”
다른 병사들이 무기를 꼬나 들었다. 하지만 레콘을 앞에 둔 상태에서 그것은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해 달라는 애처로운 몸짓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불행히도 티나한의 모습은 그들에게 위안이 되지 않았다. 티나한은 위엄왕이라는 이름에 어깨를 잔뜩 부풀렸다. 케이건은 그런 티나한에게 가볍게 손을 내밀어 제지시킨 다음 병사들의 우두머리에게 질문했다.
“미안하오만 그 위엄왕이라는 이름은 익숙하지가 않소. 자보로를 다스리는 것은 세도 마립간 아니셨소?”
“세도 마립간께선 몇 년 전에 타계하셨습니다. 그 후 씨족의 추대를 받아 지그림 자보로께서 마립간에 올랐지요. 하지만 지그림 자보로께서는 마립간이라는 이름을 버리시고 왕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왕명으로 자보로에 들어서는 이들에게 통과세를 받도록 하셨지요.”
티나한은 노기충천한 얼굴로 자보로를 지나쳐 가자고 주장했다. 비형 또한 씁쓸한 얼굴로 티나한에게 동조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품속에서 돈을 꺼내어 통과세를 지불했다. 티나한과 비형은 그런 케이건을 몹시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순순히 통과세를 받은 것에 즐거워진 병사는 케이건이 묻는 대로 사원의 위치를 소상히 알려 주었다. 케이건은 병사에게 목례한 다음 일행을 성벽 안쪽으로 이끌었다.
자보로의 성벽 너머의 풍경은 륜을 숨 막히게 했다. 륜은 이런 형태의 도시를 상상할 수 없었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과 지저분한 도로, 제멋대로 지어진 건물들. 도시 어디에서도 륜은 일관성이나 균형 감각 같은 아름다운 요소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륜을 놀랍고 슬프게 한 것은 그 건물들이 대개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별로 없는 틈을 타 륜은 비형에게 저 많은 나무들이 모두 온당한 장례식을 받았냐고 질문했다. 그의 예상대로 비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잘라서 써요. 하지만 그렇게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는 것 같군요.”
비형은 륜의 표정에 많이 익숙해져 있었다.
“산 것만 먹는 당신들의 식습관이 다른 세 종족에겐 소름 끼치는 걸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겠어요?”
륜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때문에 많이 불쾌하십니까?”
“아뇨. 난 괜찮아요. 물론 아직도 똑바로 볼 자신은 없지만. 그런데 케이건, 왜 그렇게 돈을 낭비한 거죠?”
비형의 말에 티나한이 다시 분통을 터뜨렸다.
“그래! 비형의 말이 맞아. 여기가 유료 도로야, 뭐야? 얼마든지 그냥 지나갈 수 있어. 그런데 왜 헛돈을 쓴 거야? 젠장, 은편 스물네 닢이라니. 너 부자야?”
앞장서 걷고 있던 케이건은 길을 살피며 말했다.
“나는 그렇게 부유한 사람은 아니오. 하지만 필요할 때 쓸 만큼은 지니고 있소. 물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사원에 들러 몇 가지 알아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한 거요.”
“뭘 알아 두려고?”
케이건은 잠시 침묵했다. 티나한이 조바심을 느낄 무렵 케이건은 갑자기 말을 쏟아내었다.
“물론 지그림 자보로가 다른 제왕병 환자들과 달리 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왕의 해악을 끼칠 수 있을지도 모르오. 자보로 씨족이 누대에 걸쳐 쌓은 재산과 힘이 있으니.”
“왕의 해악?”
“지그림 자보로가 통과세를 받고 있다는 것은, 그것도 여행자를 화나게 할 정도의 고액을 받고 있다는 것은 그가 전쟁 자금을 모으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소. 전쟁을 걸려면 상대가 있어야겠지. 이 근방에서 그가 정복할 만한 곳은 페치렌, 슈라도스, 메헴 정도일 거요. 그런데 모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행로에 속해 있소. 그가 만일 영토 확장 전쟁을 벌일 생각이라면 우리는 그곳을 피해야 하오. 물론 륜을 데려다준 다음 돌아올 때도 유용한 정보가 될 테고.”
“이런, 맙소사! 미친놈이잖아! 전쟁이라고?”
케이건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티나한 당신이 괴롭혀 주던 자들은 사실 큰 해악을 끼칠 수도 없는 온건한 장난꾼들이오. 활용할 수 있는 무력과 재산을 가진 제왕병 환자가 훨씬 위험하지.”
티나한은 그 말에 한탄했다. 그때 륜이 도무지 모르겠다는 투로 말했다.
“북쪽에도 나가가 있나요?”
비형과 티나한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륜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이 되물었다.
“지금 한계선 이북에 있는 나가는 너뿐일걸. 왜 그런 질문을 하지?”
“전쟁이라고 하셨잖습니까. 그 왕이라는 인간이 전쟁을 하려면 나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티나한과 비형은 왜 전쟁을 하려면 나가가 있어야 하는 거냐고 되물었고 그 질문은 륜을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륜의 질문을 이해했다. 륜이 알고 있는 가장 최근의 전쟁은 아마도 대확장 전쟁일 것이다. 그리고 나가들끼리는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 케이건은 핵심을 짚어 말했다.
“인간은 인간끼리 전쟁해.”
륜은 더욱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왜요?”
“곡물을 먹기 때문이야. 곡물을 심으려면 땅이 필요하지. 더 많은 땅을 가지면 더 많은 곡물을 가질 수 있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을 뺏으려고 전쟁해.”
“그런 어처구니없는…………….”
“너희들도 그랬어.”
“네?”
“너희들에겐 살아 있는 것들이 많이 사는 밀림이 필요했지. 그래서 대확장 전쟁을 벌여서 한계선 이남의 모든 땅을 점령하고 거기에 밀림을 만들었지.”
륜은 당황하여 말했다.
“하지만 그건 서로 사는 방식이 달라서 어쩔 수 없이 벌였던 일입니다! 우리 나가들은 다른 사람의 밀림을 뺏어서 거기 사는 동물까지 얻으려고 하지 않아요.”
“나가들은 자식을 적게 낳지. 그리고 세계의 반을 차지하고 있고. 동물이 부족하진 않아. 하지만 인간은 자식을 많이 낳고 곡물을 심을 땅은 부족해. 그러니 전쟁을 벌이지. 더군다나 왕이 생기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전쟁이 발생하지.”
“왜 그렇죠?”
티나한은 케이건이 왕의 정복욕이나 통치욕에 대한 이야기를 할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케이건의 대답은 완전히 엉뚱한 것이었다.
“왕이 사람들의 눈물을 다 마셔 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눈물 없는 비정한 자들이 될 수 있거든. 그게 왕의 해악이지.”
비형은 어렴풋이 케이건의 말을 이해했지만 다른 두 사람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다시 설명을 요구하려 했으나 어느새 사원에 도달해 있었다. 그래서 케이건의 설명을 다시 듣지는 못했다.